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주 고려전기의 대외관계

[귀족사회의 대외교섭][고려시대의 대외관계]


貴族社會의 對外交涉

발제자 9745033 조영주, 9745001 권성숙
참고문헌 박용운, 1987 <귀족사회의 대외교섭> <<고려시대사>> 上 일지사

1. 5代 및 宋과의 교섭

5代 諸國과의 교섭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와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저들의 정세변화에 영향을 받기가 쉬웠다.고려의 건국(918)을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후삼국의 정립하고 있을때는 중국 역시 5代(907∼960)의 혼란기였다.고려와 5代제국은 다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아직 대륙 북방의 契丹帝國이 직접적으로 하는 문물의 교류와 조공을 통한 우호적 접촉을 유지하여 갔다.
고려의 태조가 제위한 26년간은 後梁·後唐·後晉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왕6년에 고려의 사신이 후양에 다녀온 것을 필두로 하여 이후 후당·후진에만도 10여차례나 사절을 파견하고 있다. 한데 고려측의 사절 파견이 이처럼 잦은 것에 비해 후당·후진은 각기 고려왕의 책봉을 위하여 한 차례씩만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對中國접촉에 고려가 보다 적극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주된 이유는 대외적으로 정치적인 지원을 얻는데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또한 사절의 교환에 따른 물자의 교역도 상당량에 달했으므로 일면으로는 문화적·경제적 욕구도 상당히 작용하였다고 짐작된다.
태조의 뒤를 이은 惠宗代에는 재위 2년 동안에 후진과 서로 한 차례씩 사절을 교환한 사실이 전한다.고려측으로서는 嗣位를 알림과 동시에 契丹의 격파를 하례하기 위하여서였고, 후진은 고려의 새 왕을 책봉하여 주기 위한 내용이었다.
다음 代인 光宗에 이르러 後周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상호간에 내왕이 잦아질 뿐 아니라 교류의 양상도 좀 달라지고 있다.광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혁신적 정책을 단행한 군주였다. 그 뒤 왕7년에는 후주의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百官의 衣冠을 중국제도로 고치며, 이어서 科擧制의 채택이나 兵制 改革 등의 혁신 정치를 단행하였다.
요컨대 고려는 정치적 지원이나 물자의 교역 및 선진 문화의 수입 등을 목적으로 5代 諸國과 교섭을 계속하여 왔으며, 광종 때는 그것이 여러자기 문물제도의 정비에도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5代 제국도 고려로부터 典籍을 얻어가는 등 문물의 교류를 통해 이익을 보는 면이 많았다.이런한 관계는 후주의 뒤를 이은 宋과의 교섭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宋에 대한 親善外交

후주로부터 건국된 宋(960)과 고려간에 국교가 처음 열린 것은 광종13년이었다. 고려에서 먼저 송으로 廣評侍郞 李興祐를 파견하여 交聘함으로써 국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고려는 송에 대해 친선외교를 폄으로써 중간에 끼여 있는 글단이나 여진을 견제하려던 정치적 의도도 없지 않았으나 송의 선진문화 수입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이에 비해 송은 국초이래로 文治主義를 채택한 결과 국방력이 극히 약화되어 동북으로부터 강대한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연이어 받고 있었으므로 고려와 통하여 저들의 압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양국은 서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들은 그때 그때의 경화에 따라 거란·여진등이 개재된 국제분쟁에는 휘말려 들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우호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成宗12년(993)에 거란의 제 1차 고려침입이 있은 후부터 공식적인 麗宋國交는 일시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麗宋간의 국교가 재개되는 것은 11세기후반인 文宗 25년의 일이다.이때는 이미 거란의 세력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을 뿐더러, 송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려는 고려의 의지가 강한데다가, 고려와 通交하여 거란을 견제코자 하는 송의 전통적인 외교책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12세기 초엽에 여진족이 발흥하여 금제국을 건국하면서 다시 변모하게 되었다. 송은 여진족이 일어나 큰 세력을 형성하자 그와 손을 잡고 遼(契丹)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고려에게 그 중재를 맡아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金人의 야만성을 지적, 두 나라가 연합하여 요를 치는 것을 만류하였다.그러나 송은 금과 교섭하여 요를 협격해 멸망시키는데 일단 성공했지만 금은 요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송까지 쳐 그의 서울인 변경을 함락하고 上皇인 徽宗과 新帝 欽宗을 비롯해 많은 사람을 납치하여 가는 이른바 靖康의 변을 일으킴으로써 북송은 망하고 남은 一族이 강남으로 피신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대략 살펴보았듯이 여·송간의 국교는 間歇的·斷續的이었다. 그러나 우호적인 관계는 시종 유지되었으며,그간에 공식적인 조공제도나 비공식적인 접촉을 통한 문물의 교류는 자못 성하였다.그리하여 송의 문화가 우리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2.遼와의 항쟁

