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체제 개편과 새로운 지배 이념

-불교의 수용과 고대사회의 변화

발제자 : 9645016 박성희, 9645023 안지은, 9245040 홍정훈

Ⅰ서론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4세기경은 삼국시대로서, 바로 고구려·백제 ·신라 3국이 고대 국가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사회는 이미 씨족공동체 안의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하였으므로 씨족 사회 당시에 성립되었단 무격신앙이나 조상숭배사상만으로서는 새로운 고대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전래된 불교가 고등종교이자 철학으로서 고대 국가의 발전단계에서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함으로써 초부족적 국가정신과 새로운 사회윤리관의 확립에 기여하여 고대 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여 주었다.
여기서는 불교가 전래되어 한국의 고대 왕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원시불교의 성격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그로 인한 고대사회의 변화에 관한 문제는 원시불교의 성격과 아울러,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삼국의 사회상황 어떻게 변모되고 있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먼저 원시불교의 성격을 보자.

불교의 성격은 불교 발생 당시 회의적이고 숙명론적이며 끊임없는 고행을 강조하는 일반적 경향에서 벗어나 불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苦(고)'로부터 해탈할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운명론과 결정론을 배격하고 당시 인도인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그들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대중의 지지를 받으면서 성립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가 성립되어나가는 중요한 배경은 정치?사회 상황에서 찾으면, 기원전 5세기경 수많은 성읍국가로 나뉘어 있던 인도는 점차 강대국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군소의 수많은 성읍국가로 나뉘어 있을 당시의 인도는 제정일치 사회여서 제사가 중요시되었으나, 석가 생존 당시의 인도는 제사보다 국가통합이 주체세력인 군장 중심의 세속권력이 더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브라만계급이 쇠퇴하면서 제사의례는 형식화되고, 반면 크샤트리아계급이 세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불교는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원시불교의 성격은 성립 당시 인도의 사회상황과 연관시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왕자계급중심의 종교였다.
인도의 통일사업이 진척되면서 그것의 주체세력인 크샤트리아계급(왕자계급)이 브라만계급(제사담당)보다 현실적으로 더 세력이 강해지자, 불교는 브라만교에 대신하여 크샤트리아계급을 위해 그들의 세속적 권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둘째, 원시불교는 정복국가의 이념에 합당한 면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었다.
원시불교경전 속에 자주 나타나는 轉輪聖王(전륜성왕) 관념이 이를 알려준다. 세속적 권능을 가진 전륜성왕은 무력으로 이웃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정법으로 통치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평화가 온다. 이때 전륜성왕이 치세를 돕기 위해 미륵이 출현하여 교화한다. 이러한 전륜성왕의 관념은 통일국가에로의 지향이며, 강대국을 중심으로 통일사업을 진척하려는 정치이념의 사상적 뒷받침이었다.
불멸이후 불교가 성행하여 왕성하게 되는 것은 전인도가 통합되어가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 등이 다스리는 시기였다. 인도가 여러 나라로 분열되면 불교도 따라 쇠퇴하였다. 이것은 원시불교가 작은 성읍국가가 합쳐져 왕권 중심의 고대 정복왕조를 성립시키려는 사회변화 과정 속에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소국가 내지 부족 사이의 통합능력을 가졌을 것이고, 삼국사회는 이러한 성격의 불교를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국가체제가 변화되고 있었다.

2.. 불교의 전래와 수용

삼국시대의 초기 불교전래는 공식적으로 전해지기 이전 단계에 전래되어 신앙되고 있었다.

