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와 갑오농민전쟁

Ⅰ.머리말

본 발제문에서는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 상황을 살펴보면서 1862년에 나타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연장선상에서 1894년에 발생한 갑오농민전쟁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 상황과 임술농민항쟁의 발생 원인

1) 생산력 발달에 따른 농민층분해와 계급대립

19세기 후반 봉건사회는 사회모순이 전면화 되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토지의 소유권을 둘러싼 소작인의 대(對)지주 항조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토지의 경영 및 향촌내 유통권 장악과정에서 야기된 부농.상인.고리대업자 대 빈농의 이해관계의 대립이 있었다. 이와 함께 국가의 민에 대한 경제적 지배의 표현인 부세제도의 모순과 재지(在地)세력의 불법적인 향촌지배라는 현상적인 문제가 표출되었다.

19세기 사회경제구조의 변동은 끊임없는 농법개량과 농업생산력의 발달,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의해 야기되고 있었다. 특히 선진적 미작지대이고 유통경제가 크게 발달했던 삼남지역에서 농민층분해는 급속히 촉진되었다.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양극분해현상은 토지소유의 분화를 심화시켰다. 이와 함께 농법의 발달과 노동력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를 활용한 지주.부민들의 경영확대가 나타났다. 결국 부익부 빈익빈으로 표현되는 농민층분해로 인해 향촌내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소농경영의 영세화와 자영농민층의 몰락현상이 두드러졌다. 농민층의 구성비율을 살펴보면 지주로 지칭할 만한 경우가 5퍼센트에 불과하고, 소작농이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빈농들은 극히 적은 양의 농업소득으로 과도한 지대와 부세(賦稅)를 지불했다. 여기서 봉건지주와 소빈농.자가인 사이에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계급대립은 첨예화되었고 고율의 지대수취에 대항한 항조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농민층 내부에서도 부농과 빈농 사이의 대립이 야기되었는데 특히 부농층의 경영확대, 대지주의 차지에 대한 경쟁에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는 봉건적 생산체제 내의 갈등인 작인 빈농과 지주 사이의 계급대립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빈농들은 생산과정의 소유권을 매개로한 착취로부터 향촌내 유통과정.재생산과정까지를 포괄하는 여러 모순을 스스로 담지하고 있는 계층이었다.

2) 국가의 조세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

조선봉건국가는 방대한 관료제, 군사조직의 운영, 외교 등 국가의 여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재정을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제수취체제를 통해 마련했다. 조세는 국가가 일반농민의 잉여생산물을 취득하여 경제적 지배를 실현하고 있다는 표현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국가권력이 부세수취가 이루어지는 향촌사회 운영에 관여하는 근거가 되었다. 부세문제는 농민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세량의 격증현상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총액제로 운영되는 조세제도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총액제는 원활한 조세수취를 도모하는 관의 이해만이 반영된 것으로, 변화하는 향촌사회의 현실인 정확한 고을사정과 백성의 여건을 적절히 수렴할 수 없었고 신축성 있는 수세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관의 재정적 요인에 의해 조세 중과의 문제도 발생하였고 조세제도 운영상의 문제로서 수세담당자였던 수령과 관속들의 중간 횡령이 커다란 폐단으로 제기되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방만한 수취체계와 이를 통제할 수 없었던 행정통치능력의 위약성(危弱性)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화폐사용이 보편화됨에 따라 이들의 탐욕적인 치부욕은 더욱 자극되었으며 부정의 방법 또한 다양화되고 규모도 증폭되었다.

근본적으로 빈농의 담세능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경제력에 상관없이 동일한 비율로 부과되는 조세로 인해 빈농들은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되었다. 빈농에 대한 조세징수의 강제야말로 국가의 폭압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부세문제를 중심으로 봉건적 지배관계에서 나타나는 제반 현상적인 문제점을 모두 지적했다. 그런데 이 시기 기본모순은 봉건지주와 작인간의 대립이었다. 그렇다면 부세제도의 문제가 농민의 토지소유의 문제보다 우선적으로 제기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조선 훅시 지주제의 독특한 특징인 분산성 (토지소유의 분산성과 이에 따른 전호농민의 고립적 분산성)으로 인해 지주제에 대한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 그것이 조세수취관계에 대한 저항 속에 내포되어 표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도결은 모든 조세가 금납화되고 토지로 집중되면서 전세와 대동세 외에 세를 따로 거두지 않고 한꺼번에 결수로 묶어서 관에서 직접 거둬들이는 조세수납체계를 일컫는다. 도결의 운영과정에서도 폐단과 계급간의 상충된 이해관계가 발생한다.