太組의 對契丹政策과 東亞 國際情勢

거란은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별 힘을 가지지 못하였으나 당말의 혼란기에 耶律阿保機가 나와 제부족을 통일하고 을단제국을 세우면서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보기는 장차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먼저 배후의 압박을 제거코자 동쪽의 渤海를 급히 쳐 멸망시켰다.
그의 뒤를 이은 太宗이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화북의 燕雲 16州를 획득하는 등 영토와세력을 확장하여 갔으면 마침내 947년에 遼로 고쳐 중국을 포함하는 대제국 수립의 결의를 밝히기에 이르렀다.
거란이 고려에 처음 교섭을 해 온 것은 고려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태조 5년으로 나타나 있다.하지만 당시 고려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해 크게분노하고 있었다.그는 발해를「친척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국초부터 계속 북진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거란에 대하여는 適國視하여 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여기다 중원에서 송이 건국되자 고려는 일방적인 친송정책을 썼으므로 거란족의 요와는 더욱 더 대립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압록강 유역으로 눈을 돌려 보면, 그 하류에는 압록강 여진, 중류에는 발해의 유민이 세운 소독립국가인 정안국이 자리 잡고 있었으면 송과 통교하고 있었다.특히 거란에 원한이 많던 정안국은 송태종의 제의를 받아 들여 거란을 협격하려는 움직임 마저 보이고 있었다. 이제 동아의 국제사회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던 요는 어떤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게 된 것이다.
요는 국내 정치의 안정을 되찾은 성종때에 이르러 그 대책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압록강의 방면을 정토하는 일이었는데,고려가 아닌 압록강여진과 정안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요는 이와같이 하여 송에 대한 견제와 고려의 공격에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遼의 제1차·2차 침입

성종12년에 요는 마침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하여 옴으로써 여·요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소손녕은 적극적인 군사행동은 취하지 않고 위협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徐熙는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소손녕의 침입이유로,

1)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네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2)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 송을 섬기고 있다 는 점을 들었으며,땅을 베어 바치고 朝聘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서희는

1)그렇지 않다.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터전으로 하였으므로 고려라 이름하였고 평양을 도읍으로 하였다. 만일 地界로 논한다면 상국의 東京도 모두 우리 境城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2)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境內였는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盜據하고 있어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이다.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도로가 통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느냐고 답변하였다.소손녕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 황제에게 고한후 군사를 되돌렸고 이에 따라 서희는 성종13년부터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몰아내면서 興化鎭·龍州·通州·鐵州·龜州·郭州등의 강동 6중에 성을 쌓아 우리의 영토로 편입시켰던 것이다.
고려는 이후 요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행하게 되지만,이로써 요는 그나름대로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으며,고려는 그 대신으로 강동6주를 확보하는 실리를 얻음과 동시에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추구하는 방향을 취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동6주가 고려에게뿐 아니라 자기네가 동여진을 경략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재인식하게 되었다.그리하여 요는 재침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차에 마침 고려에서 강조의 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요의 성종은 강북의 죄를 묻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顯宗 6년에 친히 涉騎40만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 2차전을 시작한 요의 성종은 흥화진에서 순검사인 양규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그대로 남겨둔 채 통주로 진격하여 강조를 붙잡아 살해한 후 개경까지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성종은 河拱辰등을 통해 고려측의 정전 제의를 받아들여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을 확인하고서 군사를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遼의 제3차 침입과 그후의 교섭

제2차전에서 많은 兵馬만을 잃고 돌아온 요의 성종은 고려에 대해 깊은 원한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고려 임금의 친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의 불만은 더욱 컸다. 그러자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고려는 이 요구 역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이라하여 양국사이에 긴장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고려가 현종5년8월,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교빙을 요청함으로써 요에 대한 적대의 결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러 두 나라는 다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종9년(1018)에는 소배압에게 10만군을 주어 대공세를 펼쳤다.연군은 우리 군사의 공격을 받아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개경에 가까이까지 진격하였다가 퇴각하던 도중에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참패를 당했다. 이것이 유명한 귀주 대첩이다.
수차의 侵寇에서 요는 번번이 대배하였고 고려 또한 오랜 전란에 지쳐 양국은 서로 화평을 바라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국간에 和約이 성립되었고 그 결과 요는 압록강 동쪽에 있는 보주와 선주를 차지하였을 뿐 달리 전쟁에 의해 달성한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려는 상하가 단결하여 대륙 북방의 강자인 요의 침구를 잘 극복해낸 것이다.
麗·遼간에는 지금까지 살펴 온 대로 전쟁내지는 긴장상태가 연속되었으므로 문물의 교류면에서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그렇지만 제1차전의 강화가 성립된 후 互市場인 권장이 설치되었고, 또 국교를 회복한 다음에는 사행무역과 함께 밀무역이 행하여져 금·은·공예품등이 수출되고 丹絲·羊등의 수입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불교문화의 교류로서 원효의 기신론소가 요에 전해져 반포되는가 하면, 요의 대장경이 대각국사의 속장경간행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 불교자전이면서 일반민의 일용자전으로도 가치가 높은《龍龕手鏡》이 고려에 크게 유포됨과 동시에 증보된 사실등 이다.

