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삼국지방.htm
三國의 地方編制單位와 地方官

姜 鳳 龍 (목 포 대)

1. 머리말 2. 담魯와 邑勒과 備

3. 道使 4. 廣域 編制單位의 설정

5. 맺음말

1. 머리말

그간 삼국의 지방 통치조직에 대한 분야는 상당한 연구 성과를 축적해 왔다. 단순한 지방제의 틀을 복원하는 문제로부터 지방 세력의 존재 형태와 이에 대한 편제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 시도가 있었고, 이에 따라 한국 고대사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부족한 관련 자료로써 이처럼 많은 연구 성과를 축적해 오다 보니, 이제 이 분야의 연구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방 통치조직을 둘러싼 쟁점의 양산과 이에 대한 논의의 교착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겠다.

이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한 단계 진척시킬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해볼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우선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 힘써야 하겠다. 그간 고고학 및 금석학 자료의 발굴이 이 분야 연구에 상당한 성과를 가져오게 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경주되리라고 본다. 다음에 비교사적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중국 및 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비교사적 고찰은 최근에 점차 활성화되는 추세에 있으며, 그 결과 상당한 성과의 축적을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함께, 삼국 간의 지방 통치조직을 상호 비교*고찰해 보는 작업도 현 시점에서는 필요한 작업인 것으로 판단된다. 비교사적 연구는 자칫 방향을 호도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각 국별 연구 성과가 비교적 충실히 축적된 현단계에서의 삼국 간 지방 통치조직에 대한 비교사적 연구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바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가장 손쉬운 작업으로 삼국 간 지방 통치조직을 서로 비교*고찰함으로써,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의 삼국 간 지방 통치조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비교의 대상은 일단 지방 편제단위와 지방관에 한정하기로 하였다. 먼저 비교 가능한 삼국의 지방 편제단위로서 고구려의 '備'와 백제의 '담魯', 그리고 신라의 '邑勒' 등을 선정하였고, 다음에 지방관으로는 삼국에 공통적인 道使를 위시로 하여, 고구려의 褥薩과 可邏達*婁肖 및 大模達*末客, 백제의 方領과 郡將, 그리고 신라의 軍主와 (行)使大等, 邏頭 등을 선정하였다. 이러한 지방 편제단위와 지방관의 비교*고찰을 통해서,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 과정과 편제구조 상에서 삼국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어느 정도 부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또한 이를 통해서 교착화된 쟁점들이 다소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진부한 쟁점을 보태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2. 담魯와 邑勒과 備

중국 사서에는 중국의 郡縣 단위에 비견되는 삼국 지방 편제단위의 고유 명칭이 전하고 있다. 백제의 담魯, 신라의 邑勒, 그리고 고구려의 備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바로서, 삼국의 지방 편제구조를 상호 비교*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중 특히 담로와 읍륵은 같은 사서인 <<梁書>>의 百濟條와 新羅條에 각각 게재되어 있어, 우선적으로 비교의 대상으로 떠올려볼 수 있겠다.

가-1) 治所의 城을 固麻라 했다. 邑을 담魯라 하였는데 중국의 郡縣이란 말과 같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子弟 宗族을 分據시켰다.(<<梁書>> 卷54 東夷列傳 百濟條)

2) 풍속에 城을 健牟羅라고 불렀다. 邑은 안에 있는 것을 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邑勒이라고 했는데, 또한 중국의 군현이라는 말과 같다. 나라에 6啄評과 52邑勒이 있었다.(<<梁書>> 卷54 東夷列傳 新羅條)

여기에서 우선 눈에 띠는 것은 백제의 22담로와 신라의 52읍륵에 대해서는 모두 '중국의 郡縣이라는 말과 같다'('如中國之言郡縣也')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梁書>>의 찬자가 담로와 읍륵을 비슷한 성격의 지방 편제단위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겠다. 이러한 담로와 읍륵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윗 기사의 반영 시기를 따져 보아야 하겠다.

윗 기사의 반영 시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첫째, 6세기 중*후반설이 있다. 이는 담로와 읍륵을 <<三國志>> 단계의 小國 및 통일신라기의 郡과 같은 계통의 것으로 전제하고, 이에 따라 백제와 신라 간의 영역 범위의 넓이가 22와 52의 수치 만큼 차이나게 된 시기를 상정하다 보니, 윗 기사의 반영 시기를 비교적 늦은 6세기 중*후반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견해는 담로와 읍륵의 계통적 성격을 먼저 전제하고, 이에 따라 그 반영 시기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대세론적 접근이라 할 것이어서 취하기에 주저되는 바가 있다.

