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주 사회구조와 신분제

[귀족사회의 신분제와 가족제:1,2][고려시대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


귀족 사회의 신분제와 가족제

발제자 9745036 차명준, 9745026 손현정
참고문헌 박용운 1987 <귀족사회의 신분제와 가족제: 1,2> <<고려시대사>>上 일지사

1.신분제도

양천제의 문제

고려 시대의 사회 신분은 보통 상층민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양반. 귀족과 서리·향리·남반·하급 장교 등의 중간 계층, 그리고 백정 농민을 비롯해 수공업자·상인층으로 구성되는 양인 및 향·부곡·소인과 노비 등 천인의 네 계층으로 구분하려는 영향이 많았다.
한데 얼마 전부터 우리 나라의 신분 구조는 이와는 좀 달리 법제상 양신분과 천신분의 두 계층으로만 나뉘어져 있었다는 양천제 이론이 제기되었다. 즉, 양신분층은 관직에 취임할 수가 있고 국가에 대하여는 각종 부세와 역을 부담하는 자유민이었던 데 반해, 천신분층은 국가나 개인에 예속된 부자유민으로 공직에의 취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군인도 될 수가 없었으며, 특히 그 최하층에 존재한 노비는 재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 계층으로서 양분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주로 조선 전기 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지만 고려 사회도 대략 같은 구조였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고려 사회의 신분제도를 이처럼 이해하고 논술한 연구자도 있는데, 중복되는 감이 없지 않지만, 거기에 나오는 도표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양신분층 양반과 귀족··문. 무의 품관과 귀족

              중간 계층··서리. 향리. 남반. 하급 장교. 군인

              양인··백정 농민. 수공업자. 상인

천신분층 집단 천인··향. 부곡. 소 및 관. 역. 진의 주민

              노비··공노비. 사노비

여기에서 종래의 이해와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양반. 귀족과 일반 양인과를 동일한 양신분층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있다. 즉, 이와 같은 반대 입장에서는 우선 사회의 모든 사람을 양·천 곧 천인과 비천인으로 나누는 것은 전 근대사회에서는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나 적용될 수 있는 구분법이기 때문에 사회계층론으로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 비판하고, 또 양반·귀족과 일반 양인은 사·서로써도 표현되듯이 상호 못지 않게 중요하였으며, 실제로 사서에서 양인이라 했을 때의 그 양인은 양반·귀족과 일반 양인을 포함하는 의미로 쓴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일반 양인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고려 사회도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신분은 세습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자자손손이 원칙적으로 자기 부조의 신분을 세습토록 마련하였는데, 특히 천인에게는 그것이 더욱 강조되어 해당 신분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엄격히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양반과 귀족

양반이란 말은 원래 북좌남면한 왕에 대하여 동쪽에 서는 반렬을 동반, 서쪽에 서는 반렬을 서반이라 한 데서 비롯되는데, 동반은 정치를 담당하는 문관들의 반렬 이었으므로 문반이라고도 하고, 서반은 군사를 담당하는 무관들의 번렬이었으므로 무반이라고도 불렀다. 어떻든 양반이란 처음에는 문무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고려 초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양반 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점차 관료뿐 아니라 그 가족과 가문까지를 포함하는 하나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용어로 전용하게 되었다.
고려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귀족제 사회였다. 그렇다면 양반과 귀족은 어떻게 다를까.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귀족은 문무 양반, 곧 품관 전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귀족이라 할 때는 역시 왕족을 비롯하여 문벌과 가문이 좋아 고관대작에 올랐던 일부 특권층으로 범위를 좁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근자에 한국을 비롯한 동양사회의 귀족은 관직 귀족이었으므로 그에 기준을 두고 음제나 공음전시의 수여와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5품관 이상을 그 같은 신분층으로 이해하자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이러한 귀족의 범위와 관련하여 무반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종래 고려 전기 사회에서 귀족의 신분을 누린 것은 문반뿐이며 무반은 여기에서 제외되어 있었다는 견해가 유력시되어 온 때문이었다. 고찰해 보면 그와 같은 견해는 일면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의 귀족 사회는 문반을 중심으로 운영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반층만을 귀족으로 보고 무반을 거기에서 아예 제외시켜 놓는 데는 역시 상당한 의문이 뒤따른다. 많지는 않지만 무반에서 문반화하였거나, 문·무반이 혼효된 가문 및 문반과 무반 사이에 혼인으로 얽히고 있는 집안 등의 구체적인 실례가 찾아질 뿐 아니라 미천한 가손의 출신이 무관으로 영탈한 경우도 그렇게 비중이 큰 것은 아니었고, 무반도 대부분은 무반과 비슷하게 양반층에서 세습적으로 이어 나갔다는 생각에서 이라. 그러므로 문반이 대체적으로 상층 귀족을 형성했던 데 반해 무반은 하층 귀족에 머물렀다는 의견도 나와 있다.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되어 있던 고려 사회에서 귀족. 양반은 서울인 개경에 집결하여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들 중에 혹 죄를 지은 자가 있게 되면 귀향시켰는데 이것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귀향이 일종의 형벌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데서 고려 귀족 사회의 일 면모를 엿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중간 계층

