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의 발전과 삼국

―'東明型說話'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의 토착 신앙과 제사

발표자: 9645001 강미숙, 9645010 김정은, 9645021 신주현

Ⅰ. 서론

우리는 고대 정치 권력의 형성과정을 '東明王'이라는 하나의 이론을 추구하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고대 및 삼국 시대의 토착 신앙에 대해 '東明型 說話'를 바탕으로 한 고대의 천신신앙, 조상숭배신앙, 지신신앙,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래의 토착신앙을 신봉하였으며 불교가 공인된 후 토착신앙과의 갈등과 마찰을 겪으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東明型 說話'를 근거로 하여 고대사회의 정치권력을 형성하는 이론적 바탕을 고대 사회의 토착신앙과 제사의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동명형 설화에 남아있는 단군 전통의 전승과 천신 신앙

부여시조 동명의 설화나 고구려시조 주몽의 설화는 중국의 문헌에만 남아있는데 부여시조 동명의 설화는 <三國志>裵註에 인용된 <魏略>과 <後漢書>夫餘條에 남아있는 동명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옛날 북쪽땅 高離國王의 侍婢가 임신해서 왕이 죽이려 하니 "하늘에서 달걀 같은 기가 내려와 임신했다"고 말해서 죽이지 않고 가두었다. 나중에 아기를 낳아 왕이 돼지우리에 버리게 했으나 돼지는 입김으로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마굿간에 버렸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은 아기가 하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에게 기르도록 했다. 아기의 이름은 東明인데 왕은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東明은 자라서 활을 잘 쏘니 왕이 두려워해서 죽이려 했다. 東明이 남쪽으로 달아나 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지니 魚鼈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東明이 건너고 나니 魚鼈이 흩어져서 쫓아오던 병사들이 건너지 못하게 했다. 東明은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夫餘王이 됐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설화를 <魏書>와 <北史>에 따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夫餘王이 河伯의 딸을 방에 가두었더니 몸에 햇빛이 비쳐 태기가 있어 큰 알을 낳았다. 왕이 알을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렸더니 소, 말이 피했다. 들에 버리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 나중에 알에서 사내아기가 나와 이름을 주몽이라 했는데,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왕은 그에게 말을 기르게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죽이려 하자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큰 강물에 닥쳐 주몽은 "나는 해의 아들이요, 河伯의 외손"이라 말하니 魚鼈이 떠올라 다리가 되었다. 주몽이 건너고 나니 魚鼈이 흩어져 夫餘兵들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은 紇升骨城에 이르러 고구려 왕이라 했다. 』

