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주 후 삼국기의 사회변동

[신라육두품연구][려,라의 교체와 호족]


新羅 六頭品 硏究

발제자

9745019 류현주, 9745038 하지희

참고문헌

이기백<신라 육두품 연구><<신라정치사회사연구>>

1. 머 리 말

新羅에 骨品制라고 흔히 불리고 있는 엄격한 世襲的 身分制가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骨品制는 원래 聖骨과 眞骨의 두 骨과 六頭品∼一頭品의 여섯 頭品의 8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뒤에 聖骨이 소멸되고 三∼一頭品은 平人 혹은 百姓이라 불리며 그 세분된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 결과로 眞骨ㆍ六頭品ㆍ五頭品ㆍ四頭品ㆍ平人의 5등급으로 정리되게 되었다. 이 5등급 혹은 8등급의 身分은 그 등급에 따라서 위의 色服(색복)ㆍ車騎(차기)ㆍ器用(기용)ㆍ居舍(거사) 등에 대한 세밀한 規正이 있었던 것에도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여러 가지 特權과 制約이 가해져 있었다.
骨品制에서 가장 높은 身分層을 이루고 있는 聖骨과 眞骨은 王族 및 王妃族인 것이며, 新羅의 支配勢力(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2. 骨品制와 六頭品

이 章에서는 六頭品硏究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骨品制의 여러 身分層속에서 六頭品이 차지하는 位置에 대한 規定들을 먼저 알아 보기로 하겠다.
眞骨은 王族인 金氏와 王妃族인 朴氏가 主軸(주축)이 되고 있었고, 이들이 排他的(배타적)으로 政權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여기에 舊金官伽倻王族과 舊高句麗王族이 끼는 정도였으나, 그 勢力이 미약하였다. 대개 피라밋型을 이루었을 骨品制의 構造上(구조상) 六頭品에는 眞骨보다 많은 家門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王族과 王妃族이 眞骨로 고정되어 있는 骨品制下에서 六頭品은 王은 물론이고 王妃도 될 수가 없는 신분 층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예 眞骨과의 結婚對象(결혼대상)에서 제외된 신분 층이었다.
骨品制에 있어서의 六頭品의 位置를 말하여 주는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官等 및 官職에 일정한 制約이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六頭品은 新羅의 17官等 중에서 제 6 위인 阿瑗(아찬)에까지밖에 오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眞骨이 제 5 위 大阿飡이상 제 1 위 이벌찬까지도 오를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심한 제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六頭品보다 낮은 五頭品은 제 10 위인 大奈麻(대나마) 이상으로 오를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제 9 위 級瑗(급찬)으로부터 제 6 위 阿瑗까지는 五頭品 이하의 신분층보다 六頭品이 누릴 수 있는 特權(특권)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級瑗(급찬)에서 阿瑗(아찬)까지의 관등은 六頭品의 독점인 것이 아니라 眞骨도 되는 것이다. 六頭品으로 볼 때에는 級瑗(급찬) 이상으로 오를 수 있는 특권보다도 阿瑗(아찬) 이상으로 진급이 허락되지 않는 데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이아니었던가 싶다.
이러한 관등에 따르는 특권과 제약은 관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관직은 관등에 기준을 두고 임명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中央의 部ㆍ府의 長官職은 大阿飡 이상만이 임명되도록 함으로써 결국 眞骨 身分에 한하도록 규정되어, 六頭品은 기껏해야 執事部(집사부) 侍郞(시랑)이나 部ㆍ府의 卿 등 次官職에 오를 수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한편 卿은 級瑗 이상이어야 임명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五頭品 이하는 바랄 수 없는 官職인 것이다. 그러므로 六頭品은 이 官職 면에 있어서도 官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상응하는 일정한 특권과 제약 밑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점은 군사조직 면에서 幢(당) 停(정)의 獨立部隊 指揮官(독립부대 지휘관)인 將軍(장군)이 眞骨의 독점이었던 점에도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骨品制에 포함되는 것은 王京人에 한하는 것이고 따라서 六頭品도 王京人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骨品에 따라서 주어지는 官等은 京位로 되어 있다. 그런데 京位는 王京人에 한하여 주어지는 것이며, 거기에 小京人이 첨가되는 정도였다. 그 밖의 모든 地方人은 京位와는 체계를 달리하는 外位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京位를 가진 사람만이 中央官職에 임명되는 것으므로, 新羅 王京人은 말하자면 일종의 支配者集團(지배자집단)인 셈이다.

