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주 토지제도와 수취체제

[고려전기 귀족관료들의 경제생활과 축재][고려후기 농장의 발달과 사전개혁]


고려후기 농장의 발달과 사전개혁

발제자 9445004 김민기, 9745035지미정 ,9745004김나영
참고문헌 <고려후기 농장의 발달과 사전개혁><<한국사 5>>

1. 농장의 발달과 토지제도의 정비

1) 농장의 발달과 그 구조

고려 후기의 사회경제상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는 농장(農莊)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농장을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농장은 장사(莊舍)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광대한 면적으로 집적된 사적인 대토지지배의 특수한 형태였다. 고려 후기의 대토지소유현상을 농장이라는 용어로 특징짓는 이유는 그것이 중세적 토지지배관계의 한 기축인 전주 - 전객제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고 전개된 데 있다. 즉 생산물의 일정액을 수취하는 권한인 전주권(田主權)을 바탕으로 전객 농민의 사실상의 소유권을 점탈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농장의 특성은 전주권의 비법적(非法的) 비대화에 있었고, 이 때문에 사전(私田)문제로 인식되었다.
비법적인 대토지 집적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인주 이씨(仁州李氏)가 정권을 장악한 12세기 무렵부터였다.
토지탈점은 무인집권기에 이르러 더욱 성행하였다. 무인정권의 권력기반인 대규모의 사병과 가신(家臣)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기반으로 농장이 이용되었다.
몽고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황폐해진 진전(陳田)의 개간과 관련하여 농장의 발달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정부는 황폐해진 토지를 효과적으로 복구하기 위하여 사패(賜牌)를 지급하였다. 사패는 일종의 개간허가서였다. 사패는 주로 왕의 측근이나 권력기관이 받았고, 그 규모가 제한되지 않았으므로 대규모 토지집적을 가능하게 하였다. 사패에 의한 대토지집적은 원칙적으로 개간에 의한 소유지 집적이어서 수조권에 근거한 농장과는 구분된다. 권력자들이 이 사패를 토지집적의 수단으로 악용하여 주인이 있는 토지까지도 진전이라고 속여 탈점하였다. 이른바 사패에 의한 토지집적이다.
공민왕 5년의 반원적 개혁정치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후에도 대토지소유현상은 그치지 않았다.
토지겸병의 주체는 권력가였고, 겸병되는 토지는 주로 수조권과 관계 있는 토지였다. 수조권은 국가가 수조해야 할 권리를 관료에게 위임한 것이었는데, 수조권에 입각한 전시과의 토지분급 자체가 양반세가를 유지하기 위한 '세록'(世祿) '세업'(世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관료의 집안에서 계속하여 관료가 배출되는 방법에 의해서나 구분전,한인전(閑人田) 등의 제도를 통해 수조권이 세전(世傳)되었다. 수조권의 세전은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 통제력이 약화되고 권력이 집중되는 와중에서 농민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기반이 되었다.
탈점의 대상이 된 토지는 공사전 모두였다. 처음에는 수조권와 관계있는 토지였지만, 그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토지도 탈점의 대상이 되었다. 관료의 토지도 탈점의 대상이 되었다.
농민의 토지가 탈점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결국 토지탈점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농민이었, 종국적으로 침탈당하는 것은 민전이었다.
이렇게 고려 후기의 농장은 수조지나 민전의 탈점과 개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었다.

