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봉건사회

봉건사회에서의 서학과 주자성리학 그리고 동학의 흐름을 중심으로

발제자:양우열(9345021)류효진(9645013)이혜윤(9645041)

들어가는말

1. 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흐름

2. 서학·천주교의 도입

3.동학의 등장

맺음말

들어가는 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 사회의 중세적인 사회체제의 모순이 대두되기 시작하고 이로 말미암아 사회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회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제에 대한 해결부담은 지식인 뿐만 아니라, 민중에게도 함께 주어졌다. 우리는 다음에서 이러한 조선후기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해결을 위한 사상의 흐름과 서학·천주교의 성격, 이의 수용을 둘러싼 사상간의 갈등 및 대립에 대해 알아보고, 민종종교 특히 동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1. 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흐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 사회는 구조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조짐을 뚜렷이 보인다. 농업위주의 사회체제에서 생산 양식의 변화는 농업기술 향상을 가져오고 단위면적에 대한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사회적인 유동성의 증대가 불가피하여 정체된 사회의 질서를 담당하는 이념형으로서의 성리학의 권위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기반의 상실에 의한 빈농이나 폐농의 속출과 신분질서의 문란은 봉건적인 전근대 사회의 존립기반인 향촌의 단위 공동체를 뿌리까지 흔들어 놓게 되는 것이며, 정상적인 삶의 방식에서 낙오된 민중은 경제적인 핍박에 못지않게 정신적인 공백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전체적인 사회구조의 동요와 함께 전통적인 가치체계들이 더 이상 민중을 정신적으로나마 토착의 향촌 공동체에 묶어둘 수 없게 되고, 더구나 벌열 정치에 의한 폐정 및 말단 행정조직에 의한 수탈 행위에 의해 현실적인 삶의 고통에서 도저히 해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정신적으로도 동요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신분질서의 파탄과 권력층의 파당적인 독주에 의해 완전히 뿌리를 잃은 지식 계층도 정신적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런 뜻에서 민중과 일맥이 상통한다. 전통적인 사상의 흐름으로 볼 때, 전혀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서구의 종교사상, 다시말해 서학 내지 천주교가 19세기 이래 여러차례의 박해 속에서도 민중의 신앙으로 뿌리를 내리며, 19세기 후반부터 일어나는 동학 운동이 봉건 사회를 전면적으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때문이었다.

사상적으로 유교는 더 이상 경세지학(經世之學)으로서의 실효를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이에 대한 비판이 일찍부터 일어났다. 이에 몰락양반들의 후예들에 있어서 유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었기에 반주자학 사상으로 실학이 나타났다.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위축되었지만 불교행사를 통해 계속 유행하고 있었고, 도교적인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민간신앙화하기도 했다. 도교는 소외당한 일부 양반들의 은둔사상을 뒷받침하기도 했고 초제의 형태로 계속 행해졌다. 이와 함께 정감록과 여러 비기를 통한 예언사상이 나타나 민심을 현혹케하고 있었고, 예언사상은 현실부정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정치적·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등으로 민중 선동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2. 서학·천주교의 도입

관리와 학자들은 서학과 천주교, 특히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란 책을 통해서 서학을 이해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개별적인 차원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검토하는 것이 남인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익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화이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서양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는 서학과 천주교를 갈라서 서학은 긍정하였으나 천주교는 비판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지식층이 주자학으로 일색화된 환경 속에서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적 충돌을 회피하면서 서학을 수용하기 위해 가졌던 이해체계라 하겠다.

그 당시 조선의 사상계를 살펴보면 봉건지배층의 주자학 이데올로기는 더이상 선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봉건사회를 지탱하는 체제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였다. 두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지배층은 그들의 기존체제를 고수하는 한편 북벌론을 제기하여 대내적 사회모순을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북벌론이 두 전란이후 사회체제를 복구하고 나아가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반해 기존의 주자학 이데올로기가 갖는 한계를 깊이 인식한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구상이 일부의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실학이다. 아울러 그 일부는 서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서학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향은 조선사회의 내재적 환경 자체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우선 조선에서는 농업생산력의 증대라는 생산력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실학자들은 상공업진흥책을 내놓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기술에 대한 실학자들의 관심은 지대하였다.