이들 중국의 문헌에 채록된 두 계열의 설화, 즉 夫餘의 東明說話와 高句麗의 朱蒙說話가 구조적으로 똑같다는 것은 한눈에 봐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설화에서 宗敎·社會史的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공통점들은 1)여자를 가두었더니, 2)알이 태어나, 3)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4)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해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동명 또는 주몽의 어머니를 '유폐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가 "삼칠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忌했다"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것이다. 동명형설화의 밑바닥에는 단군신화의 유산이 상당히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의 전승은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고 '신령스런 새'를 천신의 아들로 섬겼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령스런 새'는 부여 시조설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구려 시조설화에 남아있다. 앞서 인용한 주몽신화에 의하면 하백의 딸이 낳은 알을 들에 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고 한다. 주몽이 하늘의 대리자로서 '신령스런 새'의 보호를 받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서 동명형 설화에 바탕을 둔 지배자들의 '새'에 대한 관련을 특히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冠帽에 새깃을 달았다는 사실이다. <魏書>는 고구려의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중국의 弁과 같은 折風을 쓰고 새깃을 꽂았다고 말하고 있다. 지배층이 새깃을 꽂는 것은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周書>는 백제 사람들이 조배와 제사 때 "基冠兩廂 加翅"했으나 싸움에 나갈 때는 그렇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가야나 신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는 것은 왕을 둘러싼 귀족층의 무덤에서 나오는 금관이나 금동관에 대부분 새깃이나 새날개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이는 '신령스런 새'는 하늘의 대리자를 표현한 것으로도 보아야 할 것이다. 주몽이 살아 있을 때 麒麟을 타고 하늘 위로 오가며 天政에 참여했다고 <帝王韻紀>는 말하고 있으며, 신라에서도 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것도 흰말이었다고 한다. 말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하늘로 올라갈 때 타고 가는 신령스런 동물로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명형 설화에 등장하는 말도 이 지역의 샤머니즘과 관련돼 있음이 분명하다. 주몽설화에는 또한 동물로 변신하는 초인적 능력에 관해서 언급돼 있다. <東明王篇>에 의하면 河伯이 잉어가 되자 주몽은 수달이 되고, 河伯이 꿩과 사슴이 되자 주몽은 매와 늑대로 변신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神主를 갖고, 마음대로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초능력이 있다는 믿음과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몽설화를 포함한 동명형 설화에 남아있는 이런 초능력은 주술적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적 기능은 단순한 神異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돼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명형설화의 권능 바탕을 둔 고대 지배자들의 司祭로서의 권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지배자들이 呪術을 벗어난 사제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복지를 책임지는 공공의 담당자요, 제도화된 제의의 관리자라는 것으로 분명하다. 단군과 마찬가지로 동명형설화의 권위를 이 땅의 백성에게 베풀던 고대의 지배자들이 '弘益人間'을 그들의 정치이론으로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弘益人間'이란 하늘의 자손이 이 땅에 내려와 베푸는 은총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대국가의 하늘에 대한 신앙 즉 천신숭배신앙을 엿볼 수 있겠다. 우리 나라의 천신숭배신앙은 단군신화에서부터 나타난다. 천신 신앙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삼국시대의 천신 신앙은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천지 신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만물의 주재자로서의 천지 신에 대한 신앙이라 했던 이유는 동명형 설화는 단순한 '하늘의 자손'이 아니라 눈부신 '태양의 자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하늘에서 '달걀 같은 기'가 내려와 태기가 있게 됐다거나, 햇빛을 받아 위대한 영웅이 태어났다는 것이 동명형설화의 특징이다.
신라의 朴赫居世와 金閼智도 해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스런 기운이 번개 빛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羅井곁에 흰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서 보니 자줏빛 알이 있었는데, 말이 크게 울고 하늘로 올라갔다. 알속에서 아기가 나오니 박혁거세였다.』앞서 밝힌 것처럼 말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샤먼을 하늘로 태워주는 신령스런 동물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번개 빛과 紫卵은 해를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이름이 단순히 '밝다'는 뜻인 '朴' 또는 '赫'으로 돼 있는 것도 주목된다. 결국 그의 이름은 동명과 같은 해의 자손임을 말하고 있다. 신라의 또 하나의 시조설화에서 김씨 왕의 시조로 적혀 있는 閼智의 탄생도 그가 해의 자손임을 말해주고 있다. 밤에 始林 숲속에서 닭 우는소리가 있어 날이 밝아 가보니 나뭇가지에 작은 금빛 櫃가 걸려 있었고, 그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櫃속에서 나온 아기가 金閼智였다고 <三國史記>는 말하고 있다. 금빛 櫃는 해를 상징하는 것이요, 닭은 눈부신 태양이 어둠을 쫓는 새벽을 알리는 것이다. 원래 夫餘族의 지배자들은 '解'로써 성을 삼았다고 한다. <三國史記>는 北부여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이며, 그가 하백의 딸을 통해서 나은 아들이 주몽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또 부여왕 '解'夫累가 동부여로 옮긴 뒤 鯤淵이 큰 돌 밑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기를 거둬 길렀으니 金蛙王이라 했고, 金蛙王은 북부여 에서 천제의 아들을 칭하던 해모수의 아기를 가진 하백의 딸을 데려다가 주몽을 낳았다고 했다. <三國遺史>에도 비슷한 얘기가 보이고 있다. 