둘째, 6세기 초반설이 있는데, 이는 百濟條(가-1 기사)와 新羅條(가-2 기사)로 각각 나뉘어 제기되었다. 먼저 新羅條의 경우, 법흥왕 8년(521)에 신라 사신이 백제 사신을 따라 梁에 파견되었던 사실을 중시하여, 가-2) 기사를 521년 전후 시기에 양에 파견된 신라 사신의 傳言에 주로 의거하여 정리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음에 百濟條의 경우,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梁職貢圖>> 百濟國使條의 題記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반영 시기를 <<梁職貢圖>>의 편찬 시기인 6세기 초반으로 설정하였다. 이 두 견해는 결국 6세기 초에 梁에 파견된 백제와 신라 사신의 傳言에 의거하여 梁朝 당시에 기록한 자료들을 토대로 하여 唐代에 재정리한 것이 위의 가) 기사로 되었다고 본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이는 자료의 계통을 추적하여 그 반영 시기를 설정하려 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더 높은 견해로 여겨지며, 현재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필자 역시 윗 기사의 반영 시기를 6세기 초로 보는 입장에서 담로와 읍륵의 성격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담로의 경우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小國 및 郡과 같은 계통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단 무난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國初 이래 백제가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해 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이들을 담로라는 이름으로 편제하였을 것이며, 이것이 위의 가-1) 기사에서 6세기 초 단계의 22개 담로의 존재로 나타난 바 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편제단위명으로서의 담로는 국초부터 쓰였을 수도 있겠고, 국초에는 모종의 다른 명칭이 쓰이다가 언제부터인가 담로로 개칭되어 6세기초의 22담로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언제인가 담로는 다시 군으로 개칭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小國-(某稱)-담로-郡'으로 이어지는 편제단위의 계통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러한 편제단위는 국초부터 멸망기까지 지속적으로 설치되었던 셈이 되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각 시기에 따라 그 명칭과 설치 범위가 달랐던 것이고, 더나아가 그의 운영 방식에서도 양상을 달리했을 것임은 물론이겠다. 현재로서는 그 전후의 사정이 어떠했는 지는 잘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가-1) 기사에 의거할 때, 6세기 초 단계에 담로라는 편제단위명을 취하고 있었고, 그 설치된 수가 22개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다. 따라서 담로에 관한 논의는 일단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먼저 22개의 담로가 처음 설치된 時點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는데, 이와 관련하여 <<三國史記>> 地理志에 나오는 郡數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地理志에서 백제의 영역과 관련될만한 州의 소속 郡數를 적기해 보면, 漢州는 28군, 熊州는 13군, 全州는 10군, 그리고 武州는 13군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웅주와 전주의 郡數를 합해보면 23개가 되어, 22담로의 수와 근사하다는 것이 우선 주목된다. 통일기 郡과 담로를 반드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담로와 군을 같은 계통의 편제단위로 인정할 수 있다면, 이러한 수치의 근사성은 일단 의미있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추론해 본다면 22담로는 통일기의 웅주와 전주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설치되었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6세기 초 당시에 백제의 지방 편제의 대상 범위는 자연히 오늘날의 충청도와 전북 지역 일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 즉, 6세기 초에 한주와 무주 지역은 22담로의 설치 범위에서 배제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추론해 낼 수 있겠다. 먼저 漢州 지역이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22담로의 설치는 백제가 漢城을 떠나 熊津으로 천도한 5세기 후반 이후에나 가능했으리라는 것, 다음에 武州 지역이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6세기 초 단계까지 백제의 편제 범위는 전남 지역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으리라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 중 6세기 초 단계까지 백제가 전남 지역을 아직 편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추론은, 의외의 결론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멸망기 백제의 편제단위와 그 범위를 전하는 '5部 37郡 200城'의 구절과 22담로를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수긍가는 바가 있을 것이다. 즉, 이 구절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37郡'이 되겠는데, 이는 곧 6세기 초 단계의 22담로가 일정한 확대*편제의 변화 과정을 거쳐 재편된 '37군'이 멸망기인 7세기 후반의 자료로써 확인된 바라 할 것이다. 22담로에서 37군으로의 변화에 내포된 핵심 내용은 편제단위의 수가 22개에서 37개로 늘어났다는 점과 그 명칭이 담로에서 군으로 개칭되었다는 점이 되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37郡의 수가 熊州와 全州의 23郡에 武州의 13군을 합한 36군의 수와 근사하다는 것을 주목해 본다면, 앞에서와 같은 논리로 늦어도 7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충청*전북 지역 뿐 아니라, 전남 지역까지도 공식 편제하여 지배하고 있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결국 전남 지역에 대한 백제의 공식 편제의 時點은 6세기 초 이후에서 7세기 후반 사이의 어느 시기였던 셈이 될 것이며, 바로 이러한 편제 범위의 확대 과정에서 편제단위의 수가 22개에서 37개로 늘어난 것이고, 그 명칭도 담로에서 군으로 개칭된 것으로 볼 것이다.

이상에서 '소국-(某稱)-담로-군'으로 이어지는 계통의 편제단위가 국초부터 멸망기까지 백제에 존치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제단위는 결코 일정했던 것은 아니고, 그 명칭의 변화와 함께 편제의 범위 및 운영 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수반해 갔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제 이러한 백제의 담로와 비교하면서 신라의 邑勒에 관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읍륵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가-2) 기사의 반영 시기를 6세기 초반으로 보는 논자들과 같은 입장에서, 일단 소국 및 군과 같은 계통의 편제단위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게 볼 경우, 6세기 초반 당시의 신라 및 백제의 영역을 비교할 때, 신라의 52개 읍륵과 백제의 22개 담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바이다.

그렇다면 가) 기사에서 담로와 읍륵을 똑같이 '중국의 군현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이겠다. 즉, 적어도 <<梁書>>의 찬자는 담로와 읍륵을 대등한 편제단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담로와 읍륵의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梁書>> 찬자의 인식을 재해석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가) 기사가 6세기 초반에 백제 및 신라 사신의 傳言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으리라는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이 때 상정될 수 있는 바는, 당시 백제와 신라 사신들이 서로 다른 등급의 편제단위로서의 담로와 읍륵을 각각 자국의 지방 편제단위명으로 梁朝에 전하였을 가능성이다. 가) 기사에 나오는 '郡縣'이 엄밀한 것이라기 보다는 막연한 편제단위를 지칭하는 바였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가능성은 일단 상정될 수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읍륵은 당연히 담로 보다는 하위의 편제단위를 지칭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에 비로소 6세기 초반의 22담로와 52읍륵 사이에 게재된 문제점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읍륵을 小國 및 郡과 같은 계통의 담로 보다 하위의 편제단위로 볼 수 있다면, 어떠한 것을 들 수 있을까? 그것으로 다름아닌 邑落 및 縣과 같은 계통의 편제단위를 우선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邑落이란 소국을 구성하던 단위 정치체로서, 후에 중앙에서는 部로, 지방에서는 縣으로 재편되는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읍륵을 이러한 읍락 및 현 계통의 편제단위로 볼 경우, 읍륵과 읍락의 音相似 조차도 예사스럽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邑落-邑勒-縣'의 계통성을 인정하고자 하며, 이에 따라 논의를 진행시켜 가기로 한다.