2) 토지탈점과 농민층의 몰락

탈점이나 사패를 이용하여 농장을 설치한 것은 권세가와 권력기관이었다. 인주 이씨의 집권기에는 이씨일족이, 무인정권기에는 무인집정과 그를 둘러싼 권세가들이 대농장주였다. 원간섭기에는 원과 관계있는 내료배(內僚輩)와 부원배(附元輩)가 크게 활약하였다. 사원도 대토지겸병에 나서서 양반의 토지나 주인이 있고 양안에 올라 있는 토지까지도 탈취하였다.
지방의 유력자도 탈점으로 토지를 집적하고 그 부를 이용하여 출세하였다.
원간섭기에는 왕실도 사적 토지소유를 확대하였다. 왕실이 토지겸병의 주체로 나서 사적으로 경제기반을 확보하게 된 이유는 왕실제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서였지만, 원간섭기라는 특수한 정치권력구조 아래에서 왕실이 공실(公室)로서의 위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왕과 궁원도 토지집적에 몰두하였다. 권력기관으로 탈점에 나선 곳은 장군방(將軍房), 홀치(忽赤),순군(巡軍), 응방(鷹坊), 내숭(內乘)등이었으며, 특히 원과 관련이 있는 권력기관이 앞장을 섰다. 왕실이나 권력기관의 침탈은 토지에 한정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정 지방을 식읍으로 삼거나 촌락을 예속시키고 수탈하였다. 권력기관 가운데 가장 활발히 촌락과 민호 탈취에 나선 곳은 응방이었다. 응방은 매를 잡을 사람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각지의 민호를 초집하였고, 인민은 가혹한 징렴(徵斂)을 피하여 응방에 자진 투속하였다. 그 때문에 응방에 소속된 민호는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토지의 탈점은 토지를 경작할 인민의 탈점을 동반하였다. 당시의 농민은 국가의 가혹한 수취와 계속된 전쟁, 고리대 등으로 인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민은 국외로 망명하거나 농장으로 흡수되어 전호(佃戶)가 되었다. 농장에 들어간 양민은 천민으로 취급되었다. 농장주가 보다 쉽게 사역시키기 위해 신분을 천민화하였기 때문이다. 관료의 수조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수조권의 비법적인 강화에 의해 사실상의 전호로 전락하여 농장민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도 농장민은 차츰 양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고려 후기에 농장이 발달한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권력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즉 고려 전기의 관료체제에 의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던 권력관계가 12세기 이후 소수의 문벌이나 무인집정에게 집중되고, 원간섭기에 이르러서는 원과의 관계에 제약되어 측근세력이나 부원배에 의해 정치가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구조 아래서 집권자가 토지겸병의 주체로 등장하고, 왕실도 사적인 경제기반을 강화하여 나갔다. 황폐해진 토지를 개간하면서 권력층은 사패를 받아 토지를 집적하고, 유리하는 농민을 유입하여 농장을 설치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고려 전기 이래의 일정한 농업생산력 발전의 결과물이 파행적인 정치권력자들에게 귀속되고, 농민은 오히려 가중되는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 몰락하는 봉건적 분해가 일어난 것이 농장발달의 배경이되었다. 농장을 통해 축적된 부는 고리대와 상업을 통해 더욱 확대되었고, 원간섭기에 이르러는 원과의 대외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농장의 생산물이 원과의 교역자금으로 사용되어 농장주의 부의 축적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민층은 더욱 열악한 처지로 떨어지고 몰락농민은 더욱 증가하였다.
농장의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것은 산천을 경계로 하여 주군에 걸쳐 있었지만, 모든 농장이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농장을 구성하고 있는 토지도 다양하였다. 농장주의 완전한 소유지가 있는가 하면 지대를 수취하는 토지도 있었고, 10분의 1수조권만을 행사하는 토지도 있었다, 농장의 경영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농장주의 완전한 소유지는 농장주의 노비에 의해 직영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처간(處干)이라 불린 전호에 의해 경작되었다. 전호 가운데는 노비도 있었지만, 농장에 투탁하거나 농장주에 의해 초집된 몰락농민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본래 신분상으로 양인이었으나, 농장민이 된 이후에는 농장에 예속된 처지로 떨어졌다. 이들 농장민은 양인인 경우 국가에 용(庸)과 조(調)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으나. 농장에 은닉되면서 이를 포탈하였다. 농장이 이들에게 유리한 처지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이 때문에 농장주는 이들을 노비처럼 부릴 수 있었다.
농장에서의 수익물은 막대하였다. 농장주는 부호였으며 농장수입의 일부는 조운(漕運)을 이용하여 개경으로 운반되었다. 무인정권기의 농장수확물은 정권유지를 위한 물적 기반으로 사용되었다.
농장주들은 상품을 강제로 판매함에 의해서도 이익을 얻었다. 이른바 억매억매(抑賣抑買)가 그것이다. 원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교역권이 형성되고, 고려도 여기에 포섭되어 국제무역과 상업이 한층 발달됨에 따라 농장의 잉여가 무역자본으로 이용되었다. 대토지겸병과 고리대의 만연,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라 농장주는 더욱 부를 축적하였고, 그것은 사치와 토지의 집적에 재투자되었다. 반면 농민층의 몰락은 더욱 촉진되었다. 돈을 빌린 농민은 토지와 자식을 팔아도 갚지 못하였고, 토지를 잃은 농민은 유리하였다. 이러한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발생한 몰락농민층과 독점적인 권력에서 소외되어 농민과 마찬가지로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방의 유력층, 수탈의 말단 책임을 졌던 향리들은 민란의 형태로 반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층의 몰락은 가속화하여 소농민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해졌다.

3) 토지제도의 재정비와 녹과전

고려 전기 사회경제의 골격을 이루었던 전시과체제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비되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은 기본적으로 전시과체제가 가진 제도상의 모순에 있었다.
정부의 대책은 겸병된 토지와 인민을 추쇄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전민변정사업(田民辨整事業)의 추진과 새로운 토지제도의 마련이라는 두 측면에서 강구되었다. 이과정에서 전시과체제의 골격은 유지하면서 기존의 토지제도를 변용하기도 하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새로운 토지제도는 녹과전(祿科田)의 설치로 대표된다. 관료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던 상황에서 녹봉에 대신하여 토지를 분급한 것(分田代祿)은 1257년(고종 44)이었다. 피난지였던 강화도의 토지 가운데 2천 결은 공름(公弟)에,3천 결은 최의에게 지급하고, 하음(河陰).진강(鎭江).해령(海寧)의 토지를 제왕(諸王).재추(宰樞)이하에게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이 토지분급은 피난지에 한정되었을 뿐 아니라 3천 결을 최의에게 지급하였고, 그나마 좋은 토지는 권세가가 차지한 불공평하고 제한적인 분급이었다. 개경환도 이후에도 국가재정은 여전히 궁핍하였고, 전시과는 이미 관료의 경제기반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후 토지분급이 다시 논의되었다. 원종 12년 2월,도병마사는 관품에 따라 녹과전을 지급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 제안은 환도과정에서 기름진 토지를 대량으로 차지한 제왕과 이현원.강윤소.이분희와 같은 대토지소유자의 반대를 물리치고 채택되어,이듬해 정월 시행되었다. 녹과전은 경기 8현,즉 장단(長湍). 송림(松林). 임진(臨津). 토산(兎山). 임강(臨江). 적성(積城). 파평(坡平). 마전(麻田)에 지급되었다. 수급자의 수조의 편리와 토지겸병의 추세 아래에서 토지를 보호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토지겸병의 추세 속에서 녹과전도 겸병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녹과전을 유지하려는 고려정부의 의지는 비교적 확고하였다. 충렬왕 4년애는 녹과전을 다시 절급하였다.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이듬해 2월에 녹과전에 충당하였던 경기 8현의 공신 사전을 되돌리는 조치가 위해진 것을 볼 때 권귀(權貴)들이 차지하고 있던 경기의 사급전(賜給田)을 녹과전에 충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녹과전의 보강조치가 송분(宋?)을 비롯한 대토지소유자의 반대로 실패한 것이다, 충목왕 원년에는 경기 8현의 토지를 양전하면서 녹과전을 개편 보강하였다. 겸병추세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러한 보완. 개편과정을 거치면서 녹과전은 고려 말기까지 관료의 경제기반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녹과전은 관료의 녹봉에 대신하여 마련된 임시적인 토지제도였으나,그 속에는 토지제도의 변동이 내포되어 있다.

