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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2장 고대
제3절 삼국의 항쟁과 청주

1. 삼국 항쟁기의 충북

1) 삼국 항쟁의 전개과정

삼국은 안으로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한 후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외적인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삼국의 항쟁으로 나타났다. 삼국의 항쟁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북진을 시작한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의 역사가 펼쳐지던 시기는 중국사에서 대체로 삼국시대·5호 16국시대·남북조 시대라고 하는 분열기였다. 이 시기에 삼국은 각기 고대국가를 성립·발전시키면서 각국이 처한 내적 문제와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 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밀접히 관련을 맺고 치열한 대립과 항쟁을 벌렸다. 따라서 삼국은 모두 통일을 위한 전략을 구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중국 남북조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북방의 유목 민족이나 또는 남방의 왜 세력 등도 외교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중국의 침략세력에 맞서 항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룩하였고, 또한 중국 세력의 침략을 저지함으로써 한반도의 존립과 발전을 약속해 주는 민족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삼국은 모두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을 치열히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삼국간의 세력균형과 자국의 존립 및 실익을 위해 적대관계에 있는 나라와 화친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까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던 나라에 등을 돌리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한 외교양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국은 비록 정치적으로 분립하여 대립과 항쟁을 벌였지만, 그 바탕에는 같은 민족의식과 문화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이민족과 벌인 치열한 대외투쟁은 고구려만의 투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후에 신라의 대당투쟁으로 연결되어지며, 이것이 총체적으로 우리 민족의 대외투쟁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삼국 항쟁의 전개과정은 4세기 중반부터 7세기 후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대략 5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제1기는 4세기 중반부터 4세기 말까지로 낙랑·대방의 옛 땅을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 간의 대립이 차츰 조성되는 가운데 신라와 화호(和好)를 맺은 백제가 남하해 고구려와 대결하던 시기이다.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북진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을 전사시킴으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이로써 두 나라는 한 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제2기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반까지로 고구려·신라 연합세력 대 백제·가야·왜 연합세력의 대결이 벌어지던 시기이다. 신라는 국내에서의 김씨 왕위 세습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고구려와 접근을 꾀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정책은 기존의 나제관계를 악화시켜 마침내 백제는 가야와 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하였다. 백제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3)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고구려는 그 요청에 따라 신라를 구원하여 주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에 따라 백제가 곤핍상태를 면키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제3기는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로 고구려 대 나제동맹의 대결이 전개된 시기이다.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 413∼491)은 평양천도와 더불어 남진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백제는 자립화 기운이 조성되면서 고구려의 내정간섭과 군대주둔 등의 영향과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신라와의 교섭을 맺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한다는 공통의 목표 아래 동맹관계를 맺게 된것이다. 제4기는 6세기 중반부터 6세기 말까지로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하면서 삼국 항쟁에 있어서 힘의 우위를 점하던 시기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백제는 한 동안 지배세력 간에 혼란을 겪었으나 사비로 천도하면서 한때 중흥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안으로 왕위 계승전이 벌어지고 서북 방면으로는 돌궐 및 북제의 압력이 가해지는 내우외환의 어려운 상황을 당하고 있을 때 나제 동맹군은 북진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가 되찾은 한강하류 유역을 점령함으로써 나제동맹은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고구려와 연결하여 백제와 대결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백제가 완패한 관산성(管山城) 전투(554) 이후 나제관계는 백제 멸망 때까지 적대관계로 빠져 들게 되었다. 제5기는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반까지인데, 고구려와 백제로 연결된 남북진영과 신라와 당의 연결로 이루어진 동서진영이 대립하는 양상을 나타내는 시기이다. 이 두 진영의 대결에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켜 버렸다. 그러나 한반도를 직할 영토화하려는 당의 정책과 삼국을 통일하려는 신라의 통일정책은 정면에서 충돌을 초래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면서 당군과 군사적 대결을 벌여 마침내 승세를 잡았다. 이리하여 신라는 불완전하나마 대동강 이남을 통일하게 되었다.

