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주 몽고침입과 고려사회의 대응

[14세기고려사회-원간섭기의 이해문제][고려후기 몽구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14세기의 고려사회 -원간섭기의 이해문제

발제자 9745040 한상미,  9745009김민주
참고문헌 박종기<14세기의 고려사회-원 간섭기의 이해문제>

1. 14세기의 고려사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사에서 14세기는 흔히 원 간섭기라 일컬어지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헤왕, 충목왕, 충정왕의 약 80여년간의 기간과 이후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의 이른바 고려 말기로 양분하여 볼 수 있다.
그러나 14세기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은 이 세기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원 간섭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일 것이다.
원 간섭기 역사는 일찍부터 타율성론에 입각한 일제 식민사학의 세례를 적지 않게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굴절되고 왜곡된 역사상이 지나치게 부각되었던 시기였다. 한시기의 역사는 앞 시기가 남긴 역사유산을 정리하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나아가 다음 시기의 역사발전을 촉진하는 밑거름이 된다. 따라서 원 간섭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이 되는 14세기의 前史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14세기 역사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원 간섭기는 계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배경 아래서 출발하였다. 아울러 그러한 역사배경이 원 간섭기의 역사성격을 일차적으로 규정짓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는 인류역사상 단일국가로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유목국가 몽고-원제국의 등장과 그에 따른 여파로서 고려-원 간의 약 30여년 동안의 전쟁이었다. 30여 년 간의 지루한 전쟁 끝에 고려는 1259년 太子의 入朝와 개경환도를 조건으로 원과 강화를 맺었다. 이러한 결정에 반발한 三別抄의 항쟁이 고려와 원의 군사력에 의해 진압되면서 고려사회는 원 간섭기로 이행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회는 몽고와의 접촉을 계기로 그 영향력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대외 모순으로 표현되는 역사현상이 14세기 전반의 원 간섭기를 규정짓는 주요한 모습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12세기 후반 무인정변으로 인한 정치권의 변동과 곧이어 약 1세기간 전개된 대규모 농민항쟁으로 고려사회는 내부적으로 크게 동요되었다. 이때의 농민항쟁은 망이·망소이의 봉기로 대표되는 항쟁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쟁 말기인 1250년대에는 농민들이 대량으로 몽고군에 투항하는 <投蒙> 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전개되기까지하였다. 고려와 원이 강화한 이후 농민항쟁은 진정되었으나 그것을 낳게 한 모순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원 간섭기 이후에도 민의 유망은 여전하였고, 그것이 상부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른바 대내모순으로 표현되는 역사현상이 원 간섭기, 크게는 14세기 역사를 규정짓게 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었다.

2. 14세기 고려사 연구에서 제기된 문제들

14세기의 고려사회는 대내외적인 모순이 중첩되는 가운데 그 여파가 여러 가지 역사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면서 새로운 사회체제를 형성하여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먼저 사회경제사에서는 수취체제와 재정정책의 변동과 조정문제, 祿科田(녹과전)과 같은 새로운土地分給制의 모색, 賜給田(사급전)과 농장 등 대토지소유제의 전개와 私田개혁 등이 주요한 연구과제였다. 또한 郡縣制 개편과 향촌사회의 변화도 주요한 연구과제의 하나다. 정치사에서는 원의 고려 지배방식과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형태와 정치세력의 문제, 나아가 그러한 정치구조 속에서 행해진 이른바 <개혁정치>의이해문제 등이 그 동안 정치사이 주요한 연구과제였다. 한편 思想史의 문제로는 원과의 관계가 형성되면서, 그것이 사상계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는가 하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단일한 문제에 집중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원 간섭기의 佛敎界의 변화와 性理學의 수용 등에 관한 것이다. 이상의 문제들은 크게는 당시 고려사회가 12-13세기 이래 중첩된 대내외적 모순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3. 원의 고려 지배방식과 정치사의 이해