서학이 왜 주목받아야 하는가의 배경은 다산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 다산은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천문·역상·농정·수리 등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관념적이론에 그치는 주자학이 붕괴되어가는 조선 봉건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못하게 되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 실용을 주장하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났던 것이다. 더 나아가 실학자 일부가 주자학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에 기반한 사상체계를 수립하려는 모색의 과정에서 서학·천주교가 주목되었다. 서학에 대한 관심은 실학자들은 중심으로 모색되었다.

①서학·천주교의 성격

학문적 대상이었던 서학의 관심과 함께 천주교도 곧 얼마 안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신앙적 차원으로 나아갔는데 성호의 제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귀국후 정조중반에 이르러서 천주교신앙은 더욱 치열해지고 교서의 간행도 보게된다. 천주교는 서울 사대부층에 퍼졌으며, 심지어는 삼남지방에까지 퍼졌는데 특히 유림의 본고장인 경상도에까지 퍼져나갔다. 이러한 전파는 신앙실천운동의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실천운동의 주체는 실학파 학자등의 양반층을 벗어나 일반 하층민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가 단순히 양반층 중심의 보유론(補儒論)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일반 민들의 신앙차원으로 발전했음을 반영한다. 이러한 경향은 신유박해로 인해 지식층이 대거 축출당하게 됨에 따라 양반층이 대거 탈락하면서 더욱 강해진다. 천주교를 보유론 차원에서 인식하려던 경향과 함께 양반층보다는 일반민에게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지배층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즉, 그들은 천주교 신도가 반란음모에 연루되어 처벌된 왕족이나 불평을 품은 양반층, 그리고 시정잡배나 농부, 아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에 주목하면서 천주교도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뒤엎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정부측에서 천주교도들을 반사회 단체의 형태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선교 목적의 의도가 주(主)였지 전교 및 포교과정에서 백성의 일규를 획책하거나 전체를 일거에 뒤엎어버리겠다는 의도를 가진것은 아니었다.

②봉건사회의 대응과 사상간의 갈등 및 대립

서학연구기풍이 생겨나고 일반민간에 천주교가 유포되기 시작하는 초기에 정부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연구가 활발해지고 신앙운동으로 진전되었을 때 정부는 주자학 체제의 도전이라 판단하고 탄압을 가하였다.
이론적인 면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배격하는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주자학 사상에 사로잡힌 지배층들은 명분론과 존화의식에 근거하여 이질적인 사상체계에 탄압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봉건사회의 신분이데올로기에 대해 서학·천주교가 갖는 진보성에 대한 억압이기도 하다. 정부는 천주교를 금수지도(禽獸之徒), 패륜난상지도(悖倫亂常之徒)라 탄압하였는데 이는 천주교도들이 조선사회의 전통적 예속인 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철폐하는 신앙행위와 신분과 문벌을 초월한 평등논리가 신분차별·서얼차대·문벌중시에 입각한 조선사회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파탄시킬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천주교는 주자학적 신분질서에 터전한 조선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동요시키는 사학(邪學)체계로 인식되어 천주교를 탄압하는 척사(斥邪)논리가 강화되었다.