4) 사급전의 지급과 그외 토지제도

특정 공신이나 기관에 토지를 사여하는 사전(賜田)제도는 이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고려 후기의 사급전은 몽고와의 전쟁과정에서 황폐해진 토지를 복구할 목적으로 광범위하게 지급되고,농장형성의 방편으로 이용된 점에서 특수하였다. 사급전은 사패를 통해 지급하였다. 사패의 획득은 곧 소유권의 확보를 의미하였다. 그런 경우 사급전은 수전자의 완전한 소유지가 되었다. 게다가 사패는 개간지에 대한 면세의 특혜까지 부여한 것이었으므로,토지집적의 수단으로서는 아주 적절하였다. 실제 사급전은 주인이 없는 토지로만 지급되지는 않았다. 권력자들은 이미 개간되어 있거나 주인이 있는 토지도 주인이 없는 것처럼 꾸며 사급전으로 받았다. 그 때문에 원래의 경작자와 갈등이 발생하였다. 사패수급자는 원래의 경작자를 소유자로 인정하지 않고,오히려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소유지로 만들었다. 정부는 이를 금지하고 토지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 줄 것을 여러 차례 지시하였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진전개간이라는 사급전 본래의 취지는 뒤로 밀려나고,사급전은 대토지 집적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새로운 지목으로 군수전(軍須田)이 출현하였다. 군수전은 1272년(원종 13)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한 직후에 제왕과 총신들이 분점하고 있던 적몰지(籍沒地)를 환수하여 병량전(兵糧田)으로 귀속시킨 데에서 연원한다. 군수전은 주로 죄인의 적몰지,폐망한 사원의 토지,양반 수조지의 일부로 편성하였다. 군수전의 설정은 해당 토지의 조세를 군수에 충당하는,그러므로 재정의 용도에 따른 새로운 지목의 출현으로서 재정운영체계의 재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군수전은 공민왕 이후 왜구의 침입 등으로 군량의 수요가 증대하면서 중시되었고,조선의 군자전(軍資田)으로 계승되었다. 구분전은 전기부터 준속해온 토지였다. 충목왕 원년의 기록에는 양반. 군인. 한인(閑人)의 구분전과 함께 잡구분위전(雜口分位田)이 보인다. 양반구분전은 관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식량 등을 수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기지방에 설정된 10결 미만의 토지로서 고려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과전법 단계에서 소멸하였다. 휼양구분전(恤養口分田)은 대역(代役)할 자손이나 친족이 없는 70세 이상의 퇴역군인과 전사한 군인의 처로서 개가하지 않은 자,관료나 군인이 죽고 그를 계승할 아들이 없는 경우에 그의 처나 시집가지 않은 딸에게 관품에 따라 준 토지로서 과전법에서도 수신전(守信田). 휼양전의 이름으로 계승되었다. 잡구분위전은 향리. 진척(津尺). 역자(驛子)등 국역부담자에게 지급한 토지이다. 향리.역자.진척의 토지는 위전(位田)의 명칭으로 과전법에 계승되었다. 이들 외에 철소가(鐵所干)에게도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국가기관의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재원으로 설정된 공해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원의 행성(行省)이 설치되자 공해전이 새로이 지급되는 등 토지겸병의 추세 속에서도 공해전은 유지되었다. 관아의 직접수조지인 공해전은 4분의 1조가 적용되는 공전이었는에,농업생산력의 발달로 결당 생산량이 증가하고 과도한 부담을 진 공해전 경작민의 저항으로 인하여 수조율이 민전과 같은 10분의 1수준으로 저하된 것이다. 과전법에서 공해전의 조가 민전의 조와 동일하게 책정된 것은 이러한 고려 후기의 변동을 수용한 결과이다. 해이해진 토지제도를 복구하려는 여러 가지 노력도 경주되었다. 관역전(館驛田)이 복구되었으며,특히 원간섭에서 벗어난 공민왕 때는 군인전.둔전 등 국방과 관련된 지목의 복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원간섭기에는 겸병의 대상이 되고 군역체제가 혼란되면서 군인전이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였다. 군인전의 복구는 공민왕 5년에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즉 토지 17결에서 군인 1정을 내는 것이 옛법이라고 전제하고 군호(軍戶)연립해오던 토지로서 타인에게 빼앗긴 것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한편 몰수한 역적의 토지를 작정(作丁)하여 모집한 군사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군인전의 대부분이 탈점되고 군호의 편성마저 불분명한 상태에서 고려 전기의 군제와 군인전을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군수를 확보하기 위한 둔전의 복구도 추진되었다. 몽고와의 전쟁중에도 연해지역에 둔전을 설치하여 재정을 보충하였으며, 원군도 황주(黃州).봉주(鳳州)등지에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을 충당하였다. 원간섭기에 들어 군둔전은 점차 침체되었다.
군둔전이 본격적으로 복구되기 시작하는 것은 공민왕 이후이다. 공민왕 때에는 황폐해진 둔전을 개간하는 한편 새로이 둔전을 개설하고, 별도로 둔전관(屯田官)을 파견하여 둔전을 관리하게 하는 등 둔전 복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둔전은 방수군에 의해 경작되기도 하고, 일반민을 동원하여 경작하기도 하였다.

