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주 무신정권의 성립과 사회운영-1)무신정권의 동향


武臣 政權期와 高麗말의 政治, 社會的 변화

발제자 92450하승철, 9745037차승하, 9445008김정호, 9545016박달진
참고문헌 변태섭,<<한국사>>(7)국사편찬위원회
이익주, < 고려 후기 정치체제의 변동과 정치 세력의 추이><<한국사>> 5

(1)武臣政權의 成立

의종 24년 무인 정중부 등에 의하여 무신란이 발생하였다. 무신란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신하여 새로이 무신정권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면에 걸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무신란의 원인은 무신란을 야기한 귀족사회 자체에서 찾아야 할 듯 하다. 즉, 고려 귀족사회의 모순이 결국 무신란 발생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제도의 커다란 모순은 귀족세력의 대두가 귀족 상호간의 분쟁을 야기케 하였다. 귀족에게는 자동적으로 정권과 경제력 및 사회적 특권이 수반 되었으므로 이를 놓고 귀족 사이에 치열한 자기항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자겸의 란과 묘청의 란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귀족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고려의 귀족사회는 동요하게 된 것이다. 귀족정치의 내부적 동요는 무신란 발생의 기반이 되었다. 고려의 문무반은 볍적으로는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대우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고려의 귀족은 문신으로만 구성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귀족의 내분이란 문신 귀족 사이의 항쟁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귀족 상호간의 분쟁으로 문신가문이 몰락하고 귀족사회는 흔들리게 되었다. 더욱이 귀족세력의 발호에 의한 집권체제의 이완은 귀족사회의 동요와 함께 무신란 발생의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려는 문반과 무반으로 양반제도를 형성하였다. 문반과 무반은 같은 고려왕조의 양반관리로 일품에서 구품에 이르는 궁계체제(宮階體制)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문무반은 반의 구별 없이 법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제적인 양반제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문무반의 차별이 심하였다. 고려는 같은 양반이지만 문반을 우대하고 무반을 천대하는 차별정책을 썼던 것이다. 고려에서는 문반만이 귀족이 되어 정치권력을 독차지하고 심지어 군대를 지휘 통수하는 병마권까지를 장악하였으며, 무반은 다만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왕조는 형식적으로는 무반으로 햐여금 양반의 일익을 담당케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커다란 차별대우를 하였으니, 이는 무인들로 하여금 봉기케 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끝으로 무신란의 원인으로 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을 들어야 하겠다. 귀족정권하에 군인은 전쟁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잡역에 충당되어 혹사되었다. 또한 군인에게 지급된 군인전(軍人田)은 도리어 귀족정권에게 빼앗겨 그들의 생활은 곤궁을 더하여 갔다. 이러한 고려왕조에 대한 군인들의 불평은 무반의 불만과 결합되어 무신란을 발생케 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귀족정치 말기에 이르러 더욱 심하여졌고 이때 무능한 의종의 실정(失政)은 무인반란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무인정치는 처음 정중부가 집권하므로 최씨정권을 거쳐 김준, 임연에 이르기까지 전후 100년간 계속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무신정권 최충헌 이후 4대에 걸친 최씨정권이다.