이에 대해 국왕인 정조는 정학(正學)을 강화시키면 사학은 자연히 소멸한다는 입장에서 온건하게 처리함으로서 서양학문을 지속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조사후 노론벽파는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봉건정부의 대응은 정적의 제거를 넘어서서 봉건 이데올로기에 대한 천주교의 도전을 물리치고자 한 봉건지배층의 사상통제의 일환이었다. 당시 정부는 오가작통법을 강화시켜 '서학쟁이'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대탄압은 체제도전세력인 천주교를 일거에 제거하는 한편 남인시대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유박해였다.
봉건정부의 대탄압은 천주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봉건국가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고 이러한 정치운동 사건은 봉건지배층을 경악에 이르게 하였고 내적으로 농민들의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히고 있던 그 당시의 저항으로 보아 천주교의 도전은 봉건지배층에게는 위협적인 것으로 보였다.
이양선의 출몰로 인해 18세기말을 기점으로 내적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는데 유럽열강의 중국침략으로 인한 중화체제의 해체는 조선정부를 위기의식으로 몰아넣었다. 1850년대에 들어와 이양선은 단순히 통상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점차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경함락 소식으로 조선정부는 서양세력의 침입에 대해 강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이러한 위기의식이 단순히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야기될 강상(綱常)이데올로기의 붕괴에 대한 우려에 있다는 점이다.
조선정부는 국제질서의 분위기와 중국의 내정을 탐문하게 되는 데 대표적인 것이 내수양이론(內修攘夷論)이다. 이러한 주장은 1862년 농민항쟁과 결부되어 심각하게 대두되었는데 삼정개선·개혁의 문제와 함께 국방력 강화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이에 정부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이양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믿어지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더 나아가 내수양이론은 정치사회적 측면뿐만 아니라 서구열강의 경제적 침탈 등을 인식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내수양이론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 봉건정부의 방책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동아시아질서 체제가 동요되는 가운데 조선정부가 독자적으로 서구열강의 침투에 적극적으로 대응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체계를 고수하면서 내수(內修)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다른 입장에서 개국부강론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재야뿐만아니라 정부내에서도 소수 제기되고 있었다. 기존의 서양관에서 벗어나 서양과 자주적으로 외교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북학사상의 부국론을 토대로 서양의 장점을 받아들여 서양을 막아야 한다는 해방사상(海防思想)의 논리를 수용하여 개국부강론을 주장하였다.
서구열강의 침투를 둘러싸고 조선의 조야는 서서히 두입장으로 갈리면서 각자의 논리들을 체계화해 나갔으나 1860년대는 내수양이론이 대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2. 동학의 등장

서울에서는 청황제의 열하피난 소식과 조정의 문안사파견 소식이 알려지면서 서양 오랑캐의 침략설이 나돌았다.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피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대외 위기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일반민들 사이에는 각종 비기와 도참류의 이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1860년 북경함락과 그 4년 후인 갑자년에 기화와 참위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대표적으로 『정감록(鄭鑑錄)』을 들 수 있다. 『정감록』은 전통적인 유교의 사상체계를 초탈하여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는 참위서라는 성격과 함께 그 사상적 지조가 주로 난세관과 말세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병란(兵亂)과 결부되어 있다.
대외 위기의식이 가중되는 가운데 정감록 사상과 함께 이단사상으로서 동학사상이 등장하여 민중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서양인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에는 우리나라에 진출할 것이니 변란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소문을 듣고, 서양세력의 침입을 막고 보국안민할 방도로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동학사상은 보국안민사상으로 민중 사이에 자연스럽게 퍼져갔다.

①동학의 성격

유교정치의 파탄, 유교의 권위실추는 결국 국민을 사상적인 혼돈 속에 몰아 넣었고 그리하여 서양인의 침공이 머지 않아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의식 속에 민중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어떠한 새로운 생활이념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실로 동학은 이같은 민중의 정치적 욕구를 채워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는 당시의 사회적·국가적 위기에 직면해서 그 내적·외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이미 퇴폐된 유교·불교 등 종래의 전통사상과 신앙을 모두 지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으로 침공해 오는 서양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적 기반으로 보는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종교에 기대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그가 새로 창도하는 종교를 서학에 대항한다는 취지에서 동학이라고 이름하였다.

