운조루 (雲鳥樓)


  - 전남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각.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8호

지정연도 : 1968년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시대 : 조선 후기

종류 : 누각


 중요민속자료 제8호.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고 하는데, 큰사랑 대청 위 상량문의 기록은 1776년(영조 52)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규모나 구조가 당시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현존하는 주요 부분은 사랑채와 안채이며, 그 밖에 행랑채 ·사당 ·연당 등이 있다. 사랑채는 3채가 있는데, 큰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m의 축대 위에 있으며, 중문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높이 약 60cm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있으며, 초석은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전면 마루 끝에 선 것이 지름 약 2.3m의 둥근 기둥이며, 다른 것은 모두 모난 기둥이다. 안채 남동쪽에 사당이 있으며, 맞배지붕 홑처마집이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 마당 건너에 연당이 있는데, 원래는 약 200평 되던 것이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연당은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五峰山) 삼태봉(三台峰)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한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1776년(조선 영조 52년)에 건축한 건물로 중요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는 경상북도 안동태생으로 낙안군수를 비롯하여 주요 지방 수령과 대규모 국가 건축의 책임자를 지낸 유이주라는 사람이 건축적 기본소양과 재력을 받침으로 창건한 것으로 금한낙지(천정 에서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에 99칸의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여 살게 한 곳이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에서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온 것이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 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 만한 돌거북이 출도 되었는데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도난당했다. 운조루가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명당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이 조선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이주에 의해 창건된 운조루는 7년간의 대공사를 거쳐 완공될 만큼 규모가 대간하였는데굵척?대군들이 집을 지을 수 있는 69칸을 넘어 99칸의 규모였다. 일부에서는 운조루 창건 당시에는 1백칸을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200여년의 새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노후되는 오늘날에는 60여칸만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후기의 상류주택으로서 "운조루"는 한국주거사 측면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 가옥은 단순히 조형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학, 민속학적측면에서도 당시의 문화상을 다각도로 조명해 불 수 있는 총체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운조루의 창건은 문화유씨 유이주(柳爾胄)(1726∼1797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본래 이곳이 아닌 경북 해안면 입석동에서 출생하여 17세 되던 해에 상경, 그 후 28세 되던 영조 29년(1753년)에 무과에 급제한 이후부터 관직에 등용된다. 그의 관직은 주로 지방수령 내지 대규모 국가 조영사업 책임자로서 건축적 기본소양과 재력 등이 바탕이 되어 운조루의 창건이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운조루가 완성된 시기는 큰 사랑채의 마루방에 기록된 문서명이 있어 영조 52년(1776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운조루 건립계획이 본격화되고 아울러 터를 잡기 시작한 연도는 1771년으로 유이주가 낙안군수로 있던 시절이다. 운조루의 건축계획이나 규모 등 전반적인 사항은 유이주가 관계하였으나, 실제 현지에서 운조루를 짓는 작업은 아들인 덕호(德浩)가 감독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운조루가 완성된 당시(1776년) 덕호의 나이는 불과 20세였으니, 뒤에서 덕호를 돕는 인물이 친족 위주로 여러 명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운조루는 7년여의 긴 기간을 거쳐 완성되었고 그 규모는 흔히 99칸 집이라고 불려지듯이 거대한 것이었다. 최초 창건 당시의 운조루 규모에 대하여는 다만 100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는 그보다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 유이주가 그의 나이 68세되던 1793년에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던 문서, 분재기에 기록된 건물내역에서 알 수 있다. 즉 총 78칸이 아들에게 인계되고 있었던 것이니, 이밖에 운조루와 함께 지어졌던 인척들의 家舍까지 합칠 경우에 족히 백여 칸의 규모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중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일부가 훼철되거나 복원·중건·보수를 거쳐 오늘의 총 60여 칸으로 유존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창건 후 120여 년이 지난 1909년에 전체적인 보수와 정리가 이루어졌던 듯한데 다시는 모두 64칸이었음이 밝혀지며, 그 이후 약간씩의 부분적인 변경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운조루의 조영에 있어 배치개념은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유교적 사고체계에 따라 이루어 졌다. 즉 남·여의 구분과 주·종의 관계, 그리고 주자가례에 따른 조상숭배 개념이 조영의 규범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인 개념은 당시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비록 구조에 있어 다소의 변화는 있었으나 그 기본원리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운조루의 경역은 남향으로 자리한 평탄한 방형의 형태로서 중앙으로 가옥의 기본이 되는 사랑채와 안채가 자리하고 있고, 사당은 안채 동쪽의 약간 윗쪽에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가옥의 전면에는 19칸이나 되는 긴 행랑채가 담장을 대신하여 자리하고 있다. 가옥의 중심부를 보호하듯 그 규모는 대단하다. 행랑채에 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전면으로 큰 사랑채와 아랫사랑채가 있는데 아랫사랑채는 서향으로 자리하여 큰사랑채와 ㄱ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난 중문간과 연결되어 대지의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안주인이 거처하는 공간과 곡간 등이 서로 연결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ㅁ자형"배치구조는 18C경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배치규범이 되는 유형(특히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된)으로서 건축주인 유이주가 영남태생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문화의 연계성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호남지방에서도 당시 운조루의 배치유형과 유사한 건축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건축사례나 기록 또한 없기 때문에 현재로는 해명하기가 어렵다. 조선후기(19C경)의 상류주택은 ㅁ자형 보다는 안채와 사랑채가 별동으로 구별되고 건물도 ㅡ자형 형식이 호남지방과 영남지방(특히 남부)에서 보편적인 기본형으로 등장한다.

 이상과 같은 배치규범은 우선 각 건물의 고유기능이 독립성을 갖고 보호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형성되는 외부공간 즉 사당마당, 사당뒷마당, 안마당, 뒷마당, 안사랑마당, 행랑바깥마당 등도 그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전반적으로 운조루의 배치구조는 유교적 사고체계에 의한 공간의 위계성 및 구심성이 잘 드러나 있고 한편으로는 자칫 실과 공간의 분화로 야기될 수 있는 공간의 연계성 등도 중문간과 샛문 등의 설치로 그 조화가 잘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