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주 고려초의 호족과 왕권

[귀족사회의 성립][고려사회의 역사적 성격]


貴族社會의 성립

발제자 9745020 박민정,  9645010 김수영
참고문헌 박용운 , 1987<貴族社會의 성립> <<고려시대사>>上 일지사

1. 太祖의 건국과 豪族聯合政策

王建의 건국

高麗를 건국한 王建은 松嶽(開城)地方 豪族의 자제였다. 그러면 왕건이 그곳에 가지고 있던 세력기반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先世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데 그것을 전해주던 史書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그 내용이 《편년통록》의 것을 중심으로 하여 <高麗史>첫머리에 실려있는 「高麗世系」에 轉載되어 있어 대체적인 윤곽만은 살필 수 있다. 그것을 잠시 보면,

왕건의 先代는 스스로 聖骨將軍이라 칭한 虎景이 白頭山으로부터 扶蘇山 左谷에 이르러 혼인하고 가정을 마련한 것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서 康忠이 태어나 역시 西江 永安村 副人의 딸인 具置義에게 장가들어 살고 있는데 이때 그는 「扶蘇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서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태어나리라」는 風水說에 따라 그대로 하고는 인하여 松嶽郡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郡의 上沙粲이 되었다 한다. 康忠은 슬하에 伊帝建과 損乎述(寶育이라 改名)두 아들을 두었고 보육에게는 다시 두 딸이 있었는데 때마침 潛邸時의 唐나라 肅宗 (《편년강목》에는 唐 宣宗으로 되어 있음)이 산천을 둘러보고자 바다를 건너 이 곳에 왔다가 언니의 꿈을 산(買) 次女 辰義와 인연을 맺어 作帝建을 낳았다. 그 후 작제건이 성장하여 아버지를 만나고자 商船을 타고 가던중 西海龍王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처치해 주고는 그의 딸 龍女와 혼인하여 되돌아오니 白州의 正朝인 劉相晞등이 소식을 듣고 큰 경사라 하여 3縣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위해 永安城을 쌓고 宮室을 지어 주었다. 龍建(隆으로 改名)은 이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사람됨이 크고 도량이 넓어서 三韓을 倂呑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그는 꿈에서 본 여인(夢夫人)을 만나 혼인하여 태조 왕건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위의 王建 世系는 비합리적인 說話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잘 맞지 않아 이를 살펴감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편 그런속에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사실은 그의 집안이 바다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왕건의 世系는 羅末에 크게 일어났던 海上勢力家의 하나였다고 짐작된다.

그런데 이 집안은 康忠때 이미 자의로 郡의 위치를 옮기고 그곳의 上沙粲― 사찬은 본래 신라의 17관등 중 제 8급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村主의 位號로 쓰인 것 ―이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제건에 이르러서는 開州(開城)·貞州(예성강 하류)·鹽州(延安)·白州(白 川)·江華·喬桐·河陰 등의 인원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집을 지은 것으로 미루어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와 강화도 및 한강 하류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펴지 않았나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근자에는 龍建때 벌써 삼한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견해까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虎景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성골을 칭하였고 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당나라 숙종을 끌여 들여 家系를 미화하려 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왕건의 先世는 신분이 낮고 그 세력 역시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世系를 통해 본 왕건 집안의 세력기반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약간 견해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가문이 상당한 기간동안 호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려 왔다는 이해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왕건은 이와같이 先代로부터의 호족적 기반위에 西海의 海上勢力 및 穴口鎭·浿江鎭 등의 軍鎭勢力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왕권의 세력기반은 우세한 水軍力을 가지고 西南海 방면의 공략에 힘써 후백제의 중국·일본과의 통로를 막고 북방에 대한 정면 공격을 견제한 전공에 의해 侍中(首相)의 자리에 오르나 폭군화한 궁예가 축출되면서 왕위에 올라 새로이 고려를 개창하게 되었다. (景明王 2년, 918)

새로운 왕조를 연 太祖 王建은 서울을 鐵原으로부터 자기의 본거인 松嶽(開城)으로 옮기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스스로의 정치적·군사적 지반을 확고히 하려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 五代의 여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한편 신라에는 友好的태도를 취하고 후백제에 대하여는 무력으로 대결해 나가는 정책을 폈다.