먼저, 고구려의 불교전래는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符堅이 사신과 僧 順道에게 불상과 經文을 보내고 同王 4년에 다시 僧 阿道가 동진에서 오니, 肖門寺와 伊弗蘭寺를 지어 그 두 僧을 각각 머물게 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일치된 기록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고구려에서는 이미 불교 傳道僧의 활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진의 支遁道林이 고구려 승려 道人에게 불교관련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支遁이 입적한 해는 소수림왕 2년에 앞서기 6년 전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에서 승려 麾羅難陀가 왔을 때 왕이 극진히 그를 맞이하고, 이듬해 절을 지어 10人을 得度하였다는 것이 불교 전래에 대한 기사이다. 이밖에 어떤 전단계적 민간전례가 있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백제는 제 13대 근초고왕 27년(372)에 이미 동진에 朝貢을 받치고 있다는 점으로 봐서 당시 동진의 성한 불교가 백제왕실에 알려지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또 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면 승려 휘라난타가 왔을 때 국왕이 그렇게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이듬해 절을 지어 10人을 得度시킬 수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불교의 민간전래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자료들이 매우 多岐하므로 먼저 그들을 전부 열거한 다음, 그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고자 한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들어온 연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諸家의 說이 紛紛하다. 먼저, 가장 연대를 늦게 잡은 경우는 진흥왕 즉위 전후 보는 견해이다. 둘째로,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로서 눌지왕대로 보는 경우이며 마지막으로 소지왕대로 보는 설이 있다.

첫째의 경우는 법흥왕 이전의 아도전설이 모두 날조된 것이라 하였고, 둘째의 눌지왕대를 주장하는 사람은 대개 사기에 인용된 鷄林雜傳을 그대로 믿고자 하는 입장이다. 셋째의 경우는 계림잡전의 記事를 당시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상극관계에 있던 때인데 과연 백제를 통과하여 一善君에 들어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 하면서 소지왕대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의견이 多岐한 원인은 불교전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阿道和尙(阿道 또는 我道)에 관계되는 典據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도관계의 전거는 대략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김대문의 鷄林雜傳(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수록), 김용행의 阿道本碑, 古記(고승전에 수록), 고득상의 詩史(고승전과 삼국유사의 主에 수록), 조선 인조 때에 세운 善山桃李寺阿道和尙事蹟碑(선산군 해평면 소재), 龜龍寺에 있는 碑銘序(조선사찰사료) 등으로 분류된다. 이 전거를 바탕으로 아도화상의 행적을 종합해서 고찰하겠다.
신라의 북방진출은 대개 두 개의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하나는 내륙지방에로의 진출이며, 다른 하나는 동해안으로의 진출이었다. 먼저 내륙지방을 살펴보면 이 방향은 고구려의 문화가 남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통로가 될 수 있어 일찍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분쟁지역이었다. 충주, 문경, 선산, 상주 등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이 길은 광개토왕이 내물왕을 도우러 왔던 코스일 것이며, 고구려의 승려들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던 길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불교전래는 350년경 魏나라 사신인 阿堀摩가 고구려에 와서 高道寧과 私通하여 낳은 阿道가 중국에 가서 수업하고 고구려에 돌아온 시기가 370년경이며 그가 母의 가르침을 받고 눌지대(A.D 417-458)에 신라에 와서 스스로를 墨胡子라고 불렀다. 즉 阿道에 의해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바로 5세기 初이다. 최초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는 그 자신 이외에도 전도승의 대명사처럼 후세에 불려졌다.
아도가 처음 一善君에 온 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면