2) 고구려의 남하와 나제동맹군의 대응

청주를 포함한 충북지역은 삼국간의 항쟁기에 중요한 쟁패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소백산맥상의 관문인 죽령(竹嶺)·계립령(鷄立嶺)·조령(鳥嶺)·추풍령(秋風嶺) 등을 통해 한반도의 요충지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삼국간의 세력 각축장이 되어 왔다. 중원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온달산성(溫達山城)·삼년산성(三年山城) 등의 유적지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삼국간의 항쟁 양상이 충북지역을 무대로 본격화된 것은 대략 5세 기 후반 경이다. 고구려는 4세기 중·후반 경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과 백제의 침입을 받아 한때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이 전사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대에 이르러 불교의 공인과 율령 반포 및 태학 설립 등 일련의 문화정책을 펴서 대내적인 체제안정을 꾀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하여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3)과 장수왕(長壽王, 413∼491)대에는 적극적인 남진정책 을 추진하여 영역을 크게 확장시킨 결과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에 있어서 막강한 실 력자로 나서게 된다. 396년 광개토왕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 정벌에 나서 백제 아신왕(阿莘王, 392∼405)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백제로부터 예성강 일대와 남한강 일대에 있는 58개의 성과 700개의 촌락을 공취하였다. 이에 따라 백제왕은 한때나마 고구려 세력권에 예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의 장수왕은 평양천도(427)를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구축하였고, 아울러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수세에 몰려 있는 백제뿐 아니라 당시 고구려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받고 있는 신라도 궁극적으로 병합하려는 의도를 갖게 되었다. 이에 433년 백제와 신라 양국은 그 동안의 적대관계를 버리고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에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당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455∼475)은 고구려의 남진정책 대응하기 위해서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선 남조국가인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교섭을 벌여 북위와 송에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 있던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견제하였다. 또한 왕의 동생인 곤지(昆支)를 왜에 파견하여 유사시에 청병을 위한 외교적 포석을 하였으며(461), 북방 유목민족인 물길(勿吉)과도 연합하여 고구려를 측면에서 견제하고자 하였다. 더구나 470년경 장수왕의 왕녀를 북위 현종의 후궁으로 맞아 들이는 문제로 인해 고구려와 북위 양국이 잠시 불편한 관계에 접어들자 이 기회를 타서 백제 개로왕은 이례적으로 남조 일변도의 외교책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북위에 고구려의 남침을 호소하고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였다(472). 이와 같이 백제는 중국의 북위와 송, 신라, 가야, 왜, 물길을 연결하는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여 대고구려 봉쇄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백제의 이러한 전략은 신라를 동맹세력으로 끌어 들이는 데에는 큰 성과를 얻었지만, 반면 고구려의 침략을 유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의 왕족 중심의 전제화에 반발하여 고구려로 망명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을 앞세워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왕도인 한성에 쳐들어 왔다. 고구려군은 먼저 백제의 전진기지인 북성을 함락시킨 다음 왕도인 한성에 육박하였는데, 한성은 공격을 받은지 7일만에 함락되었다. 개로왕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고구려 군사에 붙잡혀 아단성(阿旦城)으로 끌려가 참살되고 말았다. 이때 개로왕뿐 아니라 태후·왕자들이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하였고 8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게 송두리째 빼앗기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신라의 원병 1만명을 데리고 귀환 중인 문주왕(文周王, 475∼477)은 하는 수 없이 왕도를 한성에서 웅진(熊津, 공주)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고구려의 남쪽 영토는 대략 6세기 전반까지 남양만에서 소백산맥의 관문인 죽령·조령을 넘어 평해에 이르는 선으로써 백제·신라와 경계를 삼게 되었으며 충북의 북부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되고 만 것이다.

한편 백제와 동맹을 맺은 신라는 고구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450년 신라 하슬라주의 성주인 삼직(三直)이 실직원(悉直原, 삼척)에 수렵을 하고 있던 고구려 변장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하여 신라와 고구려 양국관계는 이제 군사적 충돌을 벌리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곧 눌지왕(訥祗王, 417∼458)의 사과로 양국간의 험악한 관계는 일단 진정되었지만, 이후 454년부터 5세기 말까지 모두 8회에 걸쳐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할 정도로 양국은 적대관계로 돌변하게 되었다. 5세기 후반의 삼국의 정세는 고구려 우위의 상황하에서 고구려가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제와 신라를 서로 번갈아 가며 침입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투는 4회로 나타나고 있어 고구려는 이 기간에 신라를 주공 목표로 군사적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제 동맹군이 연합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한성침공과 같은 국가존망의 위급한 시기에 신라로부터 구원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 신라는 481년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으로 호명성(狐鳴城, 청송) 등 7개의 성이 함락 당하였고, 미질부(彌秩夫, 흥해)까지 침공해 와 왕도인 경주를 위협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백제와 가야의 원병의 힘을 빌어 이를 격퇴시킨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나제 양국은 한쪽의 힘만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막지 못할 경우 구원요청에 의해서 공동 대응하는 관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나제 양국이 실질적인 군사동맹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신라의 소지왕(炤知王, 479∼499)과 백제의 동성왕(東城王, 479∼500) 때의 일이다. 493년 3월 백제 동성왕의 요청으로 신라 소지왕은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내어 혼인시킴으로써 양국은 혼인관계를 통해서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

