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주 문벌귀족과 관료

[고려 귀족제사회설에 대한 논의][고려 귀족사회 성립론]


高麗 貴族制社會說에 대한 논의

발 제 자 9445021 서연수
참고문헌 박용운, 1987 <고려 귀족제사회설에 대한 논의><<고려시대사>>上 일지사

1. 문제의 제기

일반적으로 고려왕조는 귀족제사회라고 설명되어 왔다. 그것은 고려왕조가 出生身分을 크게 강조하던 身分制社會로서, 家門て門閥이 좋은 귀족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국가를 운영하여 갔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해는 1920년대초의 개설서로부터 근자에 발표된 전문적인 논문에 이르기까지 대략 타당성이있는 견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70년대 초기에 들어와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고려에서 채택한 보다 일반적인 官人 등용법은 科擧制였으며, 그에 따라 선택된 科擧官僚가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고려왕조는 귀족제사회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官僚制社會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는 종래의 학설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고려를 貴族官人社會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동시에 발표되었다. 이 때 그 중요한 논거로 내세워진 것이 蔭?制였다.

2. 官僚制て家産官僚制說과 그 비판

官僚制て家産官僚制說의 論據

고려를 官僚制 내지 家産官僚制社會로 보면서 그 근거로 든 것은 科擧制度였다. 그리하여 시험을 통해 왕권에 충성을 다하는 신진인사들을 등용했거니와, 과거에 합격한 이들 科擧官僚를 근간으로 하여 官僚制가 성립될 수 있었으며, 이는 成宗代 이후 더욱 강화 발전되어 갔다고 한다.
<高麗史> 列傳에 立傳되어 있는 650명의 인물들의 분석결과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관직이 血系와는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 여하에 의거하여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과거가 얼마나 중시되었던가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과거제가 일반성을 띠고 있었을 뿐더러 절대적인 기능을 했던 고려는 마땅히 관료제사회로 파악되어야 하며, 따라서 蔭?制一般性說에 근거를 둔 貴族制社會論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편 지방의 중하급관리의 자제가 급제한 것을 계기로 出仕て陞進하여 門地를 세운 예를 볼때 과거제는 하층신분의 상승 이동을 가능케 하여 주는 기능이 컸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으로 역시 귀족제 존립설을 부정하는 또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官僚制て家産官僚制說에 대한 비판

<고려사> 열전은 본래 극히 제한된 사료일 뿐 아니라 관료적 성격이 강한 조선초기의 官人들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과거출신을 중심으로 서술한만큼 한계성이 뚜렷한 것인데 그와 같은 사실을 전혀 고려함이 없이 다만 그곳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의 숫자만 가지고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 입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과거는 결코 신분을 초월하여 實力에만 기준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신분층이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과거 가운데 明經科 이하에는 양인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핵심되는 과목인 製述科에 일반 良人은 응시할 수가 없었다.
고려시대의 과거는 시행과정에서 家門關係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科擧節次法에 따르면 擧子는 시험이 시행되기 일정한 기간 이전에 「行卷家狀」을 貢院에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당해인의 성명과 本貫て四組 및 응시자격て生年て四組의 관직 등을 기록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비록 家壯의 허물을 알아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하지마는 과거시험 그 자체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의 과거는 정치적て경제적て사회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배타적으로 共有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관료제는 근대적인 소산물로 자유로운 계약에 의하였고 가산제는 전근대사회에서 형식적으로만 관료제적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통치구조로 파악된다. 이와 같이 관료제와 가산관료제는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두 체제가 다같이 科擧制가 시행되었다 하여 곧바로 성립되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貴族制社會說의 내용