먼저 6세기 초반 신라의 52읍륵이 분포한 6세기 초반 신라의 영역 범위를 추정해 볼 필요가 있다. 梁朝에 신라 사신이 파견된 시점을 6세기 초반, 구체적으로는 521년(법흥왕 8년)으로 볼 수 있고, 이 때의 傳言이 가-2) 기사의 전거가 되었다고 한다면, 6세기 초반 당시 신라의 영역 범위에 관한 논의가 52읍륵의 분포지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 될 것이다.

6세기 초반 신라의 영역 범위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가야 지역에 대한 진출 시기가 문제의 관건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530년대 이전에는 신라가 가야 지역에 진출하지 못했다고 한 최근의 연구 성과가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의하면 신라는 6세기 초반까지 낙동강 이서의 대부분 지역에 대해서는 편제는 물론이고 군사적 진출도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를 감안할 때, 당시 신라의 편제 범위는 대체로 경북 일대와 동해안 방면 중에서 강원도 남부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6세기 초반 신라의 편제 범위가 이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범위는 통일기의 尙州 지역 전체에 良州의 일부 및 溟州의 극히 일부 지역이 보태어진 지역 일대에 국한되는 것이다. 그런데 <<三國史記>>의 地理志에 의하면 尙州의 군현 수가 10군 31현으로 41개로 나와 있어, 52읍륵은 尙州의 41군현과 良州 및 溟州 일부 지역의 10여 군현을 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결국 이는 읍륵을 읍락 및 현과 같은 계통의 편제단위로 간주한 앞에서의 추론과 정확히 부합되는 바이다.

이처럼 담로는 小國 및 郡 계통의 편제단위였고, 읍륵은 邑落 및 縣 계통의 편제단위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6세기 초반에 백제와 신라의 기본적인 편제의 단위가 이처럼 달랐던 것일까? 이에 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당시에 백제 및 신라의 사신이 자국의 사정을 梁朝에 전할 때 각기 등급이 다른 지방 편제단위인 담로와 읍륵을 강조하여 전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梁朝의 기록원은 백제와 신라 사신이 전하는 담로와 읍락을 막연히 중국의 기본적 지방 편제단위인 '郡縣'에 해당되는 것으로 기술해 놓았던 것이고, 이것이 <<梁書>> 편집의 기본 자료로 활용된 바가 되었던 관계로 <<梁書>>에서 기사 가)와 같은 기록을 전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에 백제나 신라나 모두 담로급 편제단위와 읍륵급 편제단위가 병존해 있었던 셈이 되겠는데, 이러한 지방 편제구조는 소국과 읍락에서 연원하여 후에 군과 현으로 재편되는 바 되었던 것이므로, 삼국에 공통적으로 나타남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제 <<翰苑>>에서 고구려의 지방 편제단위로 나오는 '備'를 이상의 논의와 관련지워 검토해 보기로 하자.

나) 또한 大城에는 辱薩을 두었는데 都督에 비견되는 것이다. 諸城置處閭 區刺史 亦謂之道使 道使의 治所는 이름하여 備라 하였다. 諸小城에는 可邏達을 두었는데 長史에 비견되는 것이다. 又城에는 婁肖를 두었는데 縣令에 비견되는 것이다.(<<翰苑>> 高麗條 所引 <高麗記>)

이는 7세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翰苑>> 인용의 <高麗記>에 나오는 고구려 지방 편제단위에 관한 부분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밑줄친 부분에는 약간의 글자 탈락이 있어, 이 부분을 <<新唐書>>에 나오는 동일 기사를 참고*보완하여 번역해 보면, '諸城에는 處閭近支가 있어 道使라고도 하였는데, 刺史에 비견된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윗 기사에 나타난 고구려의 지방 편제단위는 褥薩이 주관하는 大城과 處閭近支(道使)가 주관하는 諸城, 可邏達이 주관하는 諸小城, 그리고 婁肖가 주관하는 又城의 4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일단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3등급 諸小城의 장관으로 나온 可邏達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었다. 먼저 가라달에 비견되고 있는 중국의 長史가 독립된 편제단위의 장관이라기 보다는 장관의 막료에 해당하는 자라는 점을 중시하여, 가라달을 제3등급의 지방관으로 인정하기 어렵겠다는 견해가 있고, 다음에 이 견해를 받아서 가라달을 褥薩이나 道使의 직할지를 관장하는 婁肖級 지방관으로 보는 것이 좋겠고 한 견해가 있다. 필자 역시 可邏達을 지방 편제단위의 장관으로 인정치 않고 후술하듯이 욕살의 행정적 보좌관격으로 이해하여, 7세기 단계의 고구려 지방 편제단위를 褥薩과 處閭近支(道使)와 婁肖가 각각 주관하는 '大城'과 '諸城'과 '又城'의 3등급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때 褥薩은 중국의 都督에 비견되는 것으로 보아 광역의 행정단위의 장관에 해당되는 것이겠고, 處閭近支(道使)는 대개 '소국-담로-군' 계통 행정단위의 장관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고 婁肖는 '읍락-읍륵-현' 계통 행정단위의 장관에 각각 해당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렇게 볼 경우,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첫째, 7세기 단계의 고구려의 지방 편제구조는, 6세기 초반 단계의 백제 및 신라의 지방 편제구조에 비하여, 욕살이 주관하는 '大城'이 상위의 편제단위로 추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백제와 신라의 경우도 이와 대등한 상위의 편제단위로서 方과 州가 조만간 추가로 설정되었던 것이므로, 이는 6세기 초 단계와 7세기 단계의 차이를 나타내 주는 것일 뿐, 고구려와 백제*신라 사이의 지방 편제구조의 차이를 드러낸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둘째, 고구려의 '소국-담로-군' 계통의 편제단위인 '諸城'의 장관명인 處閭近支를 '道使'라고도 했다는 점이다. 이 '道使'의 칭호는 중국 지방관의 계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만 국한되어 그 용례가 쓰여지고 있어 주목되는 것이다. 이에 중국과 구분되는 삼국의 지방 편제 상의 개성과 공통점을 추출하는데, '道使'의 칭호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도사'에 관한 두번째의 문제를 다음의 3장에서 먼저 살펴보기로 하고, 상위의 편제단위인 '大城', 方, 州에 관한 첫째의 문제는 이어서 제4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3. 道使