이 시기에 고구려와 나제동맹군 간의 전투는 충북 지역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484년 7월 고구려가 북변을 침입해 오자 나제동맹군은 진천으로 비정되는 모산성(母山城) 밑에서 이를 크게 격파한 적이 있으며, 494년 7월에는 신라 장군 실죽(實竹)이 고구려군과 괴산 청천으로 비정되는 살수(薩水)의 벌판에서 싸우다가 대패하여 문경으로 비정되는 견아성(犬牙城)으로 퇴각하였으나, 고구려군이 승기를 타고 이를 추격·포위하여 신라군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백제 동성왕이 3천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고구려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한 일도 있었다. 5세기 후반 고구려와 나제 동맹국간의 전투지점이 충북 진천(母山城)-괴산 청천(薩水原)-경북 문경(犬牙城) 선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렸던 점을 감안해 보면 당시 충북지역이 삼국간의 치열한 쟁패지역이었음을 실감케 해 준다.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삼국의 세력 변동에 따라 충북지역에 대한 영유권은 다소 변동은 있었지만, 충북지역은 삼국에 의해 완전히 3분되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남한강 유역인 충주·제천·단양군을 비롯하여 진천·음성·괴산군이 모두 고구려 영역에 속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단양이 적산현(赤山縣), 단양의 영춘면이 을아단현(乙阿旦縣), 제천이 내토현(奈吐縣), 제천의 청풍면이 사열이현(沙熱伊縣), 충주가 국원성(國原城), 진천이 금물노군(今勿奴郡), 음성이 잉홀현(仍忽縣), 괴산이 잉근내군(仍斤內郡), 괴산의 도안면이 도서현(道西縣), 괴산의 연풍면이 상모현(上芼縣)으로 모두 고구려 영역이었다. 충주시 북서쪽에 있는 장미산성(薔薇山城)을 고구려의 국원성의 치소로 비정하고 있는 점과 충주시의 중원 고구려비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백제는 충북의 중서부 지역을 차지하였는데, 청주에 상당현(上黨縣), 청원군 문의면에 일모산군(一牟山郡), 보은군의 회인에 미곡현(未谷縣)을 두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반면 충북의 남부인 영동·옥천·보은 지역에서는 신라 고분군과 신라토기가 주로 발견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 지역은 본래부터 신라 영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괴산군 청천면의 살매현(薩買縣), 보은의 삼년산군(三年山郡), 옥천군 청산면의 굴현(屈縣), 옥천군의 고시산군(古尸山郡), 옥천군 안내면의 아동혜현(阿冬兮縣), 옥천군의 이원면의 소리산현(所利山縣), 영동의 길동군(吉同郡), 영동군 양산면의 조비천현(助比川縣), 영동군 황간면의 소라현(召羅縣)이 모두 신라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충북의 남서부에 해당하는 보은군의 수한면·회북면·회남면과 옥천군의 옥천읍·군서면 및 영동군 양산면 지역은 승석문 원저 단경호(繩蓆文圓底短徑壺)나 광구호(廣口壺) 등의 백제계 토기가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토기 분포상으로 보아 나제 양국간의 접전이 벌어졌던 변경지역임을 반영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충북지역은 삼국 항쟁기에 삼국의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을 벌인 지역이었으며, 이는 그 만큼 충북지역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2. 신라의 영토 확장과 청주

