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3세기 민의 동향

Ⅰ. 머리말

고려시대는 무인집권기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내적수탈과 외적수탈이 이중적 형태를 가짐으로써 외압에 의한 민족모순이 새로운 사회모순으로 추가되었다. 본 발제문제에서는 12-13세기의 농민운동을 통하여 소극적인 저항의 유망과 적극적인 저항의 항쟁을 살펴보고 농민운동의 배경.전개.변화등을 국가-지배층-민이라는 틀속에서 규명해 보고자 한다.

Ⅱ.본문

1.대몽항쟁기의 민의 동향

1)민항쟁의 배경

대몽항쟁기의 민 항쟁의 배경으로는 12세기 이후 농민항쟁에서 제기되었던 사회경제적 모순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던 점과 그러한 가운데 최씨정권에 의해 단행된 강화천도를 들 수있다. 우선 12세기 전국적인 농민.천민의 항쟁은 향촌에서의 본관제적 질서를 가져온 재생산 기반의 파괴와 토지탈점현상, 지방 수령의 가혹한 수탈등의 요인으로 일어났다. 이시기 농민ㆍ천민들의 항쟁은 지배층에게 타격을 주었으나 항쟁의 분산성과 사회인식의 저급성, 무인정권의 강력한 진압에 의해 사회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한편 새로운 최씨정권은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개량적 시책을 병행하는 가운데 민의 봉기는 계속되었다. 대몽항쟁이전 최씨정권 초반 민봉기의 양상은 대체로 수취체제의 과중과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봉기였다. 이러한 봉기들은 최씨정권으로 하여금 정권유지에 위협을 느끼게 하였고 따라서 최씨정권은 정권안정을 위한 무력기반으로 야별초(野別抄)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군사조직의 편성은 대내적으로 농민봉기와 대외적 긴장 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체제는 정국안정을 유지하면서 민의 역역(力役)을 적극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이러한 최씨정권의 자위책으로 민의 봉기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지만 민의 저항은 계속되는 실정이었다. 최씨정권은 고종 18년 (1231) 몽고의 본격적 침입에 대항하여 삼군(三軍)을 동원하는 한편 지방의 반정부세력인 초적(草賊)을 유치하여 각지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나 적극적인 대몽전쟁 수행보다 오히려 몽고와의 화의를 추진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다 최씨 정권에 의해 천도의 의견이 개진되면서 고종 19년 (1232) 6월에 천도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최씨정권의 대몽전쟁 수행을 의심케 했으며 최씨정권에 의한 대몽전쟁은 강화천도를 기점으로 해서 그 성격이 크게 변화되었다.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의도는 이미 거란의 침입시 내적 모순에 의해 유발되었던 사회적 위기의식에 대한 역사적 경험과 몽고에 대한 인식속에서 내재하고 있었다. 즉 전자는 최씨정권이 신종 7년 동경(東京)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를 강압적으로 진압한 이후 국내의 동향에 매우 민감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고종 3년 거란 침입시 대외정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원성을 사기도 했고 전란의 와중에 국내의 정적들에 의한 반발로 정권적인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따라 최씨정권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사병 양성을 적극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대몽항쟁기에 민의 공에 대한 정권이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봉기세력에게 받아 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 방책으로 민을 항전에 끌어 들일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민들의 불만을 해소 시키는 시책은 펴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몽항쟁 초기의 정부군에 협력한 일반민과 초적들의 적극적인 항쟁은 지속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13세기 민의 저항이 12세기 사회 모순에 대한 저항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12, 13세기 통치질서 혼란으로 생긴 민의 불안감과 지배층의 이율 배반적 시책으로 몽고 침입초기 잠시 잠복되었던 집권층과 피지배층의 상대적인 이해관계가 표면화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강화천도 이후의 민의 동향을 살펴보면 강화천도 이후 민은 대정부 항쟁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 외세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민의 봉기는 대부분 몽고가 대거 침입한 전후에 집중되었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강화천도로 인하여 민심은 중앙 정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강화천도 이후 민의 굶주림은 극도의 상태였는데 이러한 상황속에서 최씨정권이 성립된 이후 침체되었던 봉기세력들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던 것이다. 한편 반 정부적인 민의 항쟁과 더불어 적극적인 대몽항쟁도 벌이고 있었다. 민에 의한 적극적인 대몽항쟁의 원인은 몽고병의 무차별 침략행위 하에서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고종 18년 (1231)에 "성중에 돌입하여 그 고을의 관원을 죽이고 성을 도륙하여 가옥에 모조리 불을 질러 닭과 개까지 죽였다" 란 기록은 1차침입이 민의 상황이었는데 1차 침입에서 6차 침입때까지 이러한 현상은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에 의해 일반민들은 자신과 향촌 사회의 방어를 위해 침략자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몽고와의 6차례의 침입에 맞서서 적극적인 항몽대열로 나서게 되었다. 다음으로 최씨정권의 몽고에 대한 인식은 이미 몽고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등 나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만약 영접하지 아니하면,저들은 반드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어찌 적을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대적하며,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대적 하겠습니까"라는 주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결국 이러한 자세로 고종 18년 몽고의 침입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최씨정권은 저간의 사정과 몽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쟁준비보다는 우선적으로 자신의 정권보위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대륙에서의 세력판도변화에 대한 효과적 대응을 위한 외교적 그리고 최씨정권은 대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연대를 맺고 몽고와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것은 전쟁초기에는 효과적 전투를 했지만 점차 몽고군의 강력한 침공으로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최씨정권의 전쟁에 임하는 태도는 강화천도와 같은 변칙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강화천도의 다른 의도는 12세기이래 계속되어진 민의 항쟁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예컨데 천도직후 이통의 봉기 진압, 충주봉기 진압 역시 지배세력의 근본적 모순을 외면한 채 항몽에 전과를 세운 민들을 강압적으로 진압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최씨정권은 몽고에 대한 효과적 전쟁 수행보다는 반정부 성향을 띤 봉기세력에 대한 견제를 중시 하였다.