무신정군의 성립기는 의종 24년의 무인 쿠데타로 정중부가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명종 26에 이의민에게 주륙될 때 까지의 명종조이다. 무신정권에 대한 반항은 무신정권 자체를 타도하기 위한 구문신계(舊文臣系)와 하부신분으로보터 일어났다. 무신란 후 명종, 신종조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 노예의 반란은 무인정치로서는 일대 시련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신정권의 불안정으로 중앙 통제력이 이완되고, 무반의 대두로 신분제도가 붕괴되며, 집권무인의 토지 겸병과 탐학으로 농민 생활이 곤궁하여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신정권에 위협이 된 것은 집권무인들 자체내의 분쟁이었다. 집권무인 들은 정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치열한 자기 항쟁을 계속하였으니, 이는 무인정치를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명종조에는 20여년 동안에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의 많은 무인집정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신정권의 혼란은 새로이 집권한 최충헌의 무단 정치에 의하여 수습되었다. 명종조의 무신정권은 아직 독자적인 집정부(執政府)를 소유하지 못하고 무인집정의 지위가 확립하지 못한 단계였다. 원래 고려왕조는 문무이로(文武異路)라하여 문무반의 상호교통을 방지하고 특히 무반에게 문관직을 주는 것은 최대한으로 억제하는 정책를 썼다. 그런데 무신란 후에는 종래 문반이 가졌던 내외의 모든 관직을 무반이 빼앗아 정치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이들 무반의 총령자인 집정무인의 지위는 불안정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독자적인 집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중방정치를 실시하였다. 중방정치란 무신 전체가 정권에 참여한 형태를 말한다. 이는 곧 무인집정의 위치가 확고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또한 명종조 무신정권은 사병조직을 갖지 못하고, 국가의 부병(府兵)에 의지하였다. 이것은 명종조의 무인집정이 공적 관직의 권위를 필요로 한 것과 같이 아직도 그들이 사적 권력의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최충헌때 완전한 사병집단은 이룩되고 그 전의 무인집정은 국가의 부병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는 명종조의 무신정권이 아직 왕조권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문반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명종조는 무인 쿠데타 직후로 무신정권이 안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립자인 문신에 대하여 견제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종조의 무신정권은 문신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방이 중심이 되어 경계하고 압박을 가하였다. 이와 같이 명종조에 중방을 중심으로 한 문반견제가 심한 것은 그만큼 무인집정의 위치가 확립되지 못하고 무신정권의 기반이 불안정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2) 최씨정권과 무인정권의 몰락

무인정변이후, 집권무인의 빈번한 교체와 계속된 민란의 발생, 위정자들의 부패와 지방관리의 착취에 따른 민생의 혼란등으로 어떤 결정적인 수습 정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도달했다. 이러한 때에 최충헌이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빼앗음으로써 무인 정권은 20년이라는 싱립기를지나 전형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선, 최충헌은 거사후 왕에게 봉사10조를 올려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을 시정할 것을 건의하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한 강력한 사병집단을 조직하여 스스로의 집권기구를 수립하였다. 무력 정치로써는 도방을 강화하고 문무의 인사를 관장하는 정방을 조직하였으며,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반대파를 탄압하고, 인사, 조세의 일까지 맡아보게한 실질적인 집정부로 삼았다. 이로써 최충헌의 명종, 희종, 강종, 고종에 걸친 집권은 봉사10조의 폐단을 안고있긴 했으나 안정기를 이룩하였다. 고종 6년, 최우가 정권을 승계하여, 고종 18년, 몽고침입에 대해 강화 천도 이후에는 교정도감과 정방을 더욱 강화하고 도방을 확대했으며, 야별초를 확대해 삼별초를 조직했다. 최우이후에는 최항과 최의가 집정했는데, 최의는 국정혼란을 초래하여 고종 45년 유경, 김인준에 의해 주륙당했다. 이들 4대 60년에 걸친 최씨정권의 최고집정부는 교정도감이었으며, 최항과 최의는 교정별감이 되었다.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는 일반무반의 집중기관인 중방은 최씨들에게 배척당하고, 오히려 최우같은 이는 문반을 우대하여 고문역할을 맡겼다. 고종 45년 최의가 유경, 김인준에 의해 주살되였으나 무인정치는 중방중심의 권신정치를 실행하는 유경과 교정별감이된 김준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러나 무인공신단을 배경으로 집정한 이들은 최씨정권에 비해, 경제, 군사, 정치기구면에서 약체화 되었다. 원종 9년 김준은 임연에게 주살되고 임연이 교정별감이 되었으나, 몽고세력에 굴복해서 원종을 복위시키는등 그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는데, 그의 아들 임위무대에 홍문계, 송승례에게 죽었다. 임씨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이된 외세, 즉 몽고세력은 항몽정책의 주동자인 무신정권에 압력을 가하여 거세된 왕권과 연합 대내적으로 독자적인 무신정권의 계승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정이 복구되었다고 해서 무신난전의 문신귀족정치가 재개된것도 아니며 무신정권이 거세 되었다고해서 문신만이 정권에 참여한것도 아니다. 오히려 삼별초 진압에 힘쓴 무인들이 대거 제상이 되고 무신정권몰락이후 100여년간 대외적 전쟁과 대내적 정권다툼에는 무반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고려말에도 무인들이 정권에 참여 그 세력이 강대되었다.