대체로 동학의 접주들은 잔반, 즉 한사·잔반파락자·궁반등으로 일컬어지는 흔히 병난의 주모자들과도 같은 사족의 후예들이였다. 그리고 동학의 신도들은 빈궁과 질역 속에서 허덕이는 일반 농민들이었다.
동학은 사회의 퇴폐와 외세의 위협에 대해서 어떤 제도적 개편이나 무력적인 저항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윤리의 확립에 의해서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현실적으로 퇴폐된 유교나 불교·도교와 같은 기왕의 외래종교를 부정하고, 또 새로 유포된 서학도 아울러 배격하면서, 본원적인 인간윤리의 회복과 이에 대한 종교적 신앙의 힘을 얻어서 당면한 내적·외적 위난을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학은 동양 고래의 경천사상에 뿌리박고 천운순환론(天運循環論)과 천도(天道)·천덕관(天德觀) 그 기본사상으로 삼고 있다. 즉 주역(周易)이나 예기(禮記)에서 볼 수 있는 도·덕관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연유된 운수관(運數觀)이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인의예지(仁義禮智)보다도 더 본원적인 성(誠)·경(敬)·신(信)의 초세속적인 윤리를 고수함으로써 천도·천덕에 합치될 수 있고, 따라서 순환윤회(循環輪回)하는 천운에 순종함으로써 누구나 본질적으로 한울님(天)과 다름이 없는 존재, 즉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본질은 한울님과 같은 것이므로, 사람이 사람을 섬기는 데 있어서도 성경신(誠敬信)으로 한울님을 섬기는 거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동학은 사람은 곧 한울님(人乃天)이라는 명제를 표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동학은 퇴폐된 유교사회의 종말과 지상천국의 도래를 예고한다. 동학이 내포한 이같은 초세속적 윤리사상과 예언사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윤리의 회복을 위한 동양 고대사상에로의 복고를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회로의 출발을 시사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교리에서 내세워진 초세속적인 동학의 윤리는 오랫동안 주술적인 신앙에 젖어 있는 민중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였고, 이를 위해 동학은 당시에 민간에서 널리 행해지던 주술적인 신앙형태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간회복의 윤리와 예언자의 논리를 내세울 수 있었던 동학의 지도층과 현세적인 복리를 구하는 주술적 토속신앙에 젖어 있는 농민층과의 결합을 의미한다.
동학은 잔반과 농민의 종교였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퇴폐된 양반사회 질서와 유교윤리를 부정하고 지상천국의 도래를 예언하는 현실부정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혁명적일 수도 있는 일면을 간직한 것이였으며, 또한 그것이 외세의 위협, 서학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민족적 종교라는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②동학의 전개 및 봉건정부의 대응

19세기 중엽 국내정세는 실로 내우외환이 겹친 긴박한 상황이었고 동학의 창도는 이같은 사태에 대한 하나의 종교적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서학과 다름 없는 또 하나의 사학으로 간주되어 양반관료나 전통적인 유생에 의해 탄압·배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양반관료나 유생 사이에는 19세기 후반의 민족적·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또 다른 사상적인 갈등, 즉 위정척사론자와 개혁론자 사이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1863년 교조 최제우는 드디어 관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뒤 중앙정부는 군란과 정변을 겪기에 여념이 없었고, 지방에서 탐관오리의 가렴구주(苛斂誅求)에 의한 민란으로 중앙정국은 혼란속에 빠져 있었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요와 불안 속에 허덕이는 민중 속에 교세를 넓혀가는데 그중에서도 전라·충청 두 도에서 가장 성하게 유포되었다.
이러한 민란과 정변으로 인한 중앙정국의 혼미 속에서, 정부는 사실상 동학 교세의 급격한 팽창에 대해서 깊이 배려할 여지가 없었다. 이속에서 민중은 현실 부정적인 예언사상, 퇴폐된 유교윤리에 대하여 반발,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민속신앙적인 요소가 모두 집약되어 있는 동학에로 몰려 들었으며, 동학은 이제 사실상으로 엄연한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룬것이며, 더 이상 어떠한 사교로서 관헌의 지목과 탄압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동학의 영도자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종교로서 정부로부터도 공인을 받아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조의 권위를 회복하여 포교의 자유를 차지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고 교단의 조직력을 통해서 이를 성취하려 하였다.
이같은 동학교도의 집단적인 시위운동은 비록 그것이 일종의 민소의 형식을 취한 것이고 또 종교적인 소원이기는 하였으나, 그 결과로 동학교도들이 민중의 조직의 힘에 대한 자부와 반관의식을 크게 양양시킨 것이었다.
대원군 집권 당시에 있어서는 국책이라고 할 수 있었던 탐관오리의 배제와 척왜양(斥倭洋)의 주장이 동학교도의 운동목표가 되었고 이제 동학 지도층의 내면의식은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동학교도에 의한 복합상소(伏閤上疏)운동과 괘서(掛書)사건은 집권층과 외세의 저항을 일으켰다. 인간의 귀천을 선천적으로 엄격히 규정하는 봉건적 신분제도를 기반으로 봉건체제를 유지하던 조선봉건사회에서 동학은 봉건지배층에게 일대의 위협이였다. 성균관유생들은 동학이 역시 서학의 여파에 다름이 없으므로 이를 철저히 금압할 것을 요구했고, 또한 관료들은 동학교도들이 불노(佛老)보다도 더 패륜적인 좌술괴귀(左術怪鬼)의 무리라고 지탄한 동학배척의 상소를 올렸고 서울의 외국 공관원들의 의구심과 경계심을 촉발시켰다.