"하루는 아도가 袈裟를 입고 단좌를 하고 있었는데, 뜰에 상서러운 빛이 가득하고 겨울인데도 칡덩쿨이 눈속에 있었다. 그 줄기를 따라가 본즉 이상한 광경을 보게되고 , 이에 암자를 지어 아도를 봉양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아도가 신통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줌과 아울러 본색을 드러내어 모록에게 전도한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그는 神通自在한 僧으로 후세인이 숭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법흥왕대에 이루어진 "肇行佛法"도 아도의 功으로 돌려졌다. 마지막으로 아도의 행적에 대해서 아도는 毛綠(毛祿 또는 毛禮)家에서 雇傭살이를 하다가 모록을 위시하여 村人을 설득하였고 이어 桃李寺를 지었다. 그리고 수도에 가서 "王城西里"에 本據地를 가지고 적극 포교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왕실에서 아도를 배척했으나 그가 "成國公主"의 병을 고침으로서 宮中에 들어가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阿道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王이 묻자 天鏡林에 佛寺를 지어 주기를 부탁했다. 이에 왕은 공사를 허락했는데 그것이 寺刹이 되었다. 당시의 사찰은 현재의 면모를 갖추지 않은 것이었으며, 나중에 흥륜사가 된다. 요컨대 阿道는 "成國公主"의 병으로 인하여 왕실과 접하게 되고 因하여 흥륜사를 지었다.
그의 교화를 받은 모록의 누이 史氏는 京都에 근거지를 두고 一善君과의 신속한 연락을 취하고 포교활동을 통해서 阿道를 둘러싸고 모록가를 위시한 一君의 佛子들이 형성되었다. 그는 신라 최초의 女僧이 되었으며, 후에 영흥사를 지음으로 해서 一善君과 수도 경주에 일군의 불자가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아도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에 소지왕때에 이르러 아도를 사칭하는 자가 왔는데, 왕녀의 병을 계기로 여러 사건이 벌어진다. 여기에 이차돈이 개입되어 결국은 왕이 불교를 공인하게 된다

3. 공인 이전의 삼국시대 불교의 모습

공인 이전 불교는 주로 왕실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원시불교가 왕실 중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까닭은 왕자계급에 유리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북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진 불교는 당시 중국 북조의 '왕즉불'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어서 먼저 왕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원시불교는 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불교전래 이전 삼국사회에서는 무교신앙이 행해지고 있었다. 무교신앙 사회에서는 왕이나 귀족이 모두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을 지녔고, 그것은 그들이 본래 가졌던 성읍국가의 기반 위에서 갖추어져 왔다. 성읍국가가 연맹왕국 내에 편입되면서, 그 지배자들은 연맹왕의 신하로 등장하여 귀족으로서 왕경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하의 종속관계를 성립시킨 왕실이 관념적으로도 귀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모색하면서 불교를 수용하여 홍포하게 되었다. 자연 귀족은 이러한 불교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종래 무교신앙을 고수함으로써 비록 현실적인 사회여건으로서는 왕실과 상하의 신분질서를 인정하더라도, 신앙이나 제사를 담당하면서 왕실과 대등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불교는 사상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기보다는, 무교신앙의 방법으로 그것이 행해지는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불교공인 이전에 궁내에는 분수승이 있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종래 무교신앙의 제의가 갖는 기능을 흡수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점이 공인 이후 불교가 귀족들에게도 호감을 주면서 삼국사회에 부리를 내릴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법하다.

4. 불교의 공인과 왕실?귀족간의 타협

불교의 공인은 초전불교의 홍포과정과는 달리, 왕실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족들의 협조를 얻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삼국사회에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공인되는지에 대해서는 신라 법흥왕 당시 이차돈이 순교 사실로써 이해할 수 있다.
불교의 공인은 왕실과 귀족이 일정한 타협을 이룸으로써 가능해졌다. 불교가 사상면에서 왕실과 귀족으로 하여금 대립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그러기 위해 불교는 왕실의 입장에서는 물론, 귀족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신앙으로 나타나야 했다. 전륜성왕과 미륵보살 신앙은 불교사상면에서, 왕실과 귀족이 타협을 이루면서 서로 조화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불교를 공인하면서 왕실은 전륜성왕 관념을 포용하였다. 인도에서 일어난 당시의 원시불교는 정복국가를 정당화하는 면을 가졌다. 원시불교경전 속에 나타나는 전륜성왕은 정복사업을 추진해가는 세속적 군주의 상징적 존재였다. 전륜성왕은 무력으로 이웃의 모든 국가를 정복하고 그 땅에 불법 통치를 이룩하는 장본인이다. 이것은 군국불교를 성립시키는 데 능동적으로 작용하였다.

