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주 통치기구와 지방제도


高麗初期의 官階

발제자 9345013 문병철, 9645039 최은영, 9745013 김정희
참고문헌 박용운, 1987 <귀족사회의 정치체제> <<고려시대사>>上, 일지사
김갑동, 1988 <고려초기의 관계의 성립과 그 의의> <<역사학보>>


머리말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볼 때 대개 혼란기에는 사회변화와 더불어 많은 제도·문물이 면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극복하면서 개창된 새로운 왕조에서는 前王朝의 제도와 문물을 답습하기도 한지만 새롭게 창출하기도 한다. 高麗初期의 官階 역시 그러한 혼란과 수습과정에서 생겨난 새 제도였다.
高麗初期의 官階는 正匡·元甫·大相·元尹등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高麗初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가 成宗이후에는 鄕職化되었고 高麗末에 이르러 土官職으로 변모되었다.
여기에서는 高麗初期 官階의 起源을 살펴보고 官階의 사용목적을 알기 위해 그 授與對象 인물들을 분석하며 貴族政治의 政治體制를 알아보고 官階의 意義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것이 羅末麗初의 社會變化過程에서 차지하는 의도도 검토해 보겠다.

1. 官階의 起源과 授與對象

1) 官階의 起源

먼저 正匡·大相·元尹·佐尹등의 官階가 언제 처음 창출되었을까.
《三國史記》에서는 高麗式 官階의 起源이 904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弓裔가 國號를 摩震, 年號를 武泰라 정하고 廣評省·兵部등의 官制 정비함과 더불어 正匡·元甫등의 官階를 제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高麗史》에서는 弓裔가 제정한 관계는 正匡·大相들이 아니라 大宰相·重副들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반면 大匡·正匡등의 官階는 高麗 太祖의 즉위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高麗式 官階의 기원은 904년 弓裔가 정한바 있지만 본격적인 사용은 太祖 元年부터 시작되고 얼마간 新羅式 位階와 같이 쓰이다가 太祖 6年에 유일한 官階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高麗式 官階는 成宗 2년까지 계속 사용되었고 그것은 부분적인 文散階의 채용과 成宗 14년 文散階의 정비로 鄕職化 되었다.

2) 官階의 授與對象

高麗式 官階는 弓裔가 제정한 것이었지만 太祖가 다시 이 官階를 채용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太祖 이후에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官階의 授與對象者들을 살펴보겠다.

(1)官府·來投者
우선 高麗式 官階는 각지에서 歸附해온 자들에게 수여되었다. 특히 太祖代에 後三國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많이 授與되어졌다. 이들은 대개가 그 지역을 장악했던 城主·將軍들이었다. 따라서 太祖에게 커다란 세력확대를 가져다주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이들에게 官階를 授與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國外의 각 지역에서 來投해온 자들에게도 官階가 授與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高麗初期 官階는 太祖代부터 異國人을 포섭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2)武人·戰功者
高麗初期의 官階는 太祖의 측근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武人이나 戰爭에서 功을 세운 戰功者에게도 授與되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太祖 자신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武人들에게도 官階가 授與되었다.
太祖는 자신의 휘하장졸들에게 戰功이나 協助의 대가를 관계로 수여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3)王의 妃父들
몇몇 예외가 있겠지만 妃父들은 대개가 출신지역의 세력가들이었다. 이들의 딸과 혼인을 함과 더불어 그 父들에게 官階를 授與했던 것이다. 따라서 王室의 妃父들에 대한 官階授與는 이들에 대한 명예적인 대우일 뿐 아니라 지방세력의 흡수 내지 통제라는 측면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文人·儒臣들
그 외에 高麗式 官階는 文人이나 儒臣들에게도 授與되었다. 文人이나 儒臣들에게 官階가 授與된 것은 물론 太祖때부터이지만 光宗이후부터 더욱 많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太祖代의 혼란기를 지나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儒臣을 통한 王權强化를 꾀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많은 勳臣·宿將들이 모두 誅殺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學士들을 등용하여 개혁을 주도케 하였다.