귀족·양반과 일반 양인 사이에는 중간 계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분층이 존재하였다. 지배층을 형성하면서도 문무 양반과는 구별되는 서리와 향리·남반·하급 장교 등 일련의 신분층을 뭉뚱그려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이들 중간 계층은 대체적으로 라말려초의 군소호족과 연결되는 사람들인데,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의 지배 체제가 정비되고 직분이 분화되는 가운데 저들은 양반화·귀족화한 새호족과는 달리 내외 통치 체제의 하부구조를 맡아 상급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다스림에 있어 중간적 역할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자리를 잡아간 것이었다.
그 일부를 이루는 서리는 도필지임 이라하여 중앙의 각사에서 기록이나 문부의 관장 등 행정의 말단을 맡아 실무에 종사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고려 시대의 서리층은 리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면 양반신분층과 맞닿아 있었다는 면에서 조선조의 그들과는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향리는 외관을 보좌하여 지방행정의 말단을 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군·현의 통치 기구인 주사·군사·현사에서 시무하는 한편 직접 백성들을 상대로 하여 조세와 력역의 징수 및 간단한 소송의 처리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기능 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만큼 신분적으로도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향리가 신분을 상승시키는 길에는 기인혁을 거쳐 동정직을 받거나 과거를 치르는 등 여러 갈래가 있었다. 요컨대, 향리는 본질적으로 대를 이어가며 향역에 복무하는 직역부담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상급층은 양반으로의 진출이 자유로운 신분이었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남반은 궁중의 내료직으로, 전중의 당직이나 국왕의 호종 및 왕명 전달 등을 맡아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동반, 서반에 대한 남반으로서 하나의 반렬을 이루고 직위도 대부분 품관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남반은 직능 상에 있어서나 신분상으로도 물론 남반에 비견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다음, 하급 장교 가운데 품외의 대정등도 중간 계층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군사와 관련하여서는 하급 장교 문제보다 오히려 일반 군인들이 어떠한 신분층이었냐에 더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 시대의 군인 중 경군에 대해서는 병농일치에 입각하는 농민층으로 편성되었다는 부병제설과 군인직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층으로 편성되었다는 군반제설의 입장이 엇갈려 왔다. 그리하여 전자는 군인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농민, 즉 양인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비해 후자는 그들을 서리·향리 등과 같이 말단이기는 하지만 관료 체계 속에 포함되는 중간층으로 보고 있다.


양인

일반 양인에 백정 농민과 수공업자·상인층이 포함된다 함은 앞서 언급하여 둔 바 있다.
다 알고 있듯이 고려에서는 백성들을 군인호. 역호 등과 같이 국가에 대해 일정한 직역을 지는 정호와 그것을 부담하지 않는 백정호로 구분하였다. 이때의 백정이란 명칭 자체도 일정한 직역이 없다는 뜻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백정은 직역을 지지 않았고, 따라서 국가로부터 토지도 지급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 오는 자기 소유의 소규모 땅인 민전을 경작하여 생계를 꾸려 갔으며, 그것이 없거나 부족한 경우는 남의 토지를 빌려 소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는 이러한 백정층을 수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백정층에게는 과거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명경과 잡과에 한정되었을 뿐이었고, 고려 초의 사서에는 서인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례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과거의 실정에 비해 선군제에 의하여서는 이들의 신분 변동이 꽤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군인에 결원이 생겼을 경우, 보충하는 제도를 선군이라 하였는데 그 주대상의 하나가 백정이었던 것이다.
수공업자와 상인은 같은 양인이면서도 이른바 말업 종사자로 백정보다는 낮은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 수공업자를 보통 공장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기술은 천기로 간주되었고 상업도 시속시하여 이들에게는 법제상의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공장·상인의 자손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았고, 국학에의 입학도 금하고 있었다. 이들은 천사자로 부조의 신분과 생업을 세습하게 마련이었다. 국가로서는 이들 가운데 특히 기술자인 공장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축성 등의 토목공사나 수제품의 제조에 수시로 동원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관속 공장은 말할 것도 없고 비관속 공장까지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호적인 공장안이 따로이 작성되어 있었다. 고려 때도 개경을 비롯한 큰 도시에는 상설의 시전이 있었고 지방의 비상설장시에도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는 행상이 있었으므로 상업을 전업으로 하는 상인층의 존재는 상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억상정책이 시행되었고 교환 경제도 그리 활발치 못했으므로 그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집단 천인의 문제