3. 金<女眞>과 교섭

초기 女眞과의 관계

여진족은 渤海時代(발해시대) 이후 점차 남으로 퍼져 나와 羅末(나말),麗初(려초)에 동북으로 함경도 일대와 서북으로 압록강 南岸(남안) 및 平北(평북) 일대까지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 동북방면의 여진을 東女眞(동여진)이라 하고 서북 방면의 여진을 西女眞(서여진)이라 불렀다.
고려는 건국과 동시에 북진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여진과 일찍부터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에 대비하여 서북면 쪽으로는 平壤都護府(평양도호부)가 설치되거니와 동북면 쪽에는 ?巖城(골암성)이 있어 그 기지가 되었다.

태조는 庾黔弼(유검필)로 하여금 개정군 3,00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골성암을 지키게 하는 한편 주변의 여진족을 소유케 했다.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태조 이후에 역대 임금들에게 계승되었고 그에 따라 여진과의 관계도 긴밀도를 더해갔다.
고려는 이들에 대해 그전과 마찬가지로 무력에 의한 응징과 회유책을 함께 쓰며 정책을 지속하였다.
원래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 위에 현실적인 이해 관계도 겹쳐 向化(향화). 投化(투화)의 여진인은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때 저들은 주로 토산물을 바쳤고 고려는 그 답례로 생활필수품을 暘與(양여)하는 한편 추장들에게는 職階(직계)를 주기도 하였다. 이로써 여진인 들은 경제적으로 득을 볼 뿐만 아니라 고려의 職階(직계)를 가지고 자기네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계기로도 삼았을 것이다. 이 밖의 投化女眞人(투화여진인)들에게 空地(공지)를 주어 살게 하거나 변방의 방위군에 편입시키는 등의 조처도 고려가 취한 적극적인 회유책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여진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매우 커졌다.


尹瓘의 女眞정벌과 9城

대소의 침구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평온하였던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북만주의 松花江(송화강) 지류인 아르추카河(하) 유역에서 完顔部(완안부)가 일어나 그 세력을 동남으로 뻗어 두만강 지역까지 미쳐오게 되면서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다. 完顔部(완안부)의 烏雅束(오아속) 때에 저들은 군대를 파견하여 이미 고려에 복속하고 있던 갈유순 一帶(일대)의 여진부락을 경략하고 나아가서 계속하여 고려에 의뢰코자 來投(래투)해 오는 女眞人(여진인)을 추격하여 定州(정주)의 長城(장성) 부근까지 이르게 되었다.
肅宗(숙종) 9년 고려로서는 이를 도저히 좌시할 수가 없었다. 숙종은 처음에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임한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돌아와, 다시 ?密院使(구밀원사) 尹瓘(윤관)을 대전하게 했으나 그 역시 패하고 말았다. 적은 騎兵(기병)인 데 비해 아군은 주로 步兵(보병)인 데다가 그 조직마저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관은 임금에게 패전의 원인을 아뢰고 別武班(별무반)이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편성하여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숙종이 죽고 예종 2년 12월에 尹瓘(윤관)을 元師(원사), 吳延寵(오연총)을 副元師(부원사)로 하는 고려의 17만 대군은 定州關(정주관)을 떠나 기습작전을 펴서 여진족을 소탕하고 갈유순 一帶(일대)를 점령하였다. 윤관은 이 지역에 雄州(웅주), 英州(영주), 福州(복주), 吉州(길주)의 4城(성)을 쌓고 다음 해 2월에는 咸州(함주)를 大都督府(대도독부), 그리고 위의 4州(주)와 공검진을 防禦州鎭(방어주진)으로 편제하였다. 이어서 3월에는 宣州(선주)와 通泰鎭(통태진), 平戎鎭(평융진)에 도성을 쌓았다. 이것이 바로 尹瓘(윤관)의 9城(성)으로 이들 성의 중심을 고려 兩界(양계)의 행정체제인 州(주), 鎭(진)으로 편성하였음을 주목된다. 이는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정책의 실현이며 동시에 농업사회의 내적 팽창에 따른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 제시한 9城(성)의 명칭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 예종 4년에 9城(성)을 되돌려 줄 때의 기사를 보면 吉州(길주), 崇寧鎭(승영진), 通泰鎭(통태진), 英鎭(영진), 福鎭(복진), 眞陽鎭(진양진), 咸州(함주), 雄州(웅주), 宣化鎭(선화진)의 순서로 철수하고 있어서 설치의 宣州(선주), 公 州(공 주), 平戎鎭(평융진)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새로이 崇寧鎭(승령진) , 眞陽鎭(진양진), 宣化鎭(선화진)이 추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의주와 平戎鎭(평융진), 宣化鎭(선화진)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를 9城(성)으로 일컬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꼭 맞는 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실 9城(성) 지역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城(성)이 수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다음 9城(성)에 있어서 또 하나 큰 문제는 그것의 설치 지역에 관한 것이다.
이는 많은 의견이 제시되고 있거니와 그것들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가)公?鎭(공험진)의 위치를 豆滿江北(두만강북)으로 잡아 그 이남으로부터 定平(정평)까지의 咸鏡道(함경도) 一帶(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설

