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고려의 불교종파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교선의 문제와 신앙결사운동-

발표자:9645014 민윤정, 9645036 최선미, 9645037 최성희

Ⅰ. 서론                                               

Ⅱ. 본론                                                         
     1. 중세불교의 이해방향과 선사상의 수용   
     2. 고려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
     3.고려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운동
     4. 고려말 불교계의 동향

Ⅲ.결론


Ⅰ.서론

중세사회의 불교는 종교적인 기능과 사회전반의 구조 속에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중세불교를 검토할 때 논의되어야 할 점은 사유구조상의 특징과 이를 통해 사회구조 속에서 어떻게 존재했으며 그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사회발전의 틀 속에 시기구분과 아울러 일정하게 범주화 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서 여기에서 검토할 몇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삼국시기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기 전후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한 단계인 종파불교의 성립문제이다. 종파가 신라 통일기에 성립된 이후 불교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선사상(禪思想)이다. 선사상은 신라하대에 수용되어 고려 초에 교단(종파)으로 정착되었는데, 중세불교를 더욱 발전시킨 선진적인 사유체계를 표방한 것이다. 이로써 선사상과 이미 정착된 기존의 교종간에는 사상적으로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극복하기위한 통합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려시기의 불교는 이러한 교와 선의 관계를 들러싼 사상적인 흐름이 주도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통일신라기 이래로 불교가 왕실이나 귀족의 전유물에서 지방사회와 일반민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대중적인 신앙활동은 다른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극대화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이 고려후기의 결사운동이다.

Ⅱ. 본론

1. 중세 불교의 이해방향과 선사상의 수용

*중세불교의 이해방향

종래의 사상사 연구를 표방하면서 발표된 글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상 그 자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 또 하나는 사상을 일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아래서 배태된 산물이나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이다. 전자의 경우, 심화된 사상체계와 세계관을 표방한 공시성·보편성·독창성을 갖는 사상을 과거에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사상사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사회적 여건이나 사회 공통의 가치, 집단의 목적, 사회적 기능면을 중시하면서 그 기준을 인간의 생활상과 연결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상사를 이해할 때 특정 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파악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어떠한 사회계층이 주도적으로 사상체계를 수용,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응용, 발전시켜 나갔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이나 신앙이 전래되었을 때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치면서 그 사회에 정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래·수용하는 단계와 나름대로 해석·평가하는 단계, 그리고 재해석하여 자기 것으로 응용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특정 사상의 의미를 역사의 장에서 찾으려면, 사상은 전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면서 전체상을 투영할 수 있는, 즉 다른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전제하에서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할 때 가능하다.
한국의 중세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 종파의 성립이 갖는 의미를 중시해야 한다. 그러면 종파성립의 단계를 말해주는 기준은 사원을 중심으로 조직적·체계적으로 행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종파성립은 특정 계층만의 특정의 산물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의 산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종파의 성립이란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불교가 발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종파성립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지표를 들면 가장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불교대중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회 계층적인 측면과 지역성을 포괄한 개념으로서, 두 가지 측면을 염두 해야 되는데 하나는 지배층이 그들의 권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民)을 파악하는 방식과 민에 대한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또 하나는 불교계의 전반적인 현황 즉 교학체계의 양상, 신앙과 의식의 성격, 주도 승려층의 정치, 사회적 성향 등도 유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교학체계를 확립하는 문제와 불교대중화의 문제는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래의 전반적인 발전양상과 유기적으로 관련된 현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

불교대중화는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일반 민들의 성장을 전제로 한 봉건지배층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봉건 지배층이 서서히 보수화 됨으로써 종파불교는 이미 성장한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로서 설명한다면 신라말, 고려중기, 고려말의 불교가 보수성을 띠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불교계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잃어버렸을 때인 고려말에는 불교의 역할이 성리학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신라 말에는 진골을 비롯한 지배층은 역사발전의 방향을 몰각하고 대단히 사치화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한국 중세불교를 인식할 때 불교사 전체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하고 이것은 불교사를 특수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반사의 범주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지표는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기본으로 삼아야 하고 각 시대별, 인물별로 불교 대중화의 문제를 어떤 각도에서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실천하고 있었는가를 정리해 간다면 불교의 모습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선사상의 수용

