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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時代의 歷史認識과 歷史編纂
 
지하는 바와 같이 원시시대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조상과 그와 관련된 행적들이 구비로 전승되어 왔다.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전승이 문자로 정착된 것을 최초의 역사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 나라 역사서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등에 의해서 편찬된(삼국사 기)이다. 물론 삼국시대나 에도 역사서가 편찬되었으나. 어느 때부터인지 모두 없어지고 말아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것은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까지 남아 있어 동서의 편찬 참고가 된 것도 사실이고, 이는 더러 (삼국사기 )의 개찬이며, 나아가 (구삼국사)역시 종래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편찬된 것이라면, 이처럼 (삼국사기)에 특별한 주기가 없는 경우에도 그 전반적인 기사내용은 기본적으로 고대사서(고려이전의 여러 기록)의 그것에서 취한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점은 (삼국유사 )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한편(일본서기)에는 삼종의 백제 역사책이 제법 풍부하게 주기로 인용되어 있는데, 이들 역사책의 편찬경위라든가 사료적인 신빙성 문제를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책이름이나 단편적인 기사만 조금 남아 있을 뿐, 그 역사책 자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형편에서 고대의 역사인식을 살펴보는 일은 어쩌면 무모한 일에 속할지 모른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사료의 부족이 한국사학사의 첫 부분을 연구하는데 있어 가 장 큰 장애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대사학사는 거의 공백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이나마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각종 기록에 보이는 관계사료를 보면 그 양이 적다고만은 할 수 없으리 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그것들을 정리하고, 각 역사서 들이 편찬된배경을 염두에둔다면, 우리 나라 초기의 역사서술에 관한 연구가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에서 한국고대사학사를 정리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여기서는 선학들이 의해 나온 연구업적을 토대로 하여,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편찬에 대하여 재정리하고자한다.

 


삼국 시대의 역사인식? 역사편찬

국시대 이전에 역사책이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일찍이 신채호는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신지비 사)를 고조선시대, 즉 그의 이른바 "수두"시대의 역사책이라고 주장한 바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근거가 박약한 상 상 이외의 의미를 주지 않는다. 한편 정중환은 (삼국유사)고조선 주에 인용되어 있는 (위서)를 위만조선 말경 혹은 낙랑군 초기 에 편찬된 위만조선의 역사를 담은 기록이라고 주장한 바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어쨌든 단군신화를 기록했다 고 하는 "위서"는 종래 연구자들이 중국의 고적 가운데서 찾으려고 한 것처럼 역시 중국의 역사서로 보아야 할 것 같 다.

 


고구려의 역사편찬

구려의 역사편찬에 대해서는 아래 사료가 유일한 것이다.

 

詔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 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 時有人記事一百卷 名曰 留記 至是刪修 (삼국사기)권 20 영양본기 동 11년(60 0년)정월 조)

 

(이달에)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조서를 내려 고사를 축약하여 "신집"5권을 만들게 했다.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 작하여 어떤 사람이 사실 100권을 기록, 이름을 "유기"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것을 刪수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국초에 누군가가 국사책으로 "유기" 100권을 지었는데, 말기에 해당하는 영양왕때에 이문 진이 왕명을 받들어 이를 요약하고 손질하여 "신집"5권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국초에 "유 기"를 편찬한 것은 확실한 셈이다. 다만 그 시기를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약간 다른 견해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유기"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이 역시 연구자간에 약간의 이견이 없지는 않으나, 그 때 까지 입으로 전해오던 여러 종류의 신화. 전기나 왕가의 계보 따위를 기록한 역사책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아울러 "유기 "라는 책이름이 훌륭한 조상의 신이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둔다는 일반적 의미의 역사편찬 취지와 잘 어울리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이 주로 설화적 내용으로 윤색되어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유기"의 역사 인식은 신화적? 설화적인 성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유기"를 토대로 하여 이문진이 편찬한 "신집"의 성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점에 관하여 이우 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흥미 있는 추측을 하고 있다. 즉, 고구려 정치? 사회의 발전 전반적인 역사인식의 발달에 따라 종래의 "유기"와 구별되는 현실적? 실용적인 성격의 역사책이 필요하게 되어 새로이 착수한 것이 다름 아닌 "신집 "이며, 따라서 "신집"은 "유기"에 비해 현실적인 관심이 고조된, 실용성을 위주로 한 역사책일 것이라 고 한다. 다시 말하면 100권이나 되던 "유기"에 비해 "신집"이 겨우 5권으로 줄어든 것은 일정한 관점아래 사료를 선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신집"은 "유기"의 단순한 요약일수는 없고, 역사책의 성격 자체가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교수의 견해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역사인식의 발달단계와 잘 부합한다. 그러나 "유기"와 "신집"의 편찬 연대가 상당히 떨어진 점 즉, "유기"편찬 이후 영양왕 때까지의 몇 백년간의 기록상의 공백 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가 우리의 과제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싶다.

 


백제의 역사편찬

제의 역사편찬과 관련하여 주목되고 있는 것이 아래의 사료이다.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末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末嘗 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삼국사기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375)조)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일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 기)를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흥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 수없다.)