불교는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원년(372)에, 백제의 경우 침류왕 원년(384)에 공인되었다. 삼국이 정복국가를 성립시키면서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체제를 완비하여가는 시기에 불교는 공인되었다. 소수림왕이나 광개토왕 또는 근초고왕이나 침류왕, 법흥왕이나 진흥왕은 모두 정복군주인 전륜왕으로 불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인 이후 초기불교는 군국적 성격을 강하게 지녀갔다. 더불어 전륜성왕 사상을 기반으로 군국불교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공인불교에서는 미륵신앙이 강하게 나타났다. 전륜성왕은 사병을 거느리고 사방을 정복하는데, 점령된 땅에는 미륵이 출현하여 그의 치세를 돕게 되므로 이 세상은 부유하고 안락하게 되어 풍요가 온다. 본래 전륜성왕으로 태어나게 될 아지타와 소년 미륵은 부처 앞에서 같이 수도하였으며 아지타가 전륜성왕으로 태어나자 그의 불법통치에 미륵이 化生(화생)하여 교화를 담당하게 된다.

전륜성왕 사상과 짝하여 신앙된 미륵사상이 귀족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성격을 가져 공인 이후 귀족 중심으로 수용되고 있었다.

왕실은 전륜성왕으로 자처하면서 그의 치세를 돕기 위한 미륵의 출현을 화랑으로 설정한 셈이다. 그리하여 전륜성왕 사상과 미륵신앙은 정치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를 조화시킨 불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한 것으로, 왕실과 귀족이 불교신앙면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귀족이 미륵신앙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미륵이 석가와 같이 크샤트리아 출신이 아닌 브라만 출신이라는 점이다. 바로 인도의 브라만계급이 그들의 처지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되어 미륵은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다는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삼국사회에 동자의 모습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미륵신앙은 불교신앙내에 무격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킴으로써 토착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귀족의 흥미를 끌 수 있었다. 곧 미륵신앙은 귀족들이 불교를 수용하도록 능동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사상은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긍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어 삼국의 지배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해주는 이론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리고 왕이 여래가 아닌 보살이라는 구세보살 사상은 신라의 공인 불교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이 흥미롭다 .불교 공인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이들의 왕비도 각각 출가하여 승니가 되었다. 구세보살 사상은 왕을 절대시하고 완전무결하게 생각하는 북중국의 '왕즉불' 사상과는 달라서 왕은 보살로 간주되어 수도과정에 있게되며 스스로 출가한 보살로서 귀족이나 백성들을 제도하게 된다.
신라의 초전불교는 왕즉불 사상에서 구세보살 사상으로 바뀌면서 귀족들의 반대를 무마하게 되어 공인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왕권 중심의 귀족정치를 성립시키는 면으로 작용하였다.

5. 불교의 수용과 삼국사회의 변화

불교가 수용되어 공인되어가던 시기의 삼국사회는 왕권 중심의 귀족국가로의 체제 개편을 단행해가고 있었다. 삼국은 점차 왕권을 강화하면서 정복국가를 성립시켜 갔다. 그러한 국가체제의 정비과정과 불교의 수용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면 불교를 수용하여 공인해 가던 시기에 이루어진 체제정비를 보다 상세하게 부각시켜 봄으로써 이때를 전후한 한국 고대사회가 변화되는 모습을 이해하기로 하자. .

연맹왕국에서 왕실이 왕권을 강화해 나가면서 귀족국가체제를 성립시켜 나가는 방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현을 정비하면서 지방을 보다 확실하게 장악해가는 것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5부 및 신라 6부의 개편은 이런 면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부'는 본래 성읍국가의 기반을 가졌던 것인데, 연맹왕국내에 편입되면서 그것의 장은 귀족으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귀족은 '부'에 대한 상당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실은 이들의 지배를 점차 배제시키는 방향에서 부의 개편을 서둘렀을 것이다.