鯤淵이 큰 돌 밑에 있었다는 금개구리도 눈부신 해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해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의 '물의 신령'의 영험은 고대 왕자들에게 중요한 권위의 원천이었다. 주몽설화는 물고기를 부리고 물을 지배하는 권능은 하백의 딸인 어머니에게 귀속시켜 설명하고 있다. 주몽이 '하백의 外孫'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동명설화에도 이러한 설명이 있었을 것이다. 東부여의 金蛙王이 '鯤淵'이라는 물가에서 태어났듯이 신라에서도 혁거세는 蘿井이라는 우물가에서 降誕했고, 閼英이라는 龍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서 하백의 딸은 섬겼다는 것은 '물의 神靈의 子孫'을 주장하는 구체적 결과였다. 백제가 동명왕을 시조로 모셨다는 입장에서 볼 때, 溫祚王母가 '물의 신령'과 관련되는 神異스런 국모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다. 고구려 왕들이 시조를 '하백의 外孫'이라고 주장했듯이 백제의 왕들도 스스로 '물의 神靈의 子孫'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고대의 왕자와, 왕권을 둘러싼 지배층이 일컬었던 샘 또는 물이 뜻하는 社會史的 權能은 무엇이었을까? 말하자면 '물'은 사회의 생존을 좌우하는 농사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땅 위에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적 힘의 원천을 뜻하는 것이다. 夫餘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와 아마도 가야와 탐라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東明型의 權能을 주장했던 고대의 지배자들은 모두 농사를 생존의 기반으로 삼은 사회의 지배자였던 것이다. 그 최초의 전형적인 예는 北부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마가 지거나 가물어서 농사가 안되면 그 죄를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어야 된다는 議論이 일어난다는 <三國志> 夫餘傳의 기록이 그것이다. 물을 지배하는 권능은 농사를 지배하는 권능이었던 것이다. 北부여에서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지배자들은 모두 '물의 神靈'의 靈驗을 대행하는 司祭的 성격을 띤 지배자였다.
그러면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천신 신앙의 제사의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의 하늘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三國史記>제사지 <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10월에 제천의례를 행하는데 그 제의는 거국적인 대회이며 그 이름은 동맹이라 하였다. 그 제의명인 동맹은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과 관련이 있다. 天의 자손인 동명에 대한 제사의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계층성이 매우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왕이 제의를 주관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보여 수직적인 지배구조를 과시한 것이다. 백제에서도 천신에 대한 숭배가 대단하여 <삼국사기> 제사지 에서는 중국의 각종 문헌을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제사의례가 행해진 달을 보면 대부분이 정월이나 2월이다. 이것은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동왕 38년이나 모대왕 11년에는 10월에 제사의례가 행해졌는데 이것은 삼한의 10월제와 같은 시기로 농경을 마친 수확 의례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을 보면 삼한의 제천대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천신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사대적 관념의 투영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제사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신궁에서 천지 신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시조 묘가 오묘로 변화하고, 신궁이 사직 단으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천지신을 숭배하는 신궁이 설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신궁의 설치는 중앙통치력 확대과정이 일환으로써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내의 체제정비 및 왕권강화와 대외적 국가의식의 성장은 지증왕 대에 이르면 더욱 강고해진다.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의미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체제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증왕 대의 신궁제사를 토착신앙 자체내의 사상적 통일정책의 성공으로 간주한다면 불교 공인 이전에 왕실의 노력으로 토착신앙 내의 사상적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제천의례는 종교적인 행사일 뿐만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고대 사회의 조상숭배신앙과 지신신앙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조상숭배신앙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시조묘'에 대한 기록이다. 고구려의 시조 묘는 시조 동명성왕이 묻힌 시조 묘 주변의 사당을 의미하며 백제의 시조 묘는 동명 묘와 구태묘 두 계통으로 전한다. 신라의 시조 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묘로써 일년에 사시로 이를 제사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시조 묘에 대한 제사의례는 어떠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天의 子 또는 天의 孫이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시조 묘를 세우고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삼국 및 남북국 시대의 지신신앙은 땅과 하늘에 대한 신앙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며 신라는 특히 산악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를 지냈고 풍년이 들었을 때에도 행하였다.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3.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전래가 늦은 것은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적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천경림, 삼천기, 용궁남, 용궁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 등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들이다. 사원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으로 여기에 불교 사찰이 들어섰던 것이다.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 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Ⅲ. 결론

