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주 사회구조와 신분제

[귀족사회의 신분제와 가족제:1,2][고려시대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


고려시대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

발제자 9745036 박 성 언
참고문헌 채웅석 <고려시대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한국사>>(6) 한길사

1. 머리말

지배질서는 지배층이나 국가권력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지만, 그것들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민과의 상호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볼 때 이글의 과제와 관련하여 고려전기의 전후, 즉 신라말기와 12,13세기에 전국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민의항쟁이 일어났던 사실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항쟁의 결과로 국가질서가 교체되었는데, 이러한 항쟁은 사회모순이 극대화되고 그에 대한 기존질서의 억지력이 약화되면서 일어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항쟁의 위상파악을 구심점으로 삼고 당시 재편되어간 향촌사회를 바탕으로하여 구축되었던 지배질서를 살피게 될 것이다. 향촌사회는 모든 사회관계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장(場)으로서 국가권력과 지배층, 민 사이의 역동적 관계가 향촌사회에서 어떻게 질서화되고 변동되었는가 하는 점이 이 글의 주요 검토사항이다.
신라하대 민의 항쟁은 농민층의 분화가 심화되는 속에서 수취체제의 모순을 기폭제로 하여 일어났으며 항쟁에 참여한 계층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따라 사회변동을 수렴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질서에서는 항쟁에 참가하여 무리를 이끌었던 계층들에게 정치.사회적인 참여를 상대적으로 개방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사회질서를 논의할 때 그 자체속에 내포된 모순과 변동의 계기를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고려전기의 향촌상태와 본관제의 지배 질서

1) 나말여초의 사회변동과 본관제 성립의 배경


신라하대에는 골품제의 해체로 대표되는 지배질서의 붕괴와 함께 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고양되었다. 생산력이 발전하였지만 그 성과를 민들은 자기 몫으로 누릴 수 없었고, 권농기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수취부담이 가중되자 민들은 저항으로 나설 수 밖에 었었다. 그 당시 저항은 유망의 형태로부터 초적(草賊)활동, 적고적(赤袴賊), 양길(梁吉), 기훤(箕萱) 등의 활동처럼 대규모로 조직된 항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권력은 사치를 금지하고, 지방제도를 비롯한 통치조직을 개편하는 등 수습대책을 시도하였지만 자체 모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민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자위조직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이들 자위조직에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호부층(豪富層)과 소농민들이었으며, 이 둘 사이에는 계급적 대립관계가 내포되어 있었으나 공동의 이해관계에서는 상호 결합했다.
삼국시기 4-6세경에 철제농기구와 우경, 수리시설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사적소유가 진전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농민층이 분화되어갔다.
호부층은 신라하대 민의 항쟁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된 상황 속에서 이를 계기로 하여 지방세력으로서 분립적인 경향을 현실화하고 강화해나갔으며,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몰락농민들과 계급적 대립관계를 이루었다. 호부층은 민과의 사이에 계급적 대항관계를 첨예화시키는 것 보다는 그들과 연대하여 일정한 정치적 지향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해 나갔다.

지방세력가들은 자기지역에 있어서나 다른 세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의 지위가 지역사회에서의 지배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또 호부층들은 공동제례의식을 행함으로서 지역사회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을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점은 향도(香徒)의 조직과 역할을 살펴보아도 잘 드러나는데, 그 활동내용은 주로 불상과, 종, 석탑, 사찰 등의 조성과 법회 등에 대규모의 노동력. 경제력 등을 제공하고 그것을 매개로 신앙활동을 하였으며, 호부층이 주도하는 공동체적 유대강화를 현실적인 계기로 작용시켰다..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을 위와 같이 파악한다면, 신라 골품제사회가 붕괴되고 후삼국기를 거쳐 고려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성립되었으며, 고려왕조는 "인민을 법도있게 수취한다'고 표방하면서 조세압박에 대한 저항이나 새로운 정치적 지향이라는 호부층과 소농민들의 공동의 목표는 일정하게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호부층과 소농민층간에 부차적으로 처리되었던 계급적 대립관계는 그대로 온존되고, 오히려 표면으로 부상되면서 고려의 지배질서 속에서 새로운 외피를 걸치게 되었다.

2) 적의 작성과 본관제의 향촌지배질서


고려의 본관제(本貫制)는 위와 같은 나말려초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고 그 내용들은 籍(적)의 작성을 통하여 조정되고 실체화되었다.