종래에 향·부곡·소 및 역·진·관 등은 천인의 집단 거주지로서 특수행정구역의 일환을 이루고 있었다고들 이해하여 왔다. 향·부곡의 주민은 주로 농업 생산에 종사하였고, 소민은 주로 금·은·동·자기·묵 등 공납물을 생산하였다. 반면에 교통의 요지에 설치된 기관으로 역은 육상 교통. 진은 도선의 임무를 맡았고, 관은 숙박소였다. 이처럼 맡은 일은 각기 달랐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신분적으로 모두 천인들이었다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즉 향·부곡민은 죄인이거나 혹은 그같은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분상 천인일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여 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과는 달리 국학에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형벌상 노와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자손의 귀속 문제에 있어서 천인의 대우를 받았고, 과거에의 응시 금지 및 승려가 되는 것의 금지 등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아울러 소민에 대한 치우도 대략 이와 비슷했다고 보아 같은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도 표명되어 있다. 향·부곡민도 양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향·부곡민 양인설이 제기된 이후에도 귀향형에 의한 유배지로서 향 그리고 부곡이 이용되었다는 얼을 들어 그곳의 주민은 역시 천인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되고 있다.
고려말에는 부곡이 -향·소도 -일반 군현과 마찬가지의 존재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이들 향·부곡·소는 모두 소멸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들이 그처럼 변질된 시기가 언제부터 였느냐 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여러 논자들의 견해에 따라 일단 향·부곡·소의 주민은 천인 신분으로 이해하되, 고려 후기부터 점차 양인화하여 갔다고 보아 두기로 한다.
다음 역·진·관의 주민은 무곡 및 잡척인과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는 점 등에서 역시 천인으로 간주하여 왔다. 그러나 무곡인을 양인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물론 반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관한 별다른 논증이 있는 것도 안으로 아니므로 역민 등의 신분은 종래의 견해와 같이 천인으로 경우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노비

고려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신분층은 노비였다.
이들은 국가에 속하는 공노비(관노비. 공천)와 개인에 속하는 사노비(사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여기에 사원 소유의 사원 노비를 따로이 분류하여 파악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 노비층은 양인과도 구별되는 별종의 취급을 받은 천인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과거에의 응시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물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혼인에 있어서도 신분의 제약을 받아 원칙상 같은 노비 사이에 결혼하는 동색혼만이 인정되어 있었다. 하기는 현실적으로 양천교혼이 있기는 하였다. 이 경우 양남과 비 사이의 교혼이 대부분이었지만 혹 그 반대의 예라 하더라도 이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일천즉천의 원칙에 따라 모두 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종 5년 내지 제정된 천자수모법에 의거하여 어머니쪽 소유주에게 귀속하였다.
이러한 천인신분로서의 노비의 성격은 특히 사노비의 경우에 매매·증여·상속·탈취의 객체가 되었다는 데서 더욱 잘 드러난다. 사노비는 보통 소유주와 같은 집에 거처하면서 초목·취사나 기타의 잡역을 맡아 본 솔거 노비와, 주인과는 떨어져 외지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경에 종사한 외거 노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외거 노비는 독자적인 재산을 가지고 가정도 어느 정도 온존시켜 갈 수 있었던 데 비해 솔거 노비는 그같은 생활에서 여러 모로 불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주인의 사유재산으로서 물질과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었다.
사노비 발생의 계기로는 일반 양인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몸을 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전쟁 포로로서 사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또 불법적이긴 하지만 압민에 의해 사노비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노비는 우선 전쟁 포로로 충당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아울러 전쟁 중에 적에게 투항했다거나 이적행위를 한 자의 가속들 역시 공노비가 되었다. 그런데 한편 이들 공노비 가운데는 정변. 반란 등을 꾀했다가 실패하고 몰입된 양반. 귀족층도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양반. 귀족층은 공노비의 주요 보충 신분층의 하나였던 것이다. 공노비 가운데 성을 가지고 있는 자가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양반·귀족이 몰입될 때 그들의 가족과 소유하고 있던 사노비도 공노비로 전환되었다.
공노비는 흔히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공역 노비와 농경에 종사한 외거 노비로 나누고 있다. 그리하여 공역 노비는 노역에 종사한 대가로서 국가로부터 별사라는 명목의 일정한 급료를 받아 생활하였으며, 외거 노비는 농경에서 얻어진 수입 가운데 규정된 액수를 납부하고 그 나머지로 생계를 꾸려 갔다.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 이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결혼 내지 가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은 배려를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뿐 아니라 공노비는 정로제에 의해 60세가 되면 면역되었다. 사노비에 비해 공노비의 생활은 좀 나은 편이었다.
고려에는 화척(양수척, 조선 시대의 백정)이나 재인(조선 시대의 광대)과 같은 천인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사회적으로 노비와 동일한 취급을 받는 신분층이었다.