이상에서 '東明型 說話'를 바탕으로 한 고대인들의 천신·지신·조상숭배,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고대사회 지배자들이 동명형설화의 권능을 바탕으로 한 사제로서의 권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해와 물의 자손이라 하여 지배자의 권위를 반영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 균형과 생존을 위해 농업생산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지배자들이 주술의 범위를 벗어난 사제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사회전체의 복지를 책임지는 공공의 담당자요, 제도화된 제의의 관리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지배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불교로 바뀌었으며 토착신앙은 민중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처음에 불교와 토착신앙은 갈등을 겪었으나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되어 불교를 받아들인 지배자들도 토착신앙의례를 지속하였다. 이러한 토착신앙의 구조 안에서 불교의 수용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형태로 볼 수 있겠다.


참고자료

『한국고대사회문화연구』 「동명왕편에 보이는 고대사회」정경희

『한국사4』 「토착신앙과 제사의례」최광식

『한국고대사회연구』「동명왕편에보이는 神母의 성격」김철준

『고구려 민족형성과 사회』「신화와 신앙」이 옥


◎질문과 대답

1.동명형 설화의 중심적 기능

설화는 풍속을 고정시키고, 행위의 모범을 설정하고, 어떤 제도에 위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활동의 모범적 모델을 고정시켜 주는 기능과 사회통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동명형설화>는 고구려 사람들에게 행위의 모범이었고, 가치의 기준이 되었으며,국가가 갖는 위엄을 상징하는 구실을 했을 것이다.설화는 그것을 향유하는 집단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준다.고구려 광개토왕의 업적을 새긴 비문이 <주몽신화>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이 신화가 고구려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해주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즉 설화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씨족이나 부족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준다.

2.샤머니즘 제의는 왜 쇠퇴하는가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시대에는 나무나 동물등 자연을 숭배하던 샤머니즘이 사람들에게 크게 인식되었지만 국가가 형성되고 그에따라 체계적인 종교이념이 필요함에 따라 샤머니즘은 쇠퇴되었다. 샤머니즘은 시대성을 뛰어넘을 구체적인 체계이념이 없었던 것이다. 비록 샤머니즘이 쇠퇴하였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그 잔재를 볼 수 있다.

3.동명형 설화에서의 여성의 역할

동명형설화에서 여성의 역할로는 유화부인이 물의 신령 하백의 딸인 것과 혁거세의 부인 알지부인이 우물가에 있었던 것 등을 보아 물을 상징하는 것과 동명왕이 남쪽으로 도망갈 때 두고간 보리씨앗을 유화부인이 비둘기를 시켜 전해 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화부인은 곡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물과 보리는 당시사회의 농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화부인은 풍요의 상징으로 여길 수 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말을 신성스러운 동물로 여기는데 동명에게 왜 말을 기르도록 명했나?

그것은 옛날에는 말을 신성스런 동물로 여겨 말을 기르는 것을 신성스런 직업으로 여겼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말을 기르는 일은 아주 천한 직업으로 여기게 되었다.그래서 부여왕이 주몽 즉 동명에게 그 천한 직업을 주었던 것이다.

※부여족의 지배자들은 왜 '해'로써 성을 삼았나?

'해' 즉 '태양'을 성으로 삼은 것을 알수 있는데 이것은 농업이 그 시대에아주 중요한 것으로 농업을 하는데는 '태양'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또한 "해'씨의 조상을 '해모수'로 보고 자신들의 권능을 나타내면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신궁이란?

신라시대에 시조를 제사하던 성소이다.신궁에서의 의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새로 왕이 즉위하여 그 다음해 또는 후년 봄에 친히 신궁에서 거행하는 제사인데, 이 의례는 신왕의 즉위의례로 해석되고 있다.이 밖에도 신궁에서는 매년 봄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농경의례등 각종 국가차원에서의 제사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신궁의 설치를 교사를 비롯한 중국의례 내지 유교의례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와, 기존에 있던 시조묘가 천변지이에 대한 효험이 없자 새로운 종교적 성소를 필료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신궁의 설치가 중앙통치력 확대과정의 일환으로 설치되어있는데 신궁의 기능?

천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왕이 권력을 잡을 때 천지신의 자손임을 주장하여 통치를 정당하기 위해서 즉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왕권강화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기능이었다.

※토착신앙과 불교수용하는 단계에서 토착신앙과의 때립을 갈등을 겪었으나 융화되어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켰는데 불교와 토착신앙의 문화접변의 예를 들어 주십시오.

불교가 들어 왔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있는데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