신라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선사상이 유행하고 이에 따라 중앙의 진골귀족에 대신하여 부각된 지방호족들의 환영을 받아 선종이 성립되었다. 종래 경전의 이해를 통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적인 불교였던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사상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면서 구체적인 실천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였다. 선사상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신라 왕실의 왕권강화책과 관련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신라 말에는 세력을 잡은 지방호족에 의해 분권적 경향에 대한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 지방에 선종의 거점으로 많은 선문(禪門)을 건립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9산선문이었다. 9산선문의 개조를 비롯한 선승들은 호족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이들 선승을 후원한 세력도 지방호족들이었다.
중세불교의 기점을 선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설정한 견해의 연유에 대해서는 선사상은 고대사회의 산물로 인식하면서 비록 같은 시기에 유행하였지만 선사상과 초기 성리학 사이에는 질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즉 선사상은 교학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자기부정, 인간부정을 전제로 하여 모든 현실을 단순한 '관계'로서 절대적·맹목적으로 긍정하는 평면적인 논리를 본질로 하고 있는데 비해 성리학은 인성(人性)을 순선(純善), 선악(善惡), 악(惡)이라는 상중하의 계제적(階梯的)·수직적인 관계로 긍정하면서 현실의 인간관계는 군신·부자 사이의 의리라는 방향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 중 교학불교 특히 화엄사상을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견해만 취하여 논지를 전개한 것이 선사상을 중세불교의 지표로 인식한 우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이들은 신라중대는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더 나아가 신라중대에서 하대로 접어들면서 왕실불교, 귀족불교로서의 화엄사상이 사회적으로 일반 서민과 더욱 멀어지는 혼란기에 들어오면서 그 사회적 기반을 잃어버리게 됨에 따라 선사상은 사상적으로 교학불교에 도전하고, 사회적으로는 절대 왕권을 부인하는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선사상은 신라의 육두품 계층 뒤에는 지방호족을 그 사회적 기반으로 하여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사상이 교학불교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비판하긴 하였지만 선사상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적인 산물로서 더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선사상이 12세기에 크게 유행한 것은 12세기 후반의 무신란 이후 불교계가 재편될 때 선종계가 부각되고, 수선사 계통이 중심교단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는 선사상이 본질적으로 문벌적인 테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성도 지니고 있다.

2. 고려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대단히 숭상하여 각 종파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접속하였고 특히 선종승려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후삼국의 통일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왕건의 이러한 불교정책은 훈요10조에 나타나고 있지만 난립된 교단을 정비하고 조직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불교 교단을 본격적으로 정비한 사람은 광종으로서 그는 승과와 승계제도를 마련하고 또한 국가에서 승려와 교단을 일체관리하는 기관으로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개편작업을 추진하는데 선종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 선정일치론(禪淨一致論)의 경향을 띠고 있었던 법안종을 중국에서 받아들였다. 또 교종에 대해서도 화엄종의 균여(均如)를 발탁하여 후삼국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균여가 신라중대 이래 화엄종과 법상종간의 대립을 '성상융회(性相融會)'라는 각도에서 극복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이념적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고 실천신앙을 통해 왕실과 기층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종대의 반동정치에 의한 탄압과 성종이 최승로를 등용한 뒤로는 유학이 집권적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불교가 가졌던 체제이념으로써 기능은 축소되었으며 그 결과 각 종파별, 신앙별로 특정집단만을 대변하는 위치로 전락하였고 특히 11세기 이후 현종·문종대를 지나면서 집권적 귀족사회의 골격을 갖추고 차츰 문벌귀족층이 형성됨에 따라 불교계도 이들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문벌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대표적인 교단은 화엄·법상종으로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다. 이들 세력은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무리하게 각종 교단의 장악을 시도하면서 불교계 전반의 부패를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 이들과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대다수의 농민, 천민층은 특정종파와는 무관하게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소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조탑(造塔)·주종(鑄鐘)에 참여하고 팔관회·연등회등과 같은 정토신앙과 전통신앙이 결합하고 있는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 이였다.
이와 같이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이 보수적인 경향을 띠면서 당시 불교계를 장악했을 때에 의천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된 교단세력에 대한 자각, 나아가 고려왕실의 문벌체제에 대해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천의 노력은 속장경(續藏經)의 조판과 천태종의 개창으로 나타났고, 원효의 계승을 자처하고 송에 유학을 흡수한 다양한 불교를 통해 그 이념적 기반을 찾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의천은 기존의 보수적 성향을 띤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면서 불교통합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그의 출신 종파였던 화엄종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개혁방안은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와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와 불교계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의 방향으로 안목을 돌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층사회의 신앙에 대해서도 관심조차 가지지 못했고, 불교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불교를 대중화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못하였다.

고려중기에 선사상이 부흥되고 또한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사회구조의 보수적인 추세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점은 무신란 이후 수선사(修禪社)계통의 선종이 부각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은 틀림없다.