(나)吉州(길주) 내지 磨雲嶺(마운령) 이남부터 定平(정평)까지 주로 咸南(함남) 一帶(일대)에 비정하는 설

(다)咸關嶺(함관령) 이남 定平(정평) 이북의 광의적인 咸興平野(함흥평야) 一帶(일대)로 보는 설

이중 (다)는 주로 日帝下(일제하)에서 日人學者(일인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이들의 이론은 현지를 답사하고 치밀한 고증까지도 곁들인 것이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植民史觀(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연구했던 때문에 9城(성)의 범위를 될 수 있는 대로 좁히고자 하여 억지로 咸興平野(함흥평야) 一帶(일대)에 갖다 맞추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설이다.

다음 (나)는 英州廳壁記(영주청벽기) 등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丁若鏞(정약용) 등 조선후기 實學者(실학자)들의 주장으로 그 뒤에도 지지를 받은 바 있다.

(가)는 <<高麗史(고려사)>> 地理(지리)志(지)와 <<世宗(세종)實錄(실록)>> 地理(지리)志(지),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등 官府文書(관부문서)에 나타나 있다. 좀더 확실한 대답은 역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이러한 몇 가지 견해들을 아울러 이해하여 둘 필요는 있는 것이다.
이상 9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고찰하였거니와, 尹瓘(윤관), 吳延寵(오연총) 등은 예종 3년 4월에 일단 개경으로 개선하였고 여진의 사자의 간절한 9성의 還附(환부)를 애원함으로써 4년 7월에 그의 還附(환부)를 결정하고 곧 철수에 들어갔다.

金國 成立 이후의 교섭

9성을 환부한지 4년 뒤인 예종 8년에 烏雅束(오아속)의 아우 阿骨打(아골타)가 동북면 여진을 수중에 넣고 또 遼軍(요군)을 격파하고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다. 그 이듬해에 그는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會寧(회령)을 수도로 하여 金(금)나라를 세웠다. 이가 바로 金(금)의 태조인 것이다. 당시 요와 대치하고 있던 金(금)은 고려와의 대립을 적극 회피하였다.
金(금)은 고려에 형제관계를 맺고 화친을 제의했다. 그러나 仁宗(인종) 3년에 遼(요)를 멸망시키고는 태도를 바꾸어 君臣關係(군신관계)를 강요했다. 고려는 이를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양국간에는 별다른 충돌 없이 원만한 관계가 성립되어 이후 줄곧 지속되었다.

4. 일본 및 아라비아와의 관계

日本(일본)과의 관계

고려와 일본사이에는 정상적인 국교가 열리지 않았다. 간혹 일본인의 고려에의 來投(래투)나 상호간에 행해진 송환, 그리고 물자의 교류 등에서 약간 찾아볼 수 있다.

아라비아와의 관계

고려의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왕래한 것은 확실히 이채였다. 아마 宋(송)商(상)들의 고려 무역에 자극되어 그들도 우리 나라에까지 오게 되지 않았나 짐작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 송상이 中繼貿易(중계무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제약을 받은 듯, 아라비아 상인들의 고려 무역은 계속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