(3) 원의 간섭과 정치체제의 변동

무신정권의 종식으로 고려의 정치체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편성되었다. 이른바 측근정치(側近政治)의 형태였다.
무신정권의 붕괴 이후 원의 영향력이 증대되리란 것은 쉽게 예상되는 일이었다. 원은 고려에 다루가지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내정에 간섭하였을 뿐 아니라, 삼별초 진압과 뒤이은 일본원정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부원세력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곧 몽고와의 전쟁중에 투항하였던 고려인들이 원의 관리가 되어 고려의 정치에 관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위치는 오랫동안 몽고와 전쟁관계에 있었던 고려의 어느 정치세력보다도 우월한 것이었다. 측근정치는 고려의 국왕이 왕권의 기반을 일차적으로 원의 후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정치형태였다. 원간섭기의 전기간에 걸쳐 고려의 국왕들은 즉위하기 전 원에서 숙위하여야 했으므로 일단 즉위한 뒤에는 이전에 원에서 자신과 함께 생활하였던 시종신료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고, 이것이 측근정치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형태는 공민왕 때에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뒤에야 비로소 청산되었다. 측근정치아래에서는 소수의 국왕 측근세력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으므로, 그에 따른 폐단이 적지 않았다. 측근정치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재상산기반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으모르 츠음부터 구조적인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새로 즉위한 국왕은 언제나 새로운 측근세력을 창출하였으므로 이들은 일차적인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무신정권의 붕괴는 필연적으로 정치세력의 재편을 초래하였다. 집권무신들이 모두 축출되고 왕권이 회복되었으며, 무신집권기에 진출한 '능문능리의 새로운 관인층'으로의 문신관료들과 무신정권타도에 직접 참여하였던 일부 무신들의존재도 무신정권 붕괴 이후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무신정권의 붕괴 이후에는 무신정권타도에 협조하였던 문무관료들의 지위가 신장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붕괴와 동시에 원의 간섭이 시작되었고, 측근정치의 구조가 성립되어 국왕 측근세력이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이러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무 관료들은 오히려 측근정치라는 정치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국왕 측근세력과 혼인 등을 통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였고, 충렬왕의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운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충렬왕대 중기에 이르면 이들이 고려 후기사회의 유력한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원 간섭기에도 지방의 향리들이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는 추세는 계속되었다. 이중에서 일부는 국왕 측근세력과 타협하면서 정치운영에 참여할수 있었고, 그 결과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역시 권문세족으로 성장해나갔으며, 오늘날 고려 후기의 '신진사대부'라 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원의 간섭과 측근정치의 전개에 따라 가장 직접적 피해를 입는 것은 일반민이었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뿐만 아니라 12세기 이래 진행되었던 토지탈점 등의 폐단은 이 시기에 들어와 더욱 심해졌고, 그 위에 원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재정부담도 결국은 일반민이 짊어져야 할 몫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민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농장의 발달로 대표되는 대토지소유의 발달에 있었다. 이러한 농장은 국가에 대한 조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국가의 재정부족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일반민들의 조세부담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민들은 권세가의 농장으로 투탁하거나 유망함으로써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특히 유망현상은 고려의 지배층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토지탈점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는 지배층 전체의 이익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서도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여러 차례에 걸친 개혁정치로서 구체화되었다. 먼저 농장문제에 대해서는 토지탈점이나 '모수사패'등의 불법적인 방법으로 농장이 확대되는 것을 문제삼아 탈점된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쉬취문제에 대해서는 권세가들 역시 조세, 납부 및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불법적인 중간수탈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망에 대해서는 유망한 사람들을 본래대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개혁 정치는 국왕과 전왕의 측근 세력간의 세력 다툼에서 빚어진 것이며 모든 폐단의 책임을 전왕의 측근세력에 전가시켜 이들을 처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치는 새로운 국왕의 측근세력과 이때까지 국왕 측근세력과 타협하면서 그 자신도 토지탈점 등 사회경제적 모순의 주체가 되어왔던 권문세족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간섭기의 개혁정치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에 따른 일반민들의 저항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책으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토지 