3. 六頭品 소속의 家門

비록 聖骨이나 眞骨보다는 처지지만 그래도 얻기 어려운 貴姓인 六頭品에 속하는 家門에는 어떠한 性氏들이 있었을까. 비록 數的으로는 적더라도 이 代表的인 家門들에 대한 고찰은 六頭品의 社會的인 性格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a) 薛 氏

薛氏로서 沙瑗 과 阿瑗의 관등을 가졌는데 즉 薛烏儒(설오유)는 沙瑗(사찬), 薛秀眞(설수진)은 阿瑗으로 되어 있어서 그들이 六頭品이거나 眞骨임을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 薛氏가 六頭品이었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薛氏중에는 출중한 인물이 많았는데 新羅 최초의 花郞으로 되어 있는 薛原郞(설원랑)과 高僧 원효, 그리고 원효의 아들 설총이 유명하다.

(b) 任那後孫

强首(강수)는 中原京人이었다. 그러면서 强首나 그의 父 昔諦(석제)가 모두 京位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小京人은 準 王京人(준 왕경인)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던 실정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强首의 官等이 沙瑗(사찬)에 이르고 있음은 그가 六頭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家門은 强首 자신의 증언으로서 任那伽倻 출신인 것이 분명하다. 被征服國民(피정복국민)을 王京에 데려가기도 하지만 한편 小京에 居住케 하기도 하였음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다. 그가 六頭品으로 편입된 것은 任那伽倻의 王族이거나 적어도 최고귀족이었을 것임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c) 李 氏

李純(이순)이 大奈舊(대나구)의 官等으로 退仕(퇴사)한 점에 비추어서 그가 五頭品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하였으나, 李儒(이유)가 六頭品이 아니면 취임할 수 없는 司賓京(사빈경)이었던 사실에 비추어서 李氏도 六頭品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d) 崔 氏

崔氏가 社會的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崔雄(최웅)부터가 아니었던가 한다. 崔雄은 金憲昌亂(김헌창란) 때에 크게 공헌한 人物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崔氏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社會的으로 頭角(두각)을 나타내기는 이로부터 이후인 듯하다. 崔氏 중에서 留唐學生에 끼인 人物들을 위시하여 많은 崔氏가 그 이후에 비로소 등장하여 대체로 崔氏의 세력은 新羅 末期에 크게 떨치고 있었다.

(e) 張 氏

張氏로서 가장 유명한 人物은 淸海鎭大使(청해진대사)였던 張保考(장보고)이며, 그의 幕下에(막하)는 張弁(장변)ㆍ張建榮(장건영) 등의 武將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中央貴族으로서 六頭品이었는지 의문이다. 장보고는 海島人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장변과 장건영은 장보고의 一族이었음직하다. 張氏로서 六頭品이었다고 생각되는 첫 人物로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張雄(장웅)이다.
그는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中央軍의 先發部隧長이(선발부수장)이었으며 京位는 一吉飡이었다. 그리고 景哀王(경애왕) 때 後唐에 朝貢하러간 張芬(장분)도 역시 六頭品이었다고 생각된다.

(f) 金 氏

新羅時代에 金氏라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가 동일한 氏族은 아니었으며 新羅의 王族뿐 아니라 金官伽倻 王族의 後孫이나 高句麗王族 安勝(안승)도 金氏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眞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六頭品인 金氏도 또한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것이 金範淸과(김범청)과 朗慧和尙의(낭혜화상) 父子인 것이다. 範淸은 武烈王의 後孫이면서도 어떠한 이유로 해서 六頭品으로 降等(강등)되었고, 그 子 朗慧和尙도 따라서 六頭品임을 알 수가 있다. 이밖에 金言과 金堅其(김견기)또한 六頭品이었눈데 이는 三重阿瑗과 重阿瑗이란 그들의 官等으로 짐작할 수 있다.