가. 원의 고려 지배방식

원의 고려 지배방식은 원 세조 쿠빌라이가 천명한 <以漢法治四夷 不改土風>의 원칙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배방식은 천자와 제후라는 儀禮的(의례적)인 관계, 구체적으로 正朔(정삭)과 연호의 頒布(반포), 전기적인 朝聘(조빙)이라는 종래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관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 위에 있다고하나 원은 고려 국왕을 그들의 직접적인 통치권의 범위 내에 묶어두고 그들을 통하여 고려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華夷觀과는 차이가 있었다. 원의 고려지배는 정치군사 등 상부구조의 측면에서는 역대 어느 이민족보다도 예속의 강도가 높았다. 반면에 토지소유, 노비개혁 등 하부구조에 대해서는 낮은 편이어서 원의 고려지배가 고려의 전사회구조에 전면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

나. 정치세력과 정치구조

강화를 계기로 고려와 원이 새로운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정치세력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2세기 후반 무인정권이 성립하면서 무인들이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무인정권의 붕괴와 원과의 강화를 계기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역시 새로운 정치세력이 대두하였다.
현재 학계는 14세기의 정치 지배세력으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에 주목하여 양자의 대 립. 갈등 과정을 통하여 당시 정치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이러한 정치세력에 대하여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권문세족의 개념은 權門類와 世族類로 나누어야 한다고 하였다. 권문류는 특정 개인의 권력의 정도를 표현한 것이며, 세족류는 고려 후기 특정 가계의 사회적인 지위를 표현한 용어라 하였다. 이럴 경우 14세기 정치 지배세력은 세족층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들의 入仕에는 과거의 비중이 매우 컸으며, 당시 도평의사사는 오히려 기능이 축소되었고 재추수의 증가는 권한과 기능의 분산을 가져와 재추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왕권은 미약하지 않았으며, 국왕은 자신의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한 측근정치를 시행함으로서 세족들이 위축되었다. 따라서 14세기의 정치사를 오히려 세족과 국왕의 측근세력의 대립구조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하면 고려 후기 지베세력인 세족층은 권문세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려 후기 정치사를 재조명할 근거가 된다.

다. 개혁정치의 성격

그 동안 학계에서는 국왕의 교서형식을 빌은 일련의 시책을 반원적이고 자주적인 개혁으로 이해하였으며 당시 개혁정치는 궁국적으로 반원적인 성격 혹은 그것을 지향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개혁정치의 본질 규명은 지금까지와 같이 단순히 개혁의 주체와 폐단의 내용에 주목하여 그것만으로 개혁의 성격을 이해할 내용의 것이 아니라 국왕과 지배세력이 당시에 문제가 된 여러 사회모순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14세기 전반 고려 국왕이 시행한 <개혁정치>는 종전의 이해와는 달리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사성을 지녔을 것이다.

첫째, 당시 국왕의 교서에 반영된 주된 관심사는 농장과 사급전의 폐단, 수취의 불균형과 민의 유망이었다. 당시 국왕들에 의해 추진된 일련의 시책은 대내외의 모순으로 민의 유망과 저항에 대한 지배층의 위기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한 지배층의 자구책의 성격이 강하였다.

둘째, 당시 모순사회에 대하여 국왕들이 제시한 해결방식은 土地分給制의 전면 재조정, 세제의 근본적인 개혁, 농장과 사급전의 혁파와 같은 근본적인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셋째, 당시 국왕의 교서는 원의 지원을 받은 국왕의 즉위나 복위 등 대체로 정치적인 재편기에 반포되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국왕이 추진하고자 한 시책은 어느 면에서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였음을 배제 할 수 없다. 원은 고려 국왕을 통하여 고려를 지배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국왕의 주요한 정치적기반은 원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14세기 전반의 국왕들에 의한 여러 시책을 반원적인 개혁, 혹은 그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는 전면적으로 재검토 해야 할 것이다.

