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토지제도와 수취체계

1. 농업생산력

고려시대는 한국중세사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특히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고려시대의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로 이어진다.

1) 수전(水田)농업

고려시대의 농업은 크게 수전농업과 한전농업으로 분류되는데 고려의 수취가 쌀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수전농업이 중심이 되었다. 수전농업의 경지이용방식에 대한 견해는 상경농법과 휴한농법으로 나뉘어진다.

전품(田品)은 휴한하지 않는 토지(不易之地)를 상(上)으로 하고 한 해 휴한하는 토지(一易之地)를 중(中)으로 하며 두 해 휴한하는 토지(再易之地)를 하(下)로 한다. 휴한하지 않는 산전(不易山田) 1결(結)은 평전(平田) 1결에 준하고 한해 휴한하는 토지(一易田) 2결은 평전 1결에 준하고 두해 휴한하는 토지(再易田) 3결은 평전 1결에 준하게 한다(『고려사』권78 식화지 1경리 문종 8년 3월조).

① 상경(常耕)농법

위의 전품규정을 산전(山田)의 전품을 정하기 위한 규정으로 보고, 평전(平田)은 일반적으로 상경전(常耕田)으로 파악한다. 즉 산전을 상대적으로 척박한 토지로 세역(歲易)농법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평전에서는 이미 세역농법이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② 휴한농법

위의 전품규정을 일반적 전품규정으로 보고, 일역전(一易田)을 중(中)으로 파악하는 것은 일역전이 당시의 일반적인 경지이용방식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평전은 벼(稻)를 심는 수전으로서 일역전으로 파악하였다.

2) 한전(旱田)농업

경작방식에 따라 1년 1작으로 보는 입장과 2년 3작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1년 1작 - 1년 1작식 체계를 중등전(中等田)이 지배적인 방식이며, 2년 3작은 우등지에서만 예외 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본다.

2년 3작 - 중국 화북의 2년 3모작 한전경작방식을 원용하여 한전경작방식을 일반적으로 2년 3작 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2. 토지소유구조

1) 양전제와 전품제

고려는 건국 후 토지소유구조에 대한 국가적 규모의 정비작업의 일환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양전제는 기존의 토지소유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여 토지소유자를 명시하고 토지소유규모와 위치, 전품 등을 조사하는 작업이다. 국가는 양전을 통하여 조세수취를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였다.

양전에서 중요한 것은 면적의 산출문제인데 고려는 토지면적 산출방식으로써 결부제(結負制)를 취하고 있다. 결부제란 토지 생산성(소출량)을 반영한 것으로 고려 결부제의 특성은 단일양진척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전품제(田品制)는 양전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제도로서 토지에 대한 비옥도를 국가적 기준으로 정하여 조세수취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고려의 전품제는 3등전품제가 일반적인 것이라고 이해되어왔으나 일각에서는 9등 전품제라는 견해도 있다.

< 성종대 조세수취규정>

토지종류 전품 조액(본문 本文) 생산량 조액(세주 細註) 생산량
수전(水田) 3승11두2승5홉 15석 4석7두5승 18석
2석11두2승5홉 11석 3석7두5승 14석
1석11두2승5홉 7석 2석7두5승 10석
한전(旱田) 1석13두1승2홉5작 7.5석 2석3두7승5홉 9석
1석5두5승2홉5작 5.5석 1석11두2승5홉 7석
13두1승2홉5작 3,5석 1석3두7승5홉 5석

① 3등 전품제

성종 11년 조세수취규정에 나타나는 세주(細註)의 실체를 시안이나 상한으로 해석한다. 최근에는 12세기 생산력 발전과 관련시켜 세주는 생산력 발전을 반영하여 세액을 상향조정한 것이지만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② 9등 전품제

성종 11년 조세규정에서 본문(本文)은 하등전품의 조세규정이고 세주는 중등전품의 조세규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세 지역(上.中.下)으로 구분하고, 그 지역 안에서 다시 지품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하는 9등전품제임을 주장한다.

예) 세역전은 중등전이다. 상등지역의 세역전은 상중전(上中田), 중등지역의 경우 중중전(中中 田), 하등지역의 경우 하중전(下中田)이된다.

2) 공전.사전.민전의 개념

토지소유구조를 규명하고자 하는 방법에는 토지국유론적 견해와 토지사유론적 견해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공전.사전.민전의 개념을 각각 소유권 또는 수조권적 구분으로 보면, 공전은 국가소유지로서의 공전과 국가수조지로서의 공전으로 나눌 수 있고, 사전은 사유지로서의 사전과 분급수조지로서의 사전으로 나눌 수 있다. 민전은 소유권적으로는 사전이지만 수조권적으로는 공전 또는 사전이 될 수 있다.

