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미타신앙과 대중불교운동

- 궁예의 미륵신앙과 원효의 대중불교운동 -

발제자 : 9245039 하승철, 9645028 이유진, 9645029 이은하

Ⅰ. 머리말

Ⅱ. 미륵신앙의 본질과 궁예의 미륵이상세계

Ⅲ. 아미타 정토 신앙

Ⅳ. 원효의 대중불교운동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불교는 사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사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신앙의 대상을 중심으로 아미타· 관음· 지장· 미륵 신앙이 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믿는 신앙보다 더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 아미타불과 미륵불을 믿는 신앙이다. 그 중 개인은 현실적으로 바로 갈 수 있다고 믿은 서방(西方)의 미타정토를 선호했으나, 이 사회에 더 영향을 준 것은 미륵정토 신앙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미륵이상세계를 건립하려는 뚜렷한 입장을 표명한 사람은 궁예(弓裔)였으며, 그 이전의 미륵신앙은 계율(戒律)을 강조하거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치세(治世)를 돕는 면을 부각시키는 경향을 가졌었다.
한편 신라 중대 왕실은 삼국통일을 계기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불교교단에 대해서도 이를 국가권력의 통제하에 두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왕실을 포함한 지배층은 그들의 세속적 특권을 합리화하는 동시에 내세에서도 이를 보장받고자 불교를 전폭적으로 외호(外護)하였으며 피지배층은 그들 나름대로 현실의 고난을 유토피아의 안락으로 보장받고자 불교를 신봉하였다. 한국불교의 토대는 사실상 중대불교에서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대불교의 과제는 독자적인 철학체계의 수립과 불교의 대중화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궁예의 미륵이상세계와 신라 중대에 유행하였던 아미타 정토신앙과 원효의 대중불교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미륵신앙의 본질과 궁예의 미륵이상세계

1. 미륵신앙의 본질

석가가 현재불(現在佛)이라면 미륵은 내세불(來世佛)이다. 석가를 이어 내세에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에 대한 신앙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많은 경전에 언급이 되어 있다. 미륵은 지상에서 죽은 후 도솔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수행(修行)하면서 많은 천중(天衆)을 위해 설법하고는 다시 우리들이 사는 염부제(閻浮提)인 지상에 내려오게 된다.
미륵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언급된 경전으로《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보살상생경(彌勒菩薩上生經)》·《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이 있다. 이것을 '미륵삼부경(彌勒三府經)'이라 하는데, 경전에 보이는 미륵신앙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이상세계(彌勒理想世界)의 출현은 전륜성왕의 통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굉장히 아름답고 복덕(福德)의 사람들로 차있는 계두말(鷄頭末 ; Ketumati)성에 미륵은 파나문(婆羅門) 부부의 몸을 빌어 태어나는데, 이 때 이 나라는 전륜성왕이 다스린다. 미륵은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고 그의 출가(出家)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둘째로 미륵신앙 내에는 계율이 강조될 소지가 있다. 미륵의 설법은 시론(施論)·계론(戒論)·생천지론(生天地論)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계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가장 중요하다. 인간이 도솔천에 왕생(往生)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戒)를 지녀야 하는데, 곧 오계(五戒)와 팔재계(八齋戒)와 구족계(具足戒)를 지니고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여 십선(十善)을 닦아야 한다.
셋째로 미륵이상사회는 먼 훗날에 도래하지만,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이 정토(淨土)가 된다는 것이다. 미륵정토는 물론 미타정토도 현실을 부정하려는 면을 가졌다. 미타정토신앙은 다른 세계인 서방의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염원하기 때문에 현실 사회에 미련이 남을 수 없으나, 미륵정토신앙은 어디까지나 현실 사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륵신앙은 혼란한 말법사회(末法社會)를 배경으로 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실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다. 미래에는 현실 사회가 바로 정토가 되기 위해 그것은 이상적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미륵신앙의 이러한 본질은 불교 전래 후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믿어졌다.

