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주 후 삼국기의 사회변동

[신라육두품연구][려,라의 교체와 호족]


  羅 麗 의 교체와 호족

발제자 9445035 조형래,   9745006 김미나
참고문헌 박용운 , 1987 < 羅麗의 交替와 豪族> << 고려시대사 >>上 일지사

1.골품제도의 동요

진골귀족의 동요

번영을 자랑하던 신라도 중대말ㆍ하대초 이후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정치와 사회질서의 기본원리로 기능하던 골품제도가 모순을 드러내고, 그에 따라 진골귀족들이 분열 대립한 데다 6두품의 도전 등으로 사회에 동요ㆍ혼란이 야기된 때문이었다. 신라 중대는 무열왕통에 의한 왕권의 전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의 전제주의를 타도하려는 운동은 혜공왕때에 마침내 반란으로 폭발하였다. 혜공왕 4년(768)에 일어난 대공의 난은 전국의 96각간(족장)이 서로 싸우는 일찍이 보지 못한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 동안을 계속하였는데, 이는 경덕왕ㆍ혜공왕으로 표징되는 정치적 성격, 즉 중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나선 첫 봉화였다고 할 수 있다. 혜공왕이 살해되고 난 후 부터를 하대로 규정하는데, 하대의 신라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취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정치적 변혁과 더불어 왕계도 바뀌게 되었다. 중대를 이끌어 오던 무열왕계는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단절된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계속하여 원성왕계가 왕위를 이었다. 하대에 들어서면서 부활내물왕계와 원성왕계 사이에 왕위를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귀족연립적인 조류에 대한 반동이 왕계의 변동과 복합되어 나타난 김헌창의 봉기 등이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가는 가운데, 전제적인 왕권을 타도하는데 성공한 귀족들은 다시 상호간에 정권 탈취를 위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경제적인 부를 이용하여 사병을 양성하고 무력항쟁을 벌였다. 이제 왕위는 진골귀족들 내에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혈통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결정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신라사회는 하대에 들어와 골품제도에 모순이 나타나면서 진골귀족들이 분열, 대립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골품체제로 일컬어지는 신라의 정치와 사회 질서가 동요,붕괴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6두품의 도전

골품제도는 6두품의 도전을 받아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진골귀족 사이에 정권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그 바로 밑층의 6두품세력이 성장하여 골품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 때문이었다. 6두품은 진골 다음가는 귀족신분이었지만 관등과 관직 등에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17관등 중에서 제 6위인 아찬까지밖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이와같은 제약 속에서 진골귀족에 대한 반감과 골품체제에 대한 불만이 6두품계층 사이에서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대에 들어와 상황이 바뀌면서 6두품귀족들은 골품제 자체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와같은 움직임은 6두품계열의 자제들이 많았던 도당유학생들에게서 뚜렷이 보이고 있다. 그들이 당에서 수학한 교육내용은 반골품제적이었고 과거제에 입각한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과 유교적인 정치이념 등이었다. 이들의 진골귀족에 대한 반발심이 커가는 가운데 골품제도의 동요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나ㆍ여의 교체가 이루어질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2.대토지 겸병과 전장의 확대

녹읍과 전장제의 문란

신라의 귀족들은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는 보수ㆍ대가로 녹읍을 지급받고 있었다. 녹읍제는 토지뿐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징발권까지 부여하는 고대적인 지배양식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당시 귀족관료들의 권한이 매우 컸다는 사실은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같은 신라의 토지지배관계가 하대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크게 문란하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귀족의 사적인 대토지소유를 의미하는 전장이 확대되어간 것이 그러했다.전장은 본래부터 불수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앙의 통제력이 헤이해져 촌락을 완전히 장악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전장은 불법적으로 나라의 공과 공부를 부담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이와같은 국가 재정의 궁핍은 호족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각기 자기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난국을 수습할 수 없었던 신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사원의 전장소유

사원도 대토지를 소유하여 전장경영의 한 중심이 되고 있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로 왕실과 귀족들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면서 많은 전지와 노비를 기진받아 사원이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성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곧 국가의 경제에 큰 페단을 끼쳤다. 그럼에도 사원경제는 이후 계속 비대해져 갔다. 이처럼 하대의 사원들이 대토지겸병을 함으로써 토지지배질서를 문란케 하고 재정을 고갈시켜 역시 신라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3.호족의 등장

신라 하대의 혼란은 지방세력가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재지지배세력을 우리는 흔히들 호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호족의 등장에 따라 이제 신라의 역사무대는 중앙에서부터 지방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해상세력가의 성장

삼국을 통일한 이후의 신라는 산업의 발달과 조선술의 진전 등으로 대외무역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지방세력은 자기들의 중요한 활동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았다. 이들은 당 및 일본과 성히 교역하여 대상인으로 성장하여 갔다. 신라인들의 활발한 해외 진출에 따라 당의 산동반도나 강소성같은 곳에는 그들의 집단거류지가 생겨 신라방이라 불리어졌다. 여기에는 신라소라는 자치행정기관이 설치되었고, 또 신라원이라는 사원도 세워져 있었다.
당시 해상세력가로 두각을 나타낸 대표적 인물은 장보고였다.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다음 사병의 성격을 지닌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해적을 소탕한 후 당 및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명실공히 황해의 왕자가 되었었다.이와 같은 지방세력의 성장은 신라의 집권체제에 큰 위협이 되었다.