고대국가에서도 양전(量田)과 호구(戶口)파악이 이루여져 적이 작성되었으나 나말려초 변동기를 거치는 동안 토지소유관계와 군현의 영역이 많이 변화하였다. 그와함께 고려는 재편된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관계를 국가적 지배질서 속으로 편제하는 조치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치읍(置邑)의 형태로 나타났다.
"읍을 둔다"의 조치는 읍사(邑司)의 구성, 즉 재편된 지역사회의 내용을 국가에서 파악하여 지배질서 속으로 편제시키는 것으로서, 적(籍)의 작성과 그것을 토대로 한 치읍조치를 통해 영역확정과, 내부의 사회경제적 관계들이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되었다. 또 치읍은 보통 호구의 파악과 동시에 이루어졌고, 995년(성종14)경에 완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 국가. 호부층, 민 사이에 적의 작성을 둘러싸고, 그 각 계층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민족시킬 수 있었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이 시대 특징적인 국가권력, 토지분급제도, 신분계층질서 등이 형성되었는데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구성된 본관제에 의한 향촌지배질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당시 지역사회에서는 자위체제를 운영하면서 의식상으로 형성된 지역내의 결속과 타지역에 대한 개별성이 강하게 작용하여, 동일한 군적에 오른 백성으로서의 일체감에 기초를 두었다는 의미의 "군백성(郡百姓)으로 인식을 하여, 그 자신들이 결집을 이룰수 있었다.
또 호부층을 중심으로 직역체계를 수립하고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하였는데, 이것을 영역내의 계서적(階序的)지배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본관제의 지배방식은 영역간에도 계서적인 지배형태를 채택하였는데, 군현제와 부곡제, 주현(主縣)과 속현(屬縣)의 구별이 그것인데, 주민에 대한 법제적인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군현의 일반촌락과 부곡제지역 사이에는 다방면에 걸친 차별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역간의 계서적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영역규제가 실시되었는데, 영역규제는 호구와 전정(田丁)모두에 실시되었다.
국가로부터 향리의 직역을 분정받은 호부층은 나말려초 관반조직을 계승하여 읍사를 구성, 그 지역을 지배하였다. 읍사에는 향리직제가 마련되고 행정조직이 설치되어 행정실무를 총괄하였다. 또한 이 계층은 지방군의 지휘자가 되어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또 읍사의 하부단위에는 촌장. 촌정의 직임이 있어 촌성이 분정되는 지역촌단위의 영역에서 지배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국가에 의한 촌락지배는 재지의 유력계층, 즉 향리층이나 촌장, 촌정계층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고려 전기의 향도조직과 성격을 살펴보면 신라 하대의 그것을 기본적으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호부층들이 주도하는 본관의 정치적 공동체, 즉 읍사가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향도조직은 이 조건에 일정하게 제약받고 역으로 그 것을 보강하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 향도의 규모는 영역적으로 군현 또는 지역촌 규모였으며, 지역민들을 포괄하든지 유력계층으로 구성되면서 호부층 중심의 지역사회운영을 보완하였다.
다음에 고려 전기 국가질서의 일환으로서 팔관회.연등회와 향도의 관련성이 주목되는데, 즉 지방의 지배세력들이 향도조직을 통해 지역내 통합을 강화하려 한 것처럼, 국가적 차원에서는 팔관회와 연등회가 지방세력을 포섭.지배하는 장치로서 의미를 가졌던 점이 지적되고 있다.