2. 전민변정사업의 추진과 과전법의 성립

1) 전민변정사업의 추진과 그 한계

토지제도가 와해되고 농장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폐단이 야기되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농장의 발달은 토지의 집중과 인구의 집중을 동반하였는데, 이러한 대책으로 전민변정사업(田民辯整事業)을 실행하였다. 전민변정은 부당하게 농장에 들어간 토지는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농장민은 공민으로 만들어 공역을 부과하는 것으로 과대하게 보유하고 있는 사전을 환수하거나 조세를 부과하고, 고리대를 제한하여 인민이 농장민으로 전략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러므로 농장을 혁파하고 공역 부답민과 공세 부과지를 확보하여 재정을 넉넉히 하려고 하였고, 농장주에 대한 처벌도 하였다. 전민변정도감과 같은 별도의 기구를 설치하여 추진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전민변정은 농장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자겸의 몰락후에 취한 토지의 반환조치와 1188년(명종18)에 향읍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경인(京人)의 농장을 파취하고 그들을 서울로 돌아오도록 한 조치가 그것이다. 농장은 충렬왕때에 한층 발달되었고, 그로 인한 폐단이 심각하였으나 전민변정은 극히 소극적이고 부분적으로 추진되었다. 다시 전민변정은 충선왕에 의해 취해졌는데, 즉위 교서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폐단을 과정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고 4학사와 이승휴(李承休), 권영(權永)등의 신진관료를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원종 10년에 제정된 공부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1314(충숙와 원년)에는 각도에 전민계정사(田民計定使)를 파견하여 양전을 실시하고, 채홍철(蔡洪哲)을 5도방계사루 삼아 공부를 다시 정하였다. 이과정에서 갑인주안(甲寅柱案) 즉 양전을 통해 파악된 전정의 점유사황을 기록한 장적(帳籍)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또한 추진 세력의 미약과 고식적 대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못해 실패하였다. 이에 충목왕은 정치도감(整治都監)을 통해 개력을 추진하였다. 1347년(충목왕3) 원제(元帝)의 명에 의해 설치된 정치도감은 토지탈점과 압량위천, 고리대 등 농장의 폐단과 수조관계의 문제를 가장 큰 개선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각도에 정치과(整治官)을 파견하여 존무안렴사(存撫按廉使)를 겸하게하고 양전을 시행하였으며, 토지탈점자를 찾아서 정벌하였다. 이러한 정치도감의 개혁안은 당시의 절실한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고, 적극적인 입장에서의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여 과감한 시정방향을 제시한 것이었으나. 원제의 명령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계속적인 전민변정사업에도 불구하고 농장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시간에 따라 사정은 악화되어갔다. 이 시기의 전민변정 노력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권세가의 저항고 葡추진세력의 미약함, 원의 간섭과 원간섭기 아래에서의 비정상적인 정치권력구조, 그리고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최고권력층이었던 농장주의 저항은 강력하였다. 그들은 논의과정에서 농장의 혁파를 반대하거나 농장혁파관을 탄압하는등 갖은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추진헤력의 미약도 전민변정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였다. 전민변정을 추징한 세력은 대체로 국왕과 신진관료였다. 국왕은 권세가의 과도한 토지탈점을 견제하고 국용을 확보하기 위하여, 신진관료들은 당시 사회가 처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입지에서 개혁을 추징하였다. 하지만 아직 실권을 잡지 못한 신진관료들은 당시 사회가 처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입지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아직 실권을 잡지 못한 신진과료들은 왕권의 회복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의 추진의지와 목적에도 문제가 많았다. 왕은 자기의 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적대적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변정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비정상적인 정치권력구조, 즉 원의 간섭으로 인해 정상적인 왕정이 파탄되고 측근 세력을 통한 정치형태로 왜곡되어 있는 정치구조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민변정은 정치적양상을 띠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왕의 교체도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정치세력간의 갈등을 야기하여 정쟁화하였기 때문에 더욱 실행하기 어려웠다. 원의 간섭도 개력을 어렵게 만든 요인의 하나였다. 그래서 원은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응방을 혁파하여 소속전지와 노비를 환급하는 등 일련의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원은 기본적으로 부우너세력을 비호하면서 그들의 경제기반인 농장혁파를 방해하였다. 전민변정은 종장발달을 현상적으로 파악한 데서 취해진 소극적인 개선책이었다. 농장은 고려의 소주권 분급제도가 가진 모순으로 인해 생성되었다. 즉 수조권이 직역을 매개로 세습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이것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하면서 농민의 소유수너을 잠식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농장의 발생원인은 소유권과 수조권의 갈등에 있었고, 그 전개 방향에서 수조꺥의 확장에 따른 소유권 칩해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 결국 토지배관계가 소유권으로 귀일되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후 농장 문제는 국가유지와 직결된 절박한 과제로 대두하였다. 공민왕 즉위 당시에는 누적된 사회경제적모순을 해결하지 않고는 국가 유지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국가체제정비, 즉 공역ㆍ공세체제의 복구와 그를 통한 국가재정의 확보를 목표로 전민변정을 강력히 추징하였다. 공민왕 5년에는 대표적인 부원세력인 기씨일족을 포살하고 정동행성을 혁파하여 원의 간섭을 제거하였다. 그래서 대외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왕권강화를 기도히고, 전민변정을 단행하였다. 우왕때에도 정민변정을 두차례에 걸쳐 설치하였다. 특히 왜구방어와 관련하여 공신전을 회수해 군수(軍需)에 충당하는 등 군수의 확충을 nld한 측면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무장세력은 자신의 경제 기반을 확정하면서 전민변정을 끈질기게 방해하여 사전의 폐단은 오히려 심각해졌다.