 

여기서는 먼저 "고기"의 정체가 의문이지만, 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많이 등장하는 이 른바 고기류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더라도 이들 고기류가 각각 다른 책인지 혹은 같은 책을 달리 표기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백제가 근초고왕 때 국사를 편찬했다는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하여간 "위기"를 백제의 역사책으로 보는데는 의문을 품고 있는 연구자도 없지 않다. 즉, 이를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공식적인 문서기록이 이때 비로소 제도화되었 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병도?이기백?김두진?이기동 등의 주장처럼 역사서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백제는 북쪽으로 대방군과 인접해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그곳에 나와 있던 한인들을 흡수하여 문서기록을 시작 했을 개연성이 크다. 특히 313∼14년경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서 멸망한 뒤 그곳의 한인 지식층이 일부 백제로 歸化해왔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세기쯤 지난 근초고왕때 국사책이 편찬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백제시대의 역사편찬과 관련하여 역사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일본쪽의 관찬사서인 "일본서기"에 주기 로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등 이른바 백제의 삼서이다. 이 세책은 "일 본서기"신공기에서 ()명기까지 18개 연도에 걸쳐 모두 26개소에 인용되어 있는데, 특히 백제와 倭國(즉 일본)의 교섭 대목 에서 주로 등장한다. 실로 6세기 전반경의 계례기?흠명기는 대부분의 "백제본기"로부터 인용한 기사로 메워지고 있을 정도이다.

 백제3서에 대한 우리 학계의 견해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기백 교수는 이들 위서를 단정했지만, 이기동 교수는 그 원형이 본래 백제 조정에 의해서 편찬되었고, 조국이 멸망한 후 이를 지참하고 일본에 망명한 백제의 지배층과 그 후예들이 일본 조정에서 관료로 복무하게 된 상황에서 일본 수사당국의 요청에 의해서 제출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일본 수사 당국에 의해서 윤색되어 '일본서기'에 인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이들 역사책의 본래의 성격을 알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백제기"에는 전설적인 기사가 많지만, 그보다 후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되는 "백제본기" 는 일자와 간자 두 가지가 기록될 정도로 실록으로서 확실성이 풍부한 편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의 역사학은 후기 에 이르러 크게 진전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신라의 역사편찬

라의 국사에 대한 사료는 아래와 같다.

 伊 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大何觀 王深然之 明大阿贊居柒 夫等 廣集文士 殺之修撰

 이찬 이사부가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褒貶을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기를 수찬하지 않으 면 뒷날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저으기 옳게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 명하여 널리 문사를 모아 " 국사"를 수찬케 하였다.

 이에 의하면 신라의 국사편찬은 진흥왕 초련에 정치? 군사상 최고 요직에 있던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 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사편찬이 국가의 큰 사업의 중시되었던 것은 이 책이 완성된 후 왕이 거칠부를 파진찬의 관등으 로 한 등급 승진시킨 데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면 국사편찬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앞에서 본 이사부의 상주문 속에 어렴풋이 나마 비치고 있다. 즉 그가 국사라는 것이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하여 포폄을 만대에까지 보이는 것이라고 한 만큼 유교의 교훈적? 실용적 목적을 위해 편 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일단 "국사"의 성격을 암시해주는 유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크게 다른 견해가 정사수웅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그는 진흥왕 때의 이 국사책이 자비마립간 5년(462)이후 6세기 초두에 걸쳐 신라 조정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추진된 산성축조에 고나한 기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책일 것으로 단정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이 극사책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것이 "삼국사기"에 채용되어 있는바, 이는 이 시기 각지에 산성을 쌓은 역사가 중심이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국사편찬을 건의한 이사부의 경력이 영토의 확대 및 점령지 지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데, 신라의 경우 산성이야말로 점령지를 확대해나가기 위한 강력한 군사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사부의 체험이 축성을 중심 으로 한 역사책을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상이 주장에는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편 그가 산성 축조라는 한가지 사실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이사부가 6세기 전반기 신라의 영토확장사업에서 중심적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삼국사기"(권44)에 수록된 그이 전기에서 보듯이 신라 김씨 왕실의 증시조에 해당하는 나물마립간의 4세손이었 다. 또한 국사편찬의 최고 실무책임자였던 거칠부만 하더라도 진흥왕 때의 영토팽창에 큰 군공을 세웠지만, 계보적으로 보면 나 물마립간의 5세손이었다. 이처럼 국사편찬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이 나물마립간의 후예들이고, 당시 나물마립간의 계통의 혈연의 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었던 점, 이와 아울러 이사부의 상주문 내용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이 만든 국사책이 단순히 산성 축조기사 를 중심으로 한 역사책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진흥왕 때의 국사책은 바야흐로 제도? 문물의 정비에 따라 현실의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으로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편찬에 대해서는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현재 남아있지도 않은 역사 서를 다만 책이름이나 그 일문, 저자의 경력과 사상 혹은 시대적 배경만을 가지고 논의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지적하 면서 다음과 같이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결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로, 삼국시대에는 주로 관찬사서가 편찬되었다. 고구려의 "유기"나 이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신집" 백제의 "서기",신라의 "국사"등은 모두가 왕의 명령에 의해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편찬된 것들이었다.

 

둘째로, 그 역사인식을 추출해본다면 삼국시대에는 건국신화라든가 역대 왕의 신이한 사실 혹은 왕실의 계보를 중심으로 하여 신화적? 설화적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였으리라고 본다. 나아가 이것이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완성한 직후에 편찬됨 점으로 미루어 보아 주로 국가나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셋째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유교적 국사 서술 방법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경우는 이사부의 편찬건의에 명백 히 나타나 있거니와 "신집"?"서기"의 편찬자가 모두 유교 교육기관의 교수(박사)였음도 이를 뒷받침해 주 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