2. 궁예의 미륵이상세계

(1) 궁예 이전의 미륵신앙의 유행

불교의 공인과정에서 미륵신앙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왕실 중심으로 수용된 불교를 홍포(弘布)하면서 국가불교로 성립시키려 할 때,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던 자들은 귀족이었다. 불교의 공인은 왕실과 귀족이 불교사상면에서 타협하고 조화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귀족의 입장에서도 유리한 불교신앙이 요구되었다. 미륵신앙은 바로 그런 것이어서 귀족에게 어울리는 면을 지녔다. 공인 이후 불교가 귀족 중심으로 발전해 가면서 자연 미륵신앙이 유행하였다.
삼국시대에 실제로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한 곳은 백제에서였다. 백제 제 30대 무왕(武王)이 용화산(龍華山) 아래의 못에서 출현한 미륵삼존(彌勒三尊)에게 예경(禮敬)하고는 그곳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이 때 미륵사의 조성은 용화미륵세계 또는 이상세계를 건립하려는 것이다. 용화산은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성불(成佛)하는 곳인 용화수(龍華樹)를 상징하며,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주지(住持)한 사자사(師子寺)는 도솔천의 사자상좌(師子床座)를 나타내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은 본래 법왕(法王)과 연관되었다.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자 했는데, 이 절은 무왕 35년에 낙성되었다. 법왕이 왕흥사의 터만 닦고 돌아간 후, 무왕이 이 절을 완성하여 미륵사라 이름하였다. 법왕은 엄격한 계율을 견지한 호불군주(護佛君主)였다. 법왕이 내세운 계율과 미륵사의 창건이 밀접하게 얽히는 데서 백제에 수용된 미륵세계의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제 미륵신앙은 엄격한 계율 위에 성립되었으며 이 땅에 용화이상세계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미륵신앙 속에 현실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상은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경우 계율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정계(淨戒)의 수행을 통해 미륵이상세계를 구현하려는 신앙을 은연 중에 깔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용화세계의 구현에서도 강한 현실 사회에 대한 개혁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며, 저 밑바닥에 침잠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정토신앙이 유행하지만 사후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미타정토 신앙이 우세하였다. 미륵신앙을 두드러지게 펴고 있는 자는 진표(眞表)였는데, 그는 백제 귀족의 후예로서, 그의 사상이 백제 불교의 전통 내지 백제 부흥운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진표는 백제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 지상에 이상국가를 건설할 꿈을 꾸고 있었으며, 후에 대국(大國)의 전륜성왕의 몸으로 출세(出世)할 것을 기원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계율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2) 궁예의 미륵이상세계

궁예는 왕이 되기 이전에 세달사(世達寺)의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는 법호를 가졌다. 궁예의 불교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궁예는 자칭 미륵불이라 하여 머리에 금책(金瓔)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를 입었으며, 장자(長子)를 청광보살(淸光菩薩)이라 하고 차자(次子)를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불렀다.

* 자신이 경전 20여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다 신빙하지 못했다. 때로는 단정히 앉아 불설(佛說)을 강론하니 승석총(僧釋聰)이 말하기를 "다 사설괴담(邪說怪談)으로 훈계가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궁예가 듣고 화를 내어 그를 철퇴로 쳐 죽였다.(三國史記』 列傳 제 10, 弓裔傳)

궁예는 법상종(法相宗)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였으며 그의 차자인 신광보살은 아미타로 이해된다. 또한 장자인 청광보살은 관음을 이른다.
신라 법상종은 미륵불을 주존으로 그 옆에 미타를 모시는 교단과 이와는 달리 미륵불 옆에 지장을 모시는 교단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궁예는 전자 곧 미륵과 미타의 양존을 받드는 신라 법상종파에 속해 있었는데, 이 교단에서는 관음(觀音)을 중요하게 받들었다.
신라 말에 법상종 내의 두 교단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는지를 분명히 하기는 힘들지만 궁예와 관련된 태현계의 법상종이 고려 초에 위축되어 쇠잔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며, 반대로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진표계의 법상종은 그 힘을 떨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신라 말의 두 교단 사이에 존재했던 대립을 충분히 상정하게 한다.
스스로를 미륵으로 장자를 전륜성왕으로 상정하려는 궁예의 불교신앙은 용화이상세계(龍華理想世界)를 구현하려는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미신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궁예는 전륜성왕으로 출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륜성왕의 출가는 윤보(輪寶)의 자리가 옮겨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부터 전륜왕이 전륜하여 상승(相承)하면서 인간의 수명은 줄어들고, 도적이 횡행하면서 전쟁과 살인이 그치지 않는 혼란한 사회에 들게 된다. 궁예가 당대의 신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미륵정토신앙은 말법(末法)시대, 즉 불교의 교리와 부처의 설법이 모두 어그러져 지켜지지 않은 혼탁한 세상을 배경으로 퍼져 나갔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는데. 그것은 미륵존에 대한 희구가 더 절실함에서 나온 것이며, 이상세계로의 지향을 위한 현실 사회의 개혁의지가 강한 데서 나온 것이다. 궁예는 전륜보를 내세워 출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라 국가의 무질서와 사회혼란을 부각시켰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륵의 교화로 그 사회를 개혁하면서 이상세계의 건설을 꿈꾸었다.
다만 궁예는 용화이상세계의 건립을 염원했으나, 바로 당대에 그것을 세우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용화세계의 건설을 위한 현실 사회의 개혁에 더 치중해 있었다.