전정의 문제는 각종 조세가 토지에 집중되는 착취방식의 변화를 통해 봉건국가의 전통적인 인신지배방식이 점점 이완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한편, 화폐납이 일반화되는 추세 속에 고가의 결가가 부과될 개연성이 컸음을 동시에 표출시켰다.

환곡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환곡은 소농경제로 운위되는 사회에서 그 재생산을 보장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본래는 진대(賑貸)라는 형식의 사회경제적인 측면이 강조되던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환곡은 점차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관청의 재정확보 방안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이 시기 부세문제는 단지 운영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적인 모순을 제도내에 담고 있었다. 본래 중세 부세제도는 봉건적 신분제와 저급한 상품화폐경제를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부세제도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의 대대적인 변화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파행성을 드러냈다. 우선 신축성이 결여된 총액제하에서 변동된 기저의 읍세민정(邑勢民情)이 반영되지 못한 채 불특정 농민에게 편중 부과되었던 점을 들 수 있고, 발달된 화폐관계에 매개되어 환곡 식리를 통한 농민의 수탈이 급증되는 측면이 나타난다.


3) 사대부 토호들의 불법적인 향촌지배

19세기에 들어와 노론 일당제가 장기화되면서 서울을 근거로 한 명문벌족이 형성되어 타 당파의 중앙진출을 봉쇄함에 딸라 지방에 근거를 둔 정치집단은 더 이상 형성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방의 사족들은 그 권위를 상실하고 향반.토반 등 지방차원으 유력자로 전락해갔다. 토호라 일컫는 사대부들은 봉건국가로부터 향촌통치를 이념적으로 위임받았음을 강조하고 수령의 비호하에 불법적인 지배를 행했다. 사대부 지주들의 계급적 지배는 지배층의 사상이었던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논리 정연하게 뒷받침되었으며, 실제로 봉건적인 신분을 강조하는 향교.향약, 봉건적 법체계의 운영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농민을 계도, 교화하여 현존하는 봉건적 신분제와 지배체제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무단적 지배를 행했던 토호들은 전면봉기 과정에서 농민들의 습격을 받아 그 집이 부서지고 불태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4) 1862년 임술농민항쟁

당시 빈농들은 높은 생산력과 신분변동에 조응하여 사회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첨예한 계급모순을 체득하고 있었는데, 국가에 의한 부세수탈과 사대부 토호에 의한 무단적인 향촌지배는 이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 결국 체제적 모순의 담지자인 빈농들은 주관적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계급적 인식정도를 떠나서 반봉건항쟁의 대열에 나섰던 것이다.

1862년 임술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 이래 계속된 생산력발전과 계급구성의 변화라는 토대의 변동에 조응된 것이었고, 체제적 모순의 담지자인 농민들이 중세봉건사회를 부정하며 전개한 변혁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봉건사회 해체기의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가) 농민항쟁에 대한 봉건정부의 조세대응책

봉건정부는 농민봉기의 원인이 전적으로 삼정문란에 있다고 천명하고 삼정이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삼정이정책 자체는 원칙에 대한 천명에 그쳤을 뿐 이의 구체적인 시행을 강제하는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또한 기본모순이 토지소유관계를 둘러싼 계급대립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부분적인 문제점의 해결에만 관심을 둔 것이었다. 삼정이정책은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실시가 유보되다가 다시 본래의 제도로 환원되었다. 삼정이정절목이 반포되고 곧 폐지되는 과정에서 농민봉기가 재차 유발되었다. 봉건정부는 체제붕괴의 위기에 직면하자 봉기과정에서 제기된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것처럼 대규모 개혁책을 모색하다가 수습국면에 들어서자 이를 기민하게 철회함으로써 재차 농민들을 기만했다. 이는 봉건국가의 대응책의 허구성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었다.

나) 1862년 농민항쟁의 결과 및 성격

빈농들이 지향했던 사회변혁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지주제개혁과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는 반봉건 투쟁의 전반적인 강도와 수준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고, 봉건정부의 입장 또한 농민들의 대대적인 항쟁에도 불구하고 지주 양반가의 이해를 접어둔 채 지주제를 해체시킬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하였다. 그 대신 사회모순을 균등한 조세부과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봉건정부는 농민항쟁으로 야기된 체제붕괴의 위기상황을 삼정이정책의 시행을 통해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수탈의 잠정적인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삼정이정책은 농민들이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인 성과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삼정이정책이야말로 당면한 사회모순을 부분적이나마 해결하는데 있어서 봉건정부가 제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응책이었다.