7세기 단계의 고구려에서 '소국-담로-군' 계통의 편제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을 處閭近支 혹은 道使라 칭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중 특히 道使의 칭호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는 사용례가 전혀 없는 반면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에만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어, 삼국 간에 지방 편제상의 적극적 교류가 있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먼저 백제의 道使 용례 및 그와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다-1) 또한 5方이 있었는데 중국의 都督方과 같다. 모두 達率로 통령케 하였다. 方마다 郡을 관장하고 있는데 많은 것은 10개에 이르고, 적은 것은 6*7개였다. 郡將은 모두 恩率로 삼았다. 군현에는 道使를 두었는데 또한 城主라고도 하였다.(<<翰苑>> 百濟條 所引 <括地志>)

-2) 5方에는 각각 方領 1인씩이 있는데 達率로 삼았다. 郡將은 3인이 있는데 德率로 삼았다. 方은 병사 1,200인 이하 700인 이상을 통수하였다. 城의 내외 民庶 및 餘小城은 모두 나뉘어 예속하였다.(<<周書>> 卷49 列傳41 百濟條)

-3) 5方에는 각각 方領 1인씩이 있는데 達率로 삼았다. 方佐가 그를 보좌하였다. 方에는 10郡이 있었다. 郡에는 將 3인이 있었는데 德率로 삼았다. 병사 1,200명 이하 700이상을 통수하였다. 城 내외의 庶 및 餘小城은 모두 나뉘어 예속하였다.(<<北史>> 卷94 列傳82 百濟條)

백제의 道使 용례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翰苑>>(다-1 기사)에만 보이고 있어, 적어도 7세기 단계에는 道使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1) 기사에 의하면, 광역 행정구역으로서의 5方을 들고, 郡이 각 方의 관장하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에, 郡將의 존재를 들고, 이어서 郡縣 단위에 城主라고도 불리는 道使를 두었다고 하고 있다. 이를 언뜻 보면 7세기 단계의 백제 편제구조는 '方-郡-縣'의 3등급으로 구성되었고, 郡 단위에는 郡將이, 縣 단위에는 道使가 파견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아마도 찬자 역시 이러한 인식하에 다-1) 기사를 작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의 도사는 '읍락-읍륵-현' 계통의 3등급 편제단위의 장관인 셈이 되어, '소국-담로-군' 계통의 2등급 편제단위의 장관으로 파악한 고구려의 그것에 비해 한 등급 낮은 직책이었던 것이 된다. 중국에는 없고 삼국에만 고유하게 쓰였고, 더구나 같은 <<翰苑>>에 실려 전하는 고구려와 백제의 道使의 용례가 이처럼 상이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예상 밖의 결론이라 할 것이다. 이에 좀더 면밀한 고찰의 필요성을 느끼는 바이다.

<<周書>> 및 <<北史>>에서 다-1) 기사와 같은 내용을 각각 전해주고 있는 위의 다-2)와 다-3) 기사에서 이 문제를 천착해가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두 기사에서 方을 관장하는 장관으로 方領이 있었음을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면, 道使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周書>>의 다-2) 기사와 <<北史>>의 다-3) 기사는 언뜻 보기에 백제의 지방 편제에 관한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상당한 차이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다-2) 기사에 의하면 方領은 물론이고 郡將, 그리고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方에 관련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이고, 郡과의 관련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에 城과 餘小城에 대한 내용이 添記되어 있다. 이에 의거한다면 方領과 郡將을 각각 方과 郡의 장관으로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方領과 郡將이 모두 方 단위의 지방관으로 파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다-3) 기사에서는 方에 관한 부분과 郡에 관한 부분을 분명히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方領과 方佐는 方에 관련된 지방관으로 기술하고 있고, '郡將' 부분은 郡과 將으로 나누어 將을 郡의 장관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이렇게 기술하다 보니 그 뒤에 이어 기재된 병사들은 方 단위에서 통솔하였던 것인지, 혹은 군 단위에서 통솔하였던 것인지 알 수 없게 애매하게 처리되었다. 이와 함께 그 뒤에 城과 餘小城에 관련된 내용이 添記되어 있다. 이에 의거한다면 方領은 方의 장관, 將은 郡의 장관으로 확실히 파악될 것이다. 여기에 현 단위의 道使만 보탠다면 <<翰苑>>의 다-1) 기사에 나타난 바와 같은 3등급의 지방 편제구조를 그대로 재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위의 다) 기사를 검토해본 결과, 다-1)과 다-3) 기사는 다-2) 기사와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기사를 중심으로 백제의 지방 편제구조를 파악할 것인가가 문제이겠다. 이를 위해 <<翰苑>>과 <<周書>>와 <<北史>>에 각각 실려 있는 百濟條(다 기사)의 사료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翰苑>>의 百濟條는 여러 자료를 폭넓게 참고하되 <<北史>> 百濟條를 주로 참고하여 작성되었으리하고 한 지적과, <<北史>> 百濟條는 기존의 正史인 <<魏書>>*<<周書>>*<<隋書>> 등의 列傳에 기록된 내용을 刪削編纂한 것으로 새로운 것은 별로 없다고 한 지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둘 때, 백제의 지방 편제구조는, 당연히 <<周書>>의 다-2) 기사를 중심으로 하되, 여기에 다-1) 기사와 다-3) 기사를 보완하는 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제 다-2) 기사에 의거하여 백제의 지방 편제구조를 도출해 보기로 하자. 다-2) 기사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여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方 단위에 관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5方의 각각에 達率級이 임명되는 方領 1인과 德率級이 임명되는 郡將 3인이 있어, 이들이 方 단위의 700-1,200명의 병사를 통수했다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다-3) 기사에 의하면 方領을 보좌했다는 方佐의 존재를 지적하는 한편으로, '郡將'을 '郡의 將'으로 보아 方과 구분되는 郡 단위의 장관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다. 여기에서 다-3) 기사에서 方佐의 존재를 지적한 것은 다-2) 기사를 보완해주는 새로운 자료의 제시로 받아들여도 좋겠지만, 郡將을 郡의 將으로 본 것은 <<北史>>의 찬자가 郡의 명칭에 현혹되어 '郡將'의 칭호를 재해석한 오류로 볼 것이다. 신라의 촌주의 사례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듯이, '郡將'은 군 단위의 지방관이라기 보다는 <<周書>>의 기록 대로 方領의 지휘하에 方 단위의 병사를 분할 통수한 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方領은 方佐의 행정적 보좌를 받고, 郡將 3인의 군사적 보좌를 받으면서 方 단위의 행정*군사적 제반 업무를 총괄했던 것이 된다.