및 수취제도의 개혁을 통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제도의 운영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적인 문제점들을 개선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모순의 주체가 되었던 세력이 그 모순을 개혁하는 데서 오는 한계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원이 고려의 국왕을 후원하고 이를 통하여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고려의 국왕은 원의 후원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측근정치의 기본적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왕권이 약화 되어져 갔으며, 국왕의 통제력에서 벗아나 직접 원과 연결되는 정치세력, 즉 부원세력이 다시 대두하였다. -국왕권의 약화는 주로 고려의 국왕이 원의 정치적 변동에 직접 관련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먼저 1278년에 고려에서 축출되었던 홍다구의 후손들이 원에서 요양행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충선왕 복위 이후에 다시 고려의 정치에 간여하였다. 두 번째 부류는 국왕 측근세력에서 부원세력으로 전화한 경우이다. 즉, 왕위가 교체되는 경우 '개혁정치'라는 이름으로 전왕의 측근세력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었고, 따라서 이들 가운데 일부가 원으로 들어가 부원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여원관계의 진전에 따라 형성된 부원세력이었다. 부원세력이 대두함에 따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정치적 사건은 이들에 의해 제게된 '입성책동'(立省策動)이었다. '입성'이란 정동행성은 물론 고려국가 자체를 없애고 새로운 행성을 두어 고려를 직접 통치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성책동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그러나 '입성'은 곧 고려국가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였으므로, 부원세력을 제외하고는 고려의 모든 정치세력이 존립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되어 졌다. 부원세력은 충숙왕 이후 관리의 인사에 영향력을 직접 미치게 되었다. 특히 고려국왕이 행성관리 추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원세력이 직접 원에서 행성관리에 임명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면서 결국 정동행성이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부원세력의 강화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1345년에 설치된 정치도감이었다. 원에서는 정치도감의 설치를 권유하고 그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그 것은 충혜왕 때에 문란해진 정치질서를 회복시켜 고려에 대한 간섭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또, 고려측에서는 주로 권문세족이 중심이 되어 부원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도감의 개혁은 원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한계를 가질수밖에 없었으며, 부원세력의 지위가 원의 지원에 의한 개혁에 의해서도 강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도감의 활동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부원세력의 배제라는 이 개혁의 경험이 뒤이은 공민왕의 반원개혁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 있다.

(4) 반원개혁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에서는 1356년에 반원개혁이 성공함으로써 원의 간섭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곧 측근정치의 구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측근정치는 원의 간섭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성립된 정치형태로서, 이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상황에서는 더 이상 계속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공민왕의 즉위는 그의 추대를 주장했던 권문세족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민왕을 원에서부터 시종하였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공민왕의 측근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권문세족과 국왕 측근세력 사이에는 적지않은 마찰이 일어났다. 공민왕은 이 두세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당면의 과제인 부원세력의 척결에 주력하였다.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의 정치세력은 반원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당시 중국에서 몽고족의 지배력이 약화됨으로써 그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공민왕은 1356년 반원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기철을 비롯한 권겸, 노책 등 부원세력을 죽이고, 부원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으며, 1358년이후 원의 직할지가 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이로써 반원운동은 성공을 거두어 부원세력이 그 가운데서도 국왕 측근세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왕 측근세력이 권문세족보다 우세하지 못 하였으며, 점차 와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공민왕 초의 정치적 과제가 부원세력의 제거와 원 간섭의 배제라고 할 때, 부원세력에 대해서는 국왕 측근세력의 입장이 대체로 일치하였으나, 원의 간섭을 배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내부에 이견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일신은 부원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켰으나 그 자신완전히 제거되었을 뿐 아니라 원의 간섭이 배제됨으로써 고려의 자주성이 회복되었다.
