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말 농민 항쟁의 사회적 성격

머리말

중대 말기의 잇따른 정치적 변란은 전제 왕권을 중심축으로 한 중대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동요를 반영하는 것이었고, 아울러 하대로의 전환은 그로 인한 지배체제의 변화를 의미라는 것이었다. 하대에 이르러 성립된 귀족 연립정권은 중대 지배체제가 변화한 결과였다. 중앙권력의 분산은 일원적이고 집권적인 국가권력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면서 신라 사회의 모순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농민층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고, 이들은 지방세력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신라사회의 몰락과 후삼국의 성립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농민반란은 어떠한 사회적 성격을 가졌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Ⅰ농민항쟁의 배경

1.신라 말기의 사회상황

신라는 하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정치적 혼란과 함께 경제적 혼란까지 겹쳐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말미암아 일반 농민들은 극심한 생활의 궁핍을 겪고 있었다.

① 정치적 측면

진성여왕대를 전후로 하여 왕위 계승다툼은 극심한 경향을 보였다. 귀족내부에서의 갈등과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속화 되었고, 더구나 이러한 귀족들의 자체 분열뿐만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의 생활은 사치스럽고 방탕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진성여왕대를 이후로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어 있었고,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제압할 힘조차 없었다. 더구나 효공왕대 이후 朴氏王의 출현과 그로 말미암은 진골 金氏세력과의 대립, 견훤세력에 의한 金氏왕의 재출현 등. 복잡한 정치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과 귀족들은 백성들 위에 군립하려고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지배계급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차게 되어 반사회세력화(反社會勢力化)되게 된다.

② 경제적 측면

신라시대 토지제도 내에서 녹읍은 귀족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지방의 지정된 읍에서 직접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제도였다. 이때 대부분의 귀족관리들은 자신의 가신(家臣)들을 시켜 수조(收祖)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녹읍제 하에서 녹읍민은 녹읍주에게 조세를 납부하는 동시에 국가에 요역을 부담하고 공부(貢賦)를 바치는, 국가와 녹읍주에게 이중지배를 당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때 국가는 지방 관리들을 통해 녹읍주들의 지배 행위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 하대 경덕왕대에 녹읍이 부활하면서, 이들 지방관리들은 녹읍주와 결탁하거나 현실적으로 그들의 지배를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녹읍제 내에서의 불법, 탈법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지게 되고, 지방관리들 또한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여기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이다.

귀족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농민 토지를 강점하거나 수탈하여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이는 귀족뿐만 아니라 승려나 사원에 의해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됨에 따라 사회구조 내에서는 유민이 발생하게 되고, 이들 유민들이 도적화되거나 지방세력의 사병으로 들어감에 다랄 신라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 농민항쟁의 원인

앞서 언급한 신라말기의 사회상황은 농민항쟁을 일으키는 원인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왕위계승다툼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으며, 귀족이나 승려, 사원의 대토지 소유로 인한 일반민들의 경제적 생활은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라는 요인까지 겹쳐 농민들의 일반생뢍은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토지 소유에 의한 토지 집중화현상은 계속되어 유민을 발생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고, 왕과 귀족들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면서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 재정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다 주었고, 이에 국가는 조세 부담을 농민에게 가중시키게 되었다. 진성여왕 3년(889)전국에 대한 공부 독촉이 실시되자 각지에서는 농민과 지방세력들이 봉기하게 되어 농민반란이 시작되게 된다.

Ⅱ.농민항쟁의 전개

1.농민층의 봉기 봉기

전근대사회에서 국가나 귀족들의 과중한 수취에 대한 농민들의 소극적인 항쟁의 한 형태는 유망이었고, 유망민들을 포함하여 생계자체가 곤란한 농민들은 개별적으로 남의 재산이나 곡식을 약탈하기도 했다.

신문왕대 도적이 사라져 사회가 안녕하기를 소원한 기록은 신라중대 도적이 적지않게 발생했음을 알 수 있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혜공왕대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수취량이 늘고 흉년과 대기근이 겹쳐 농민의 상당수가 도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신라 하대에 이르면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손을 노비로 팔거나, 일본으로 가서 해적질을 하거나, 당나라로 식량을 구하러 가거나 또한 도적이 되기도 했다.