2) 전제개혁의 논의와 과전법의 성립

원간섭기와 공민왕대를 통하여 추진된 전민변정사업은 결국 토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토지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더하여 외적의 침입과 원명 교체에 따른 불안한 국제 정세로 군자(軍資) 확보가 절실해졌다. 고식적인 방편으로 사전의 공수방안이 제시되기도 하고 과렴이 계속되었다. 노지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이었다. 1388년 5월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전제개혁을 추징하였다. 그 예로 조준의 개혁안은 사전논의 기폭제가 되어 토지 국유의 원칙하에 전국의 토지를 국가 수조지로 편성하고 수조권만을 분급하되 현존하는 사전을 혁파하고 수조지의 사전화를 방지하는 데 역점을 둔 개혁안을 제출하였다. 이 개혁안을 계기로 사전구폐법(私田拘弊法)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전구폐의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두 입장이 대립하엿다. 즉 현재의 사전을 일거에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 전면적 개혁론과 현존하는 사전은 그대로 두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폐단만 제거하자는 입장, 부분적 개선론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사전문제의 소재와 원인파악, 그리고 해결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개선론자들은 사전자체는 본조의 성법이므로 일거에 혁거하거나 가볍게 고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사전점유의 폐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농민층의 피해만 제거하면 구법의 변경없이도 사전의 폐해가 처리될 수 있다고 보았다. 개혁론자들은사전폐해는 수조지가 사적으로 세전되어 조업전화 함으로써 조종의 수전수전하는 법이 무너진 데서 말미암는다는 입장에서 사사로이 받아 겹병한 사전을 혁파하고 수조지를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직역담당자를 대상으로 토지로 지급하는 원칙을 삼았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기반과 당시의 사회 모순을 바라보는 사회와, 그리고 그 저류를 형성하는 철학적 기반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사전개선론자들은 개혁론자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사전혁파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였다. 개선론자들은 사전분급지역을 경기에 한정하는 안에 반대하다가 관철하지 못하자 경기에서 받지 못한 부족액만큼은 외방에서 받게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하여 사전을 외방에 설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 경기의 원칙은 고수되었고, 1390년 저원에 급전도감에서 과전수급 대상자에게 과전지급문서인 전적(田籍)을 지급하였다. 이어 9월에 구래의 공사전적을 시가에서 불태음으로 고려의 사전은 완전히 소멸되고, 391년 5월 과전의 지급과 관리에 관한 기본법규가 공포되어 과전법이 성립되었다.