결국 최정권에 의한 기만적 강화천도는 이전의 소강국면에 있던 민의 봉기를 보다 적극적 항쟁 세력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2).민항쟁의 전개

대몽항쟁기 민의 동향은 강화천도를 전후하여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민의 대몽항쟁 초기에는 정부와 결합하는 등 적극적 양상을 띠고 있는데 초적의 전쟁참여 예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적은 일반적으로 지배층의 토지 탈점과 과중한 수탈에 저항하는 집단이었는데 강화천도 이전 이들은 스스로 항복하거나 우군에 충당되어 대몽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는 12세기 이래 계속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항하여 봉기한 초적들이라 할지라도 몽고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하에 일반 반정부 투쟁을 유보하고 최씨정권과 함께 대몽고 투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시대적 분위기도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 이것은 대몽항쟁기에 민의 공에 대한 정권이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봉기세력에게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 방책으로 민을 항전에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시책은 펴지 못하고 있었다.












3) 민항쟁의 변화

13세기 대몽항쟁기에 민의 항쟁은 반정부, 반몽고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13세기 후반에 접어 들면서 주목되는 사실은 투몽현상이었다. 이것은 민에게 있어서 강도(江都) 정부의 가혹한 수탈과 대몽항쟁 방식에 대응하는 행위였는데 즉, 토지 탈점으로 인한 토지 소유관계의 변화와 과중한 부세수탈을 피하고 생활의 근거지인 향촌을 보호하려는 민의 대응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투몽행위는 14세기에 몽고 영역으로 인구가 대량 유출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 원간섭기의 민의 동향

1270년 (원종11년) 몽고와 강화가 이루어져 개경으로 환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무신 정권은 붕괴되었고 왕정이 복고 되었다. 그 과정에서 출륙입조(出陸入朝)를 반대하는 무신정권은 제거되고 그들의 손발인 동시에 항전 주력군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삼별초의 무력해체와 작업이 진행됨으로써 삼별초의 저항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유망 농민층의 대거 참여와 협조속에 이루어 졌는데 이는 외세에 의존하는 고려 정부의 태도와 참여와 협조속에 이루어 졌는데 이는 외세에 의존하는 고려정부의 태도와 이전 시기 항쟁의 경험에서 오는 민의 사회의식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몽고와의 강화뒤에 이어지는 원간섭기도 이전 시기의 사회경제의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채 원에 보낸 공물의 부담까지 겹쳐 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들은 권세가의 농장으로 들어가거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유망하는등 새로운 생존을 모색하였다. 특히 이시기에 유망이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유망 지역도 고려 밖의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다.

1) 유민 발생의 배경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게된 이후 민의 동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유민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민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의 호구 파악에서 빠진 민호(民戶)를 말하며 농업경제가 주업인 전근대사회에서는 농민이 경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수탈이 강화되거나 천재등이 일어 났을때에 발생한다. 민의 유망은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대해 벌이는 소극적인 저항의 형태이다.

①대원관계

먼저 대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지출이 증가하여 민에 대한 수탈이 증가하였다. 이런 재정지출은 원이 고려의 지배층을 예속시킨 뒤 그들을 이용하여 삼별초 정벌, 일본원정 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징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민이 고려에 설치된 원 부속기관과 대원관계상의 권력기관으로 투탁하여 부세 수탈에서 벗어나 고려의 요역부담에서 면제 되었다. 이와는 달리 고려의 부세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 원으로 들어가 버릴수 있었던 상황도 민이 유망하는 요인이었다.

②토지소유의 문제

국가의 대해 조용조(租庸調)를 내지않는 대토지 소유로 당시 세력자들은 유리민을 불러 모아 처간이라하여 그 노동력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는데 이들 처간은 불법적이긴 하지만 삼세를 내지 않았다. 또다른 배경은 대토지 소유의 발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농민경리가 영세해지고 있었다. 사전주(수조권자)가 그 수조권을 바탕으로 전조수취를 강화하거나 한 토지에 수조권이 중복 지급되어 농민의 토지 소유권을 제약하고 나아가서는 그 소유권까지 탈취하는 것도 민을 유망하게한 배경이 되었다.