둘째, '城'과 '餘小城'에 관한 부분이다. 다-2) 기사를 단순 문맥상으로만 본다면, 이 부분의 '城' 역시 '方城'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고, 그렇다면 '餘小城'은 方城에 부속해 있는 城으로 파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2) 기사가 지방 편제구조의 전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城'은 제2등급의 편제단위를, '餘小城'은 제3등급 편제단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翰苑>>의 다-1) 기사에서 方 단위 이외에 제2등급 편제단위와 그 장관으로서의 道使 혹은 城主의 명칭까지 새로이 추가*정리한 점을 주목해볼 수 있겠다. <<翰苑>>이 <<北史>> 등을 주로 참고하면서도 그밖의 다른 자료도 폭넓게 참고하여 작성되었으리라는 지적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새로운 자료의 추가는 충분히 이해되는 바이다. 이에 이를 앞의 추론에 첨가*보완하여 다시 정리해보면, 제1등급의 편제단위인 方 단위에는 方領이하 方佐와 郡將이, 제2등급의 편제단위인 '城' 단위에는 道使(혹은 城主)가 파견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 제3등급의 편제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은 기록상 나타나 있지 않아 미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의 道使 역시 고구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제2등급, 다시 말하면 '소국-담로-군' 계통의 편제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道使 용례는 고구려 및 백제의 경우와는 달리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6세기 초반에서 후반에 걸친 시기의 金石文 자료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迎日冷水里新羅碑(503년 建碑, 冷水碑라 약칭함)나 蔚珍鳳坪新羅碑(524년 건비, 鳳坪碑라 약칭함) 등 6세기 초반의 금석문이 발견되기 전에는, 신라의 道使 용례는 6세기 후반의 南山新城碑(591년 건비)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남산신성비에 나오는 道使는 縣의 전신이라 할 城(村) 단위에 파견된 지방관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신라의 도사는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제3등급 행정단위에 파견된 존재였던 것으로 흔히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冷水碑와 鳳坪碑가 발견되면서, 6세기 초반에는 신라에서도 道使가 제2등급의 편제단위에 파견되는 지방관이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어, 신라의 도사 역시 원래는 고구려*백제의 그것과 같은 존재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라의 道使는 6세기 초반에는 제2등급의 편제단위를 관장하던 지방관이었다가, 6세기 후반에는 3등급의 편제단위인 城(村) 단위를 관장하는 지방관으로 변모되었다고 하겠다. 그 자세한 내용은 기왕의 연구에 미루어 두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신라 道使의 지위가 이처럼 변모하게 된 원인과 그 변화의 실태를 언급하는 것에 그치도록 하겠다.

먼저 6세기 초 단계까지는 신라에서도 역시 '소국-담로-군' 계통의 제2등급 행정단위에 파견되던 도사가 6세기 후반에 '읍락-읍륵-현' 계통의 제3등급 행정단위인 城(村) 단위에 파견되는 존재로 변모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읍락-읍륵-성(촌)' 계통 단위의 독자적 성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신라의 지방제가 '소국-읍락'의 구조에서 연원하여 '군-현'의 지방 편제구조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소국-군' 계통의 단위성을 계속 유지해 가면서도 한편으로 '읍락-현' 계통의 소단위체가 독자적 운동력을 점점 강하게 확보해 간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시에 전반적으로 나타난 사회 발전 및 분화의 추세 속에서 성취된 바였을 것이다. 둘째, 소단위체에 대한 직접 통제를 관철하기 위한 국가적 시도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국가적 시도는 소단위체의 독자적 운동력이 강하게 확보되어 감에 따라 비로소 가능했을 결과적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국가적 시도가 역으로 소단위체의 독자적 운동력을 더욱 가속시키는 데 작용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 '읍락-읍륵-현' 계통의 성(촌) 단위가 국가의 기본 편제단위로 부상하였고, 이에 기왕에 '소국-담로-군' 단위의 행정단위에만 파견되던 道使와 새로이 설정된 邏頭가 성(촌) 단위에까지 확대*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중 邏頭는 군 단위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성(촌)에 파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邏頭가 군 내의 여러 성(촌)에 파견된 道使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군 단위의 선두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군 단위 업무를 어느 정도 통일적으로 주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에서 邏頭의 출현은 곧 道使에 이러한 성격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邏頭의 존재가 6세기 중반 경의 明活山城碑(551년 건비)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으므로, 도사의 성격 변화는 그 즈음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고 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즈음에 제1등급의 편제단위인 광역 행정구역으로서의 州가 설정되고 있어, 6세기 중반 경의 신라 지방 편제구조는 결국 軍主와 使大等 등이 관장하는 州와 邏頭가 관장하는 郡, 그리고 道使가 관장하는 城(村)의 3등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고구려의 지방 편제구조와 비교해 볼 때, 고구려의 경우는 7세기 단계까지 제2등급 편제단위를 관장하는 道使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해 가면서, 제3등급 편제단위를 관장하는 지방관으로서의 婁肖를 새로이 설정했던 것에 반하여, 신라의 경우는 제2등급 편제단위에 파견하던 道使를 새로 설정한 邏頭와 함께 제3등급의 소편제단위인 성(촌)에까지 확대 파견하는 한편으로, 邏頭로 하여금 완만하게나마 제2등급의 편제단위를 대표케 하는 방향으로 재정비한 것이었다. 백제의 경우는, 제3등급 편제단위를 관장하는 지방관의 명칭이 자료상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대체로 고구려의 경우와 비슷한 과정을 밟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삼국간 지방제 정비 과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4. 廣域 編制單位의 설정