헌덕왕 11년 소규모 조직을 이루어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도적집단. 즉 초적(草賊)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고, 이를 국왕이 명하여 잡아들이게 했는데 초적집단은 도적행위뿐만 아니라 중앙귀족 권력투쟁의 무력기반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의 賊 수신등 100여명과 함께 모반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2.농민항쟁의 전개

진성여왕 3년(899)부세독촉으로 전국각지에서 도적이 봉기하자 사벌주(상주)를 근거지로 원종과 애노가 초적의 무리나 농민군을 규합해서 최초로 반신라 투쟁을 전개했다. 원종, 애노르 중심으로 한 대규모로 조직화된 농민군의 항쟁에 정복군은 그 위세에 눌려 무기력하게 대응하게 되고, 각지에서 농민이나 초적을 규합한 농민군이 옛고구려 (강원도와 평양지역)와 백제지역(전라도)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원종(元宗)과 애노(哀奴)반란 2년후 죽주(충북 축산)에서 기훤(箕萱)이 궁예(弓裔),원회(原會),신훤(申煊)을 아래에 두고 활약했는데 기훤의 대우에 불만을 품은 궁예는 북원(원주)의 양길(良吉)농민군에 의탁한다. 양길로부터 군사를 받은 궁예는 농민군의 수가 급증하고 군사력이 막강해지자 양길을 배반하고 895년 자신을 임금으로 칭하고 독립하여 강원도와 충북지방으로 세력을 떨친다.

한편 옛백제인 전라도에서는 견훤의 농민군과 붉은 바지를 입은 농민군이 활동을 했다. 견훤은 여러 가지로 상황이 어려워진 농민들의 처지와 여전히 남아있는 반신라 감정을 백제부흥운동과 적절히 결합시켜 농민에게 호응을 얻음으로써 농민군을 형성하게 된다.

붉은 바지를 입은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에서 경주 모량리까지 진격했는데 이는 신라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군의 활동으로 인해 대혼란에 빠지고 지방행정체계가 마비되었음을 증명한다. 또 옛고구려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궁예의 농민군이 강원도 동북부에서 위세를 떨치자 패서지역에서 활동하던 농민군과 '붉은옷' '누언옷'으로 표식한 적의적(赤衣賊),황의적(黃衣賊)등이 합세하여 농민군이 조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규모가 크고 넓은 지역에서 활동한 이런 농민군외에도 신라 전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농민군이나 초적이 활동을 했다.

전남 압해현(압해도)에서는 능창(能昌)이 거느린 농민군과 그 주변의 갈초도에서의 초적이 서로 연결하여 활동을 전개했는데 서해의 해안과 도서지방에 농민군의 활동근거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간지대를 근거로 산길 또는 길목을 막거나 아니면 주변고을이나 성을 습격하기도 했고 대규모의 토지를 집적한 사원을 습격하기도 했다.

해인사의 경우 사원의 습격이 잦아지자 사원세력은 일반백성이나 승려들을 조직하여 자구책을 마련하기도 하는데 농민항쟁의 공격대상은 반드시 중앙정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서 농민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지방세력가들은 강력한 자위조직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농민군을 진압했고, 농민군을 점차 그들의 하부 조직으로 편성시켜 지방세력가들은 조직적이고 독립적인 세력이 된다. 흔히 호족이라 불리는 이들 세력의 우두머리들은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면서 상하의 관직체계까지 갖춘 독자적인 조직을 거느리기도 하였다.