2. 갑오농민전쟁

1. 조선봉건체제 해체기로서의 19세기

1) 19세기 사회변동과 반봉건의 움직임

19세기로 접어들자 그전부터 성장해오던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각 분야별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체제를 지탱해주던 중심적 고리들의 이완.붕괴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당시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는 봉건지배계급에 대한 이러한 투쟁은 보다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투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도 최고의 형태를 보인 것으로는 관서농민전쟁-홍경래란-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면서 당시 성장하고 있던 사상인(私商人)층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몰락양반들이 연합하여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것은 그후 농민투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쳐 농민투쟁의 일대 전개를 마련하였다.

19세기 중엽을 지나자 각 지역과 각 계층별 저항은 더욱 빈번하고 강력해졌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소빈농층의 봉기였다. 소빈농층이야말로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들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기본계급으로서 조선봉건체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층세력이었다.

1876년(고종13)에 강요된 개항을 맞이하자 농촌경제는 더욱 무너져 내렸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농민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에 농민봉기와는 달리 명화적(明火賊)이라는 일정한 조직을 갖춘 농민도적떼들이 경향(京鄕)각지에서 출몰하여 부호의 집을 털기도 하고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봉건정부는 민씨 집단의 부패 타락한 정치로 인하여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2)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부상

조선후기 민중사상은 19세기의 커다란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변혁세력의 적극적 활용에 힘입어 지배계급의 성리학에 대항하는 기층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중요한 몫을 하게 되었다. 이는 곧 동학으로 연결되고, 또 갑오농민전쟁 당시 일반 농민군의 정서와 상당히 일치된 변혁론이었다는 점에서 19세기 조선사회의 특질을 발견하게 된다.

3) 동학의 등장과 의미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과 동학을 결부시켜 그 명칭을 '동학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동학민중운동'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농민전쟁과 동학과의 깊은 관련성과 농민전쟁에 끼친 동학의 기여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1894년의 농민전쟁을 명명하는데 있어 동학을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먼저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던 1860년 농촌사회는 봉건사회의 모순과 농민층 분화로 그 안정적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혼란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은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고, 이런 틈을 타 사호일각에서는 서학이 기층민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최졔우는 서학을 하나의 사상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당시 기층민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여러 사상들을 정리하였다. 이와같이 여러 민중사상을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인간생활 중심의 질서를 내세움으로써 지배구조의 전도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동학은 기층민의 염원을 반영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면서도 종교적 입장에 안주하여 현실의 가파른 모순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당시 봉건체제 속에서 불온한 것이었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2. 척왜양운동의 전개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1893년은 반외세의식을 기본으로 하는 척왜양운동이 조선의 각지에서 일어났다.

먼저 공주와 삼례에서는 지방수령들이 '동학은 사술(邪術)이다'라는 이름 아래 교도들의 돈을 빼앗거나 관아에 잡아가곤 하였다. 이에 동학의 남접계 서인주(徐仁周)는 1892년 10월 서병학(徐丙鶴)과 함께 최제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교도들을 공주에 모이게 하여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글을 올렸다. 이것이 공주집회였다. 이들의 교조신원운동은 단순히 신원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농민들이 기다리고 있던 대사회운동의 실마리를 풀어가는데 그 뜻이 있었다.

한양과 지방에서는 1893년 1월 서인주.서병학이 최시형을 찾아가 한양 궁궐 앞에서 상소할 것을 제의하였다. 최시형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북접계의 복합상소가 진행되고 있을 때 남접계는 척왜양의 괘서를 한양 거리에 내걸고 반외세(반봉건)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 괘서는 교조신원을 간청하는 북접계의 온건한 어조와는 전혀 달랐다. 척왜양의운동은 지방에서도 계속 이어져 지방거리마다 방문이 나돌았고 모두 척왜양을 부르짖었다.

전봉준은 다른 지역에 사람들을 모아 교단쪽의 운동을 반외세(반봉건)의 정치운동으로 유도하려했다. 이리하여 충청도에서는 보은에서, 전라도에서는 원평에서, 경상도에서는 밀양에서 각각의 집회-삼남집회-가 동시에 열리게 되었다.

3. 사발통문과 고부봉기

1)사발통문의 결의사항

당시 고부는 주변에서 가장 번성했던 고을이었다. 이곳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해왔고 그는 부임 초부터 온갖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전봉준은 네가지 결의사항을 포함하는 격문을 만들어 고부군내 각리 이장 및 집강들 앞으로 띄워 보냈다.

