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주 무신정권의 성립과 사회운영-2)농민,천민의 신분해방운동

[12,13세기 농민항쟁의 배경과 원인][12,13세기 농민항쟁의 전개와 성격]


12, 13세기 농민 항쟁의 배경과 원인

발제자 9745007  김미성,    9745032 정기훈
참고문헌 한국사(6) <12, 13세기 농민 항쟁의 배경과 원인>

머리말

1170년 무인정변 직후 발생하기 시작한 농민항쟁은 이후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1216년 거란족의 침입과 1231년 몽고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시적으로 그 기세가 수그러들기는 하였으나, 1273년 삼별초항쟁(三別抄抗爭)이 진압되기까지 거의 1세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된 농민항쟁은 국내외의 정세변동에 따라 그 원인이나 배경이 항상 단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농민항쟁은 그 규모와 전개양상에서도 지역적인 편차가 심했으며, 나아가 항쟁주도층의 신분구성, 항쟁의 지향성 등에도 역시 다양한 편차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이때의 항쟁은 전개양상이 복잡하고 다양하였다. 이 시기 항쟁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가 약 1세기간에 걸친 다양한 모습의 항쟁을 사례연구 형식의 개별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여왔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한 연구는 개별항쟁에 대한 사실을 정리, 확인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항쟁이 고려사회라는 중세적인 태내(胎內)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당시 사회의 구조변동이나 그것에서 파생된 사회모순과 따로 떼내어 고찰할 수 없다.
12세기말에 본격화한 농민항쟁은 가까이는 12세기 초 개경주변의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민의 유망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민의 유망현상은 이 무렵 활발한 대외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봉건귀족층의 민에 대한 토지 탈점, 부의 분배를 둘러싼 귀족층간의 정치적 대립, 여진과의 전쟁을 위한 민에 대한 수취의 강화현상과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약 200여 년간 지속되어왔던 고려 전기 사회의 구조는 12세기 이후 점차 자체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2세기 후반기에 시작된 농민항쟁은 비록 전개양상이나 규모, 지향성, 참가 층의 구성 등에 다양한 편차를 안고 있으나, 그것은 당대 사회구조가 안고 있는 자체 모순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려사회가 안고 있었던 구조적 모순이 결국 그런 다양한 모습의 항쟁을 낳게 하였다. 당시 농민항쟁의 원인이나 배경을 총체적인 차원에서 접근, 고찰하는 일은 고려 전기 사회구조의 특성과 함께 그러한 사회구조가 변동되는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으로 12, 13세기 농민항쟁의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농민항쟁의 배경

1)민의 유망현상
고려시대 농민항쟁은 무인정권의 성립(1170년) 직후인 12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이미 12세기초에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의 사회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변화는 크게는 고려전기 사회를 변동시키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한국사의 어느 시기에도 찾아볼 수 없는 약 1세기간에 걸친 대규모 농민항쟁의 배경이 되었다.
12세기초인 예종대(1105∼22년)에는 민이 크게 유망(流亡)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유망은 민이 국가에 대한 조세와 역역징발 등의 공역(公役)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농민저항운동의 한 형태였다. 고려정부는 이러한 현상에 대처하기 위하여 예종 원년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파견했다.
감무가 파견된 지역을 검토하여 보면 유망의 추세를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다. 예컨대 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전 12세기 전반의 예종과 인종대(1122∼46년)에는 개경근교의 경기(10개 군현)·서해도(9개)지역에서부터 양광도(29개)·전란도(17개)·경상도(11개)지역에 이르기까지 전체 80여 개 군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감무파견지역도 처음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에서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를 미루어보아 당시 유망현상도 개경을 중심으로 한 경기·서해지역에서 시작되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결국 그것이 전국적인 범위에 걸친 광범위한 추세였음을 알려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감무가 파견된 곳이 속현으로 되어있어 속현에만 유망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수취구조상 속현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부곡제 지역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유망현상이 심하게 나타난 곳이었다. 동·철·자기·묵(墨) 등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는 소(所)지역이 중앙기관이나 지방관원으로부터 정기적인 공납인 상공(常貢) 외에 별공(別貢)을 징납당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유망이 특히 심각하였다. 여러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는 소 지역은 당시 활발한 대외교역과 그것을 주도한 봉건귀족층의 집중적인 수탈을 받는 곳이었다. 또한 이 무렵 여진과의 전쟁도 소(所) 생산품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켜 소의 주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준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12세기 초 유망현상은 속현뿐만 아니라 부곡지역에서도 크게 발생하였다. 이때의 유망현상은 기록에 나타난 것 이상으로 심각한 사회현상이었다.
12세기 초 유망현상을 일으킨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계서적이고 복합적인 영역으로 구성된 고려전기 군현체제의 자체모순과 다른 하나는 고려전기 이래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이었다. 당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10세기 이래로 완만하고 꾸준하기 이루어졌으며, 이때에 이르면 어느 정도 그 성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산전(山田)·연해지·저습지의 개간같은 농경지의 양적인 확대현상, 시비술(施肥術)과 수리시설, 새로운 종자의 도입과 같은 농지이용의 집약화로 나타났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특히 당시 宋·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대외교역과 맞물려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전반에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급속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산관계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12세기 후반 부호층(富戶層)이나 무농치부자(務農致富者)와 같은 존재의 등장은 당시 농민층의 분화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으며, 결국 유망의 빌미를 제공한 배경이 되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권농사의 임무를 띤 지방관이나 경제력을 소유한 재지유력층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것은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둘러싼 지배세력간의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낳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이들은 축적된 부를 기반으로 고리대 방납행위를 통하여 농민의 소유지를 탈점하였다. 이와 같은 농민층 분화와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독점한 봉건귀족의 토지탈점은 12세기 초 농민유망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군현체제의 모순에 따른 과중한 부세수탈도 농민유망의 배경이 되었다.