군진세력의 대두

군진은 본래 신라가 국경의 수비를 위해 변경지대에 설치한 군영을 말하는데, 해상세력이 발달하게 되면서 해적들이 일어나 횡행이 심해지자 군진을 해안의 요지에도 설치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이었다. 청해진 세력은 마침내 중앙정부와의 대결을 시도하다가 일개 군진세력으로서는 한계가 있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청해진이나 마찬가지 위치에 있었던 다른 여러 군진들은 지방세력가들에게 군사적인 힘을 제공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크게 활약한 인물들 중 패강진 출신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城主·將軍의 自立

신라는 지방에서 代를 이어가며 지배적 지위를 누리는 유력자들이 있었다. 그 대부분은 郡縣의 행정체계 밑에서 村落民을 통제하는 구실을 담당해 온 村主層이었다.이들은 관료는 아니지만 鄕村에서 상당한 권세를 부릴 수 있는 토호세력이었다.
지방의 유력자들 중에는 몰락해 내려간 中央貴族 출신이 또한 한 부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中央貴族 가온데는 眞骨도 있었지만 6頭品 출신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지방세력은 下代의 혼란기에 처하여 각기 중앙 정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립할 태세를 취하였다.
이와 함께 郡太守나 縣令등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있던 관리들도 스스로 독립하여 자신의 세력권을 형성해 가게 되었다. 그들은 城主혹은 將軍이라고도 칭하였다.
羅末 후삼국의 사회는 흔히 호족으로 불리는 이들 지방세력가들이 離合集散과 상호 다툼을 거듭하는 가운데 야기된 大動亂期였다.
호족들은 한정된 범위이긴하지만 자기의 세력권 내에서는 王者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앙정부에 비견될 만한 행정조직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적·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었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도 세력의 크기에 따라 大豪族과 中小豪族으로 구분이 가능했고 지역에 따른 차이를 상정 할 수 있다. 때문에 장군을 칭할 정도의 대호족과 大監·弟監등으로 일컬어진 중소호족과를 支配·服屬 관계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대호족과 더불어 중소호족들도 각기 독자적인 통치기구를 갖고 있었으므로 양자는 지배·복속 관계만이 아니라 그 실 내용상으로는 상호의존적인 면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어 일정치는 않다.

4. 農民의 蜂起

農民蜂起의 發端

신라의 골품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을 즐겼지만 농민들은 평소에도 租稅와 貢賦·力役등의 과중한 부담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下代의 농민들은 점차 몰락해갔다.
그런데 정부는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농민들에게 더 부담을 지움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진성여왕대는 그의 失政으로 정치기강이 문란하였고 더불어 재정난도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국이 州郡에 貢賦를 독촉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흉년과 전염병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농민들은 貢賦의 독촉을 계기로 전국적인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農民蜂起의 展開

沙伐州(尙州) 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견훤과 궁예의 양대 세력에 의하여 전국이 신라와 함께 三分되면서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갔다. 즉, 견훤은 완산주를 근거로 삼고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 아래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眞聖女王6년, 892), 궁예는 송악(개성)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구실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孝恭王 5년, 901)신라와 더불어 鼎立의형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를 우리는 後三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후삼국의 지도자는 모두 뚜렸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를 몰락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는 크게 작용하였으나 그후 어떠한 질서를 수립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렸한 이념과 목표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양자는 모두 專制君主로 화하여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 자신 호족출신으로서 궁예밑에서 몸을 일으켜 덕망을 쌓은 王建이 諸將의 추대를 받아 새로이 高麗를 열므로서(景明王 2년, 918)이후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되었다.

5. 禪宗과風水地理設의 盛行

禪宗의 盛行

下代의 신라는 전통적 불교 교파인 敎宗에 반발한 禪宗이 일어나 큰 시련을 겪었다. 화엄종을 대표로하는 敎宗은 소의경전은 주로하는 敎學佛敎였다. 그것은 王卽佛의 사상이나 인과응보설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사상 등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조하고 골품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는데 이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히 경주 중심이 되었고 일반백성들과 유리되어 갔으며 나아가서 난해한 이론에만 치우치는 경향을 띠게되었다.
禪宗은 이와같은 敎宗의 폐단에 대한 반발겸 극복을 위해 일어난 것이다.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坐禪을 통해 心性을 도야함으로써 각자의 마음속에 自在하는 佛性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禪宗은 자연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禪宗의 등장이란 교학불교의 권위와 그가 딛고 선 절대 왕권에 대한 부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禪宗은 지방의 호족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컸다.
禪宗은 9세기초 선덕왕때 도의가 가지산문을 개장한 이후 이른바 9산이 성립하면서 호족들로 부터 큰 환영과 함께 지원을 받았다. 대부분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禪宗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중앙집권적 체제에 반항하여 일어난 호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호족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처럼 신라 下代에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전환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하겠다.

風水地理設의 전파

羅末 호족들의 대두와 함께 널리 전파된사상으로 또 風水地理設이 있었다. 이는 산세와 수세를 살펴 都邑·住宅·陵墓등을 선정하는 일종의 相地學으로써 지리에는 쇠왕과 순역이 있는데 旺處,順處는 明堂을 택하여 陽基(도읍·주택)나 陰宅(능묘)으로 잡으면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수 있는 반면, 衰處·逆處의 경우는 불행을 가져다 준다는 설명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풍수가들은 그와 같은 명당으로 「장풍득수」의 땅, 그 와 정반대인 경우에는 寺搭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비보사탑설 같은 것도 나오게 되었다.
羅末에 이 풍수지리설을 크게 선양한 이는 道詵이었다. 원래 그는 禪宗 9산중의 하나인 동리산파에 속한 禪僧이었는데 風水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전국을 다니며 山水의 쇠왕과 순역을 점쳤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각지의 호족들은 저마다 자기의 근거지를 명당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호족으로서의 존재를 합리화 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당시의 풍수지리설은 禪宗과 함께 호족세력과 결부되어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