'부' 체제를 개편하는 작업은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지방을 점차로 왕권의 직접적인 통치체제 속에 흡 수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과의 신속한 연결을 위해 우역을 두고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장이 설치되어 적어도 자급자족의 부락공동체가 무너지고 이전 성읍국가 내지 부 규모의 지역을 연결시키는 확대된 교환경제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지증왕6년에 국내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하고 비로소 군주를 두었으며 동 왕 15년에는 소경을 설치하였다. 지증왕대에서부터 신라국가는 서울과 지방을 확고하게 장악해가는 중앙집권체제로의 개편을 단행해 갔다. 군주는 지방 행정조직이 갖추어져가는 과정에서 주의 장관으로서 군사적 임무를 지닌 군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군사조직의 정비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지방이 중앙왕실의 통치질서 속에 편입되는 과정이 군사조직의 정비와 병행되고 있는 셈이다. 법흥왕 4년에 설치된 병부는 그동안 추구해온 군사조직이 거의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해준다.

불교공인 이후 진흥왕대 전륜성왕 사상과 연관된 화랑도의 개창은 넓게는 귀족연합이요, 좁게는 가문별로 흩어진 군사력을 중앙으로 통합해 가려는 체제정비가 마무리 되어감을 뜻해 준다.
불교가 공인되는 시기에 삼국이 모두 체제정비를 마무리 짓고 있다. 삼국 각국의 체제정비의 성격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귀족연합체제를 이룩하려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면서 그것은 귀족의 각 문호별로 흩어진 군사력을 중앙의 통제 속에 묶으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가 광개토왕 대에 강력한 정복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과정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고국원왕대의 실패는 고구려의 군사력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부족별로 흩어져 있어서 그것의 통솔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삼국이 체제를 정비하는 모습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왕실과 귀족의 연합을 의도하는 것이고 그러한 귀족연합 위에 중앙집권적인 군사체제가 확립되어 나갔다. 공인불교가 전륜성왕 관념을 강력하게 표방하면서 군국불교로 성립되는 것은 당시에 행해진 체제정비의 성격과 표리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공인불교의 전륜성왕 사상은 정복국가를 성립시키면서도 일방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면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실 중심의 사상이지만, 다른 귀족세력과의 연합을 의도하는 성격을 지녔다. 구세보살 사상은 '왕즉불' 사상과는 달리 왕법과 불법의 조화인 동시에 왕실과 다른 귀족 사이의 연합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Ⅲ.맺음말

삼국의 국왕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건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씨족사회 및 부족사회를 기반으로 한 원시적 전통은 청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청산되어야 할 대상속에는 무격신앙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무격신앙에 대체할 수 있는 불교라는 사상체계가 이미 중국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삼국의 국왕들에 의하여 주목되었던 것이다. 다만 당시의 사회적 조건이 귀족 세력과의 일정한 타협위에 이를 성취하게끔 하였었다.

그리하여 불교의 수용은 분명히 한국사의 발전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구실을 담당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신라 사상사 연구 - 고익진 [한국 고대의 불교 사상], 이기백 [고대 한국에서의 왕권과 불교]

초기 한국 불교교단사 연구 - 신종원 [신라의 불교전래와 그 수용과정에 대한 재검토]

한국 고대사론 - 김두진 [ 불교의 수용과 고대사회의 변화]


질문에 대한 답

1. 왕권중심의 귀족정치가 전제왕권으로 이행했을 때 불교가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하였는가?
:이 질문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불교를 왕실이 수용하여 주변의 귀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 정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적절히 불교의 사상을 이용하였는가를 짚어보면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삼국시대 중 신라를 중점적으로 고찰해보겠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당시에 귀족의 사상적 기반은 무격신앙(하늘神을 숭배)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상적으로 한 단계 더 체계화 된 불교를 왕실에서 수용하고, 이를 발판으로 왕실은 사찰을 중심으로 무격신앙을 포용하면서 아울러 왕의 존재를 신성화시킨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도의 아소카왕은 스스로를 전륜법왕이라 칭하였고, 신라에는 법흥왕, 진흥왕 등이 불교식 법명을 사용하면서 불교에 귀의한다. 이와 함께 왕의 존재의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제석신앙의 관념이 등장한다. 이처럼 종교적으로 신성화된 왕은 귀족에 대한 정복전쟁과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데 불교의 사상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왕권중심의 귀족정치가 전제왕권으로 이행하는 데 있어서 왕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사찰의 건립, 석가사리봉안 같은 유형의 또는 미륵불, 제석신앙 같은 무형의 도움을 주었다.