3) 과전법의 내용과 의의

과전법의 내용을 편의상 토지분급규정과 토지 관리규정, 그리고 조세 킹 전주-전객과계 규정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과전법의 토지 지배관계의 기본방향은 전국의 토지를 일단 국가 수조지로 편성한 다음, 그 수조권을 국가 재정의 용도에 따라 각처에 분속시키는 한편 관인을 비롯한 직역자에게 절급하는 것이었다. 핵심인 과전은 국가 수조지와 국가 기관에지급한 수조지는 공전, 사인에게 지급?한 수조지는 사전이 되었다. 관전법의 토지분급규정 가운데 주묵할 만한 것은 사전경기의 원칙이다. 즉 직역자에게주는과전을 경기지역에 한정시킨 것이다. 이는 외방에 사정이 지급됨으로써 말생하는 비법적인 겸병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고, 과전은 시산(時散)을 막론하고 경성에 거주하며 왕실을 시위하는 모든 관인층을 18과로 구분하여 절급하였다. 외방에는 군전을 지급하였다. 군전지급 대상자는 무직사(無職事)의 관인으로 지방의 유력자였던 한량관리(閑良官吏)였다. 이들은 본전, 즉 본래의 소우지의 다수에 따라 10결 혹은 5결씩의 군전을 받고, 그 대가로 부경숙위(赴京宿衛)의 의무를 졌다. 그 의무는 군역은 아니어서, 군전의 지급이 군역부담과는 부고나하게 이루어졌고, 다만 양계(兩界)에는 군적을 두지 않는 대신 그 조세를 군수에 충당하였다. 과전을 받은자는죽었지만 그는 처가 수신하는 경우에는 수신전(守信田)을, 부모가 다 죽은 경우에는 그 자식에게 휼양전(恤養田)을 지급하여 관인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급된 과전은 토지관리규정에 따라 관리하였다. 과전은 계속하여 변동되므로 그 관리가 복잡하였다. 과전의 관리는 문권(文券)으로 하엿다. 과전을 받은 자는 부모가 죽은 후에부무의 관전과 바꿀 수 있고 과전을 받은 자가 죄를 범하거나 관직을 이을 자손이 없어 반납하는 경우, 승진하여 과전을 추가로 받거나 부모의 과전을 자손이 분할하여 받는 경우, 과전을 자손이나 타인에게 증여하거나 휼양전둁르 받았던 자가 나이 20살이 되어 자기 과(科) 이외의 토지를 반납하는 경우의 전권 관리를 상세히 규정하여 수전수전(授田收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과전의 분할 수식(收食)과 증여가 가능 했다는 사실은 수조권이 물권(物權)처럼 행사 되었음을 보여준다. 공전사의 조는 수전 1결에 조미 30두, 한전 1결에 잡곡 30두였고 공전의 조는 국조로, 사전의 조는 전주(田主)에서 수납하였다. 공신전을 제외한 사전에서는 결당 사전은 백미 2두, 한전은 황두(黃豆)2씩을 세(稅)로서 국고에납부하엿다. 또한 군대 동우너과 같은비상시에도 공사전의 조를 모두 공수(公收)할 수 있는 유보조항도 두었다. 과전으로는 지급한 토지의 수조권자를 전주, 사실상의 소유자인 경작자를 전객이라고 했고, 전주와 전객의 권리는 함께 보호되었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고려 후기 사전의 폐단은 일식 종식되었다. 수조권을 매개로 하여 비법적으로 형성된 농장이 혁파되고 관료와 공역자에게 수조지가 재분급 되었고, 국가수조지도 증가하고 공역을 부담할 공민도 증가하였다. 그에 따라 국가재정이 넉넉하게 되었다. 과전법에 의한 소유권 보호, 전객에 대한 배려는 사적 소유권의 성장 즉 전객구너의 성숙을 반영하고 촉진시키느 전전법은 농민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을 반영하지 못하였고, 농민생활의 안전책을 근본적으로 마련하지도 못하였다. 과전법은 전시과와 마찬가지로 수조지 세습의 길을 열어 놓았다. 수신전과 휼양전은 그 제도적 보장이였으며, 그 때문에 과전으 '영영사여된 토지'로 인식외었다. 과전봅은 중세사회 토지 소유관계의 특징인 수주구너제도를 기반으로 한 토지제도였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전시과(田柴科)와 녹과전9祿科田)을 계승한 제도로, 극에 달한 토지 소유관계의 모순을 기본적으로 해결하였기보다 미봉적으로 해결한 제도였다. 그러한 까닭에 과전법은 일종의 과도기적 토지분급제도였다.