3. 고려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

신앙결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불교가 수용된 이후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경우 어느 시기에도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4세기 말에 동진의 혜원(慧遠)이 중심이 되어 백련사를 결성한 것을 신앙결사의 시초로 본다. 그리고 신앙결사는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신앙결사운동 조직화과정의 특징은 중앙 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독자적인 형태로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앙결사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다양하게 전개된 신앙결사를 들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눌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로 사액되었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의 백련결사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방 불교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며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수선에 힘썼고 특히 거조사에서는「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수선사가 당시 불교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시 사회에서 수선사가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인 측면의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지눌이나 혜심은 불교의 궁극적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는데, 이들은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선사상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고 발전시켰다 할 수 있다. 둘째, 수선사는 당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하면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이 정토신앙임을 인식하고서 이를 수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했기 때문에 참담한 현실 속에 피폐되었던 지방사회 일반 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선사가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 민들의 지원을 받던 결성 초기의 단계에서 차츰 독서층의 지지를 받게됨에 따라 사원의 규모도 확대되었고, 나아가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최우정권의 의도와 맞아 떨어져 최우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 불교단을 통괄하는 위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지눌과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둔 요세는 1198년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로서의 출발을 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修禪)의 체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천태교관(天台敎觀)으로 확고한 사상적인 전환을 하였다. 요세는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해 특히 실천행을 강조했는데 그 방향을 수참(修懺)과 미타정토로 인식하고 1216년에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다. 백련결사는 결성 초기에는 지방토호층과 이를 지지하던 일반 민들을 주요 단월(檀越)로 하였으나 1230∼40년대에는 최우를 중심으로 최우와 밀착된 중앙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성장 기반을 서서히 구축해 가던 것이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세기 전후에, 실천적인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결사운동의 역사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사회 계층적인 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 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사상사적 측면에서는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수행과 교화라는 두방향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4. 고려말 불교계의 동향

13세기 후반 이후 대내외적으로 대몽항전기를 거치고 무신정권이 붕괴하면서 원간섭기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불교계는 대대적으로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연 출현 이후 부각된 가지산문은 불교계의 중심세력으로 존속되었으나 원간섭기의 가지산문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 이러한 보수적 경향의 세력과 대항하면서 당시 사회가 내외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 특히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백련사 계통을 계승한 운묵(雲默)을 들 수 있다. 운묵은「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통해서 당시 사회를 말법시대로 인식하고서 원간섭의 참담한 현실 속에 처해있던 대다수의 민중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실천신앙으로서의 정토신앙을 제시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권문들과 원당이라는 명목 하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이들의 민중에 대한 자각을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 문제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못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 신앙적인 기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사상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단계에 이룩하였던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을 주자 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다. 즉 주자 성리학이 고려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기반은 이미 무신란 이후의 불교계에 의해 마련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고려말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가치로 내세운 신진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야 말았다.

Ⅲ. 결론

중세불교를 인식하는 기준은 불교가 전 사회구조 속에서 어떠한 사회적 기능을 했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상사는 사상 그 자체의 체(體:본질)와 상(相:현실), 용(用:작용,기능)을 유기적·종합적으로 파악하되 역사학 방면에서는 현실면과 기능면을 더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종래에 불교사를 교(敎)와 선(禪)의 문제로만 한정시켜 인식한 경향은 불교사의 이해폭을 임의로 축소한 것으로 판단된다. 최소한 정토신앙(미타·미륵·관음신앙)과 관련지어 파악해야 하며 더 나아가 불교의례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밀교적인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앙결사 문제도 사회구조적인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일반민의 존재양태와 관련하여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의 추이를 검토해야 되겠다.
적어도 고려 이전의 중세사회에서는 불교가 종교적인 면에서 지배적인 사유구조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 외적인 면에서도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틀이었음을 인식하는 방향에서 연구를 할 때, 중세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가깝게 복원할 수 있게된다.


참고문헌

『한국사(6)』채상식, 1994, 한길사

『한국역사입문(2)』채상식, 1995, 풀빛

『한국사상의 심층연구』최병헌, 1986, 우석

『신라사상사연구』이기백, 1986, 일조각


Q & A

1. 선사상의 유행을 왜 중세사회의 내부발전의 산물이라고 하는가?

2. 결사운동에 대한 귀족관료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3. 선과 주자성리학은 어떤 관계 아래에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자 성리학은 선(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대두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상은 원래의 사상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변질되면서 국가와 통합하면서 불교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사원을 중심으로 부패하게 되고 승려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변질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지못하게 됨에 따라 성리학이 대두하게 된다.

◈토론 내용

1. 선사상이란 무엇인가?

2. 교학불교와 화엄사상은 무엇인가?

3. 선교일치론은 무엇인가?

4. 천태교관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