Ⅲ. 아미타정토 신앙

정토란 '청정한 국토'의 줄임말로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미타부처가 주재하는 서방의 정토를 아미타정토라 하며, 흔히 극락(極樂)이라 부른다. 극락은 윤회의 사슬을 끊은 궁극적인 이상향이다. 아미타 정토신앙이란 아미타부처의 도움을 받아서 극락에 태어나고자 하는 신앙형태를 말한다.
아미타정토 신앙은 7세기 중엽에 신라사회에 등장한 것으로 왕경에 거주하던 하급귀족이나 평민들 중에서 골품제도의 모순으로 인하여 몰락해서 왕경에 가까운 지역으로 낙향해 간 사람들 사이에서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동경하는 풍조에서 발생하였다. 신라 중대에 들어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으로 중대왕실의 후원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일반민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왕권강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일반민들은 아미타정토신앙에 매료되었는가?

정통의 내용, 왕생인의 자격, 왕생의 방법 등을 분석한 결과 중국 정토교학에 비해 정토의 문호를 개방하려는 추세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누구나 손쉽게 아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일반민들에 대해 상당한 흡인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신라승려들은 정토의 문호를 가급적 개방하고자 하였는데, 그 이론은 불성론(佛性論)이라는 새로운 인간관의 수렴이다. 나아가 불성론은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성을 의미하므로 차별적 인간관을 내포하는 종래의 무교(巫敎)에 비해 한 단계 진전된 사유체제였다.
신라 중대에는 아미타정토 신앙이 계층과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신라인들 사이에서 널리 성행하였으므로, 지배층의 아미타신앙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 계층별 신앙을 두 가지로 유형화하여 염세적인 민중들은 염불에 의한 현신(現身)왕생을 희구하는 반면, 현세긍정적인 귀족들은 추선(追善)에 의한 사자(死者)왕생신앙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신라 중대 아미타정토 신앙의 특징은 모든 학파나 종파에서 공통으로 신앙하였다는 점과 왕생인의 자격을 최대한 완하시켰다는 점이다.