삼국은 그 후반기에 이르면 공통적으로 광역의 편제단위를 새로이 설정하게 된다. 6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확립된 신라의 州制와, 늦어도 사비천도 이후에는 확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백제의 5方制, 그리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의 지방 5部制가 그것이다. 이러한 광역 편제단위의 새로운 설정은 '소국-담로-군' 계통의 편제단위들을 몇개의 광역권으로 묶어 파악함으로써, 개별 분산성을 지양하고 지방 지배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먼저 신라의 州制를 살펴보기로 하자.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신라 州制에 관한, 신뢰할 수 있는 첫 기사는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昌寧眞興王巡狩碑(이하 昌寧碑라 약칭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 四方軍主 比自伐軍主 沙喙 登**智 沙尺干 漢城軍主 喙 竹夫智 沙尺干 碑利城軍主 喙 福登智 沙尺干 甘文軍主 沙喙 心麥夫智 及尺干 上州行使大等 沙喙 宿欣智 及尺干 喙 次叱智 奈末 下州行使大等 沙喙 春夫智 大奈末 喙 就舜智 大舍 于抽悉直河西阿郡使大等 喙 比戶智 大奈末 沙喙 須兵夫智 奈末

윗 기사는 昌寧碑에서 軍主와 (行)使大等에 관한 부분만을 발췌한 것인데, 軍主는 比自伐軍主*漢城軍主*碑利城軍主*甘文軍主가 각각 1인씩 4인이 열거되어 있고, (行)使大等은 上州行使大等*下州行使大等*于抽悉直河西阿郡使大等이 각각 2인씩 6인이 열거되어 있다. 이중 먼저 4인의 軍主를 보면, 이들은 軍主 칭호에 冠稱되어 있는 比自伐*漢城*碑利城*甘文의 四方에 각각 파견되어 '四方軍主'라고 불렸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의하면 이들 軍主의 파견지는 比子伐州*北漢山州*比列忽州*甘文州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사방의 최전방에 설치된 전진기지로서의 '小州'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行使大等 2인씩이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는 上州와 下州의 용례는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州, 곧 '廣域州'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使大等 2인이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는 于抽悉直河西阿郡은 于抽郡과 悉直郡과 河西阿郡의 3개군을 포함하는 광역의 準編制單位로 파악될 수 있어, 곧 準廣域州로 볼 것이다.

이후 신라가 한강하류까지 군사적으로 전진해 감에 따라, 진흥왕대 후반에 이르러 경기*충청 일대의 신척경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새로운 광역 편제단위가 설치되는데, 新州가 그것이었다. 上州와 下州와 新州, 그리고 于抽悉直河西阿郡은 창녕비에 나오는 四方軍主와 대응*설정된 (準)廣域州였던 셈이다. 이후에 다시 강원도 내륙지역으로 진출해 감에 따라 이 지역 일대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광역 편제단위가 설정되어, 신라의 영역은 5개의 광역 단위로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광역 편제단위의 추가 설정은 小州에 주둔하는 군단('停')의 주도하에 신척경지역을 새로이 확보해 감에 따라 성취되어진 바였다. 따라서 (行)使大等은 각 방면에 파견된 四方軍主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하에서 廣域州 및 準廣域州를 단순히 행정적으로 관리했던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신척경지역의 확보가 전진 기지로서의 小州의 주도하에 이루어짐에 따라, 소주의 추진 배치가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삼국 간 역관계의 변화에 따른 小州의 移置도 무상하게 행해졌다. 삼국 간 항쟁*대립이 지속되고 삼국 내부의 편제 역시 안정화되지 못하고 있는 한, 小州의 빈번한 移置로 인한 이러한 불안정성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6-7세기를 경계로 하여 삼국 간에 國界가 확정되고, 각 나라별로 國界 내의 편제가 안정화되어 감에 따라, 小州는 군사적 전진기지로서의 성격 보다는 방어를 위한 핵심 기지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그간 무상히 移置되어온 불안정성을 지양하고 일정 지역에 정착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해 갔다. 이에 따라 小州는 광역 편제단위의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부상되어 갔으며, 급기야 구체적인 지명을 冠하는 小州의 칭호가 上州니 下州니 新州니 하는 기왕의 추상적 廣域州의 칭호와 混稱되든가 혹은 그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小州와 廣域州의 2원적 형식을 띠던 신라의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州制의 운영은 점차 1원화 되어 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7세기 중반경에 신라의 광역 편제단위는 一善州[上州], 居列州[下州], 北漢山州[新州], 牛首州[강원도 내륙지역], 何瑟羅州[동해안 지역]의 5州로 일단 성립됨을 보았으며, 문무왕 5년(665)에는 上州와 下州의 일부를 떼어서 ?良州를 다시 추가 설정하면서 6州로 늘어나게 되었다.

백제의 광역 편제단위는 자료가 미흡한 관계로 신라의 경우 처럼 그 성립 및 변화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살펴보기는 어렵다. 다만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5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다음의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는 있다.