5세기 후반 백제의 웅진으로의 남천과 신라의 자립화 기운에 힘입어 충북지역에서 신라의 세력확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475년 고구려군이 불시에 백제의 왕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점령함에 따라 충북지역에서 백제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위축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배제하고 내물왕 직계에 의한 김씨왕위 세습체제를 확립하려는 자립화 운동이 일어났다.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바로 자립화 의지와도 밀접히 관련을 가진다. 중원 고구려비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기록과 {일본서기} 흠명기 8년 2월조(464)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경북지역을 고구려 영토로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근거로 할 때 고구려군이 광개토왕때부터 왜군의 신라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신라 영내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50년 신라는 실직원(삼척)에서의 고구려 변장의 살해사건을 계기로 하여 고구려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 사실과 관련시켜 볼 때 신라 영내에 있는 고구려군은 적어도 460년 후반경에 이르면 신라에 의해 축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남아있던 경북지역은 다시 신라 영역으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 무렵 고구려 세력을 소백산맥 이북으로 몰아낸 신라는 곧 이 지역을 영역화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나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삼년산성(三年山城, 보은, 470), 모로성(芼老城, 군위 효령, 471), 일모(一牟, 청원 문의, 474), 답달(沓達, 상주 화령, 474), 구벌성(仇伐城, 의성, 485), 굴산성(屈山城, 옥천 청산, 486), 도나성(刀那城, 상주 모동·모서, 488) 등이 자비왕과 소지왕대에 걸쳐서 신라에 의해 축성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성들은 거의 충북의 남부지역과 경북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신라는 5세기 후반경에 그 서북 변경지역을 영유하고 군사적 요충지에 축성사업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이를 통해 산성 중심의 지배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군사적 성격을 가진 지방 행정조직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이 지역에서 강고하게 잔존해 오던 구소국의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의 경우처럼 수장층을 왕경으로 이주시켜 관등을 수여하고 중앙귀족으로 흡수하거나, 또는 국왕의 빈번한 순행을 통해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智證王, 500∼513)대에 이르러 기존의 친백제 노선에서 벗어나 고구려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해 나갔다. 고구려와 백제간에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여·제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라는 직접 개입을 자제하면서 권력기반의 강화와 여러 제도정비 및 개혁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흥왕(法興王, 514∼539) 12년(525)에 신라는 백제와 다시 수교를 맺음으로 인해서 이제 나제 양국은 다시 우호관계를 되찾게 되었다.

이어 진흥왕(眞興王, 540∼576)대에도 신라는 법흥왕에 이어 친백제 노선을 유지하였다. 진흥왕 2년(541) 백제의 성왕(聖王, 523∼554)이 먼저 신라에 화의를 요청함에 따라 전왕대에 이어 나제간에 우호관계를 이어 나가게 되었다.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 왜와 연합하여 백제의 오랜 염원이었던 한강 고토의 실지회복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신라와의 관계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여·제간의 대결구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가야지역에 진출하여 본격적으로 영역확대를 꾀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는 신라 발전의 관건이 되는 한강 유역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백제와의 화호를 계속 유지 하고자 하였다. 549년 중국 양나라로부터 불사리를 받아 들였는데, 백제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548년의 독산성 전투에서는 신라 장군 주령(朱玲·일명 朱珍)이 이끄는 3천의 군사를 백제에 파견하여 고구려군을 격퇴시킨 적이 있었다. 마치 5세기 후반 나제간에 이루어졌던 군사동맹 관계가 다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5세기 후반과는 달리 신라는 여제 양국의 역관계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실리를 취하기도 하였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 천안 또는 괴산 증평)과 금현성(金峴城, 전의 또는 진천)을 각기 공취할 때 양군이 지친 틈을 타서 이 두 성을 이찬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신라의 영토로 공취케 한 사례가 참고된다. 또한 551년 북진의 경우도 신라의 양면 실리외교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신라는 551년 백제·가야 연합군의 일원으로 북진하여 백제는 옛 왕도인 한성을 포함하여 한강하류 유역의 6군의 땅을, 신라는 단양 적성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소백산맥의 죽령을 넘어 남한강 유역의 10군의 땅을 고구려로부터 공취하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백제·가야·신라 연합군이 북진을 단행하여 한강유역을 점령하는 데에는 당시 고구려가 처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고구려는 대내적으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대외적으로 서북변에서 돌궐에 의한 군사적 압력이 고조되면서 이들 연합세력을 적절하게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제 연합군의 북진으로 한강유역의 16군의 땅을 상실한 고구려는 그 대책으로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를 연합군 대열에서 떼어내어 백제 주도의 연합군을 무력화시킬 모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암묵적으로 동의해 주는 조건을 내세워 신라와 화의를 맺었던 것이다. 신라도 백제가 공취한 한강하류 유역을 확보해야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화의요청에 적극 동의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에서 다시 친고구려로 급선회하는 양면 실리외교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묵계에 따라 신라는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방심하고 있던 백제를 공격하여 전격적으로 한강하류 일대를 점령해 버리고 이곳에다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을 모두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백제 성왕은 554년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신라정벌에 나섰는데, 관산성(管山城, 옥천)에서 성왕이 신라군의 기습으로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백제와 가야 및 왜 연합군은 대패하여 3만에 가까운 인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관산성 전투).