Ⅳ.원효의 대중불교운동

원효는 대략 80여부 15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당시까지 중국 불교계에서 연구되고 있던 거의 모든 불교 사상을 망라해서 연구하고 체계화함으로써 그의 그의 사상을 망라해서 연구하고 체계화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동북아 불교계의 불교학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일반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그들을 교화하는 불교대중화에 매진함으로써, 그의 사상은 대중성을 띠게 되었다. 즉, 그의 사상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원효사상에 대한 연구는 불교학자들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원효사상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작업인 원효의 저술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왔다. 원효사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원효연구의 본질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화엄종조설(華嚴宗祖說)의 영항을 받아 종파론적인 접근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학자들 사이에서 종파론적 접근의 편협성을 비판하고 원효를‘통불교(通佛敎)의 건설자’내지는‘화쟁주의자(和爭主義者)’보려는 화쟁론적 접근이 주창되었다. 아울러 일본학자들도 40년대 들어서면서 원효사상의 중심을 기신론사상(起信論思想)으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화엄학이나 신유식학과의 관계해명을 적극 시도하는 기신론적 접근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기신론적 접근방법은 앞서 거론한 화쟁론적 접근방식과 함께 이후 원효사상연구의 기본틀이 되었다. 불교 교학사상 가장 돋보이는 업적은 중관·유식 두 학파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가장 합리적인 도리를 제시한 것이다.
즉,『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다 소와 별기를 지어 기신론을 부여함으로써 중관과 유식을 일심으로 종합한 이론이다. 그의 중관파의 부정론이나 유식파의 긍정론을 다같이 비판하고 세계는 오직 일심이라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일심은 상반되는 두 측면의 통일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측면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일체의 현상들이 발생,발전하고 운동, 변화한다고 보았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일심은 두 부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다. 원효에 의하면 진여문은 발생도 소멸도 없으며, 증감도 차별도 없는 절대적 본체인 일심의 본질적 측면을 의미한다. 생멸문은 발생과 소멸이 있으며, 증감·차별이 있는 일심의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측면이다. 이러한 일심의 두 모순적 측면인 진여문과 생멸문의 관계를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인도의 대승불교에서부터 발생하였던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극복하는 문제는 신라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불교계의 현안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원효의 불교는 중국에서도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불교는 곧 중국에 전해져서 법장이나 이통현(李通玄), 그리고 그 뒤의 징관(澄觀)등에게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종의 성립과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화쟁을 통해 원효가 궁극적으로 건립하고자 한 사상인 기신론사상은 일심사상이며 그것은 곧 여래장사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원효가 기신론의 일심사상을 여래장사상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일심사상을 주목하는 경향이있다.
한편 원효사상 가운데 그의 대중교화활동과 밀접히 관련된 계율사상과 정토사상도 1960년대 이후 학계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우선 원효의 계율 관련 저술을 분석하여 대중교화활동을 위해 대승보살계를 중시하였음이 밝혀졌다. 또 원효의 정토교학 관련저술을 분석하여 원효가 미륵정토보다 미타정토를 중시하면서 동시에 미타정토로 왕생할수 있는 자격을 가급적 완하하고 왕생의 방법도 쉽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7세기는 신라사회와의 문맥 속에서 원효의 생애를 복원하고자 한 시도는 주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Ⅴ. 맺음말

미륵은 전륜성왕의 치세에 출현하여 그의 통치를 도와 이상세계를 만들고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이미 미륵신앙은 전륜성왕 신앙과 짝하여 포용되었다. 특히 미륵신아이 현실 사회를 개혁하려는 경향을 표면에 내세우게 되는 것은 궁예에 의해서였다. 그는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상세계인 용화세계의 건설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궁예가 표방하는 미륵신앙은 이상세계의 건설보다는 현실사회의 개혁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배자의 억압이나 사회체제의 동요 등은 바로 미륵 출현의 전조로 생각되어졌다. 미륵정토신앙은 혼란된 사회를 부정하고 이상세계를 건설하려는 종교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미륵신앙은 민간신앙과 연결되거나 또는 신흥종교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원효는 저술활동을 통하여 경전 사이의 이견(異見)을 적극적으로 화쟁(和諍)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교리를 체계화하는 사교판론(四敎判論)을 건립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일심사상(一心思想)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7세기 신라사회에 불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스스로 환속하여 거사(居士)로서 일반민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교화활동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참고 문헌

『한국사시민강좌 10』 김두진, 1992

『한국사 (4)』 김영미, 1994 한길사

『한국역사입문 (2)』 남동신, 1995 풀빛

『신라사상사연구』이기백, 1986 일조각


질문 및 답변

Q) 기신론 사상이 무엇입니까?
A) 일심 사상이라고도 하는데, 마음의 청정한 연안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중관사상과 마음의 염오한 연을 주로 밝혀 온 유가사상을 잘 조화시켜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뜻을 밝힌 것이라 본 것이다. 즉, 일심사상으로 중관파와 유식파 사상을 지양·화합시켜 참된 깨달음과 세속생활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현실생활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 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진을 이룰 수 있다. 또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세속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다.

Q) 화쟁론이 무엇입니까?
A) 두 교설이 대립하여 쟁론을 일으켰을 때 그들에게 '다같이 도리가 있다'는 이론으로 경·론·이설을 폭넓게 포용하고 이해한 것이다.
예를 들어 두 교설의 대립이 나타난 것을 보면 진(깨달음, 진리)과 속(세속), 유(유식) 와 무(중관)의 대립이 있다. 도처에서 갈등과 투쟁, 대립 분단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지양하고 궁극적인 평화를 성취하고 주장한다.