ⓐ 소유권적 ㆁ 공전 ; 국가소유지로서의 공전

* 사전 ; 사우지로서위 사전 -민전(소유권적으로 사전)

ⓑ 수조권적 ㆁ 공전 ; 국가수조지로서의 공전 -민전(국가에 직접 조세)

* 사전 ; 분급수조지로서의 사전 -민전(분급된 해당 지역관청에 조세)

3. 전시과 체계

1) 전시과의 성립과 개정

전시과는 고려 전기의 기본 토지제도로 관료층과 직역부담자에 대한 토지분급체계를 규정한 제도이다. 전시과 제도는 976년(경종 원년)에 신설되었는데, 보통 시정전시과라 불리운다. 이 시정전시과는 후에 998년(목종 원년)에 개정전시과로, 1076년(문종 30년)에 경정전시과로 개정된다. 이러한 전시과의 내용을 보면,

① 시정전시과

시전전시과 제도는 토지 지급대상이 관품의 고하(高下)를 논하지 않고 인품(人品)에 따라 정하여졌다. 또 그 지급기준에 있어 자삼(紫衫).단삼(丹衫).비삼(緋衫).녹삼(錄衫)의 사색공복(四色公腹)에 따라 4계층으로 구분하고, 다시 단삼은 문반.잡업.무반으로, 비삼.녹삼은 문반과 잡업으로 나누어 토지를 분급하였다. 단삼 이하의 계층이 관직을 기준으로 구분한데 비해, 자삼 계층은 관직의 유무에 관계없이 관계(官階)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고려왕조를 개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자삼층이 관직의 유무에 관계없이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정전시과에서 인품이라는 요소가 분급의 기준으로 작용한 것은 신구 세력이 타협하여 정국의 안정을 모색하던 경종의 지배계층 전체를 분급대상으로 흡수하는 데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였다.

② 개정전시과

시정전시과는 998년(목종원년)에 개정전시과로 개편된다. 개정전시과의 분급기준은 문무양반관료와 군인, 즉 인품의 요소가 배제된 오로지 관직의 고하(高下)에 따라서 18등급으로 나누어 토지를 분급하였다. 시정전시과와 비교해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면, 첫째 관직의 높낮이가 지급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 둘째 무반직이 문반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점, 셋째 '한외과(限外科)'인 잡색원리(雜色員吏)와 유외잡직(流外雜職)이 과내로 편입되었다는 점, 넷째 마군(馬軍).보군(步軍)이 과내로 편입되었다는 점, 다섯째 모든 품 등에 전지와 시지가 지급된 것에 비해 16과 이하에는 전지만을 지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③ 경정전시과

이후 전시과는 몇 차례 개정을 거쳐 1076년(문종 30년)에 경정전시과로 최종 완성되었다. 경정전시과는 18등급으로 나누었고 개정전시과에 비해 전시지급액이 감소되었다. 또 경정전시과는 양반전시과 이외에 무산계전시과 및 승려.지사들에게 지급하는 별사 전시과를 새로 건설하고 있다. 이 경전전시과를 개정전시과와 비교해보면, 첫째 전지와 시지의 지급이 감소했으나 시지감소의 폭이 전지에 비해 더욱 큰 점, 둘째 무반에 대한 대우가 높아진 점, 셋째 산직(散職)이 지급대상에서 제외된 점, 넷째 향직이 지급대상으로 포함된 점, 다섯째 '한외과'가 없어지고 모두 18과 내로 편입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2) 전시과의 토지분급방식과 운용

전시과의 토지분급방식은 수조권이론과 면조권이론으로 대변할 수 있다. 이들 이론은 토지국유론의 토지분급방식과 토지사유론의 토지분급방식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①토지국유론적 입장

모든 토지가 국유지이기 때문에 국가적 토지분급체계에 의해 분급되는 토지는 국유지에 대한 수조권을 분급하는 방식을 취한다고 본다. 그에 따라 고려시대 전시과체제를 공전제(公田制)로 파악하고 전국 토지를 수조권의 귀속에 따라 공전과 사전으로 나누었다. 이 경우 사전은 전조가 왕실.사원.양반.군인.기인에게 귀속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양반전 - 관료층의 대우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 제정

토지의 수익권을 지급받는 것으로서 피급자가 사망할 때는 반납되어야 할 토지이다. 양반전(私田) 경작 농민은 수확의 2분의 1을 전조(田組)로 양반관료에게 납부한다. 그러나 양반관료와 경작농민사이의 전주-전객의 관계에서 양반관료가 지주로서 수조지를 법적으로 소유한 상태에서 직접 지배.관리.경영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일정기간 전조를 분급 받았을 뿐이었다고 본다. 즉, 전주인 양반의 지주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이 토지는 피급자가 사망하면 반납되므로 이 토지의 경작 농민을 국가에 예속된 농노로 파악하기도 한다.

