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사 (燕谷寺)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내동리(內東里) 지리산자락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시기 : 544년(신라 진흥왕 5)

창건자 : 연기조사


 절은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볼 때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에 걸쳐 가장 번성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창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절은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까지의 기록이 전무합니다. 다만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곡사가 기록되어 있어 사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입니다.근대에 들어와서는 1895년 무렵에도 여전히 왕가의 신주목을 봉납하는 곳으로 있었는데, 밤나무의 남용으로 절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견디다 못한 스님들이 떠나게 되어 결국 절이 폐사되었습니다.

1924년에는 박승봉이 절 경내에 700원을 들여 심우암을 창건했으나 6·25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가 되었고, 그 뒤 1965년에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를 겸해 세워지면서 절은 다시 법등을 잇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1994년에는 종지(宗知)스님이 주석하면서 보다 활발한 중건 불사가 이루어졌는데, 같은 해에 요사를 중건하고 늘려지었으며, 1995년에는 일주문을 새로 지었습니다.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4년(543년)에 화엄사를 세운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화엄사나 천은사보다 먼저 지어졌다.

 사찰 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

연곡사 창건될 당시에는 지리산에서 가장 큰 절로 그 웅장함을 자랑했으나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두 차례의 전쟁으로 파괴와 손실의 아픔을 겪으며 지난 81년에야 복원불사가 시작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연곡사 경내에는 동부도(국보 제53호), 북부도(국보 제54호), 서부도(보물 제154호)를 비롯해 삼층석탑(보물 제151호), 현각건사 탑비(보물 제152호), 동부도비(보물 제 153호)와 같은 훌륭한 문화재가 보존돼 있어 연곡사의 옛 영화를 짐작케 하고 있다.

 전쟁의 쓰린 상처를 온몸으로 안고 또다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몸을 추스르고 있는 연곡사, 그 고요한 적막함이 오히려 세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다. 섬진강변 외곡에서 연곡사에 이르는 구간은 옛날의 지리산 주변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흔적들을 접하게 된다. 층층이 잘게 쌓아 만든 계단식 눈두렁의 선형의 아름다움과 가파른 언덕바기에 둥지를 튼 가옥들이 그것인데 도로변 깊은 계곡과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연곡사 뒤편으로는 피아골이 이어진다.

 한편 대웅전의 왼쪽으로 의병 고광순 순절비가 있는데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지방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 그는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때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하였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 연곡사 동부도 (東浮屠)

   --(국보 제53호)

 법당 뒤 상록수림이 우거진 언덕배기에 예의 지리산의 미녀 동부도가 새색시처럼 부끄러운 듯 자리잡고 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면 굳이 국보 53호라 지정된 문화재 안내판을 읽지 않더라도 첫 눈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말기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쌍봉사 철감국사 부도와 함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또한 가장 형태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조각이 정교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곡사 경내에 있는 부도 3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았고 하대석의 하단에는 운문(韻文)을, 상단에는 사자를 조각했다.

 중대석에는 둥근 통모양의 안상(眼像)속에 팔부신상(八部身像)을 두었으며 옥신 (屋身)의 면에는 우각(隅角)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주형을 세우고 옥신 각 면에는 문비와 향료 그리고 사천왕상이 얕게 양각돼 있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의 부도라 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자료가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이 동부도를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으나 당시의 험한 지리산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화도 가지고 있다.


▷ 동부도비

   --(보물 제153호)


 높이 1.2미터의 동부도비는 동부도 앞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어 주인을 알 수가 없다. 동부도비의 조각에서 독특한 것은 거북등에 표현된 날개이다. 네모진 대좌석과 귀부가 한돌로 조각된 이 탑비는 비신은 유실되고 이수만 남아있다.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든 귀부의 정상에는 장방형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네 측면에는 구름문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윗면에는 복판의 연화문을 새겼다. 똑바로 곧추선 귀두는 용두화 되었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목부분이 절단된 것을 보수하여 붙여 놓았다. 거북의 등문양은 새깃과 같은 날개모양을 돋을  새김하여 그 끝이 뒤쪽의 등허리에서 멎었고 날개 뒤쪽으로는 육각문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귀부 위에 남아있는 삼산형의 이수는 구름무늬로 가득채웠으며 그 정상에는 화염문을 장식한 보주가 돌출되어 있다. 이수 정면 중앙에는 탑액을 구획하였으나 명문이 없다. 원래부터 탑액에 명문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없애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동부도 옆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동부도라고 부르지만 동부도와 연관성은 고증할 길이 없다고 한다. 규모가 아담해지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통일신라시대와는 다른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북부도

   --(국보 제54호)


 동부도에서 산 쪽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동부도와 꼭 닮은 부도가 한 기 있는데 이름이 없어 그냥 북부도라고 부른다. 이 부도는 동부도를 모델로 삼아 그대로 옮겨 놓았는 것 같지만 작품성은 전혀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까래가 있는 지붕돌 천정면에 구름무늬를 부조해 놓아 더욱 아름답고 발전적이다.