2. 家族制度

家族과 婚姻

가족은 血緣이나 婚姻, 入養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生計등을 공동으로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러면 고려 때 가족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고려시대 가족의 기본형태는 小家族이었다고 보는 이가 있거니와 현재 전하는 호족에 의하더라도 결혼한 자녀와 그 子妻, 女斷까지 함께 거느리고 있는 가족을 비롯하여 5∼6人 정도의 가족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분가금지 조항이 준수되었다고 할 때 부모의 생존시에는 혼인한 형제 자매가 한가족을 구성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리라는 짐작도 있다. 고려에는 大家族 내지 中家族이 매우 많다고 보는 학자도 있기도 한데 아마도 소가족 또는 核家族을 중심으로 하여 大家族, 中家族이 섞인 형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고려 때의 가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率斷家族이 많다는 점이다. 원래 고려에서는 사위가 婚初 몇 년동안은 妻家에서 생활하는 斷留妻家婚의 습속이 있었다. 이런 婚俗과도 관련이 되겠지만은 妻父母가 老年을 딸 사위와 함께 가족을 구성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족 가운데 妻, 곧 여자의 위치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는 조선 후기처럼 父系에 의해 長子, 長孫으로 이어지는 直系家族 형태가 강조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하겠다.
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의 형성에는 婚姻이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그러면 당시 이 婚姻의 연령은 어떠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麗末 貢女를 위해 내려진 禁婚令의 대상이 13세부터 16세까지 였다는 것에서 대략 알 수 있다. 그렇지만 麗末은 早婚의 풍습이 심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고 또 그이전의 사례들을 찾아보면 여자는 18세 전후, 그리고 남자는 20세 전후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개 一夫一妻制에 입각한 가정생활을 영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면(高麗史) 列傳이나 현존하는 金石文에는 多妻의 기사가 꽤 여렷 눈에 띈다. 또 仁宗때 사신으로 왔던 宋人 西兢은, 고려의 '富家는 妻 3∼4人에게 장가들고 있다'는 서술도 해놓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多妻와 一夫一妻制가 병행되었다는 설명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다. 아마 원칙은 一夫一妻制였지만 왕실과 일부의 양반, 귀족층에서 다처 내지는 蓄妾을 하였다는 이해가 온당할 듯싶다.
近親婚 내지 同姓婚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후대와는 다른 고려시대 혼인 풍습의 하나이다. 왕실에서는 극도의 근친혼이 행하여졌고 양반 귀족층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혼인이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어떻든 고려의 혼인제는 다른 시대와는 다른 여러 가지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이 곧 고려사회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財産의 相續