동학의 지도층은 복합상소마저 실패하게 되자 이제 운동의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교주신원이라는 순전한 종교운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정치적 성격을 띤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관례적인 소청(疏請)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거항 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동학교도의 거항 시위운동이였던 보은집회(報恩集會)의 보고를 접한 정부는 동학교도들을 진무케 하였고 방을 붙여 인심을 선동한다는 일은 용서할 수 없으므로 모여든 교도들이 개전·퇴산하지 않으면 엄준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제 보은집회가 순전한 동학교도로서의 취지가 아니라, 일반 민중의 집회 즉 일종의 민회로서 간주되게 되었고 정부에 의해서 동학교도들은 진압당하였다.
동학은 이제 민중을 기반으로 한 엄연한 하나의 세력으로 대두한 것이며, 적어도 척왜양의 목표에 있어서는 일반 민중과 이해를 같이 하는 종교집단임을 현실적으로 나타내면서 교조 신원운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대표적인 시위운동에로 그들의 운동을 정치운동에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③농민들의 수용

최제우는 민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요소로 민간에 전래하는 막연한 하느님 관념에 잡다한 민속 신앙형태를 수렴하여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거부감과 배척태도를 직시하고 이를 민중을 선동하는데 이용하였다. 당시 천주교는 포교활동을 넓혀가면서 전통사회의 규율과 생활 습속을 자의적으로 경시 내지 파괴하는 태도 때문에 집권층에 의한 박해 수준을 넘은 민중 스스로의 배척 태도가 역력했다. 특히 개인의 구제를 위주로 하는 천주교 신앙은 가족 공동체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교리가 전통 윤리에 견주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강력한 배외 사상으로 나타나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와 같은 구호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동학운동의 배외 사상은 다분히 정치적인 성향을 띤 것이며 민중의 공격심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외국세력에 대한 배타적인 구호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교조 최제우는 기독교를 비판하였지만 배타적인 감정을 드러낸 바는 없으며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수용하려는 관용을 보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와의 갈등은 없었고, 그 배후에 있는 서구 세력을 자극하지 않았다.
최제우가 민중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원인을 요약하면 첫째로 민중의 전통적지지 기반인 토착 신앙과 주술을 메시지화한 점, 둘째로 민중의 정신적 공동을 포착하고 체계화한 토착 신앙을 그 자리에 메워 넣은 점, 셋째로 원초적이고 잠재적인 외국세력에 대한 혐오감을 공격 지향의 배외(排外)감정으로 상승케 하는 메시지를 발한 점을 들 수가 있겠다.
최제우는 사회 변혁의 당위성이 제기되는 조선 사회의 실정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어 단순한 도당적(徒黨的)성격의 저항운동이 아닌, 범민중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사회 개혁의 요청이 불가피함을 포괄적인 사상 체계로 구성하였다.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정규적인 학문 수학의 배경을 갖기 못하여 학문의 영역이 한정되어있었다. 그러나 그가 동학 교단을 지도한 후부터는 원시동학의 형태를 벗어나 교리나 조직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동학의 세력을 신장하는데 있어 최시형은 원시동학의 사도(使徒)적 방황 시대에서 조직 종교로, 동학도를 조직 종교로 정비하고 제도화하였다. 이는 이전의 잠정적인 대중 집회 성격에서 탈피하여 수도적 사명을 띤 종교 공동체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며, 갑오동학혁명의 엄청난 동원력의 에너지를 축적하게 되고 최시형은 폭력적인, 혹은 대중 운동으로 조직이 노출되어 괴멸당하는 것을 우려하여 지하의 비밀 집회를 위주로 세력을 육성해 나갔다.


맺음말

우리는 위에서 조선 후기 사회모순으로 인해 도입·발생된 서학·천주교, 동학으로 인하여 그당시 사회에 불러일으킨 사상동향을 살펴보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조선의 구조적인 사회체제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사회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회모색을 위한 실학이 등장하게 되고 실학의 등장은 곧 서학·천주교의 도입을 가져왔다. 대외위기와 함께 신앙적인 차원으로 발전한 천주교의 교세확대는 정부에게 서양열강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져오게 되고 이로 인해서 정부는 천주교를 사학으로 판단하고 탄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양선의 출몰과 더불어 서양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동학의 등장을 가져온다. 동학은 서학을 비판하면서 농민이 수용하기 쉬운 민간사상을 수용함으로서 농민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급속도로 교세가 확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동학은 정치적인 색채를 띠면서 농민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정치적운동을 시도하지만 지도층의 분열로 실패하게 된다.