太祖의 豪族聯合政策

태조가 건국한 후 그에게 부과된 가장 큰 문제는 호족들을 회유·억압하는 일이었다. 그가 새로이 나라를 열었다하나 지방 각처의 호족들은 후삼국의 혼란시대와 다름없이 독자적 무력과 경제적 지반을 보유하여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또 왕건과 전장에서 고락을 같이한 호족출신의 諸將들도 전쟁에 의한 포로·노획물 등의 이익을 分占하고 私兵을 거느린 채 자기의 세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政局의 불안을 면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저항하는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한편으로 그들과의 타협과 연합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우리들이 고려 초기의 정권 형태를 흔히 豪族聯合政策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호족들에 대한 몇 가지 시책을 폈는데, 그 첫째로 들수 있는 것이 結婚政策이었다. 왕건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내지는 호족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함으로서 그들과의 결합을 굳게 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호족들의 입장에서도 딸을 왕에게 주어 外戚으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왕실과 호족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第5妃는 예외에 해당한다. 그는 신라 왕실 출신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다른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즉, 왕건은 자신이 호족출신으로서 다른 호족들을 지배하는데 권위가 필요하며 그것을 신라왕실에서 빌리려 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태조는 왕실권력의 분산을 꺼려 異服男妹간의 결혼과 같은 극도의 근친혼을 행하였고 그러므로서 왕실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혼인정책과 더불어 유력자들에게 王氏의 姓을 하사하여 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연합을 굳게 하는 姓政策도 비슷한 범주로 파악할수 있다.
다음 事審官制度와 其人制度도 태조가 취한 對豪族施策중의 하나 였다. 태조가 사심관제도를 시행한 목적은 물론 호족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앙행정력이 지방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에서 수도에 거주하는 지배계층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꾀한 것이라 볼수 있다. 其人制度 역시 호족(향리의 전신)에 대한 견제책의 일환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다만 아직 왕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던 太祖年間에 중앙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基人을 選上시킬 수 있었는가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다. 호족의 자제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던 당시의 사정으로 미루어 이 제도도 왕권과 호족 쌍방간의 互惠的 바탕위에서 운용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요컨데, 태조가 시행한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의 내용은 좀 달랐지만 그 추구하는 바의 목적은 모두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 겸회유의 필요성에서 출발된 제도임을 알수 있다.

태조는 한편으로는 西京經營을 통해 고려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육성함으로서 또한 호족세력을 견제하는 한 방책을 삼았다. 태조가 즉위한 이래로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국방상의 의의가 강조되어 왔고 또 풍수지리사상과 결부되어 설명되기도 하였으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對後百濟戰에 이 지역의 우세한 군사력을 원할하게 동원하기 위함에서였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지마는 일면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 확보라는 정치상의 목적도 컸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강대한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응할 만한 새로운 세력기반이 필요하였고 그같은 근거지의 육성에 서경이 안성맞춤이었다는 주장이다. 서경에 대한 우대·경영의 큰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그 하나를 들어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건국초의 사정으로 짐작컨데 거기에 호족세력을 견제한다는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는 이어서 후대 왕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고 있다. 말년에 朴述熙를 통해 전한 「訓要十條」가 그것인데 여기에는 佛敎를 존중할 것과 풍수지리에 대한 그의 信心 및 政治要途들이 조목조목 언급되어 있다. 태조는 이 밖에도 民心의 수습에 힘쓰고 민족융합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고 있으며 또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北進政策을 폈다.
요컨데 태조의 꾸준한 노력 결과 고려왕조는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을 가지게 되었으나 호족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2. 惠宗, 定宗의 시련

惠宗代의 정변

태조를 정점으로 결속되어 있던 豪族勢力과 王室勢力이 그의 후계자인 혜종에게까지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혜종대의 정국은 박술희의 지원을 받는 혜종 자신의 세력과 광주원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왕규세력, 그리고 왕식렴과 손을 잡고 있던 혜종의 異服弟 요의 세력이 왕위를 둘러싸고 음모와 정쟁을 벌여 혼미를 거듭한 시기라 할 수 있다. 혜종은 적대세력을 정면으로 분쇄할만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혜종대의 왕위 계승전은 왕실과 호족세력 및 호족출신 外戚이 서로 얽혀 일어난 일대 정변이었다. 여기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사람은 堯(定宗)였다.