4. 사회경제구조의 재편과 재정정책의 변화

가. 수취체제의 재편과 재정정책의 변화

재정정책과 수취문제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14세기 역사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유념해야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의 수취와 재정문제는 토지와 역제(役制),군현제(郡縣制) 등과 밀접한 고리를 이루고 있었던 만큼, 12- 13세기의 농민항쟁, 원과의 전쟁등으로 야기된 사회구조의 변동이 당시 수취체제와 재정정책에 어떤 모습을 반영되었던가 하는 점이다. 둘째, 몽고와의 전쟁과 이후 대원관계의 전개가 당시 수취체제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기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런 2가지 전제 위에서 이반 공동연구에서 얻어진 14세기 수취체제와 재정정책에 관한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고려 전기 수취체제는 토지(田柴科)와 인정(人丁)을 결합시킨 정호(丁戶)체제에 입각한 군현 단위의 총액 수취제였다. 따라서 고려 전기 수취체제는 토지와 역제, 그 외연(外延)으로서 군현제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고려 전기 국가재정 역시 이와 같은 수취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나 12세기 이래 사회경제의 변동에 따라 수취체제 자체는 크게 변화하였다. 우선 14세기 수취체제는 대체로 무인정권기를 거치면서 수취의 기본이 되는 고려전기 조, 포 ,역의 삼세 외에 상요, 잡공(雜貢)이라는 명목의 부과세가 추가되었다. 고려전기에 일반 군현지역과 부곡지역으로 차별 편제하여 군현민들에게는 주로 미(米), 포(布)를, 부곡지역에는 전업적 생산품을 부과하던 수취방식이 고려 후기에 오면 과거 소의 생산품을 대부분 잡공이라는 명목으로 군현민에게 부가하는 방식으로 변하게 됨에 따라 공부(貢賦)와 잡공체계로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역의 경우도 요공 또는 상요의 형태로 과거 부곡지역의 주민들이 부담한 역을 군현민들에게 부담지웠다.한편 정호체제가 무너져 전(田)과 역(役)의 분리현상이 일반화되면서 고려 후기에는 군현수취의 기준도 변화하였다.

다음으로 14세기에는 재정정책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원과의 새로운 관계가 전개되면서 발생한 막대한 양의 현물수요는 재정부족과 함께 재정구조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토지제도의 근본적인 개혁보다는 민에 대한 수취를 강화하는 편법을 택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정부는 재정관서를 개편하였다. 관서는 토지와 노비의 탈점, 시장에서의 강제적인 교역, 과렴재단(科斂財團)의 형성 등을 통하여 재정을 확보하였다. 이 가운데 노비와 토지탈점을 통한 재원확보는 토지탈점을 가속화시켰으며, 이는 고려 전기 이래의 관청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분급(分給)제도를 변화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상과 같이 14세기의 수취와 재정문제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한편 그것으로 인하여 수취체제 자체가 또 다른 형태로 극복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4세기 수취체제와 재정정책의 변화는 이때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고려 전기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그것에 대신하여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중대한 변화였다.

나. 토지분급제의 변동과 농장의 발달

전시과체제를 근간으로 한 고려 전기 토지분급제는 12세기 이후 크게 변동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정형화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녹과전의 성립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녹과전은 고려 전기의 토지분급제를 계승 보완하는 측면이 강하였으며, 이것이 뒤에 과전법으로 이어졌다. 14세기 토지분급제는 녹과전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녹과전과 유사한 형태의 토지분급제로서 사급전을 들 수 있다. 사급전은 원 간섭기 이후 14세기의 독특한 토지분급제였다. 사급전은 전시과와 같은 고려 전기의 토지분급제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원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대두한 정치세력인 공신, 부원배, 국왕측근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국가는 이들에게 사패(賜牌)를 지급하여 한전이나 진전을 지급하여 개간하게 하는 대신 소유권 등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사급전은 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것으로 품계에 따라 정해진 액수가 없었고, 국왕의 재량에 따라 액수의 제한이 없었다. 또한 한지개간을 명목으로 지급된 경우 소유권과 수조권을 결합해서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배권이 대단히 강하였다. 그래서 토지를 탈점하는등 폐단이 심하였다. 이와같이 사급전은 12세기 이래로 발달하여 온 농장과 함께 토지탈점과 겸병을 확대하여 나갔다.
사급전과 함께 당시 문제가 된 농장은 이미 12세기 초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4세기 사회경제 모순의 상징으로서 특히 문제가 된 농장은 13세기 후반 원 간섭기 무렵부터였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권력형 농장에 의한 탈점이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민전에 대한 탈점이었다. 민전에 대한 탈점은 조세와 역역의 근원인 양인 농민층이 유망하거나 농장에 흡수되어 국가의 재정기능 자체를 마비시켰다. 이번 공동연구에서는 권력형 농장 외에 그 동안 연구자의 관심 밖이었던 진전과 한전의 개간이나 매득(買得)에 의해 형성된 농장에도 주목하였다. 이를 부농형 농장 혹은 병작형(竝作型) 농장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번 역구를 통하여 12세기 이래 농업생산력 발달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농장이 이때에 등장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5. 사상계의 변화모습