3. 본관제와 신분계층질서의 관계

1) 본관제의 지배방식과 양천제

고려시대 신분제는 양천제(良賤制))를 바탕으로 하였고, 그에 따라 신분이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크게 나뉘었다. 이와는 달리 고려시대 신분체계를 관료귀족, 중간계층, 양인, 천인의 4계층으로 구성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신분제의 기본구조를 양천제로 파악하려 하며, 특히, 고려 전기 국가권력은 국역부과를 중심으로 전체주민을 양천제라는 기본틀로 파악했다.
사회의 내적 질서가 법제화된 한 측면은 노비제를 통하여 살펴볼 수도 있는데, 노비는 개인 또는 기관의 재산으로 인정되어 천인신분이 되었다. 노비신분은 원칙적으로 양인과의 혼인이 금지되었고, 국역을 부담하지도 않았으며, 본관제에 편성되지도 못하였다.
노비신분과 같이 본관제에 편성되지 않고 국역을 부담하지도 않던 존재로서 양수척(楊水尺)을 들수 있는데, 이들은 적에 올려져 파악되지도 않고, 이동하는 생활을 하며 부역의 의무도 지지 않았다.
그러면 본관제질서 속에 편제된 양인신분 내부의 계층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고려시대에 천인(노비)에게는 사환권이 부정되었지만 양인에게는 인정되었다. 그렇지만 사환권(仕宦權)이 양인신분의 보편적 권리로 인정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고려시대 관료층과 중간계층 사이에는 계선이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관료층의 하부와 중간계층의 상부가 서로 중첩되어 연결되었던 점이 밝혀지는데, 비록 별도의 신분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양인신분내에서도 중간계층과 그 이하 계층 사이의 계선이 부각된다.
고려전기 양인층 내부에서 현실적인 경제력의 차이를 기반으로하여 국가에 대한 역부담의 구분으로 발전하고, 계층적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되어갔던 모습은 정호와 백정의 구분으로 찾아볼 수 있다.
정호는 고려 전기 백정보다 우세한 조건을 가지고 있던 부강한 계층이었고, 정호층이 변방수비와 농지개간이라는 이중목적을 위한 변방 사민(徙民)의 대상으로 차정(差定)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정호층의 부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 정호와 백정의 관계는 어느 정도로 계서화되어 있었을까?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정호는 국가에 직역을 지면서 전시과제도에 의해 군인전. 외역전 등의 분급대상이 되고 정치적으로 지배계층 범주의 하한을 이루었던 중간계층들이었으며, 백정은 일정한 직역과 전정을 받음이 없이 다만 국가에 대해 조세를 부담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정호와 백정층 각각의 내부에는 그 존재형태가 다양했는데, 정호의 경우 같은 지역 사회 내에서도 직역의 종류와 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또는 가문의 우열을 따라서 차이가 났으며, 영역간의 계서적 지배방식하에게 그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였다.

2) 사회적 분업과 계층질서

사회적 분업과 유통구조는 국가권력과 지배층에 의해 조직되는 면이 강하였다. 특히 국가질서 의 차원에서 業(업)이 고정화되었으며, 거주지와 복색, 교육과 입사(入仕)의 기회 등 사회적 위신이 차별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농민은 조(租), 포(布), 역(役), 삼세(三稅)의 주요부담층이었고, 이 시기의 공물생산은 농민의 다양한 생산활동분야에 걸쳐 강요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농업을 기초로 하는 한편 공물생산과 관련하여 본관제하에서 특수하게 편제된 소(所)지역이 존재하였는데, 소는 특정공물을 생산하면서 소리(所吏)라는 그 자체의 관리조직을 갗추고 군현제에 의해 행정적 통치를 받았다. 이처럼 군현의 일반농민과 소의 주민으로 양자를 구분하여 이루어진 공물수취는 군현규모, 크게는 국가규모에서 통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조정되었다. 같은 부곡제에 포괄되는 향(鄕), 부곡(部曲), 장(莊), 처(處), 역(驛), 진(津) 등의 지역들도 소의 경우처럼 실상 농업에 종사하면서 국역체계 속에서 특정역을 부담하기 위하여 설정된 단위들이었다.
또 농.공.상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개개인의 존재형태는 다양하였지만, 그에 대한 차이는 고려되지 않은 채 모두 공장. 상인 등의 범주로 파악되었다.
이상에서 본관제에 긴박된 양인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국역체제는 각종 사회적인 역의 부담층에 대해 각각 분리 설정하였고, 같은 본관 지역내에서도 정호와 백정, 잡류, 공장과 상인 등의 사회적 지위가 달리 규정되었다.

3) 차대정책 합리화의 논리

신분계층 질서가 표현되는 정치적, 사회적인 차별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식되면서 고정화되고 세습화 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 분식의 대표적 형태는 형벌과 관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계서적 지배를 합리와하기 위한 근거로서 왕조국가질서에 대한 불복종에 따른 형벌을 들었다. 특히 건국당시의 상황을 문제로 삼았는데 이때 본관제가 전국가적 규모로 질서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국가질서에 대한 협력여부를 명분으로 하여 차별이 합리화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부곡제지역민은 영역적으로 규제되어 계서적 차대(差待)를 받고, 자녀에 대한 귀속률이 노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염격하게 적용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양천제의 큰 테두리 속에 부곡제지역민이 양인에 포함되지만, 양인내에서 다른 계층과는 다시 분명한 계선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점이 고려시대 신분계층질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곡제지역민을 제외한 양인신분내의 다른 계층들에 대한 차대는 대개 본말관(本末觀)의 입장에서 합리화되었는데 이는 농업이 본업이 되고 수공업과 상업은 상대적으로 말업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고려시대에 말업관의 토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권농과 토지긴박이라는 국가적 필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공업의 경우 신라시기에는 공장이 관등위계를 받았으며 지역사회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민의 분화가 진전되면서 개별적이고 사적인 성격의 수공업자가 나타나게 되고, 그에따라 국가권력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 농업에 기초한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현상으로 파악하여 소위 말업관에 따른 차대에 의한 제한을 강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차대정책은 기본적 생산인 농업으로부터 일탈하여 상공업으로 전신하는데 대해 일정한 제한을 하는 것인 동시에 업(業)의 강제, 즉 역(役)의 징발체제의 유지라는 국가의 필요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였다.