고려 때 상속의 대상이 된 재산으로는 私有의 奴婢와 土地 및 寶貨, 곡물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노비와 토지이다.
그러면 먼저 노비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旗田巍氏가 子女에게 均分相續되었다는 논지를 편 이래 현재까지도 별문제 없이 지지되고 있다.
그리고 획득된 노비의 소유권은 매우 중시되었다. 결혼하였을 경우에도 父邊傳內의 노비와 母邊傳來의 노비가 호적상으로 분명히 구분되었다는 것에서 이같은 점을 잘 엿볼 수 있다.
토지의 상속문제는 역시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백성들의 私有地인 民田이 중심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民田의 일반적인 상속형태는 子女均分相續이었다는 경향이 많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토지를 子女에게 均分相續한 듯한 실례가 찾아지기 때문이다.
李之?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弟, 妹에게 財産을 나누어주지 않아 당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尹宣左는 병이 들자 子女를 앞에 불러놓고 이르기를, "지금의 형제들이 서로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은 (재산의) 다툼 때문이다."라고 하고는 아들 粲에게 명하여 文?를 작성하여 家業을 均分케 하였다.
弟, 妹간에 아버지가 작성해 준 文契를 가지고 家産을 다투어 소송이 있자 孫 주은 그 文契를 잘 해결해 드디어 家産을 절반씩 나누어 주었다.
국가의 分給地이면서 社有地처럼 상속이 인정된 토지는 功蔭田이 있다. 이 토지는 父에서 子로, 子에서 孫으로 世傳토록 하였는데, 그러나 그것이 單獨相續이었는지 아니면 균분상속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공음전은 無子인 경우에 한해서 女斷와 親姪, 養子 등에게 傳給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보면 애초의 상속시에는 여서는 참여하지 못했던 것 같다.


親族組織

고려 때의 친족조직은 相避制나 禁婚의 범위, 그리고 五服制度와 戶籍에 있어서 世系推尋 범위 등을 통해 대략 짐작 할 수 있다. 먼저 相避制부터 살펴보기로하자. 이것은 관직 취임시에 친족관계에 있음으로 해서 서로 피해야 하는 범위를 구정한 법제로 父側親族을 直系는 자기를 중심으로 위로 2代, 아래로 2代까지 傍系親 4寸兄弟 및 4寸姉妹의 夫까지 相避하고 있다. 이에 비해 母側親族은 그 범위가 훨씬 좁고, 妻側親族은 臺省,정 의 경우에 좀 넓어지고 있으나 그 이외에는 妻의 父, 祖에 한하고 있다. 한편 禁婚의 범위는 父系親은 6寸까지, 外家親은 시기에 따라 2寸∼6寸까지였다.
다음 호적제도에서의 世系推尋을 보면 4祖戶口式에서는 戶主의 父, 祖, 曾祖, 母, 外祖와 배우자의 父에 그치고 있으나, 8祖戶口式에서는 여기에 다시 祖父母, 外祖父母, 妻父母의 각기 4祖와 母를 포함하고 있다. 母側과 妻側의 친족에 많은 관심을 베풀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그렇지만 5服制의 有服親보다도 그 범위가 더 넒게 잡혀 있는 이 世系推尋이 친족조직으로서는 어느 정도의 이미를 가지는 것인지 이점은 분명치 않다.

5服制란 斬衰 3년, 齊衰 3년과 齊衰 周年 및 大功 9月, 小功 5月, ?麻 3月의 복제를 말한다. 그리하여 喪服을 입는 기간의 장단에 따라 친족관계의 親疎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 제도에 의하면 父系親은 同高祖 8寸까지가 포함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여기에서도 母側과 妻側의 服이 크게 강화되어 있어 주목을 끌고 있지마는, 그러나 실제로 佛敎式 喪禮와 祭禮가 널리 행해지고 있던 당시에 5服制와 그에 입각하고 있던 5服親이 과연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가지는 것인지 의심되는 바가 많다.
이상의 검토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 친족조직의 범위에 대해서 지금 당장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한가지, 그 조직에 母側이나 妻側이 상당히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은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하여 고려때는 父系血緣集團, 곧 姓氏集團은 없었으며, 심지어는 家門의 존재까지도 부인하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지배신분층이 本貫과 姓氏를 칭한 것은 이미 고려초기부터엿다. 지배신분층은 일찍부터 姓貫을 칭하고 그를 통해 친족조직을 성립시켜 갔으며, 또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家門 내지는 門閥도 형성되었던 것이다. 단, 家門, 門閥이라 했을 때 거기에는 女斷나 外親등 異姓親도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문, 문벌의 의미를 재음미하고 또 고려조 나름의 특성이 반영된 친족조직의 내용도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