2. 天鏡林은 "소도"가 맞는지?
이기백은 "七處伽藍處"(천경림, 신유림, 천왕사, 영흥사 등)중의 하나인 天鏡林을 고유신앙의 장소, 즉 삼한시대의 소도였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단, 일반적인 학설은 이 곳이 삼한시대에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주술적인 행위가 이루어 졌던 장소라는 것이다.

3. 하필 아도는 왕에게 천경림에 불사를 지어주길 바랬는가? (3쪽 10째줄)
천경림은 앞서 말했듯이 고유신앙의 소도였다. 이 곳에 절을 짓는다는 것은 고유신앙 위에 이 불교를 덮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유신앙을 없앤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을 포함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현재 불교가 고유신앙와 많은 부분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것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4. 불상생계와 전륜성왕은 모순관계가 아닌가?
{팔리어 대장경}에서 무수히 되풀이 되는 도덕적 교훈은 생물의 살생을 삼가라는 말씀이다. 살아있는 생물의 영역, 즉 땅 속의 구더기에서 거대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동물의 학살도 결과적으로는 폭력이 적용되어 있음으로 피해야 한다. 그 누구도 증오감으로, 개인적인 공포로 인해, 부를 축적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 일반적으로 불살생은 불교사를 통해 중요한 윤리적 기준이 되어 왔다. 정치적 영역에서 이상적 정부는 질서를 유지하기에 충분히 강력했으며 번영을 증진시켰으며 나아가 종교 성직자들에게는 특히 관대하였다. 그러나 정치?경제적 영역에서는 선악이 헝클어져 있어서 가능한 한 불상생의 이념을 따르려 하나 완벽하게 현실화한다는 기대가 별로 없었다.
살생은 불교의 최고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자비에 완벽하게 거역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비가 행동으로 바뀔 때 큰 힘을 가진다. 바로 폭력도 허용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폭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호법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기를 허용한다. 여러 경(經)을 인용하면서 무거운 죄악에 맞서는 세력이란 폭력에 호소하여 섭수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상대에 따라 태도를 결정하는 상황윤리를 지지한다.
문제는 <힘인가, 정의인가>가 아니라 상황에 응하여 어떤 힘과 어떤 정의로 통일하느냐에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평화주의를 보살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렇지만 법화경은 그렇게 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만일 어떤 사람이 믿지 않고 이 경전을 훼방하면 모든 세간의 부처종자를 끊어버리거나 (....) 그 사람 죽은 뒤에 아비지옥에 들어가느니라. ([비유품[)

라고 설하여 주술적인 협박의 언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법화경}만이 아니다. {대승열반경} 에서는 국왕인 유덕(有德)왕이 정법을 호지한 각덕(覺德)비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기사용을 계율로서 승인하고 있다.

선남자여 정법을 호지하는 사람은 5계와 위의(威儀)에 걸림없이 칼, 활과 화살, 창을 지녀야 한다. ({복본열반경}, 권3 [금강신품])

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같이 호법의 목적을 위해 계율이 아니라 무기를 허용했던 점은 이 경의 사상이 기독교의 <검을 주러 왔노라> 고 말했던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다만 열반경의 경우에 도장지계( 刀杖持戒)를 설하고는 있지만 무기의 사용은 자위( 自衛)를 위한 부득이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견지에서 <비록 칼과 막대기를 지니다 해도 목숨을 끊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과잉방위를 엄하게 경고하고 있음을 덧붙여 두었다.