4. 고려 후기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의 변화

1) 민의 항쟁과 관 주도 향촌통제의 모색

본관제에 의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는 12세기 이후 점차 변화하였는데 주목되는 변화의 모습을 살펴보면 속현지역에 감무(監務)를 비롯한 지방관이 많아지고, 부곡제지역이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군현내에 흡수되면서 감소되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망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고 항쟁으로 발전하면서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충격이 가해졌다.
이 시기 민의 유망은 경제적으로 진전(陳田)의 대규모적인 발생에서 표현되었는데, 주된 원인은 사회경제적인 경작조건의 악화에 있었다.
지배층들이 소유지와 수조지를 집적시키는 경향이 많아지고, 토지를 탈점(奪占).겸병(兼倂)하는 풍조가 예종. 인종때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농업뿐 아니라 수공업이나 상업을 통하여 소농민들의 잉여를 축적할 가능성도 권세가, 사원, 지방관, 향리 등에 의한 강제적 상행위 결과 축소되었다.
이처럼 난숙한 귀족문화는 수취량을 늘리고 농장의 확대나 피지배층을 상대로 한 강제적 상행위, 고리대 등을 통해 그 물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상과 같은 사회변화 속에서 팔관회와 국선(國仙)의 유풍이 원래의 격식을 잃고 쇠퇴되었는데, 이는 전대의 신앙활동보다 향촌공동체적 모습이 부각되는 향도의 모습이다. 이는 12세기 이후 농민층의 분화과정에서 몰락농민이 발생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자립성을 확보해나가는 소농민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보장할 수 있도록 향촌공동체를 재구성할 필요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지배질서도 재편되었는데, 고려후기에는 현거주지에 적을 붙여 수취대상으로 삼는 공호제(貢戶制)가 실시되었다.
지방관 주도로 향촌사회의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추구되면서 향례도 개편되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일련의 정책들은 사회변동에 대응한 것이었지만, 기존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개혁한 수준은 아니였다.

2) 신분계층질서의 변화

12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동요하게 되었으며, 신분계층 질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세기 이후 공호제가 실시됨으로써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영역간에 실시되었던 계서적 지배질서가 무너지면서 부곡제 지역민과 일반 군현민 사이의 신분적인 동질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부곡제지역이 해소되어 군현으로 상승하거나, 부곡제민들의 항쟁이 계속되어 더 이상 차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볁로는 '중간계층'의 계서적 지위의 변화를 들수 있다. 12세기 이후 향리들은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향촌질서를 주도하기 어려워지고 향역부담자들로 지위가 하락해갔다. 그리하여 차츰 향리들의 피역(避役)현상이 심해져 더 이상 향촌사회운영이 어려웠고, 직역부담에 따른 반대급부로서 전정(田丁)의 분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셋째로는 공호제실시가 민의 유망에 대응한 것이면서 또한 양인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인데, 국가는 조세부담층을 확보하기 위해 양수척이나, 사적으로 예속된 양민들을 노비변정사업 등을 통해, 추쇄(推刷)하여 공호에 충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호제의 실시를 통한 공역부담층의 확보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비제 자체는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고수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려 후기에는 양인에서 천인으로 뿐만 아니라 노비가 양인으로, 나아가서는 지배계층으로까지 상승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충렬왕 이후에는 결핍된 국가제정을 보충하기 위해 제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도 실시되었으며, 일반평민이나 향리층들도 과거제를 이용하거나 이러한 기회들을 이용하여 상급지배계층인 품관으로 지위를 상승시켰다.
또한 호구를 위조하든지 권귀와 연결되어 불법적으로 관직을 받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양반으로 상승하기도 하였다.
지배질서의 차원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양인농민층이 몰락하고 품관층(品官層)이 확대되는 현상인데, 고려후기 신분제 정비는 노비변정과 양반호적의 정리를 통해, 대체로 지배층을 양반에 한정시키되, 한편으로 천인을 노비에 한정시켜 양인을 확보하고, 양인내부의 계층적 동질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고 파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