이 반원개혁은 공민왕을 정점으로 하여 국왕 측근세력과 권문세족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은 원의 정치세력과 일정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반원개혁도 국왕 측근세력이 주도한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오히려 부원세력으로 지목되어 개혁에 의해 제거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국왕 측근세력은 점차 축소 되어갔고, 더욱이 공민왕의 측근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으로 국왕 측근세력은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였다.
1359년과 1361년의 두 차례의 걸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은 원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는 등 이전의 있었던 반원개혁의 성과를 부정하는 조치가 취해지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기용하고 그를 통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신돈에 의해 주도되었던 개혁은 전민추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탈점하고 있던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권문세족에 의해 억지로 노비가 된 사람을 다시 양인으로 환원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권문세족의 맹렬한 반대에 대해 공민왕과 신돈은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여기서 권문세족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신진관료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돈과 신진관료 사이에 정치적인 제휴가 가능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신진관료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먼저 1367년에는 성균관이 다시 지어졌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진관료들이 세력을 결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해에 과거제도가 개혁되어 국왕의 친시가 부활되었고 선진 농업기술이 전래되어 농업생산력이 발달하여 중앙정계 진출에 대한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또한 새로운 학문체계인 성리학은 신진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신돈의 등장 이후 공민왕과 신돈, 그리고 신진사대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개혁정치는 1371년 신돈이 제거되면서 중단되었고, 신돈의 제거와 무장세력의 대두는 정치세력의 재편을 가져왔다.
이와 같이 신돈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후 정국은 권문세족의 재 등장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으로 인하여 이들이 서로 대립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같이 잦은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서 대두된 신흥 무장세력들은 그들을 필요로하는 신진 사대부와 결탁하게되고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최영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신흥세력들이 주축이된 이성계의 세력이 권문세족을 대변하는 최영과 일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이 실행되었지만, 결구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최영을 비롯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신진사대부와 함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는 사전개혁문제가 주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사전개혁 문제는 위화도 회군 직후에 논의되기 시작하여 개혁론자들의 주장이 잇달아 개진되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과 권문세족이 집요하게 반대했고, 이에 개혁론자들은 이성계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사전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결국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여 이성계가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사전개혁을 완수하여 새로운 토지제도로서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사전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개혁론자들은 과전법을 제정한 바로 다음해에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역성혁명을 달성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말의 사전개혁은 조선건국의 대전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신진사대부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서 일차적으로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토지탈점을 부정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고 있던 일반민의 이해와도 부합되었다. 조선건국은 그것을 주도한 신진사대부의 계층적 이해가 광범위한 일반민의 이해와 부분적으로나마 연결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조선건국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명종조에 무인집정이 따로이 집정으로서의 특수관직을 갖지 못하고 의연 종래와 같은 공적 관직의 권위를 필요로 하고 그의 무력장치로서 강력한 사병집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국가의 부병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아직도 집권무인이 왕조 권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나타낸다. 또한 무인집정의 자기 스스로의 집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전체 무반세력의 중심기관인 중방을 통하여 무인정치를 실시하고 또 중방을 중심으로 하여 문반에 대한 압박과 견제를 가한 것은 아직도 무인집정이 독자적인 지위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적대적인 문반세력의 위협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명종조의 무신집권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한 성립과정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형적인 무신정권이라 할 수 있는 최씨정권 확립의 준비단계였다고 하겠다.
1170년 무신란, 발발이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최충헌은 확고한 무인 정권 체제를 마련한다. 이로써 최씨 무신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계속된 무인집권이 이루어지고, 친정이 복귀된 원종 이후에도 중앙 정계에 무인이 득세하게 되는 것은, 고려중기 문벌귀족체제가 근본적으로 파괴되었음을 애기한다. 또, 고려말, 정치,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고자하는 신흥유신이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관료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기존의 권문세족과, 사원, 왕실, 지방토호에 의해 자행되는 토지겸병을 문제삼아, 사전혁파를 통한 토지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꿈꾸게 된다. 그 결과,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개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