③부세수취의 문제

고려 전기의 조, 용, 조 3세가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고 있었으며, 용,조에 해당하는 상요(常搖) ㆍ잡공(雜貢)이 호(戶)를 매개로 하여 이중으로 수취되고 있었다. 또 공물의 경우 유통경제의 발달을 이용하여 권력과 관계 있는 자들이 선납(先納), 대납(代納)하고 해당 군현에서 그 액수의 배를 수취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민이 유망하는 현실에서 부세액 외에, 부세를 군현단위로 공동 납부하는 수취의 구조나 권세가의 납세 거부도 민의 부담을 과중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2)민의 동향

앞에서 살펴본 배경으로 하여 유민은 향리, 백성, 공사노비 모든 계층에서 발생했다. 그 중에서 고려전기에는 향촌의 토착세력으로 실질적으로 지방 지배를 담당하던 향리층이 유망의 한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이 이 시기 유망의 특징이었다. 유민은 권세가들의 농장으로 들어가 권력에 의지해서 공민으로서 져야 하는 부세 수탈을 벗어났다. 한편으로 쌍성, 여진, 요양, 심양들 원의영역으로 유망하여 고려의 부세수탈을 완전히 벗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국외로의 유망이 광범했던 것도 이 시기 유망의 한 특징이다. 이외에 침탈에 항거해서 반란하거나 초적이 되어 항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항쟁은 대원관계의 진행으로 수탈이 집중된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3)정부 지배층의 대책

①토지문제에 대한 대책

정부 지배층은 토지문제를 국가재정의 확보라는 시각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민이 경작할 토지를 보장해주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賜田)문제, 과도한 사패전 지급문제, 전의 침탈을 해결하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사적 소유의 발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왕 측근세력, 공신, 부원세력에게 사패전 지급문제, 전주의 침탈을 해결하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고려정부는 전쟁후 황폐해진 토지복구와 권농책으로 지배층에게 유리한 토지제도를 채택하고 그들의 토지소유를 인정하는 방안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그 자체로서나 또 사패를 빙자한 겸병이 성행하는 것으로나 국가의 재정수입이 감소되는 주요한 한 원인이었다. 이러한 사패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사패전을 몰수하고 그 제도를 폐기하는 것이었겠으나, 고려정부는 이를 수행할 수 없었다.

②부세수취 문제에 대한 대책

부세수취 문제에서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여 재정수입을 확보하고, 부세를 고르게 하기 위해서 1269년과 1314년의 두차례 조세제도를 개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취제도 개정은 민생 안정이 아니라 토지소유에서 오는 모순을 그대로 두고 수취제도만을 고친 것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유민이 계속 발생하고 토지의 투탁, 탈점이 이루어지는 상태에선 표방하는 바의 '현재의 전구(田口)' 조차 제대로 파악될 수 없었다. 또 토지와 호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농장주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는 것이어서 그 자체로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으며 지방관인 향리의 중간수탈도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어서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얼마나 실효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③유민추쇄책

고려정부는 유리한 민을 추쇄하여 원거주지로 환원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워낙 유리하는 민의 숫자가 많고 추쇄하여 환원시키는데도 한계가 있었으므로 일정한 원칙을 정하였다. 고려의 지배층은 유리한 민호를 추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향리는 모두 본관지로 환본시켜 역을 수행하게 했다. 백성은 환본하되 유망한 연수가 오래 되었으면 현거주지에서 적을 부쳐서 공민으로 파악하게도 했다. 원으로 유망한 민호의 경우에도 모든 외교역량을 동원하여 추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원으로 유망한 민호는 원지방 관리와 지방 토착세력의 방해로 추쇄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공부(公賦) 부담을 피해 권세가의 농장으로 숨어 들어간 민호는 지배층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관되어 제대로 추쇄할 수 없었다. 유민이 발생한 뒤에 이 문제를 수습하려는 유민수쇄책도 한계성을 가진 것이었다.

Ⅲ.맺음말

농민항쟁은 사회경제적 모순의 산물이다. 그 속에는 사회구성원의 보다 나은 삶을 제약하는 낡은 체제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발전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의 지배체계 속에서 직접생산을 담당하고 각종 세금과 기본적인 삶조차 영위할수 없게 되면 항쟁한다. 항쟁의 첫 단계는 소극적인 저항이다. 이런 모순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서 유망하는 자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 발생적으로 모여서 도적화되고 더 나아가 보다 조직적으로 명분과조건을 내걸고 지배질서에 적극적인 저항을 한다.

이에 고려왕조는 민생안정을 위하기 보다는 귀족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수취를 강화하였고 지배층은 토지탈점과 농장의 확대. 고리대. 피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교역행위 등을 통하여 수탈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원세력에 의해 농민들은 이중적 대상이 되었으며, 이 시대의 민의 저항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참고문헌-

김기덕[농민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역사연구회엮음. 한국역사입문2

신안식[대몽항쟁기 민의 동향] 역사와 현실7

김순자[원간섭기 민의 동향] 역사와 현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