가. 불교계의 변화

무인집권 이래 중심적인 교단이었던 조계종, 특히 수선사는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원 간섭기 이후에 점차 영향력이 감소되어 갔으며, 그에 따라 불교계도 크게 개편되었다. 당시 불교계는 원 간섭기의 정치현실에 타협 온존하려는 경향과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를 계승하면서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려는 경향으로 나누어졌다.
먼저 전자의 경향을 살펴보면, 원 간섭기 이후 무인정권을 무너뜨린 왕정복고파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시 불교계는 일연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계승을 표방한 가지산문(迦智山門)과 백련사의 성격을 변질시키면서 그 계승을 표방한 묘련사 계통이 크게 부각되었다.그러나 가지산문을 중심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원 간섭기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당시에 드러난 불교의 타락상이나 고려와 원이 일본정벌에 따른 민중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인 기능을 스스로 축소시켜 니갔다. 다음 후자의 경향을 살펴보면, 무인집권기 이래 결사운동은 고려중기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운동은 특히 토성층, 향리층의 자제, 일반민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결사의 유행은 중앙불교가 지방으로 확대되었으며, 불교가 사회적인 실천성을 강하게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천적인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회모순을 극복하는 이념기반과 추진세력을 결집하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되었던 사회적인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의 독서층, 향리층이 획득하였던 사상계의 주도권을 성리학으로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연구로 원이 고려불교계에 대해 보호와 간섭이라는 이중적 불교정책을 펴서, 불교계가 천원의식을 갖게되고 원과 고려체제에 순응하는 국가불교적·체제지향적 불교로 일층 변모되고, 이에 따라 사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나. 성리학의 수용

고려 후기 성리학 연구는 그것이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조선시기를 지배하는 정치사상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먼저 성리학의 수용배경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자.

1)고려 후기 사대부는 지주적인 토지소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호농민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앙권력의 전호에 대한 부당한 수탈과 유망을 막아 지주에 충실한 복무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2)권문세족과 사대부의 정치적인 대립구도하에 전자에 의한 농장의 발달 수취와 과중 등으로 야기된 향촌사회 일반 구성원의 광범한 유망현상 등이 후자의 재지 중소지주적인 기반을 위협함에 따라 기존체제에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성리학 수용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3)당시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새로운 농업기술이 수용되었다. 농법수용에 의한 생산력의 발달로 사회 기초단위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것에 따른 새로 사회질서를 모색하려는 역사적 과제가 부여되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적인 시회질서를 모색하여 당시 사회 변화를 수렴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은 종래 유교를 철학화 내면화한 사상인데, 종래 유교와 달리 사서를 중시하고 수기치인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고려 후기에서는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여러 경전과 현실 정치론 가운데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수용되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 간섭기 유교지식인이 당시 사회가 당면하고 있었던 민의 문제, 원의 존재와 불교의 폐단 등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성리학의 수용과 정착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한 연구는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6. 14세기 고려사회의 역사적 의의

14세기 고려사회는 고려 전기 사회가 남겨놓았던 여러 사회폐단을 혁신하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하는 역사적 과제를 떠안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살폈듯이 정치사의 경우 대외모순이 특히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것은 고려의 국왕을 그들의 통치 범위 내에 묶어두고 그들을 통하여 고려를 지배한 원의 지배방식 때문이었다. 고려 국왕의 중조(重祚), 입성론의(立省論議), 원(元) 관제 형식에 맞추어 고려관제를 뜯어 고쳐 그것에 꿰어맞추는 형식의 관제개편, 원의 지배에 철저하게 부응한 군제개편 등에서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상사의 경우도 정치사와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인 불교와 성리학이 당시 원을 하나의 상위 지배기구로 인정한 정치 지배세력에 체제유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원과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면서 나타난 대외적인 모순이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던 것이다.
14세기 고려사회는 대내외의 여러 모순으로 지연된 12세기 이래의 사회변동을 마무리짓는 시기였다. 따라서 14세기 역사는 12세기 이래 진행되었던 고려 전기의 변화를 하나의 완결된 모습으로 마무리짓는 괴정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고려사회 자체의 변동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