2)지배층의 분열과 전쟁의 격화
이 시기 지방사회에서 대규모 농민유망이 일어난 한편으로 중앙에서는 지배층의 심각한 분열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지배층의 분열현상은 지배층사이에 국가적인 위기의식의 광범한 확산과 함께 지배세력의 보수화·파당화 경향으로 나타났다.
먼저 국가적인 위기의식은 지배층 일각에서 도참설(圖讖設)을 인용하여 서경(西京)이나 남경(南京)에 새로운 궁궐을 짓거나 아예 수도를 옮겨 국가의 기업을 연장하여야 한다는 논의로 나타났다. 숙종 때 남경 건설이나 예종·인종 때 서경에 이궁(離宮)을 건설하자는 논의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러한 논의는 단순히 이 시기에 도참설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사상적인 풍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민의 대규모 유망이라는 밑으로부터의 동요와 민심이반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2세기 초 지배층이 시폐(時弊), 즉 당시의 폐단으로서 흔히 지적하는 상하 사치풍조의 성행, 미곡에 사토(沙土)를, 은(銀)에 동철(銅鐵)을 섞어 과다한 이익을 추구하는 유통경제의 문란행위, 요언(妖言)과 망언(妄言)의 횡행, 지방관의 작폐는 민의 유망을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현상이 부추긴 사회전반의 위기의식이 지배층 사이에 국가적인 위기의식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인 면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정치세력은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한 족당(族黨)·당여(黨與)라는 형태로서 결집하여 주요 정치사안에 따라 이합집산이 심각한 보수화·파당화 경향을 드러내었다. 결국 그러한 경향은 헌종을 옹립한 이자의(李資義)세력을 누르고 왕위에 오른 숙종의 쿠데타, 이자겸(李資謙)의 난, 묘청(妙淸)의 난 등 일련의 정치적 변동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는 12세기 초 표면화되기 시작한 농민층의 대규모 유망현상에 대해 지배층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데에 따른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2세기 초 이래 나타나기 시작한 상부구조의 정치적 분열과 하부구조의 유망현상에 고려사회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못함으로쎄 12세기 후반에는 각각 무인정변과 농민항쟁이라는 미증유의 사회변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2. 농민 항쟁의 원인