② 토지사유론적 입장

사유론적 입장에서 보는 전시과의 토지분급방식은 소유토지에 대한 10분의 1 수조권을 국가가 관료층에게 위임해주는 방식이다. 공전은 왕실.국가의 소유지 및 조(組)를 왕실.국고 혹은 기타의 공적기관에 바치는 민전.민유지라고 보고, 사전은 조(租)가 국가에 의하여 지정된 사인에게 귀속된 토지이거나 궁원.사원이 본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로 파악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공전 4분의 1조를 지세(地稅)적 개념으로, 사전 2분의 1조를 지대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 양반전

**양반전의 경영을 농민의 소농경작으로 파악하는 입장

농민의 소유토지에 대한 수조권의 분급방식으로 전시과 소속토지의 경영은 원칙적으로 농민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다만 생산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조세를 피분급자에게 납부하면 되는 것으로 본다.

**양반전의 경영을 소작제경영으로 파악하는 입장

백정층의 광범한 존재와 그들의 영세한 토지소유규모 및 생산력의 한계조건은 전시과제도의 토지지급방식을 농민의 소유토지에 대한 수조권의 지급방식보다는 양반층의 소유토지의 지주제적 경영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농민의 소유토지에 대한 수조권지급방식 보다는 양반층의 소유토지에 대한 면조권지급방식으로 본다.

ⓑ 공해전 - 관청과 같은 국가기관에 지급한 토지

**사유론의 입장에서 공해전은 예외적인 공유지로 파악하는 입장

공해전의 경작은 소재하는 촌락 농민의 요역노동이나 혹은 관노비에 의한 경작 가능성도 예상하며, 관청이 농민으로부터 수취하는 조는 일종의 지대로써 그 수조율은 2분의 1의 조라고 본다. 이는 공해전의 성격을 공유지로 보는 입장이다. 2분의 1, 4분의 1의 차율수조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민전수조율의 4분의 1이 적용된다고 보기에는 공해전의 성격이 민전과 판이하다고 보고 국가와 농민간에 일종의 소작관계가 성립되면서 2분의 1지대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사유지적 성격이 공전화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

고려의 지방 공해전은 나말려초 호족의 소유지로서 토지의 성격상 공전으로 분류된다고 본다. 즉 명목상으로는 공전이면서 그 관리는 향리들에게 맡겨지고 향리들이 그 토지에 대해 일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토지로 파악한다. 이는 공해전의 성격을 향리소유지의 공전화로 보는 입장이다. 2분의 1, 4분의 1, 10분의 1의 조율을 모두 인정하는 입장에서 순수 소작관계도 아니고 또한 민전과 같은 국가 대민의 수취관계도 아닌 사유지적 성격의 공해전이 공전화하는 가운데 4분의 1 수조율의 의미를 규명하고 있다.

4. 농장의 형성과 녹과전

1)농장의 형성

사적 토지소유로의 가능성을 가진 전시과는 양반전, 군인전, 공해전 등의 제도가 권세가들에 의해 농장이라는 고려 후기의 대토지소유현상을 낳게하여 더 이상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농장은 생산물의 일정액을 수취하는 권한인 전주권(田主權)을 바탕으로 전객농민의 사실상의 소유권을 점탈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에, 결국 전주권의 비법적(非法的) 비대화가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사전혁파론자들은 사회모순을 사전(私田)자체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비법적인 토지탈점의 문제는 12세기 무렵 인주이씨(仁州李氏)가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어 무인집권기에 이르러 더욱 성행하게 된다. 무인정권의 권력기반인 대규모 사병과 가신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기반으로 농장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또한 전쟁 후 진전(陳田)-황무지-의 개간은 농장의 확대를 더욱 가속화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원과 관련된 국가기관.내료(內僚).부원배(附元輩)가 권력을 이용하여 토지점탈에 앞장섰고, 심지어 왕실도 농장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결국 토지점탈에 의한 농장의 형성은 토지를 경작할 민의 탈점을 동반하였다. 그래서 당시 농민은 국가의 가혹한 수취와 계속된 전쟁, 고리대 등으로 국외로 망명하거나 농장으로 흡수되어 전호가 되었다. 이렇게 흡수된 농민은 천인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것은 조세.공역부담자의 감소를 의미하여 국가에 있어서도 재정면에서 커다란 손실이었다.