(g) 高句麗 및 百濟의 舊貴族

新羅가 百濟와 高句麗를 멸망시킨 뒤에 그 貴族官吏들에 대하여 행한 處遇 規定에 의하면 高句麗人으로서는 六頭品으로 편입된 사람이 있으나 百濟人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新羅가 高句麗와 百濟를 멸한 뒤에 그 貴族 중 일부에게 京位를 주어 骨品制에 편입시킨 것은 新羅의 骨品制 전반 혹은 六頭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육성(六姓)과 육두품

이 장에서는 우선 그 출자나 성씨가 확실치 않으면서도 육두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중요한 두 인물, 여삼(餘三)과 녹진(祿眞)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자 한다.
먼저 祿眞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녹진은 姓과 字가 자세하지 않다. 부(父)는 수봉일길찬(秀奉一吉瑗)이다. 녹진은 23세에 시사(始仕)하여 내외관을 두루 거치고 헌덕대왕 10년 무술(戊戌)에 집사시랑(執事侍郞)이 되었다. (중략) 뒤에 태천주도독(態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반(叛)하매 왕이 군사를 들어 이를 쳤는데, 녹진이 공이 있어 왕이 대아찬(大阿瑗)의 위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三國史記 45, 祿眞傳)

이에 의하면 그의 관직은 집사시랑으로 되어 있고 아마 관등은 아찬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뒤에 공이 있어 대아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대아찬이 진골만이 받을수 있는 관등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그는 육두품이었을 것이다.
여삼은 선덕왕때의 인물로 원성왕의 해몽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원성왕과의 관계는 녹진과 충공 각간(忠恭 角干)과의 관계를 방불케 하는 것이어서 감히 그를 육두품으로 추정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인물은 모두 그 성씨를 모르며, 따라서 혹은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문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외의 육두품 가문이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 것으로 주목될 수 있는 것이 육촌(六村) 혹은 육부(六部)에 주어졌다고 전하는 육성인 것이다. 육성은 이(李)·정(鄭)·최(崔)·손(孫)·배(裵)·설(薛)이며 이(李)·최(崔)·배(裵)외의 나머지 삼성(三姓)을 검토해보겠다.

우선 정씨의 구체적인 인물로는 정공(鄭恭)과 정년(鄭年)이 있다.

다음의 손씨의 구체적인 인물로는 흥덕왕대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어린애를 묻으려고 했다는 모량이인(牟梁里人) 손순(孫順)이 있다.

끝으로 배씨가 있는데, 배씨에 속하는 인물로는 배훤백(裵萱伯)이 있는데 그는 흥덕왕이 돌아간 뒤의 왕위쟁탈전에서 제륭(悌隆)의 일파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육성을 통틀어 전반적으로 고찰한다면 희미하나마 어떤 결론이 얻어질 것이 아닌가 한다. 원래 육성은 유리왕 9년에 육촌이 육부로 개편될 때에 국가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가문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더라도 성을 가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였을 것이다. 육성의 가문이 성을 일컫게 된 것은 앞뒤의 차이는 있으나 그 사회적 세력이 성장한 뒤의 일일 것임이 분명하다. 또 육성을 일괄해서 육부와 연결시켜 생각한 것은 그들 모두 의 세력이 더불어 큰 사회적 비중을 차지한 뒤의 일일 것이다. 육성 가문의 세력이 더불어 커진 시기는 위에서 살핀 바로는 신라 하대였다. 그러므로 육부와 육성을 결합시켜 생각하게 된 것은 하대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게끔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육두품인 육성이 육부와 연결지어진 것이 신라 하대의 일이었음이 드러났다고 해도 의문이 모두 풀린 것이 아닐 것인데 육두품으로서의 사회적 성장을 뒷받침해주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육성을 형성하는 방법만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성과 육부가 결합되기 이전에 육촌전설(六村傳說)이 있어 왔으며, 그것이 육두품과 관련을 맺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던 때문이었다고 추측되는 것이다. 사실 사로부족(斯盧部族)을 형성하고 있던 씨족장가족(氏族長家族)이 왕족인 진골 바로 밑의 신분층으로 편입될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육두품 신분의 기본이 되는 요소는 사로부족을 형성한 씨족장가족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내게 한다. 여기에 사로부족이 밖으로 팽창해나가는 과정에서 병합한 부족가족의 지배자들이 첨가되어 나갔을 것이다. 거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의 경우와 같이 이미 귀족국가로 성장했던 나라의 상류귀족이 이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한편 또 진골이 강등되어 육두품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육두품의 유래에 대한 이러한 모든 사정은 육두품이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신분적인 특권과 제약을 가져온 배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5.육두품 귀족의 활동