신라의 한강유역 확보와 관산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이후 삼국간의 항쟁사 전개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갖는다. 즉 신라는 한강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영유함으로써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고구려와 백제를 분리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여 삼국항쟁에 있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진흥왕 25년(564) 신라가 북제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한 일은 주목된다. 이어 565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을 받았다. 신라와 북제와의 교섭은 신라의 독자적인 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는 종전 신라의 대중외교가 고구려나 백제 예속하에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이제 대중외교의 자주권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흥왕이 북제로부터 받은 책봉은 신라사상 처음의 일로서 신라 왕권이 이제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구도를 적절히 이용하여 양면 실리외교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대내적인 체제정비와 영역 확대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해 나갔는데, 이것이 6세기 전반 경 신라외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신라는 5세기 후반 경부터 웅진천도로 위축되어 있던 백제의 공백을 이용하여 충북 남부와 서부지역에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자비왕대에 쌓은 보은의 삼년산성은 바로 신라의 북진을 천명하기 위한 의지의 표시이다. 삼년산성은 고구려의 남하세력을 저지하는 한편 옥천을 거쳐 백제의 왕도인 공주나 부여를 공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축조되었다. 더구나 이곳이 한반도의 중앙지대로서 북방으로 진출하는 목구멍과 같은 위치에 요새지를 마련한 것이다.

백제의 상당현이었던 청주 지역은 충북지역에 있어서 백제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다가 아마 6세기 경 위와 같은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이라는 대세 속에서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명확하게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청주 인근에 있는 문의가 이미 신라에 의해 영유되어 474년에는 이곳에 산성(壤城山城으로 비정됨)이 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 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5∼6세기에 해당하는 신라의 고분 양식과 유물이 출토되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고분군은 문의초등학교 뒤쪽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데,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부식 암반층을 파내고 남북을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의 구덩이를 먼저 만든 뒤 묘곽의 네 벽과 바닥은 막돌을 이용하여 석곽을 축조한 뒤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모두 9기의 신라계 돌덧널무덤(竪穴式 石槨墳)에서 굵은 고리 귀걸이(太環耳飾) 5점, 두형 굽다리접시(豆形高杯) 2점, 투겁창 2점, 투겁도끼 1점, 재갈 1점, 고리긴 칼(環頭大刀) 1점, 은상감 장식유리 제품 1점 등이 출토되었는데, 5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의 유물로 편년되고 있다. 신라가 충북의 남부지역인 보은에서 먹티(墨峴)를 넘어 문의를 확보한 것은 공주-대전-금강 대청호-문의-청주로 이어지는 백제의 전략적 통로를 차단하는 결과가 되어 이제 신라의 청주 장악은 시간문제로 남은 셈이 된다. 신라에 의한 문의 점령으로 이제 백제는 충북지역에서 겨우 청주와 청원의 일부 및 회인 지역을 차지하는데 불과하다.

다음으로 청주시와 청원군 지역에서 6세기 경까지의 백제계 토기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주시와 청원군 지역에서 백제계 토기류가 출토되는 곳은 청주시의 경우 4∼6세기 초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봉동 백제 고분군, 부모산성과 그 주변 일대인 내곡동·신성동·향정동 지역, 원삼국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송절동 고분군, 우암산성과 그 주변 일대인 우암동·수동·대성동 지역, 상당산성의 서쪽과 남쪽 사면인 사천동·율량동 지역과 방서동·명암동 지역, 산남동 고분군 등이고, 청원군의 경우 옥산면 소로리·동립리 일대, 오창면 일대, 가덕면 병암리 일대, 북이면 서당리·장양리·학평리·대율리·화상리 일대, 강외면 상봉리 일대, 부용면 부강리 일대 등이다. 충북지역에서 출토되는 백제토기의 가장 흔한 기종은 원저 단경호(圓低 短徑壺)와 원저 광구호(圓低 廣口壺)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벽에 대개 격자무늬가 시문되어 있고, 여기에 장란형의 단경호와 손잡이 달린 잔과 화분형의 적갈색 토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충북지역에서는 백제 후기에 발견되는 삼족토기계나 개배(蓋杯)·그릇 받침류(器臺類) 및 뚜껑있는 토기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6세기 이후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출토예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위의 유적지 중에서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청주 신봉동 백제 고분군중에서 돌방무덤(석실분)의 축조연대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편년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청주시는 적어도 6세기 초까지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청주지역은 6세기 전반 경 신라의 영토확장 추세 속에서 신라에 의해 병합된 이후 계속 신라의 영역으로 존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