3. 농업생산력 발달의 추이

1) 농지개간의 새로운 추세와 수전농법의 발전

고려 후기에 오면서 농업생산력은 크게 발전했다. 고려 전기까지 부분적으로 달성되었던 상경화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사회경제의 여러 측면에 적지 않은 변동을 초래하였다. 고려후기 생산력 발전의 모습은 여러 부문에 걸쳐 나타났다. 특히, 논농사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논농사의 발전상을 수리시설의 보수와 신축, 새로운 농경지의 확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 수리시설의 중심은 堤堰(제언)이었으므로, 수리사업도 제언의 부수와 신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제언의 수측과 보수는 명존 18년의 경우처럼 왕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행해지기도 하고, 중방제 수측과 金方慶(김방경)에 의한 守山堤(수산제) 보수처럼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제언 수측은 이전 시기부커 있어왔던 이로, 고려 후기에만 보인느 특징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이 시깅의 특징적인 모습은 河渠(하거)의 신설, 준설에서 찾아볼수 있다. 하거는 제언의 물은 멀리 수송하고 저습지에 고인 물은 빼는데 융용한 시설로서 관개와 저습지 개간에 이용되었다. 인종대에 張文緯(장문위)는 樹州(수주)에서 수로를 개척하여 저습지를 개간하였고, 의종대에 林民庇(임민비)는 溟洲(명주)에스 준거하여 논에 물을 대었다.
의종 6녀에 이문저는 홍주에서 거를 준설하여 관개하였으며, 희종대에 최보순은 안남대도호부에서 제방을 쌓고 물길을 내어 수재를 없앴다. 崔瀣(최해, 1287∼1340년)의 송안양주서 에 양산의 저습지 개발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양산의 전지는 모두 하습하여 가물면 곡식이 익지만 비가 오면 물 때문에 히를 입는 곳인데. 이원윤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도랑을 깊이 파는 등 턱별한 노력을 기울려 황전을 거의 모두 개간하였다고 한다. 하거의 활발한 조성은 관개과 저습지의 배수을 가능하게 하여 저습지가 논으로 사용될수 있는 길을 열었고, 그에 따라 논농사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저지개간은 고려 초·중기의 토지개간이 산전 중심이었던 점에 대비되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12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어 조선 전기에 본격화된 저지개발은 내륙의 저습지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해안지역의 낮은 땅도 함게 개발되었다. 연해지역의 저지는 몽고과의 전쟁중에 적극적으로 개발되었다.
연해지역의 토지가 몽고와의 전쟁과정에 처음으로 개간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 전기에도 농장의 형태로 개간되어 군둔전으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도 연해지는 꾸준히 개간되었다.
연해지 개발은 지방관에 의해서도 추진되었다. 연해의 토지는 농민과 지방관에 의해 이미 고려전기부터 개발되고 있엇다. 그 결과 궁원전과 사원전이 연해에 설치되고, 해도와 산성으로 입고한 상태에서 연해와 섬의 토지가 개간되었다.
몽고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연해지역 토지개간은 계속되었다. 특히 왜구의 빈번하 침입을 방어하는데 소용되는 군수를 확보하기 위해 공민화 이후 둔정설치가 논의될 대, 가장 적격지로 연해의 토지가 거론되어 적극적으로 개간되었다. 그러나 왜구의 게속적인 침입으로 연해지 개간을 타격을 받았다. 정부에서는비옥한 연해 농경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수군에 의한 둔전의 형태 혹은 성보를 수축하고 관수를 두는 방안을 강구하여 소농민들의 연해전 경작을 보호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해지역의 농경지 개간을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였고, 왜구가 없어진 조선 초기에야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때에는 주로 서남해안의 토지가 개간되었다.
개간된 저지는 수전으로 활용되었으며, 그에 따라 논농사의 비중이 점차 커졌다. 연해의 농경지는 높은 생산성으로 인하여 농경지로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말 게속되는 왜구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연해의 농경지를 고수하려 한 것은 내륙의 농경지가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연해의 경지가 비옥한 때문이었다. 농경지의 확대, 특히 기름진 논의 확보는 논농사의 발달을 가져왔다. 밭농사 중심의 농업구조가 서서히 논농사 중심으로 옮겨가는 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나고 있었다.
농경지 개간과 함께 종자의 개발과 경종법 등에서도 일정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전작 농업공학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이었다면, 후자는 농학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이었다.
저습지의 개간을 농업기술면에서 특별한 기술을 요하였고, 그에 따라 저습지 개간법이 발달하였다.
고려후기 벼로는 선명도가 알려져 있다. 선명도는 매미가 울대에 수확하는 올벼의 일종이다. 농사직설에는 벼 경종법으로 무삶이, 건삶이, 모종의 세 종구를 수록하고 있는데, 올벼는 무삶이법으로 경작하였다. 올벼 무삶이는 수원에 닿아 있는 기름진 땅에서 행하며, 늦벼 무삶이는 진창이난 부허한 땅, 찬 물이 도는 땅등 비교적 자연조건이 불리한 곳에서 행하였다. 그에 비해 건삶이는 봄에 가물어서 무삶이를 할 수 없는 경우에 행하는 독특한 경종법으로 늦벼가 사용되었다. 모종법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논에서 행해지는 모내기법이었다.
논은 세등급으로 구분되었다. 물대기와 빼기가 모두 자유로운 논이 상등, 늘 물이 고여 있어 오랫동안 비가 오면 모가 썩는 논이 중등,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비가 와야 경작할수 있는 논이 하등이었다. 결국 올벼 무삶이는 상등전에서 행해진 경종법이고, 선명도는 그에 적합한 품종이었다. 간석지에 알맞은 벼의 품종이 개발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염분에 강한 당도가 수입되어 간석지에 재배되었으나 고려시대에는 그러한 품종의 개발이나 도입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원의 강남미 도입시에 당시 강남의 논농사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든 점성도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선명도의 존재로 보아 고려 후기에는 수리안전지대를 중심으로 올벼 무삶이벗이 중점적으로 행해룶음을 알 수 있다. 입지조건이 좋지 못한 논에서는 늦벼 무삶이와 건삶이도 행해졌다. 또한 벼 경종법으로는 가장 발달한 삽앙법도 행해졌다. 모내기법은 14세기 초반에는 삼난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
모내기법의 보급정도는 농서즙요를 통해서도 살필수 있다. 농상집요를 발췌 번역한 농사즙요에는 벼 경종법으로 세역직파법과 발이재지법이 수록되어 있다. 후자는 토지가 협착하여 세역을 하지 않고 연년 경작하는 곳에서 행하는데 못자리에서 기른 모를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으로 번역하였다. 농상집요의 발이재지법을 원래 모를 뽑고 그 논의 잡초를 제거한 다음에 다시 모를 심는 것이었으나, 그를 해석하면서 당시의 농법으로 고쳐 이해한 것이다. 그러한 점을 이미 모내개법이 상당한 정도롤 보급되었음을 반영하는 사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무삶이법이 경종법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모내기법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 수리시설의 확충이 있었음으 물론이다. 앞에서 셜명한 하거는 저습지의 배수시설일 뿐 아니라 재언이나 하천수를 멀리 운반하는 시설이기도 하였다. 12세기 이래 하거의 준설에 의한 관개 기록이 적지 않게 보이는 것은 15, 16세기에 본격화하는 하천수 이용이 이 시기에 이미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모내기법은 제초하는 노동력과 종곡을 절약할 수 있는 경종법이었으므로 농경지를 많이 가진 농민이나 종족이 넉넉하지 못한 농민 모두에세 선호되었다. 그러나 모내기는 가뭄을 만나 제때에 모를 내재 못하면 실농할 위험성이 컸다. 그런 까닭에 조선 초기에는 정부에서 이를 금지하였는데. 그러한 사정은 수리사정이 상대적으로 열악하였던 고려 후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벼농상의 발전은 휴한법이 극복되고 상경화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고려 후기는 세역농법이 상경화하는 시기엿다. 고려 전기에도 농업수준이 완정히 휴한단계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미 일부 선진지역에서는 논농사를 중심으로 상경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점진적인 상경화 추세가 고려말 조선 초기에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상경화된 농법수준은 농사직설에 잘 나타나며, 농서즙요에도 보인다. 농서즙요에서는 제민요술의 세역을 환답 즉, 하나의 전자에 해를 따라 밭곡식과 논곡식을 번갈아 가며 경작하는 윤답농법으로 번역하였다. 그렇게 번역한 이유는 물론 당시에 윤답농법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윤답농법은 휴한농법이 상경농법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나 연작상경할 수 없는 조건하에서 보급된 농법이었지만 이미 휴한법으로서의 세역은 극복한 단계였다.