貴族·貴族制의 개념 문제

고려를 귀족제사회로 보려 할 때 먼저 귀족과 귀족제에 대한 개념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종래 이에 대해서는 「家門·門閥이 좋은 사람들」을 귀족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사회를 곧 귀족사회로 이해하였으며, 또 身分制社會라는 점에 중점을 두어 이같은 사회에서의 지배신분층을 귀족이라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말할 때에 그 사회는 곧 귀족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견해 등이 피력되어 왔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家門て門閥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이 좋은 文班만을 귀족으로 보고 그것이 文班보다 못한 武班은 귀족에서 제외했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배신분층은 생각하기에 따라 귀족에는 포함시킬 수 없는 豪族이나 吏族까지를 포괄하는 넓은 신분층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의문이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귀족은 「一般人民과 구별되는 신분적て정치적 특권이 주어진 가족에 태어난 인간」또는 「신분제사회에서의 지배신분층」등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많다. 즉, 貴族制下에서는 出身身分이 제1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개인의 능력이나 資性은 제2차적인 문제가 된다. 개인은 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그의 배경이 되는 宗族親戚과 合體되어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족제하에서는 관직의 세습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정권은 소수의 家門에 의해 累代的으로 장악되며 그 결과 門閥이 형성되고 家族의 상하가 생겨난다. 이 家族意識은 혼인관계에 가장 잘 표현되어서 귀족들은 동일층 내지는 上層家門과의 결혼을 희망하며, 그에 따라 하나의 폐쇄적인 通婚圈을 형성하게 된다. 고려사회에서 이와 같은 특성은 5品이상 官僚層에 잘 보이고 있다. 이것은 고려사회가 곧 귀족제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貴族制社會說의 論據

高麗貴族制說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논거로 내세운 것은 음서제였다. 음서의 혜택은 공신들의 경우에 특히 컸지마는 일반 고급관료들도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손을 벼슬 시킬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특권은 어느 정도까지 許與되어 있었을까. 음서는 일반적·정기적으로 실시된 제도였는가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만 시행된 제도였는가 하는 점과,한명의 관료가 자손 1명에게만 蔭職을 주는 이른바 「1人 1子」가 원칙이었느가, 아니면 여러 명의 자손에게 음직을 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점에 있어 종래에는 특별한 경우에 시행되었으며 「1人 1子」에 한하여 가능했다고 파악하여 왔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음서는 국왕의 즉위나 王太后의 冊封과 같은 국가의 큰 행사 때뿐 아니라 매년 정기적·항례적으로 시행되었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음서는 5品이상의 貴族官僚들이 그들의 자손을 家蔭에 의해 官途로 나가게 할 수 있는 길로서의 의미 이외에 또 그 관도에 早期進出시키는 제도로서도 커다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음서를 통하여 진출한 관인들이 아무런 限職制의 제약을 받음이 없이 높이 승진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다시 그들 자손에게 음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귀족제사회의 특성과 잘 부합되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고려귀족제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음서제를 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서제와 같은 원리에서 5품 이상의 귀족관료에게 그들의 특권적인 생활을 세습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경제적 토대로 마련된 것이 功蔭田柴法이었다. 이 공음전시는 처음 공훈이 현저한 공신에 한하여 지급하였으나 文宗代에 이르러 훈공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官人身分 그 자체에 대한 우대 보호책으로 5品 이상의 文武兩班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지급하였다. 이 법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일반의 兩班田柴가 當代限인 데 비하여 공음전시는 법 제정의 근본 취지에 합당하게「傳之子孫」하는 세습적 상속을 인정한 점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공음전시법은 확실히 귀족적 특성에 잘 어울리는 제도였으며, 따라서 이와 같은 제도를 마련한 고려왕조는 귀족제사회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인 측면과 함께 귀족관료들의 실상과 그들이 고려사회에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て사회적 위치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서도 귀족제설은 뒷받침을 받고 있다. 이 작업은 구체적으로 귀족관료들의 家系와 관직 및 通婚圈 등에 대한 조사의 형태를 띠었다. 그 결과 고려의 대표적 門閥貴族家門은 慶源李氏로 알려졌다. 慶源李氏가 많은 재상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家門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음서 출신자가 다수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경원이씨에 비견할 만한 고려 최대 문벌의 하나인 海州崔氏와 慶州崔氏, 利川徐氏, 慶州金氏, 坡平尹氏, 平山朴氏, 등이 있다. 이들 귀족가문 출신이 거의 모든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정치적て경제적て사회적 특권신분층인 소수의 門閥貴族家門이 정부의 요직을 점유하고 국가를 운영해 간 귀족사회라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蔭敍制와 功蔭田柴法과 같은 귀족적 특권의 제도화가 성립할 수 있었으며, 科擧制조차도 귀족제적인 방향에서 운영하여 갔다고 생각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