서학·천주교, 동학은 신분제에 대해서 비판하는 평등사상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며, 시학도 비록 초기에는 유교적 입장으로 서학을 이해하지만 후에 평등사상을 내세웠따. 하지만 서학·천주교는 전통사회 민중사이에 만연해 있는 주술성을 거부하여 군중심리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어쨌든 천주교의 포교활동이나 동학운동은 변혁기라는 당대의 사회적 조건속에서 활발히 전개된 일종의 민중의 신앙운동으로서 다음시대의 종교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 고 문 헌

황선명, 「신앙운동으로서의 서학과 동학」『민중종교운동사』 제9장 종로서적
한우근, 「동학의 성격과 동학교도의 운동」 『한국사』17 국사편찬위위회

김태웅, 「서구자본주의의 침투와 위기의식의 고양」 『한국사』10 한길사
박찬승, 「'근대'와 '제국'-그 도전과 대응」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상사의 과학적이해를 위하여』 청년사)

Q & A

1. 서학·천주교가 단점이 있다면 어떤점이 있는지 발제자의 생각을 종합하여 말씀해주십시오.

서학·천주교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이런 것은 명확하게 말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발제를 준비하면서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이념논리 즉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데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사상적인 면을 자주 변화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느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사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그 문화를 이해하려는 융통성이 필요한데 초기 천주교는 그러한 점에서 고착성을 나타내고 있다.

2. 서학이 사상적인 면에서 민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점은 무엇인지 . . .

주자가례가 적용되지 않고 유교의 형식적인 제사나 의례에 구애를 받지 않는 상민이나 일반 민중층의 입장으로 볼 때, 천주교의 영혼 불멸 사상이나 천당과 지옥의 관념은 쉽사리 동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격신인 천주에게 귀의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천주교의 교의와 평등주의는 현세적인 고통에 대한 보상의 불철저와 봉건사회의 신분제에 불만을 갖는 민중에게는 소박하면서도 열렬한 소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3. 후에 동학이 민중을 포섭할 때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거부감과 배척태도를 직시하고 이것을 민중을 선동하는데 이용하였다고 발제에 나오는데 이점은 초기 천주교가 민중의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점과는 모순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점에 대하여 설명해주십시오

이 점은 초기 천주교는 그런 점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정부의 신유박해와 프랑스신부의 순교등으로 인해 서구 열강이 통상을 요구해 오는 등으로해서 민중이 판단할 때 천주교의 도입이 서구의 침입을 가져왔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함에 따라 거부감과 배척태도가 생겨났다고 생각됩니다.

4. 이 시기 주자성리학자들의 개혁안이라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노론들의 개혁안을 찾을 수 없어서 그 시기 실학자들의 개혁안을 요약하여 설명하여 드리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익의 개혁안을 살펴보겠는데 이익은 경제적 개혁으로 전제개혁론으로는 당시의 토지겸병현실을 지적하면서 균전론은 토지 겸병으로 파산하여 유리하는 서민에게 생활 기반을 보장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전제와 세제는 정확하게 토지를 측량하고 호구를 조사함을 기초로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경제개혁정책은 객관적 운영기반을 전제로 하고 있는 합리성을 보여주면 국가 재정의 건전한 충실화를 추구하였다. 노비제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지적하며 노비의 종부법을 폐지하도록 요구하며, 노비의 사유의 한계를 정하고 한계를 넘으면 속량하게 하며 노비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여 함격한 자는 국가에 속량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노비를 점차적으로 속량하는 것이 국가의 힘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기본적으로 유교전통의 정치원리인 민본정신과 왕도의 이념을 계승하면서 군덕을 함양하는 데 방해가 되는 신관과 궁녀의 인원수를 제한하도록 요구하였다. 군덕을 함양하는 제도적 장치인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을 공개하여 신하들 사이에 논평을 받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에는 경연에서 말한 것도 발표하지 못하게 하는 실정이었다. 경연강의를 여론의 비판을 받도록 함으로써 임금의 정치적 식견이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 폐쇄화되는 폐단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폭넓게 관료들의 여론을 수렴할 수 있도록 하는 여론정치를 제도적으로 모색하였다. 붕당의 폐단을 막기위한 대책으로 양반이 실업을 천시하는 태도를 고쳐야 하고 과거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선배계층이 관료로만 진출하려는 폐단을 개혁하기위해서 선비도 농업생산에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5. 서학과 동학의 사상 가운데서 공통점은 있는가?