2)토지제도의 재정비

① 전민변정사업(田民辯整事業)

겸병된 토지와 인민을 추쇄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시행하였다. 농장민은 공민으로 만들어 공역을 부과하였고 과다하게 보유하고 있는 사전을 환수하거나 주세를 부과하고 고리대를 제한하여 인민이 농장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농장을 혁파하고 공역부담민과 공세부과지를 확보하여 재정을 넉넉히 하려는 것이었다.

② 녹과전(綠科田)

녹과전은 전민변정사업과 함께 전시과체제의 바탕하에서 수급자의 수조의 편리와 토지겸병의 추세 아래에서 토지를 보호하여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다. 녹과전은 관료전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위한 토지제도로써 그 범위는 경기 8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신들에게 지급된 사급전(賜給田)을 되돌려 녹과전에 충당하려 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대토지소유자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③ 사급전(賜給田)

원과의 전쟁과정에서 황폐해진 토지를 복구할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지급되었다. 사급전은 일종의 개간허가서 이자 그 개간지의 소유허가서인 사패(賜牌)를 통해 지급되었다. 즉 사급전은 주인이 없는 진전(陳田)을 지급하는 것이었으므로 사패의 획득은 곧 소유권의 확보를 의미한는데, 이것은 오히려 토지집적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고려후기 농장을 혁파하려는 정부는 토지 재정비사업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사회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으나 ①당대의 최고권력층이었던 농장주의 강력한 저항, ②추진세력의 미약, ③왕의 추진의지와 목적의 문제성, ④원의 간섭 등으로 실패하였다.

5. 전제개혁 논의와 과전법의 성립

1)전제개혁의 논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일파는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전제개혁은 사전구폐법(私田拘弊法)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사전구폐의 방법을 둘러싸고 개선론자와 개혁론자 두 입장이 대립하였다.

① 개선론

사전 자체는 본조의 성법(成法)이므로 사전점유의 폐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농민층의 피해만 제거하면 구법의 변경없이도 사전의 폐해가 처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소경전(所耕田)에 여러명의 점유주가 있는 것을 문제의 소재로 보고, 일전일주(一田一主)의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는 개선론자들이 개혁론자들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사전혁파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였던 것이다.

② 개혁론

사전폐해는 수조지가 사적으로 세전(世傳)되어 조업전화함으로써 조종(祖宗)의 수전수전(授田受田)하는 법이 무너진 데서 말미암는다는 입장에서 사사로이 받아 겸병한 사전을 혁파하고 수조지를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전개혁을 둘러싼 논전은 결국 직역담당자의 균등한 수조지 점유라는 명분과 군국의 재정확보라는 대의를 내걸고 개혁의 타당성을 내세운 개혁론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사전혁파안을 의정하였다. 이에 개선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개혁안은 고려의 사전을 소멸시켰고, 1391년 과전의 지급과 관리에 관한 기본법규가 공포되어 과전법이 성립되었다.

2)과전법(科田法)

과전법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수조지로 편성한 다음, 소유권의 의미가 완전히 배제된 수조권만을 국가재정의 용도에 따라 각처에 분속시키는 한편 관인을 비롯한 직역자에게 18과로 절급(折給)하는 것이었다. 과전은 외방에 사전이 지급됨으로써 발생하는 비법적인 겸병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로 경기지역에 한정되었다. 공사전의 조는 수전 1결당 조미 30두, 한전 1결당 잡곡 30두인데 공전의 조는 국고로, 사전의 조는 전주에게 수납되었다.

과전으로 지급한 토지의 수조권자를 전주, 사실상의 소유자인 경작자를 전객이라고 하며, 과전법은 전주가 전객의 소경전(所耕田)을 빼앗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하였고 전객 또한 소경전을 함부로 팔거나 타인에게 증여하지 못하게 하여 전주와 전객을 함께 보호하였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고려후기 사전의 폐단은 일단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수조지가 증가하고 공역을 부담할 공민도 증가하여 국가재정이 넉넉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이병희, 1995 「전시과제도와 농장」(한국역사연구회 엮음,『한국사연구입문』②)

박종진, 1995 「국가재정과 부세제도」(한국역사연구회 엮음,『한국사연구입문』②)

김기섭, 1994 「고려전기 농업생산력과 전시과체제」『한국사』(5) 한길사

안병우, 1994 「고려후기 농자의 발달과 사전개혁」『한국사』 (5)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