바) 도읍은 固麻城이다. 그 밖에 다시 五方이 있으니, 中方을 古沙城이라 하고 東方을 得安城이라 하고, 南方을 久知下城이라 하고, 西方을 刀先城이라 하고, 北方을 熊津城이라고 하였다.(<<周書>> 百濟條)

윗 기사의 반영 시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견이 개진되기도 했지만, 어떤 견해를 취하든 熊津城을 北方으로 두고 있는 5方制는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 정비된 광역 편제단위로 보아야 한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5방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부 견해의 일치를 본 것도 있고, 이론이 분분하게 제기된 것도 있다. 먼저 北方인 熊津城이 오늘의 공주를 지칭한다는 것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겠고, 中方은 오늘의 고부에, 동방은 오늘의 은진에 각각 비정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의견이 접근해 있다. 그러나 남방의 경우 그 비정지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게 제기되어 있고, 서방의 경우 역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다만 고부에 비정되는 중방의 관할 지역이 대개 오늘의 전북 일대였을 것이므로, 결국 남방의 관장 지역은 그 중심 城은 알 수 없다 하여도 대개 전남 일대가 되겠다는 것과 서방의 관장 지역은 서해안 일대였으리라는 것 정도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5方制 하에 포괄된 사비시대 백제의 지방 편제범위는 충청도에서 전남의 남단에까지 미쳤던 것이 되어, 충청도와 전북 지역에만 미쳤던 6세기 전반의 22담로제에 비하여 그 편제의 범위가 전남 지역에까지 확대되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백제 멸망기의 지방 편제단위를 반영하는 '5方 37郡 200城'이라는 구절 중의 37郡은 5방제가 정비되면서 백제의 22담로제가 확대 개편된 바였을 것으로 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제2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백제 方制의 조직 구성과 그 운영 실태에 대해서는 제3장에서 <<翰苑>>*<<周書>>*<<北史>>에 나오는 5방 관련 기사(다-1, 2, 3 기사)를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 바 있다. 즉, 5方에는 각각 達率級이 임명되는 方領 1인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에 德率級이 임명되는 郡將 3인을 두어 方 단위의 700-1,200명의 군사를 통수하는 한편으로, 方佐를 두어 행정적 업무 집행을 보좌케 하는 2元體制로써 方制를 운영해 갔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백제 方의 조직 구성은 善德王 11년(642)에 백제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몰렸을 때의 신라 大耶州의 내부의 조직 구성과 매우 흡사한 바가 있어 주목된다. 이를 도식화하여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백제의 方과 신라의 州의 조직 구성 비교

<백제 方의 조직 구성> <642년 당시 신라 大耶州의 조직 구성>

方領 軍主

+- 方佐 +- 佐 - 幕客

郡將 諸將士

| |

兵卒 兵卒

642년 당시 신라의 大耶州는 전진 및 방어기지로서의 小州의 하나였지만, 7세기 중반경에 小州가 廣域州의 명실상부한 중심지[州治]로 재편되어 갔다는 앞에서의 지적을 상기한다면, 642년 단계의 大耶州는 대백제 방어기지로서의 小州的 성격을 기본적으로 유지해 가면서도, 下州의 廣域圈 관할의 중심지로서의 州治的 성격을 겸유하는 과도적인 모습을 띠었을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비교표에 나타난 공통점은 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성격의 광역 편제단위의 조직 구성이 백제와 신라의 양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제 이를 염두에 두면서 고구려의 광역 편제단위를 검토해 보자. 이미 제2장에서 고구려의 지방 편제단위는 大城*諸城*又城의 3등급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고, 이중 大城에 파견된 褥薩이 중국의 都督에 비견되는 것에 비추어 大城을 광역 편제단위의 중심 城으로 이해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백제의 方이나 신라의 州에 해당하는 고구려 광역 편제단위의 명칭과 그 운영 실태를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자료의 부족으로 여의치가 않다. 다만 다음의 기사에서 광역 편제단위의 명칭을 찾아볼 수는 있다.

사) 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隋書>> 卷81 列傳46 高麗條)

이 기사는 여러 해석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지만 '內評의 五部褥薩과 外評의 五部褥薩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여기에서 內評이란 왕도를 중심으로 한 일정 범위의 중앙 畿內를 지칭하는 것이겠고, 外評이란 지방을 지칭하는 것이겠다. 그렇다면 중앙의 행정구획인 5部와 지방의 편제단위인 5部에 각각 욕살이 파견되어 있었던 것이 된다. 여기에서 지방의 편제단위로서의 5부가 전국을 5대분한 광역 편제단위를 지칭하는 것임은 물론이겠으며, 결국 욕살은 이러한 광역 편제단위의 중심 城인 大城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이러한 部制는 대개 6세기 중반 경에 설정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백제나 신라의 광역 편제단위가 설정된 것과 대체로 같은 시점으로서, 삼국이 공통적으로 6세기 중반 경에 이러한 광역 편제단위를 설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여기에 백제와 신라의 광역 편제단위의 운영상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部制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통수를 분담하는 자와 행정적 업무를 맡은 자의 보좌를 받아 욕살이 部의 군사*행정적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욕살의 행정 보좌관으로서는 <<翰苑>>의 관계 기사(기사 나)에서 중국의 長史로 비견되는 것으로 본 可邏達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욕살 휘하의 군사적 통수를 분담한 무관으로는 어떠한 자를 들 수 있을까? <<翰苑>>에 나오은 다음 기사를 주목해 보기로 하자.

