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의 토지제도와 수취체계

Ⅰ. 머리말

고대사회 경제생활의 중심은 농업이었으므로 토지는 기본적 생산수단으로서 부의 포괄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토지와 관련된 제도들은 단순히 제도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시기의 사회경제적인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토지제도에 관한 문제는 토지를 매개로 한 組.調.役의 수취체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본문에서는 먼저,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토지제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쟁점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의 國有와 私有문제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고, 三國의 토지제도는 어떠했는지 살펴 볼 것이며, 三國의 형성과 발전에 따른 수취체계의 변화를 국가의 對民수취 내용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Ⅱ. 고대사회의 토지제도

1. 국유론과 사유론

우리나라의 고대사회에서 토지가 국유였는가 사유였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전체의 구조를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초기의 연구자들은 근대 이전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궁극적으로는 국가에 귀속된 것으로 보았다. 1920년대에 일본인 와타 이치로에 의해 제기된 公田制 (=토지국유제)는 그 뒤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어 거의 정설화되다시키 하였다. 그의 주장에 으?하면 삼국이전의 토지제도는 族制조직을 기초로 하는 공유제였다. 원시 이래의 토지공유제를 국가적 규모로 확대하여 토지국유제를 확립한 공전제에서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고, 관료와 功臣에게는 收組權을,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는 경작권을 나누어준 데 불과하며 토지 자체를 지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사유지가 존재했더라도 이는 불법적이고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와타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한국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수탈을 합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고,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의 기초로 강력하게 창출된 것이었다.

토지국유론은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연구에서 더욱 발달하였는데,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백남운은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토지국유제를 이론화하는 데 이바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토지국유제 또는 공전제는 다분히 피상적인 관찰의 경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토지사유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196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토지 사유의 구체적인 실례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들 연구또한 토지국유론의 비판에는 충실했으나 사유의 내용을 밝히는 데는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사유지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토지사유론을 인정하기 곤란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토지소유권의 구체적인 사례를 밝혀보려는 연구가 있고 세제에 관한 연구를 통해 통일신라시기에 들어와서는 토지사유제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2. 고구려와 백제

우리나라 초기의 토지제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豪民ㆍ加계층의 대토지소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소규모의 토지를 소우한 자영농민도 있었겠지만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한 것은 아무래도 대토지소유라고 추측된다.

대토지소유는 주로 食邑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공을 세운 장군에게 식읍을 하사한 예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이는 피정복지의 토지와 백성을 나누어주는 제도였다. 식읍민에 대한 식읍주의 수탈은 하호에 대해서보다 한층 가혹했는데, 식읍 이외에 賜田도 중여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전을 田主가 직영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수조권을 행사하는 녹읍의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이는 식읍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식읍이나 사전으로 인한 대토지소유가 제도로 정착된 것이 녹읍이라고 추정된다.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황실이나 귀족의 대토지소유 이외에도 일반 백성의 사유나 국가의 소유지도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녹읍제의 성격과 그 운영원리에 관해서는 신라를 중심으로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3. 신라

신라시대 귀족 관료의 경제적 기반은 祿邑과 官僚田 였고, 백성에게는 丁田을 지급했다. 먼저 녹읍 및 정전과 관련된 『삼국사기』 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문왕 7년(687) 5월에 문무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2) 신문왕 9년(689) 1월에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組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여 이로써 영원한 법식을 삼았다.

3)성덕왕 21년(722) 8월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4)경덕왕 16년(757) 3월에 여러 내외관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주었다.

5)소성왕 원년(799) 3월에 청주 거노현으로 국학생의 녹읍을 삼았다.

녹읍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으나 녹읍의 혁파와 부활을 전하는 위의 자료에서 그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사료 2),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녹읍은 신문왕 9년에 폐지된 바 있고 경덕왕 16년에 부활되었다. 그러므로 녹읍은 신문왕 9년이라 부르고 경덕왕 16년 이후의 녹읍을 후기녹읍이라 하는데, 그 이후에 녹읍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녹읍제는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관료전이 설치된 것은 신문왕 7년이었는데 이것이 신라의 토지제도상 획기적인 큰 사업이 었다는 점으로 보아 관료전의 지급은 녹읍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에 대한 경제적 조관리들이 받은 경제적 대우는 관료전과 매년 지급되는 組였을 것이다.