2) 고부봉기

전봉준은 군중들과 함께 고부관아로 진격하여 악덕지주와 조병갑에게 기생해사던 자들의 집을 습격, 소각하였고 억울하게 갇힌자를 풀어주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기를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정황이 중앙에 알려져 조병갑은 책임을 추궁당하고, 조병갑의 후임으로 용안현감 박원명을 임명하였다.

4. 제1차 기병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무장에서 4천여 명의 농민군을 모아 호남창의소라는 이름 아래 창의문을 선포하였고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의를 위해 일어날 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으 본격적 시작으로서, 이른바 3월 제 1차 기병이었다.

5. 폐정개혁안과 집강소 통치

청.일 양국에 군사주둔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맺은 전주화약에 따라 농민군이 집강소를 통해 실시한 폐정개혁안은 봉건적 잔재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조선봉건사회를 지탱해주던 중심고리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호로의 기틀을 잡아주는 방향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농민적 토지소유의 지향을 포함하는 봉건적 경제의 불평 등을 제거하는 내용, 봉건적 신분차별로부터 해방시키는 내용, 위의 두 봉건적 모순들이 뭉쳐서 나타나는 정치적 문제로서 중앙집권층 및 집방 탐관오리의 축출에 대한 내용이다. 이러한 폐정개혁안의 성격은 객관적으로 근대자본주의적 개혁과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6. 제2차 기병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봉건잔재를 척결하기 위해 농민군에게 봉기할 것과 삼례로 모이라는 통문을 띄웠다. 삼례에 모인 전봉준 직속의 농민군은 스스로 의병이라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삼례에 투쟁본부를 설치한 전봉준은 재차 기병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통문을 각 지방에 보냈다. 이즈음 농민군의 봉기는 호남지방뿐만 아니라 충청도.경상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 등 북쪽지방으로까지 번짐으로써 조선전역에서 항쟁의 시작되었다.

농민군의 이러한 봉기는 정부.일본 연합군의 반격으로 12월을 고비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894년의 농민전쟁은 막을 내렸다. 농민전쟁 기간동안 쌓아올린 새로운 사회로의 사회.경제적 기반, 이를테면 근대 민족사회를 여는 조건들이 정부.일본 연합군의 학살 .파괴로 좌절되어 갔다.

7. 농민전쟁의 성격과 의의

1) 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농민전쟁의 주도세력으로는 전봉준 등으로 대변되는 호남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잡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척왜양운동 때부터 세력화되어 고부봉기를 거쳐 본격적 농민전쟁 단계에 이르기까지 농민전쟁의 기본동력과 결합하여 농민전쟁을 이끌었다.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의 사회.경제적 지향은 농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확보와 나아가 소상품생산자로 성장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이에 장애되는 사회적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주체세력의 정치.이념적 지향은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토양 속에서 출발하여 척왜양운동기에는 초보적 반외세의식과 민회라는 서구정치제도에 대한 인식까지 보이다가 1착병을 거쳐 집강소 농민통치 및 청일전쟁을 경험하고서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국내외문제와 2차기병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봉건체제를 지양하고 자본주의적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근대민족주의로의 지향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2) 농민전쟁의 의의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개항 이후 조선사회에 노정된 내외적 모순의 총체적 폭발로 일어났으며, 전봉준계열이라는 주도세력의 오랜 준비와 소빈농층의 끈질긴 투쟁이었다. 봉건사회의 말기적인 모순들이 농민들을 내리누르고, 세계자본주의 열강까지 농민들을 조를 때 안팎의 거대한 장벽들을 서로의 연대의식과 자신들의 독자역량으로써 완전히 돌파해버리고 근대민족사회의 터전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Ⅱ.맺음말

19세기 후반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사회모순이 전면화 되었다. 농민들은 임술년 이후 갑오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50여차례의 농민항쟁을 통해 제반모순에 대한 문제를 거듭 제기하였다. 19세기 후반 농민들의 항쟁은 이처럼 다양한 계급모순 속에 고양된 농민들의 의식과 외부 조직체계 (종교결사)의 동움에 의해 전국적인 항쟁으로 그 외연이 확대되었다. 체제적 모순의 담지자인 농민들은 점차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저항의 주체로서 결집되어 갔는데 이같은 계기는 바로 1862년의 전국적인 농민항쟁에서 마련되었고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으로 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