1) 토지탈점과 토지분급제의 모순
12,13세기 토지탈점의 형태는 채무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즉 빈약한 백성들이 채무를 갚지 못하면 부강양반(富强兩班)이 그들의 토지를 빼앗으므로 토지 소유의 불균형과 함께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유망을 하거나 항쟁의 대열에 합류할 여지를 마련하였다.
사적 소유지에서의 토지탈점은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농민층 내부에 계층분화가 일어나면서 새롭게 등장한 부호(富戶)층, 무농치부자(務農致富者)등이 주도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계층분화는 나아가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토착 향리층과 새로이 대두한 계층 사이에 심각한 갈등과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새롭게 등장한 계층은 토지탈점을 통하여 민과 대립적인 관계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지배권력과의 대립적인 관계로 인하여 유망민과 함께 항쟁의 대열에 참여할 여지도 있었다.
봉건귀족층을 주심으로 한 토지탈점은 사적인 토지 소유에 기초한 생산관계를 변동 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과 봉건적인 신분제에 기초한 수조권적인 토지소유 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수조지(收租地)는 수조권자의 소유지위에 분급되어 분급된 액수만큼 면조의 혜택을 받게 하거나, 소유지가 부족한 경우에는 일반 농민층의 소유지인 공전(公田) 혹은 민전(民田)에 수조권을 분급하여 소출의 일정량(1/10)을 수조하게 하였다. 토지의 분급 방식이 어떠하든 간에 분급된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일반 농민층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농민층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소유권은 수조권에 의해 그만큼 제약을 받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경제외적인 강제가 경작자이며 납조자(納租者)인 농민층에게 강하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탈점을 떠나서라도 수조권자인 지배층과 납조자인 농민층 사이에 항상 대립과 갈등의 소지가 내재하고 있었다.
당시 수조지는 분급권을 가진 국가권력과 관인층의 수조권, 농민층의 경작권이 겹쳐있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탈점은 지배세력 자체 내의 정쟁과 함께 한 토지에 두세번의 조세를 납부하여야 할 정도로 농민층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즉 농민의 소유지인 민전 위에 분급된 수조지가 탈점될 경우 농민은 국가에 대한 부담은 물론이거니와 수조권자와 탈점자에게까지 조세를 부담해야 했다. 특히 수조지 탈점은 봉건귀족층과 지방수령층이 결합, 다시 말해 국가 권력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 당시 탈점은 주와 군을 단위로 할 정도로 대규모였는데, 그것은 국가권력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지탈점이 안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간의 대립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탈점의 최대 피해자인 농민층의 불만과 저항은 탈점자인 봉건귀족층뿐만 아니라 탈점을 용이하게 해준 수령과 향리층 등 국가 지배기구에까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시 농민 항쟁이 국가 권력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2) 지방관원의 부세수탈과 군현체제의 모순
봉건 귀족층의 토지탈점과 함께 당시 농민 항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으로 농민에 대한 과중한 부세수탈을 지적할 수 있다.
무인정변 이후 무인 정권의 실력자들이 자신들의 물질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전혀 자격이 없는 자를 수령으로 파견하여 농민 유망을 가속화 시켰다. 당시 농민 항쟁의 원인이 된 수령과 향리층의 수탈은 토지탈점과 함께 한국사의 전시기를 통하여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농민 항쟁의 원인을 논할때 단순히 지방관원의 수탈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문제의 본질에 다가섰다고 할 수는 없다. 고려시대 지방관원들의 수탈이 가능하였던 배후에는 본질적으로 당시 대민수취(對民收取)의 중심 기구인 고려 전기 군현체제 내에 구조적인 모순이 있었다.
고려 전기 군현은 주현(主縣) 아래에 예속된 속현(屬縣)과 향, 부곡, 소 등의 부곡 지역이 묶여 하나의 대규모 행정 단위가 되었다. 따라서 각종 역의 징발이나 조세는 일차적으로 주현에 집중되었고, 주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속현과 부곡제 주민은 조세운반 등 각종의 공역(貢役)을 부담하였다. 부곡제는 양인신분 가운데 반왕조적 세력 거주지와 이전부터 생산 여건상 전업적으로 물품을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그 주민들은 군현제의 주민들에 비해 특정의 역을 추가로 부담하였다.
이와같은 군현 구성 때문에 고려정부는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과 속관이 상주하면서 대민수취 업무를 수행한 주현을 직접 장악하고 속현, 부곡등의 임내(任內)는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지배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물론 개별 속관이 속현과 부곡 지역에 대한 행정에 관여하고 그 곳에 거주하는 향리층을 견제 하기는 하였으나, 이들 지역에 대한 수취는 현실적으로 해당 지역의 토호 세력인 향리층이 전담하였다. 이러한 군현 지배 방식은 수령과 토호세력에게 이중의 수탈을 받았던 농민의 중앙 정부에 대한 광범한 저항과 항쟁을 유발하였다.

3. 농민 항쟁의 지향과 의미

사회 모순의 결과로 폭발 하였던 이 시기 농민 항쟁은 다음과 같은 의미와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먼저, 그동안 고려 전기 모순구조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봉건적인 신분제에 기초한 토지분급제나 속현, 부곡제등의 불합리한 수취 구조가 민의 성장을 가로막는 질곡으로서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는 낡은 유제(遺制)였다는 사실을 당시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 농민 항쟁을 겪으면서 보다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또한 농민 항쟁을 계기로 하여 국가적인 토지분급제의 운영 방식이 녹과전(祿科田)이나 과전법(科田法)의 형태로 크게 개선되었다. 한편 과중한 역부담으로 민의 대규모 유망과 항쟁을 낳게 한 부곡제가 농민 항쟁을 계기로 점차 해체되어 갔으며, 나아가 그것은 고려 전기 군현체제를 변동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지배세력의 정치 운영에 있어서 민의 존재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사실도 농민 항쟁이 가져다 준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12, 13세기 농민 항쟁은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항쟁을 통하여 당시 농민들이 제기하였던 사회 문제들이 14세기까지 여전히 지배층의 주요한 관심사였다는 사실은 직접 생산자인 민의 존재가 당시 사회 변동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성장 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당시 국왕들이 해결하고자 한 여러 시책이 사회 모순과 폐단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개량적인 수준에 그침으로써 끝내는 고려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이상과 같이 12, 13세기 농민 항쟁은 이후 역사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것은 민이 점차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