2. 貴族社會의 政治體制

1)官職과 官階

高麗時代의 官職은 文班職과 武班職, 京職과 外職등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實職과 散職으로도 구분이 가능하였다.
實職은 職事, 곧 일정한 직임이 부여된 官職을 말하므로 통치기구내의 定額은 모두 實職이었다고 할 수 있다. 實職과 대칭되는 의미를 지닌 散職은 職事가 없는 허직이었다. 官職과 거기에 취임할 수 있는 관원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데 따른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많은 인원을 관직세계에 수용할 필요성에서 마련된 職制이다. 散職은 職事가 없기는 하였지만 일면 勳職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뿐더러 검교직 소지자는 녹봉과 토지를 지급 받았으며 동정직자도 급전이 대상에 끼어있었다. 이러한 散職은 고려후기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濫授되면서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
吏란 보통 기록이나 문부를 관장하는 도필의 임무를 띠고 행정의 말단을 맡아 실무에 종사한 품외의 하급관리를 말한다. 胥吏는 물론 그 한 부류로서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중앙의 명사에 소속하여 있는 吏屬을 뜻하였으며, 이들이 조무하는 자리가 胥吏職이었다. 胥吏職은 일반관직체계의 조직으로 기능하여 다음 단계의 품관으로 진출하는 데 별다른 제약이 따르지도 않았다.
官階는 관인들의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국가의 公的 秩序體系를 일컫는다. 光宗 9년부터 中國式 文散階가 이용되었고, 光宗祖 이후는 고려 나름의 관계와 중국식 文散階가 병용되는 기간이었으며, 결국 成宗 14년에 이르러 후자가 유일의 공적 질서체계로 지위를 굳힘으로써 전자는 官階로서의 생명을 잃게되었다.
文散階는 文·武 관인들의 지위를 나타내는 질서체계였으며 官職을 수여받는 경우 散階와 官職을 지닐 수 있었는데 이때 양자의 품계는 일치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산관에 맞추어 직사를 제수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려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이런 점에서 高麗의 文散階는 미숙성을 드러내고 있다.
鄕職은 국초의 官階가 成宗 14년에 이르러 변신하여 이룩된 것이다. 鄕職은 長吏나 武官의 노인, 武散階를 가진자, 軍人, 兩班, 胥吏 및 女眞의 추장 등에게 준 爵과 같은 의미를 지닌 조직이었다.

2)中央 政治體制의 性格

고려시대 정치의 중심기구는 이른바 3省 6部제로서 그 체제와 기능은 唐制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정치제도는 唐制만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또한 宋制계통과 고려 독자적인 제도도 섞여 있었다. 高麗의 지배구조는 唐制와 宋制, 그리고 高麗의 독자적인 세 계통으로 구성돼 여러 정치기구 사이에 운용의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었는데, 우선 이런 점에서 고려 정치체제의 특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사실은 고려가 唐·宋制의 제도를 고려의 실정에 맞게 소화, 흡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高麗의 정치체제에는 또한 귀족적 요소가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먼저 통치의 근간이 된 내사문하성의 설치 자체가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유신세력이 그 중심기구로 내놓았다는 사실에서 시사 받는 바 크거니와, 그것이 행정기관이 아니라 의정기관이었다는 점은 역시 그 같은 면모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臺諫制도 또한 그러하다. 臺諫은 간쟁이나 시정의 부실을 논하는 기능 등을 통해 감히 왕권을 제약하고 국가의 중사에 깊이 관여하는 귀족세력의 대표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3)地方의 統治組織

高麗의 朝廷이 상주하는 外官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해 본격적으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成宗 2년에 12牧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牧을 설치하고 牧使등을 파견함으로써 중앙의 통제력이 본격적으로 지방에까지 침투되기 시작한 것이다.
成宗 14년에 이르러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증설된 것은 지방관제상 매우 획기적인 조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2州 牧使制에서 12軍 節度使制로의 전환은 주목할만하다. 고려의 12軍 節度使制는 '일종의 군정을 강화함으로써 더욱 완전한 중앙집권을 꾀한 조치'라고 평한다.
高麗時代 최고의 지방행정구획으로는 京畿와 5道 兩界가 있다.
道의 장관은 按察使였다. 兩界는 변경지대인 까닭에 外官制가 발달하여 일찍부터 兵馬使가 설치되었고, 兵馬使는 兩界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관하는 장관으로 일원적인 지배체제의 책임자였다.
高麗時代에는 모든 州·部·郡·縣에 外官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지역에 한하여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郡·縣의 크기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중앙관이 파견되는 州郡·州縣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지방관이 없는 屬郡·屬縣이 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鄕, 部曲은 주로 농경에 종사한 반면 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金·銀·銅·鐵 및 紙· 墨등 특정 공납품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所는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공납품을 생산토록 한 특수 행정조직이었다.
高麗에서 외관을 보좌하여 지방행정의 말단을 담당한 것은 보통 장사나 외라고 불린 향리층이었다 그들은 비록 관인은 아니었지만 국가권력의 말단을 장악하여 일반 백성과 직접 접촉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은 매우 큰 것이었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屬郡·屬縣이 많아 그곳에서 향리가 사실상 수령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또 신분적으로도 그들은 麗初의 호족과 연결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권한과 지위는 상당히 크고 높았던 것이다. 향리층은 과거를 통하여 얼마든지 양반 귀족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또 향리로서 가지고 있는 권한도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앙정부로서는 이들에 대한 통제책을 따로이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其人制度와 事審官 制度가 그러한 것들이다.
其人制度는 지방관제가 정비되어 중앙행정력이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향리의 자제는 기인으로써 인질의 성격을 띠고 서울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게 변모된 것 같다. 事審官은 父系뿐 아니라 母系와 妻系 등 일정한 인연이 있는 지역에 임명되어 그곳의 통제에 임하였다.