이번 장에서는 육두품 귀족이 주어진 신분적 상황 속에서 어떠한 사회적 활동을 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 특출했다는 것이다. 원광(圓光)이나 원효(元曉)의 이름만 들어도 이 점은 납득이 가리라고 믿는다. 신라말기의 선종이 또한 육두품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선종은 지방의 호족과 결합하여 중앙귀족에 반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에 육두품이 가담하고 있는 것은 퍽 흥미있는 현상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다음은 학문적인 면에서의 육두품 진출을 주목해야 하겠다. 신라에서 유학자라는 이름을 들을 만한 인물을 들자면 아무래도 강수(强首)와 설총(薛聰)을 먼저 들어야 하겠는데, 이들이 모두 육두품이었다. 그리고 시대가 뒤로 처지면 최치원 등 많은 유당학생(留唐學生) 출신들의 학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육두품 출신이 정치적으로 진출하는 경우에는 이 학문의 길을 통하여서였던 것이다. 골품제의 제약 밑에서 일정한 관직을 획득하기 위하여는 학문이 가장 안성마춤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령 강수의 예가 이를 잘 말하여 주고 있으며 설총의 경우는 그의 유학적 정치이념으로 인하여 출세한 것이다. 그의 유명한 풍왕서(諷王書)는 도덕적인 이념이 정치에 필요한 것을 비유(譬諭)로 말한 것이다. 이를 듣고 신문왕은,

그대의 우언(寓言)은 진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부디 이를 글로 써서 왕자(王者)의 계(戒)로 삼게 하라(三國史記 46, 薛聰傳)

고하여 그를 높이 등용하였다고 한다.
국왕에 대한 도덕적 충고의 예로는 이순, 여삼, 김경신이 있으며 녹진의 경우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육두품 귀족이 학문에 근거하여 정치적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의 하나는 그들이 집사시랑의 관직을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점이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5·6명 정도의 집사시랑 중에서 3명이 육두품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육두품이 학문을 통해서 관직으로 진출하는 길은 국학과 독서삼품과가 설치됨으로 해서 더욱 촉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더듬어오고 보면 육두품은 정치적 출세를 위하여 왕권과 결탁하였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육두품의 반발은 왕권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골 귀족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예시한 육두품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모두 왕국의 총애를 받은 인물들이거나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렇게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집사부란 것이 그러한 왕권과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구실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 말기가 되면 골품제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육두품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말기의 육두품 출신 학자들의 동향은 대체로 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육두품 귀족들의 반발이 노출하게 된 것은 신라 중대의 전제주의가 무너진 이후 진골 귀족들의 세력이 다시 대두하여 중앙의 정치무대에 골품제의 여러 모순이 나타나는데 대한 비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사회적 력량(力量)에 대한 자각이 컸다는 것도 잊어선 않되며 이와 동시에 당에 유학(留學)하는 경향이 늘어나서 그들이 당의 과거제에 의한 입신출세의 법을 스스로 보고 경험한 바가 있었던 사실이 또 하나의 자극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육두품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뒤 고려왕조에서 새로운 관료로 등용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제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중앙의 최고귀족이 되어 그들의 학문에 바탕을 둔 정치이념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6.맺는말

이상은 신라사회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밝혀 보려는 목적으로 씌어졌으며, 골품제를 전반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그 중의 한 신분층인 육두품만을 문제삼아 보았다.
먼저 골품제에 있어서의 위치를 살펴보고, 그 결론을 토대로 신라사에 나타나는 육두품 귀족의 가문을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비록 가문은 분명하지 않더라고 육두품일 것으로 생각되는 개인들도 이를 문제삼아 보았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골품제와 같이 뚜렷한 신분제가 그리 흔한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고대로 올라가면 신분제가 차지하는 사회적 비중은 큰 것이다. 사실 골품제를 올바로 이해함이 없이는 신라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본장은 이 골품제의 해명을 위한 조그마한 연구에 지나지 않지만, 보다 새로운 각도에서 이 골품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자극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