 구도가 안정돼 있고 조각이 섬세하여 솜씨가 뛰어나 우리나라 부도를 대표할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각형의 지대석위에 구름꽃무늬를 조각한 팔각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문을 새겨 간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 각 면은 문비, 향로, 사천왕으로 장식 했다. 비교적 넓은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에 따라 이중연목 기왓골 등을 정성들여 목각하였고 상륜부는 4마리의 봉황이 날개를 벌린 돌을 얹고 다시 연화석, 보륜 등을 놓았다.

 북부도는 시대별로 보면 동부도보다 뒤에 만들어진 고려 초기 작품인 듯한데 석질과 강도의 차이 때문인지 오히려 동부도보다 풍화가 심하다. 빠르게 마모되어 가는 북부도의 모습이 안타깝다. 늦기 전에 보호각이라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서부도

   --(보물 제154호)


 북부도에서 산길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몇 기의 부도가 있는데 서부도라고 불리는 소요대사 부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몸돌 한 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消遼大師之塔 順治六年 庚寅)이라는 글씨가 2줄로 뚜렷이 남아 있어 소요대사가 입적한 순치5년(1648) 다음해인 순치6년(1649)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부도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부도의 몸돌이나 다른 부분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양상으로, 서부도가 그런 예의 하나이다. 소요대사 태능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그 문하의 4대파 가운데 한파를 이룰 만큼 유명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크게 중창한 스님이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조각수법은 날렵한 동부도나 북부도에 비해 둔중한 편이다. 키도 조금 더 커서 3.6m이고, 보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지대석에 홈이 패어 있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고 있다. 팔각하대석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나, 윗면에 곡선을 그린 흔적이 있다.

 그 위에 얹은 중대석은 가운데 부위가 각지 타원형이며, 아래위 대칭으로 앙련과 복련이 조각된 독특한 모습이다. 상대석은 팔각 앙련석인데, 아래에 각형(角形)의 2단 받침이 있고, 윗면에 호형(弧形)의 높은 굄이 있다. 몸돌도 팔각이며, 한 면에 문비를 모각하였고, 다른 한면에 글씨, 나머지 여섯 면에는 따로 돌을 붙여 만든 것처럼 불룩하게 여섯 구의 신장상을 조각해 놓았다.

 4구는 사천왕, 2구는 신장상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지붕돌 역시 팔각인데, 추녀 끝이 얇고 넓다.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고, 귀퉁이에는 귀꽃이 큼직하게 솟아 있다. 상륜부는 온전한 편으로 앙화, 두 줄의 횡대에 꽃무늬가 수놓인 복발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북부도가 동부도를 충실히 모방한 것이라면, 서부도는 동부도를 변형 모방한 셈인데, 조선 사람의 검소한 멋이 풍겨난다.


▷ 삼층석탑

   --(보물 제151호)


 대적광전 남쪽에 서있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화강석으로 높이 6m의 석조물로서 기본 통식에서 벗어난 다른형으로 기단 부가 3층이며 또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한 점이 특이하다.

 이 석탑은 연곡사법당(대적광전)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상륜부는 유실되고 보주만을 올려놓았다

 한때 삼층석탑이 있는 곳까지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 것을 상상해보면 옛 연곡사의 규모가 그려진다. 탑신부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나, 이중 기단이 아니라 여러 개의 석재가 3중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각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소홀한 느낌마저 든다.

 3층 지붕돌이 떨어져 뒹굴던 것을 1967년에 복원하였는데, 이 때 상층 기단에서 높이 23.5Cm의 금동여래입상이 나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하층기단에서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체감율이 온화하여 아름답다. 각 부재의 구성양식으로 보아 건립연대를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할 수 있는데 석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 초로 내려오는 것을 생각하면 현각선사가 활동하던 10세기 중반쯤 연곡사에 등장하지 않았나 싶다. 높이는 6미터이다.


▷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보물 제152호)


 이 탑비(보물 152호)는 연곡사 법당에서 우측(향좌)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좌와 한 돌로 된 이 탑비는 역시 비신은 유실되었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이 귀부의 앞발은 동부도비와는 반대로 왼쪽발을 살짝 들고 있다. 조각수법은 몸체에 비해 귀두가 유난히 크고 역동감 있게 부각되었으며 이수 역시 용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천상을 나는 느낌이다.

 등허리의 갑문은 모두 6각문이며 등허리에 세워놓은 비좌는 전후좌우에 큰 안상형을 새기고 양측면에는 알 수 없는 화문을 장식하였다. 귀두는 용두화되었는데 입에는 여의주를 머금었고 머리 뒤로는 귀가 달렸으며 머리 정상에는 뿔이 하나 돌출하였다. 찢어진 입 뒤로는 바람에 날리는 듯한 수염이 인상적이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대칭되게 몸을 틀고 있으며 이수 하단 정상과 중간에 구름무늬가 조각되었다. 이수 전면에는 탑액을 구획하고 그 안에 전서체로 「현각선사비명(玄覺禪師碑銘)」이란 탑호를 새겼다.

 탑액 좌측(향우)으로 다른 한 마리의 용이 탑호를 향해 있고 그 우측(향좌)으로도 알 수 없는 짐승문양이 부조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 비문은 학사(學士) 왕융이 지었고 글씨는 주국(柱國) 장신원이 썼으며 979년(고려 경종(景宗) 4)에 건립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