Ⅲ농민항쟁의 의의

1. 지방세력의 성장과 후삼국 성립

9세기 후반 전국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신라국가의 통치기반이 급속하게 와해되면서, 농민군, 초적들은 신라 정부군이나 지방군의 커다란 저항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농민군이나 초적들의 활동이 점차 활발해지자 피해를 당하는 계층들은 그에 대한 무력 대응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리들은 주, 현, 군에 속했던 지방군과 사병을 활용하여 무장력을 갖추고자 하였고, 사원의 경우도 부호세력이나 촌주층과 같은 지방세력에 의탁하여 그들의 재산과 안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방세력이란 이전에는 호족이라 불렀던 성주와 장군들로서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신분제에 의해서 정치적 기회가 봉쇄되어 있던 바, 중앙귀족들에 대한 반발의식이 팽배한 집단으로서 당시 몰락해 가는 중앙귀족과 연결되지 않았기에 신라 국가와는 거의 독립적으로 자위력을 보호하여 각 지역의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후에는 일부 농민군들 중 성주 장군과 같은 지방세력으로 전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지배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무력대결로 인해 여러 작은 세력의 재편 결과 후백제와 태봉의 성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에서 농사를 지어 장군이 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었다 한다. 그는 출신기반이 중앙관리나 지방관리가 아닌 지방의 미미한 가문이라고 보이며, 이는 전공(戰功)으로서 비장(裨將)이 되었고, 농민군을 규합하여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견훤은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를 치고서, 그 곳을 근거지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공공연히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농민군을 규합하여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후, 900년에 드디어 후백제왕이라 자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였다. 그는

내외적으로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여 지배기관을 강화하였다.

태봉국을 건국한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왕위쟁탈전 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산속에서 은둔하던 중 농민군 휘하에 합류하여 진성여왕 8년(894)자신을 장군이라 칭하고, 895년에 강원도와 패서의 농민군과 토착세력들이 합세하자 개국 할 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君을 자칭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는 901년 국호를 고려라 칭하고 자신을 왕이라 부르게 하였다. 즉 그는 골품제의 규제로 운영되던 신라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을 결합시켜 세력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 인물은 지방군의 비장출신이고, 몰락한 왕족출신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지방세력으로 성장하는데는 농민군과 초적의 무리들이 중요한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는 점. 즉 농민군을 규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다음 스스로를 장군, 왕이라 칭하고, 각각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과 신라 타도를 주장하면서 후백제, 태봉을 건국한 것이 공통적이라 하겠다. 또한 원신라에 비해 변방수비나, 조세, 공물운반 부담이 가중되어 상대적으로 사회 경제적 모순이 보다 심했던 옛백제, 고구려지역에서의 民들의 반신라 감정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였던 바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이러한 후백제, 태봉의 성립 뒤에 농민군을 무력기반으로 한 지방세력들간의 무력 경쟁속에서 후삼국의 정립을 가져오게 되었다.

2. 농민항쟁의 사회적 의의 및 성격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토지 소유 집중화 현상에 따른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나타난 변혁운동 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의 발생에는 귀족들에 의한 수취의 증대와 더불어 자연적 요인으로서의 자연재해 등의 요인과 신라 하대의 농민에 대한 이중적 지배구조의 모순이 작용한 바가 크다 하겠다. 결국 농민층의 빈곤과 유망, 도적화는 9세기 말 농민항쟁으로 확대되었으며, 과다한 수취가 가능했던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과 나아가 지배구조를 용인하고 있던 신라국가의 지배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운동으로 확대,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변혁운동은 불합리한 지배구조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점차적인 국가세력의 몰락으로 인한 지배구조의 폐기로 투쟁의 열기가 식으면서 농민들 스스로 지방세력에 의탁해 가면서 정치적 변혁의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맺음말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은 농민층의 유망으로 시작해서 후삼국간의 국내전쟁으로 까지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소집단 규모로 분산적인 항쟁을 하다가 신라 사회의 사회, 경제적 모순이 심화 되면서 점차 조직화 되어 국가를 상대로 항쟁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900년 이후 후삼국 사이의 전쟁과정에서 지방세력은 농민들의 항쟁을 자신들의 정치적 강화에 적극 이용하여 마침내 그들 주체의 고려를 성립시켰다. 즉 신라 하대 농민항쟁은 신라국가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했고, 후삼국 통일과 고려의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겠다. 그러나 이와같은 농민항쟁은 후에 건립된 고려시기에서 불합리한 수취제도의 어느정도 개선을 통해 농민자신들의 부담완화를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지위와 처지를 향상시키는데는 크게 기여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한국사」(4) 진덕재 1994 「신라 하대의 농민항쟁」

「신라문화」10.11 항집 김갑동 1994 「신라의 멸망과 경주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요론」 형설출판사 제6장 「통일신라와 발해」

「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도의 연구」 김갑동 「나말여초 지방세력의 동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