定宗의 시련

定宗은 「群臣의 翊戴를 받아」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의 즉위는 위에서 보았듯이 西京에서 기반을 닦았던 王式廉과 몇몇 지지세력에 의해 군사력이라는 비상수단이 동원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開京에 기반을 둔 호족출신을 중심으로하는 반발세력에 대해 정종은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崔承老 상소문에 「일찌기 惠·定·光 三宗이 相繼한 처음을 보건대 百事가 未寧할 제 兩京의 文武官이 반이나 살상되었으며」云云하는 기사로써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兩京이란 開京과 西京을 말하며 그 가운데 정종에 의해 살상되었다는 문무관은 개경세력으로 생각된다. 정종에게 우호적이었던 西京勢力이 이때 숙청되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정종의 숙청작업에도 불구하고 반발세력은 여전히 커서 그의 개경생활은 불안감을 면할 수가 없었다. 아마 정종이 西京으로의 遷都를 서두르게된 일 요인이 이런 데에 있지 않았나 보여지고 이는 그때까지 정종을 후원해온 王式廉과 서경세력의 정치적의도와도 관련되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한마디로 정종의 兩京遷都計劃은 착잡한 정치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마련되었는데 이를 위해 당시 고려사회의 정신면을 지배하던 風水地理設을 이용하였다. 서경은 明堂이라는 것이다.
정종대는 혜종 때에 비하여 어느정도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아직 시련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3. 光宗과 景宗의 王權强化策

光宗의 王權强化策

호족세력에게 억눌림을 받던 王權은 光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광종은 처음 즉위하여 7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온건한 방법으로 호족세력을 무마하면서 서서히 왕권의 안정을 모색하여 갔다. 그리고 그는 光德이라는 독자적인 年號를 세워 자주적인 일면을 보이는 한편 밖으로 중국왕조, 특히 後周와의 밀접한 외교교섭을 통하여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높이는 등 정치적 기반을 닦는 데 힘썼다.

이리하여 어느 정도의 토대가 잡히자 그는 7년부터 11년에 이르는 5년동안에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그 첫 착수가 왕 7년(956)에 시행한 奴婢按檢法으로, 이는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본래 良人이었던 자를 해방시켜 還良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호족출신 공신들이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 얻은 포로나 戰災民 등을 노비로 만들어 자기의 경제적·군사적인 세력기반을 증대시켜 왔으므로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왕 9년(958)에 後周의 歸化人인 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科擧制度를 시행하였다.
科擧는 주지하듯이 文藝나 유교 경전의 능력을 시험하여 그 성적에 따라 官人을 등용하는 제도로, 이것은 국초 이래 커다란 정치적 비중을 가지고 있던 武勳功臣들을 약화시키는 대신 군주에 대한 충성을 본분으로 하는 新進人士를 기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실시한 것이었기에 武的존재인 호족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다음은 왕 11년(960)에 있은 百官의 公服제정으로, 服色의 구분은 일정한 位階秩序에 따른 상하의 등급을 나타내었고, 그것은 곧 광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광종대의 이같은 제반 개혁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雙冀를 비롯한 中國 歸化人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科擧를 통하여 등용된 이른바 「젊은 무리」, 또 大豪族과는 사회경제적인 처지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던 「群小土豪」였다. 이들은 별다른 세력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王權과 깊이 밀착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로써 혁신정치는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졌다.

광종은 숙청을 전후하여 侍衛軍을 크게 강화하고 있었다. 즉, 그는 州郡에서 풍채있는 자를 선발하여 入侍케 함으로써 자신의 군사력을 증강시켰고, 한편, 광종의 왕권강화정책은 불교측으로부터도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 점은 특히 均如와 광종과의 협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대략 살펴 왔듯이 광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전 생애를 바친 군왕이었다. 이제 광종의 개혁정치를 거치고 난 이후의 왕권은 적어도 중앙에서만은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었으며 이에 광종조는 고려왕조의 확립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였다.