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력이고 둘째는 도력(道力)이다. (....) 무거운 죄악은 세력으로 항복받는다. 악은 도력으로 섭수(攝受)한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관용>이라든가, <온화>라고 하면 일단 듣기에는 좋지만, 참으로 정법을 사랑하고 不正(부정)을 증오하는 사람의 자연감정에서 보면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부정을 꾸짖고 부정을 중오하는遁 일이없이 어떻게 정법을 믿고 정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파사현정(破邪顯正) 이라고 말해지고 있듯이 정의를 드날리기 위해서는 삿된법을 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정을 꾸짖을 줄 모르고 불의를 미워할 줄 모르는 것은 도덕적 퇴페와 쇠망의 운명을 면할 수 없다.
부정이나 불법을 꾸짖고, 삿된 법과 싸우는 것은 선(善)의 분노이다. 이것은 탐욕 우치와 더불어일컬어지는 삼독중에 있는 성냄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분노는 분노라도 그것은 선의 분노이다. 깨달음에 비탄(悲嘆)이 있다고 한다면 번뇌에도 착한 번뇌가 없어서는 안된다. 시대의 악과 타협하는 위선적인 관용의 미덕을 고발한 日蓮의 분노야말로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日蓮은 간디식의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다.

목적(불법흥륭)을 위해 수단(전쟁)을 가리지 않는 힘의 모랄과 목적수단을 동일시하는 종교적 윤리의 문제는 목적이란 실천적 의지가 선취하여 내세운 목표인 것이다. 이 행위의 목표실현이 결의될 때 모든 행위가 목표실현에 대하여 수단이 되고, 수단 상호간에 최후의 목적에 대한 접근정도에 따라서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중층적으로 이룩되며 이리하여 목적의 계열이 조직화 된다.
모든 존재는 상황속에서 자신이 그 상황에 어떻게 관계되는가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된다.

가령 평화시에 타국인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 해도 전쟁 시에는 필요악이라 시인되고 애국적 행위로서 칭찬되기도 한다. 생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이미 영구히 회복할 가망이 없는 환자에 대하여 의사가 안락사의 조치를 강구하여도 그것은 흉악범의 살인 행위와 동일한 레벨로 악하다고 간주될 수는 없다.
불교가 자비의 동기에서 5계의 처음에 불상생계를 내세우고 있어도, 어부나 사냥꾼들은 처음부터 이 계율을 지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살생을 정당화하게끔 하는 상황을 최대한도로 줄이는 데 있다.
전륜성왕은 불법흥통을 위해 정법이라는 목적을 갖고 힘으로서 다른 나라를 다스린다. 이것은 타국 침입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부정될 수가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 목적만 올바르다면 그 수단은 2차적으로 생각하여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전륜성왕은 자비를 행하는 보살로서 '구세보살'로 까지 칭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5. '불교가 공인된 이후 제사를 담당하던 무속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였는가?
원래 삼국은 중앙집권화가 되기전에 여러 부족국가의 연합 형태로서 각 부족의 장이 정치적 권력과 제사장의 권위를 동시에 가지고 이를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삼국이 통일국가의 모습 즉 중앙집권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시기는 삼국이 공인되는 시기와 거의 맞물린다.
그러면 중앙집권적 국가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을 때 이러한 여러 제사장은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까
중앙집권적 국가를 수립하면서 국왕은 바로 여러 부족장들 중에서 힘이 센 그리고 여러 부족을 통합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여러 부족장들의 반박을 없애기 위한 대책으로서 그 전의 권리와 비슷한 그들만의 특권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귀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예로 삼국에서 불교가 공인될 당시의 삼국 상황을 살펴보면 삼국의 국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귀족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왕권은 분명히 크게 신장하였지만 귀족의 견제를 받는 일면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화백회의와 같은 귀족회의를 그 근거로 들 수가 있다.
이러한 귀족의 권한은 불교가 공인되는데 있어서 귀족에게 유리한 면이 있어야 했다. 아마도 그것은 윤회전생설이었을 것이다.

윤회전생설은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슷한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해 정치사회적인 특권들을 나면서 보장받고 있다. 이러한 특권은 전사의 선업의 응보라 믿으면서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시키고 골품귀족화 함으로써 불교수용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모습들은 특권적 권리를 보장받는 골품귀족의 모습으로 불교공인후에 변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