아) 武官은 大模達이라 했는데 衛將軍에 비정된다. 一名 莫何邏繡支 혹은 大幢主라고도 하였으며 ?衣頭大兄 이상을 임명하였다. 次官은 末若이었는데 中郞將에 비견된다. 郡頭라고도 하였으며 大兄 이상을 임명하였다. 1천인을 統領하였다. 이하에도 각각 등급이 있었다.(<<翰苑>> 高麗條)

이는 <<新唐書>> 高麗條에 나오는 관련 기사에 비해서, 몇몇 글자를 달리 쓴 것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자세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大模達과 末客을 욕살 휘하에서 部 단위 병사 1천인을 분담*통수한 자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모달과 말객에 각각 비정된 중국의 衛將軍과 中郞將은 漢代의 首都 및 禁中의 군사를 지휘하는 武官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들이 욕살 휘하의 무관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윗 기사가 褥薩과 處閭近支 등의 지방관을 기술한 직후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문맥상 중앙 보다는 지방과 관련된 존재일 가능성이 일단 더 크다. 또한 대모달의 一名으로 나오는 大幢主는 신라의 軍主 휘하 병사를 분담 통수한 幢主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으며, 말객의 一名으로 나오는 郡頭는 백제의 方領 휘하 군대를 분담 통수했을 것으로 추정한 郡將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어,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대모달과 말객을, 욕살 휘하의 군사를 분담*통수했던 武官으로 볼 수 있겠다는 의견을 일단 제안해 두고자 한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지방 편제단위와 지방관을 중심으로 하여, 삼국의 지방 통치조직을 비교*고찰하여 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梁書>>에 나오는 백제의 담로와 신라의 읍륵을 비교*고찰하였다. 담로와 읍륵에 대해서 <<梁書>>에서 '중국의 郡縣이라는 말과 같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동질의 지방 편제단위로 볼 수도 있겠으나, 본고에서 분석해본 결과 담로는 小國 단위에서 연원하여 후에 郡으로 재편되는 편제단위로['소국-담로-군' 계통의 편제단위], 읍륵은 邑落에서 연원하여 후에 縣으로 재편되는 편제단위['읍락-읍륵-현' 계통의 편제단위]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소국-담로-군' 계통의 편제단위와 '읍락-읍륵-현' 계통의 편제단위는 백제와 신라의 지방 편제구조 상에서 각각 제2등급과 제3등급의 편제단위를 공통적으로 이루는 것이었다. 한편 <<翰苑>>에 나오는 고구려의 備는 '소국-담로-군' 계통의 제2등급 편제단위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에 파견된 지방관은 道使였다.

道使는 중국의 관제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반면 고구려*백제*신라에만 공통적으로 있었던 지방관이었다. 백제의 道使는 方領과 郡將과 함께 역시 <<翰苑>>에 나오고 있는데, 이는 方領과 郡將에 이어 제3등급의 편제단위에 파견되는 지방관이었던 것으로 보아, 제2등급 편제단위의 지방관인 고구려의 道使와는 다른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周書>>와 <<北史>>에 나오는 관계 기사를 비교*검토해본 결과, 方領과 郡將은 모두 제1등급 편제단위인 方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아서, 백제의 도사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제2등급 편제단위의 지방관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신라의 道使는 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6세기 전반의 冷水碑*鳳坪碑와 6세기 후반의 南山新城碑 등의 금석문 자료에서만 확인되고 있는데, 6세기 전반에는 도사가 제2등급 편제단위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음에 반해, 6세기 후반에는 신설된 邏頭와 함께 제3등급의 편제단위인 城(村) 단위에까지 확대*파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읍락-읍륵-현' 계통의 제2등급 편제단위인 城(村)의 소단위체가 독자적 운동력을 확보해 감과 함께 국가가 이들에 대하여 직접 통제를 관철시키려는 시도를 강화해 감에 따라 나타난 것이었다. 즉, 6세기 후반 경에 道使는 제3등급의 편제단위에까지 확대*파견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새로 설치한 邏頭를 제2등급의 편제단위[郡]에 대한 완만한 대표자로 편제하면서, 그 결과로서 이러한 변화가 6세기 후반 경에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에 반해 고구려와 백제의 도사는 제2등급의 편제단위에 파견되는 지방관으로서의 지위를 7세기 경의 <<翰苑>> 단계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의 경우 7세기 경에 제3등급 편제단위의 지방관으로 婁肖가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7세기까지도 도사를 제2등급 편제단위의 지방관으로 유지해 가되, 제3등급 편제단위의 지방관으로서 婁肖를 신설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점이야말로 지방 통치조직의 정비과정에서 신라와 고구려 간의 차이점이 되겠는 바, 백제의 경우는 고구려의 경우와 비슷했을 것이다.

6세기 중반 경에 삼국은 공통적으로 제1등급의 광역 편제단위를 설정하였다. 신라의 州, 백제의 方, 고구려의 部가 그것이었다. 신라의 州는 군사적 전진기지로서의 小州와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廣域州가 幷置되어, 그 각각에 1인의 軍主와 2인의 行使大等이 파견되었는데, 후자는 전자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하에서 광역주 단위를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존재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후 7세기에 접어들어 삼국 간의 國界가 획정되고 國界 내의 편제가 안정화되면서, 小州는 점차 광역주의 중심지['州治']로 편제되었고, 軍主는 그 장관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백제의 광역 편제단위로서의 方은 언제 설치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周書>>에 나오는 5方制는 사비 천도 이후에 정비된 것이 확실하다. 方에는 그 장관인 方領과 그 휘하에 병사를 분담하는 3인의 郡將과 행정적 보좌관격인 方佐가 있어, 方 단위의 군사*행정적 업무를 관장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方制의 구성과 운영 형태가 7세기 중엽 경의 신라 大耶州의 그것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7세기 단계의 신라의 경우도 역시 병사를 분담*통수하는 諸將士[幢主]와 행정적 보좌관격인 佐*幕客 등의 보좌를 받아 軍主가 州 단위의 군사*행정적 업무를 총괄하는 형태로 운영했을 것으로 보았다. 고구려 역시 그러했을 것으로 보아, 褥薩 휘하에 병사를 분담*통수하는 자로서 대모달*말객이, 행정적 보좌 역을 맡은 자로서 可邏達이 각각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