또한 녹읍이 부활되었을 때 관료전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관료전은 신문왕대이후 신라 말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의 녹읍 혁파는 戰功이나 高利貸 등을 통해 많은 토지와 백성을 私的으로 지배하게 된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장기간의 전쟁으로 더욱 곤궁해진 소농민층을 보호하여 궁극적으로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경덕왕대의 녹읍 부활은 귀족세력의 강화와 왕권의 약화라는 정치적인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후 하대의 정치적 혼란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다.

현직관리를 중심으로 지급된 관료전은 전제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 기능은 미약했다고 추측된다. 관료전은 실제 그 토지로부터 큰 경제적 이득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는 관료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전제왕권도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관료전은 지방 하급관리의 경제적 대우 정도로 기능이 약화된 채 그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Ⅲ. 고대사회의 수취체계

고대사회의 수취체제에 대해 살펴봄에 있어 우선할 것은 그 대상인 '民'이라는 존재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고대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지배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 할 사항이다. 민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면, 良ㆍ賤을 기준으로 할 경우 특저이대에 따라 오류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민을 피지배층 중에서 지배층에 배타적으로 예속된 일단의 부류를 제외한 피지배층 일반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1.국가의 대민편제 및 수취

국가의 대민수취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토지에 대하여 수취하는 조(租),지방특산물을 수취하는조(調), 인정을 징발하는 역(役)이 그대상이다.

삼국 이전에는 소국이 산재해있는 시기여서 대민수취의 내용은 미분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租.調는 부족단위의 집단적 공납의 형태로 이루어졌고 役은 軍役보다는 전쟁물자를 위한 단순한 잡역의 동원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민에 대한 수취는 기존 정치조직에 의해서 중복적으로 부과되었고, 이들 지배층의 사적.배타적인 대민지배를 매개로한 형태였으므로 민이 짊어져야했던 부담은 심히 가혹했을 것이다.

삼국 초기 또한 중앙의 정치조직이 점차 강화.재편됨과 함께 중앙세력은 복속한 소국집단에 대해 기존의 독자적 정치조직을 인정해주고 의례적인 복속관계를 확인하는 관계로 편제했다.

먼저 이 시기의 役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국은 왕경민을 중심으로 한 일정한 범위의 민을 동원하여 部兵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지방민들은 국가적인 군역체계에 의한 정식의 지방군으로는 조직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이 시기 租.調의 수취체제 역시 役과 마찬가지로 지방민과 왕경민의 차별적 편제 아래있었다. 즉, 전쟁의 주체로서 동원되는 왕경민들에 대해서는 그 성과물이 일정하게 배분되었을 것이고, 조ㆍ조에서도 일정한 특헤가 주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초기에는 아직 강력한 국가권력이나 대민수취의 방식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전과 유사한 특징을 지녔었다.

이후 삼국이 각자 정치적으로 안정되어가면서 삼국간의 대립이 격화되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지방민을 국가적 군사활동에 참여시켜야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였다. 力役동원제도를 보면, 이 시기에 즉 6세기부터는 지방민에 대한 역역동원이 상당히 정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왕경민과 지방민의 차별이 실질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했지만 제도상으로는 해소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경우, 중앙과 지방세력에 대해 경위와 외위의 이원적 관등체계가 거의 7세기에는 경위로 일원화되었다. 그래서 삼국간의 전쟁이 최고로 고조화된 7세기의 신라는 전 국민을 동원한 군사총동원체제인 6정을 성립시겼다.

組.調의 경우, 고구려 조세조항에 관한 문헌을 보면 조세의 부담자인 민을 인(人)과 유인(遊人)으로 구분하고 인을 다시 3등분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로 국가의 전체민에 대한 차등적인 수취가 이 시기에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취제는 민의 사회적 분화를 반영하여 이를 차등 부과함으로써 세제의 합리화를 추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면에서 이전의 미분화된 수취제에 비해 커다란 진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두세의 비중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재산 혹은 토지 소유량에 따른 수취형태가 아직 미미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3. 대민수취체제의 재편