景宗의 王權强化策

광종의 숙청은 경종의 즉위와 동시에 즉각 중지되었을 뿐더러 유배자를 풀어주고 囚人을 방면하는 등의 사면 조처가 취해졌다. 이에따라 景宗代에는 종래의 開國功臣系 가 다시 등장할 수 있게 되면서 光宗代에 진출한 인물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 등, 어수선한 상황이 되었다. 이를 위한 정국의 새로운 안정의 모색은 국가의 질서체계내에 당시의 모든 지배계층을 흡수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고, 그같은 모습은 경종 원년 11월에 마련된 田柴科에서 볼 수 있다. 이 때에 성립된 전시과는 紫衫·丹衫·緋衫·綠衫의 4色公服에다 人品의 요소까지도 참작하여 給田하는 기준으로 삼되, 丹衫 이하 층은 다시 文班·武班·雜業으로 구분하고 이들 각자를 역시 몇 단계씩의 品等으로 나누어 田地와 地의 지급액을 정해 놓고 있다. 여기서 紫衫層은 元尹 이상의 고위 官階를 띤 호족과 功臣系列을 대상으로 한 것 같고, 丹衫 이하는 官職을 지닌 官僚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듯싶은 것이다.
이처럼 경종 원년의 전시과는 일원적인 기준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給田制 안에 당시의 지배계층 모두를 포괄하고 있고, 또 文·武兩班의 分立 및 官職序列에 의한 체계화 등의 양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경종 원년의 전시과 설정은 단순한 給田制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4. 成宗의 體制整備와 貴族社會의 형성

崔承老의 時務策

경종이 재위 6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즉위한 成宗은 前代王들의 경우와는 달리 주로 新羅 六頭品계통의 儒學者들을 중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들자면 崔承老인데, 그는 왕명에 응하여 28조에 달하는 疏文을 올렸다. 그것이 유명한 그의 時務策인데 그 대부분은 성종에게 採納되어 직접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었다. 말하자면 그가 올린 시무책은 성종대에 새로이 마련되는 국가체제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셈이었으며, 그만큼 당시의 정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큰 것이었다.
최승로의 上書文은 크게 5朝政積評과 時務 28조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는 먼저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朝의 정치에 대하여 잘잘못을 평가한 후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바의 정책방향이나 훌륭한 君主像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제시된 시무책 28조는 현재 22조만이 전해지고 있지마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그는 儒敎政治理念의 구현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는 中央集權的인 정치 형태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상주하는 外官을 파견할 것과(제7조) 지방의 豪右勢力을 억제해야 한다는(제17조) 건의에 잘 보이고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된 통치권력이어야 하며, 그것이 분산됨으로 해서 人民들이 괴로움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견해였다.
이처럼, 그는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강조하였고 또 그 최고권력자로 국왕을 지목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왕권이 지나치게 강대해져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광종과 같은 전제주의 군주에게 있어선 극력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그 대신 臣下들을 禮遇하며 넓은 포섭력을 가지고 아랫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유교적인 군왕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그가 말하는 유교적인 군왕은, 貴族官僚였으며, 요약컨대, 그는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 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주장했던 것이다.

지배체제의 정비와 貴族社會의 형성

成宗은 역대 왕들이 구축하여 놓은 기반 위에서 崔承老의 보필을 받아 왕권을 한층 안정된 위치로 올려 놓는 동시에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갔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때에 마련되는 官制에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고려시대 통치의 중핵이 되었던 中書門下省이 왕 원년과 2년에 걸쳐 성립된 데 이어서 尙書省과 관료의 秩序體系인 文散階 등이 모두 성종 당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종대에는 지방통제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왕 2년(982)에 주요 지역인 12牧에 상주하는 外官(地方官) 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으로 침투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지방의 豪族들은 재편되어 어떤 부류는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지만 여타의 대부분 인원은 종래의 독자적 지위를 상실하고 鄕吏로격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지배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먼저 크게 활약한 사람들은 위에서도 잠시 설명한 바 있는 儒學者들이었고, 다음 또 하나의 부류는 地方豪族系였으며, 한편, 開國功臣系도 또 다른 한 줄기로 포함되었다.
이처럼, 성종대는 內外官制의 성립과 함께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그것을 운영해 갈 신분층도 대략 자리를 잡아간 시기였다.
또한, 그러한 속에서 이들이 지향했던 바는 왕권과 지배신분층으로서의 귀족이 원만한 협조를 이루는 가운데 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貴族社會體制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