2) 농법의 발달과 농업생산력

고려시대에 독자적이 농서를 편찬한 적은 없다. 당시에는 중국의 농서를 많이 도입하여 이용하였다. 이미 고려 전기에 범승지서가 도입되었으며, 중,후기에는 잠서인 손씨잠경과 농상집요가 도입 유통되었다. 이 가운데 잠서인 손씨잠경은 이두로 번역하고, 농상집요는 다시 간행하였다. 이는 고려의 현실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적인 농하 성립의 기초를 마련해가고 있었다.
농상집요는 원의 가혹한 수취의 계속되 외적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농업을 복구하는 데 활용하기 위하여 간행하였다.
12세기 임경화에 의하 손씨잠경의 이두 번역은 직접잠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전에는 손씨잠경이 전해졌어도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번역 보급한 이후로 양잠업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잠서 간행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조선 초기의 농서즙요의 간행으로 보다 손씨잠경의 이두 번역도 상당 부분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농상집요의 간행과 잡서의 이두 번역, 그리고 12세기 이후 일련의 의학서적 간행은 조선초기 태종태의 농서 간행을 거쳐 농사직설로 집성되는 한국적 농학이 성립해가는 출발점이었다.
농업기술의 발전은 시비법, 제초법, 경작작물의 확대 등에서 나타났다. 시비법의 발전은 농업생산력 증대에서 관건적인 일이었다. 조선초기의 농사직설에는 신구의 시비법을 마아하였는데 그 전체적인 수준은 강낭농법과 같은 단계였다. 제민요술 이래의 전통적인 두과노비도 연작법에 활용하는 것으로 변모 발전하고 소초, 숙분, 요회, 분회들의 방실을 중시아였다. 이런 시비법이 농사직설단계에서 갑자기 마련된 것은 아니고, 고려 후기 이래 시비법의 발달상을 집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비에 관해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1331년 복주지방에서 분전한 사례가 있다. 분전은 경작지 전체에 거름을 주는 것으로 씨앗에 거름을 섞어 뿌리는 분종법보다는 발전한 시비법이다. 분정하는 경우 곡식뿐 아니라 잡초도 거름을 먹게 되어 잡초가 무성해지므로 제초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시행하기 어려운 방법이었다. 여기서의 분전은 논에서의 분전이나 대소맥전에서의 구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사직설에는 논의 시비법으로 객초를 낳는 법과 거름을 넣는 법의 두가지를 들었는데, 그 종류와 방법은 다양했다.
시비법과 제초법도 발달하였다. 농서즙요의 회환농법과 모내기는 제초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일정한 토지를 논과 밭으로 교대로 하용하면 잡초가 자라는 것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고, 모내기를 하면 제초하는 데 드는 노동력이 절반 이하로 준다. 실농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앙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농서즙요에는 두 잎이 나며 제초하기 시작하고, 제초한 후에는 매번 물을 빼서 모를 햇볕에 드러내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이 또한 논을 햇볕에 드러내오 잡초의 생장을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회환농법과 원리상 비슷하다. 제초기구로는 극젱이와 호미를 사용하였는데, 일부지방을 제외하고는 주로 자루가 짧은 호미를 이용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다양한 밭작물을 재배하였다. 벼와 알곡작물로 보리와 밀, 조, 기장, 피, 귀리를 재배하고 콩과 알곡작물로 콩, 완두, 팥, 너풀콩 등을 재배하였다. 또 여뀌와 알곡작물로 메밀이 있었다. 이 작물들은 다양한 품종으로 분화되어 토질과 기흉에 맞게 경작되었다. 배추, 무, 가지, 동와, 마늘, 파, 물외, 부추, 아욱 같은 채소와 참외, 배, 복숭아, 밤, 대추, 귤, 앵두, 호도 등의 과일을 재배하였다. 유자식물로서 호미, 직물원료작물로 삼, 모시, 뽕나무를 재배하였으며,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1364년 문익점이 전래한 목면은 가난한 사람들이 비단이불을 마련하지 못해 혼기를 놓치거나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혼인시에는 면포만 사용하도록 하자는 제안이 나올 만큼 널리 유통되었다. 면화의 생산과 면포의 등장은 의류 생활을 변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직조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약용잘물로는 피마자, 생지황 들을 재배하였다. 채소, 과이로가 특용잘물의 재배에는 중앙관청인 내원서에 속한 과원과 민간인의 과원운영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통해 접목기술과 같은 과일재배기술이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