신라 국가의 새로운 재편의 기준은 통일이 마무리되는 문무왕대부터 본격적으로 갖추어졌다, 문무왕 17년과 21년에 각각 설치된 좌우사록관은 귀족세력이 녹읍과 녹읍민에 대하여 행사권을 통제하여 대민수취에 대한 새로운 국가적 기준은 마련하기 위한 기반이었다. 그 후 통일 이후에는 녹읍 자체가 혁파되어 세조의 형태로 대치되어 관료들에게 관료전이, 민에게 정전이 지급되어 왕토왕민 사상에 입각한 토지제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이로서 일반적인 수취제제는 기반이 마련한 셈이다. 租.調.役의 수취제제는 8세기 에 이미 정형화되었뎐 것으로 보인다.

먼저 조의 수취와 관련하여 토지의 측정단위로 결.부.속 등이 쓰여졌는데, 결부제란 토지에 일정한 소출량을 기준으로한 토지측정단위를 말하고, 적어도 9세기 초에 일반적으로 통영되었을 것이다. 이미 문무왕대에 토지단위로서 결이 통용되고 있음을 보면 늦어도 통일 신라기에는 전국적인 양전사업이 실시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기에 결부제가 일반적으로 실시되었다변 곧 가호별 토지소유를 파악 정리한 토지대장이 작성되엇음을 의미한다.

이에 의하면 이 시기 組의 수조율은 일반적으로 10분의 1의 세율이 적용되엇다.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형식 내용면에서 합리적으로 크게 정비되고 부담 또한 경미한 것이었다.

調의 경우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까지 기본적으로 촌락별로 수취가 이루어졌다. 촌락민들을 품목의 작물과 나무를 공동경작하여 부담하였고 조의 부담량은 도량형의 재조정으로 합리화 되었다.

그리고 이시기 役의 징발은, 戶等制에 의해 이루어졌다. 삼국시기에는 지방민에 대한 역역 및 군사활동에의 동원은 유력 토착세력에게 의존하는 형태였는데, 통일 이후에는 신라 국가권력이 군현재적 지방형태로서 지방지배를 철저히 확인해나가면서 전국의 민을 직접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기준을 마련하였다. 이런 통일 이후의 호등제는 인정의 일원적 파악이 필수 적인 것이었다.

力役동원의 경우 군역과는 달리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져서 호등제에 의하여 각 호등별로 인정의 수를 정하고 계연의 수취는 촌락벽 役夫 할당의 기준이 되었다. 역부들은 대개 국가의 전국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동원되어 사역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의 수취체계는 租.調.役의 모든 형태에서 체계성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이후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달은 민계층의 사회적 분화의 심화와 국가의 대민지배의 강화로 인해 통일기에 수취제의 합리적 기준을 마련하였다.

Ⅳ.맺음말

고대사회의 토지는 그 소유관계에 따라 國有냐 하는 논쟁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사유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 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토지소유관념은 독특한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사유와도 다르고, 사회주의적 공유와도 다른 그 중간 형태라 할 수 있다.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시행한 진보적 토지제도는 오래 시행되지 못하고, 8세기중엽의 경덕왕때에는 다시금 녹읍이 부활되고, 관료전이 폐지되었으며, 백성들에게 준 정전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통일후 귀족세력을 억제하려는 국가의 전제적 힘이 귀족들의 반발로 점차 무력해져 가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한편, 고대사회의 수취체제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의 정치체데가 미흡할 경우 그 수취 또한 미분화되고 일관되지 못하였다. 고대의 경우 미분화되고 체계적이지 못하던 것이 삼국을 거쳐가면서 정형화되고 통일신라기에는 제도로서 대민지배를 하게 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기에는 조에서는 결부제가 조에서는 촌락별 수취체계에서 체계성과 합리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고대사회가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회 ㆍ 경제적으로나 국가체제유지 측면에서 '토지'가 갖는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토지제도와 수취체계를 보다 잘 제도화해나가는 것이 그 사회가 발전 할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참고문헌

이우태 1994년 - [토지소유관계와 신분편제] 한국사 4한길사

강봉룡 1994년 - [민의 존재형태] 한국사 4한길사

김기흥 1992년 - [8,9세기 통일신라의 경제] 한국고대사연구 6

한국역사연구회 - [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한영우 -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