Q) 화엄종조설이 무엇입니까?
A) 종파론적 접근으로 사회와 연관시켜 해석할 때, 신도와 승려, 농민과 지주, 민중과 지배 계급은 사회관계의 그물에서 빠뜨릴 수 없는 그물코가 되어 모든 사람이 원만무애하게 평화공존하는 생활을 영위함을 말한다. 즉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현실의 사회제도와 존재가 임니의 고난과 관계가 없음을 논증, 관계의 그물은 객관세계와는 다른 개념상의 관계에 불과하다.

Q) '불성론'이 무엇입니까?
A) 사전적 의미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나, 사회발전적 의미로는 평등사상과 관계된다. 삼국시대에 원효는 불교교단내에서의 평등을 세속에서의 평등까지로 확대주장했는데, 이러한 것은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다란 말로 표현한다. 이로써 종래의 귀족적 불교가 대중화되게 된 것이다.

Q) 백제에서 미륵신앙이 발달한 이유는?
A) 중국으로부터 미륵신앙을 받아들인 이유도 있지만, 미륵신앙이 백제에서 부흥하게 된 계 기는 그것이 당시의 백제왕실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진데 있다. 신라, 고구려와 경쟁관계에 있던 백제로서는 이들보다 우월한 사상이 필요했고, 백제땅이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불이 내려올 땅이라는 사상은 인민들에게 선민의식을 심어주기에 적절했다. 또 백제의 왕은 전륜성왕으로써 행세할 수도 있었는데, 왕권의 강화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륵신앙은 신라에도 융성했다. 백제와 신라는 경쟁관계에서 서로 우월함을 드러냈고, 그것은 백제의 미륵사와 신라의 황룡사가 경쟁적으로 조성된데서도 알 수 있다.

Q) 용화이상세계가 무엇입니까?
A) 궁예가 구현한 미륵이 다스리는 현세에서의 이상세계를 말한다. '용화'라는 말은 미륵이 현세에 태어나서 성불하는 '용화수'에서 나온 말인데, '도솔'이나 '미륵'이라는 말과 함 께 이상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Q) 미륵신앙이 왜 귀족에게 유리한 불교신앙입니까?
A) 석가모니가 왕족 출신인데 반하여 미륵은 귀족 출신으로 출가하여 성불한다. 따라서 종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한 불교는 자연히 왕실 중심의 신앙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왕실과 귀족의 불교사상면에서 타협하는 시점에서 미래불인 미륵을 믿는 신앙이 귀족에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귀족출신들도 내세에서 성불하고자 하는 염원을 포함한다고 하겠다.

Q)궁예의 미륵신앙운동은 왜 실패했는가?
A) 궁예는 미륵을 자처하여 용화이상세계의 건립을 염원하여 용화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해 현실 사회의 개혁에 치중하였다. 이 때에 궁예는 미륵관심법이라는 신통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자들을 억압하였다. 그 한가지 예로 부인이 자신의 비법행함을 정색하고 간하니 자신이 신통력을 써서 보니 부인이 다른 사람과 간음하였다고 말하고서는 부인을 죽였다. 이러한 관심법의 실행에 의한 궁예의 포악한 정치가 그의 미륵신앙운동을 실패하게 하였을 것이며, 이 때에 발맞추어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그 뜻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Q)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A) 이 두 신앙의 공통점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면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은 극락의 대상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륵신앙이 '미륵하생'의 미래불을 얘기하고 극락의 장소가 현재 우리가 사는 곳을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아미타 신앙은 서방정토인 내세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락의 대상이 다름으로 해서 미륵신앙은 현실개혁적이고, 아미타신앙은 죽은 뒤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므로 현실부정적이다.

Q) 원효의 대중불교운동이 신라 진골에게 미친 영향은?
A) 불교가 대중화 되면서 정토신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주로 믿는 계층들은 신라의 현실에 불만의 많은 사람들이 하층귀족이나 촌주들, 그리고 평민, 노비의 일반 민중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현실 비판세력들이었다. 따라서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항정신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 비판의 구체적 대상은 골품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전제정치였다. 진골들은 진골 귀족을 대표하는 '화백회의'의 기능 약화로 실질적으로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왕족 중심의 진골 귀족들은 정치·경제·군사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정토신앙을 민심을 수습하는 길로 택하였다. 그 결과 전제왕권을 소극적으로 뒷받침해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