3. 官階의 意義

1) 社會移動의 媒體

신라가 하대로 접어들면서 중앙에서는 진골귀족 상호간에 왕위 쟁탈전과 더불어 지방통치의 해이현상이 일러나게 된다. 이에 따라 骨品制 자체에 불만을 품고 있던 6두품이나 지방세력들이 부상하게 된다. 그러다가 진성여왕대의 전국에 대한 조세독촉이 계기가 되어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지방세력 즉 소위 豪族들이 각 지역을 分店하는 사태로 돌입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궁예와 견훤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여 급기야는 後三國時代를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이 戰亂으로 발전하는 경우 武的 용모나 기질 때문에 지위를 향상시키기도 한다. 이 현상은 高麗의 건국을 전후한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武的 기질이 있는 자들은 太祖의 휘하의 군인으로서 戰功을 세워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 그들은 官階를 授與받음으로써 정치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이처럼 무인들은 武的인 資質과 戰功의 대가로 官階를 수여 받음으로써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물론 그들은 구체적인 관직은 갖지 않았지만 官階만을 지닌 채 최고의 실권자로서 활약하였다. 高麗初期의 官階는 지휘상승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 媒體役割은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社會移動의 媒體로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地方自治權 確保의 媒體

각 지역의 歸附者나 戰功者들에게 官階를 수여하고 이와 함께 州나 府로 승격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당시가 아직도 전란기였다는 정치상황을 高麗하면 太祖는 더 많은 지역세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官階授與는 그들의 충성의 대가로 그 지역의 통치권을 위임해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高麗式 官階를 지닌 지방의 최고 실력자 밑에는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력을 담당한 계층이었을 것이며 또 新羅에서 高麗初의 왕조 교체과정에서 고려왕실에 불복한 훈구대신들이 지방으로 폄출되어 사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지방의 지배자 집단은 高麗式 官階를 받은 상층집단과 新羅式 位階나 官職을 가지고 있는 하층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고 高麗式 官階를 지닌 자들이 모두 在地세력이라는 뜻은 아니다. 재지세력들은 지방의 실력자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중앙으로 진출하여 在京세력으로 활약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경세력은 중앙으로 진출한 후에도 출신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바랬다. 중앙에서도 이들은 통하여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꾀하려 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事審官 制度였다. 즉 중앙으로 지출한 지방세력 事審官이 되어 출신지의 副戶長이하를 통제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중앙의 진골귀족중심의 골품체제가 타파되고 새로운 사회가 전개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바꾸어 말해 閉鎖社會에서 半閉鎖社會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羅末麗初의 혼란기에 太祖에게 歸附 내지 협조한 지방세력들은 官階를 수여 받음으로써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事審官을서 출신지의 통치를 관여하기도 하였다. 반면 太祖에게 불복하거나 미온적인 자들은 지위가 강등되어 高麗式 官階를 받은 자들의 하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따라서 高麗初期의 官階는 太祖 측에서 보면 간접적인 지방통치의 한 수단으로 가능하였지만 지방세력측에서 보면 자치권 확보의 매체역할을 했던 것이다.

맺음말

위에서 얻은 결론을 요약하면,
첫째, 高麗初期 官階의 起源은 904년 궁예가 정한 데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용은 태조 원년부터이다. 그 사용초기에는 신라식 관계와 병용되었으나 태조 6년부터 유일한 관계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관계의 성립은 태조 6년을 전후한 시기라고 하겠다.

둘째, 高麗初期 官階를 수여 받은 인물들은 대체로 4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죽 歸附, 來投者, 武人, 戰功者, 王의 妃父들, 그리고 文人, 儒臣들이 그것이다. 태조의 관계사용 목적은 자신의 領城確保와 勢力擴大를 위한 것이었다. 또 光宗이나 成宗은 文人이나 儒臣들에게 官階를 授與해주고 이들을 통해 王權强化와 改革政治를 실시하였다.

셋째, 高麗時代의 官職은 文班職과 武班職, 京職과 外職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實職과 散職으로도 구분이 가능했다.

넷째, 高麗의 지배구조는 唐制와 宋制, 그리고 高麗의 독자적인 세 계통으로 구성돼 여러 정치기구 사이에 운용의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다섯째, 高麗의 조정이 상주하는 외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해 본격적으로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成宗 2년에 12牧을 설치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成宗 14년에 이르러 12州 牧使制에서 12軍 節度使制로의 전환은 주목할 만하다.

여섯째, 羅末麗初의 혼란기에는 신분과 지위의 변화가 컸다. 그러나 지위상승의 배경에는 왕에 대한 충성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이들에게는 고려식 관계가 수여됨으로써 정치적 지위가 보장되었다. 죽 그들의 지위 상승에는 관계를 통한 단계적인 승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高麗初期의 官階는 사회 이동의 모체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여섯째, 高麗初의 지방세력들은 태조에게 歸附내지 협조한 대가로 州, 府로의 승격과 함께 관계를 수여 받았다. 이에 따라 지방세력들은 그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인정을 받아 자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 이들은 중앙으로 진출하여 事審官이 되어 출신지의 지방통치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羅末麗初에는 여러 제도가 변화, 창출되면서 사회성격도 바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 시기가 왕조의 교체기임과 더불어 전란기라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면에서 볼 때 羅末麗初 전란의 역사적 의미도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