동학과 서학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혁의 기운이 고취되는 가운데 그러한 사회적인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던 민의 정신적인 공백 상태를 동학과 서학으로 포용했다는 점에서 종교적 신앙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또한 서학과 동학은 모두 그러한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상적 세계를 열망하는 기운 속에서 둘다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고, 또한 능력, 자질, 노력에 의한 보상의 기회가 골고루 적용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구를 강조하며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적서 차별을 괴로워하던 서민 계층에게 모든 만인은 평등하다는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시기에 새로운 변혁이었으며 사상적인 공통점이였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두 사상은 모두 남녀평등을 지향하고 있다.

6. 동학에서의 하느님과 천주교에서의 하느님의 차이?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하느님은 유일신 신앙에 근거한 그러한 존재로서의 개념인데 반하여 동학에서의 하느님이란 민간에 전래하는 막연한 하느님의 관념에 잡다한 민속 신앙 형태를 수렴하여 체계화 한 것으로 민간 신앙에 담겨진 인격적 존재로서가 아닌 막연한 관념상의 만유를 주재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근원을 두고 있다.

7. 최제우가 민중을 휘어 잡게 된 요인(토착신앙과 주술을 메시지화 한점,신성한 행적)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최제우는 동학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무속적인 요소와 주술을 많이 사용하였다.병을 치료하자는 사람들에게 부적을 사루어 먹으라는 말과함께 규합하여 동학을 전파하자고 하였고 〈검결〉을 부르며 칼춤을 추는 의식도 거행하였다.매월 초하루 보름에 돼지 잡고 과일 장만해서 깨끗하고 한가한 산에 들어가 단을 모으고 제사를 지내며 주문을 외서 강신을 청한다는 것이다.강신이 되면 나무 칼을 잡고 뛰는데 공중에 한발씩 올라 갔다 내려온다는 것이다.이렇게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검결〉이다.
그리고 최제우의 신통력의 소문도 동학 전파에 많은 기여를 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죽은 노파를 소생시켰다.말이 놀라 멈추니 제방이 무너졌고 말을 탄체 강을 건넜다하여 동물들에게 조차 그의 신통력을 부여 하였다.그리고 그가 형장으로 잡혀가는 도중에 머리위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고,칼이 목에 들어 가지않아 청수를 놓고 묵념한 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그리고 형장을 내리니 홀연 벽력같은 소리가 났다는 등의 여러 그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말들이 전하고 있다.최제우를 달리 부르는 말로 복술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술법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문을 외는 식의 말들이 나오는데 궁궁을을(弓弓乙乙)이나 궁을(弓乙),이재궁궁(利在弓弓),송송가가(松松家家)등의 말들이 나오는데 이는 정감록의 내용에 있는 것으로 특히 궁궁을을은 조선의 국운이 끝나고 나라를 구하는 진인이 나온다는 뜻으로 동학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많이 도용되고 있다.그러나 이는 동학이 정감록의 사상에 만족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민중의 미망을 불쌍히 여기고 그것을 교계(敎戒)로 하려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

8. 잔반들이 지향한 사회는 어떤 것이었는가?

당시 사회는 성리학이 가지는 모순과 그에 따른 사회구조의 모순에 대한 많은 비판과 반성이 있어왔다.그중 몰락한 양반이라 할수 있는 잔반들은 특히 사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그들은 성리학적인 체제내에서 서양문물을 우리 사회에 적합시켜 발전해나가자는 실학적인 의견과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인 전봉준 같은 이들은 혁명적인 사고로 조선을 완전히 뒤집고 세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그들은 농민들이 주체가 되는 신분구별없는 그리고 누구나 토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