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주 중세사회 이행과 관련한 제문제

[남북국시대의 지배체제와 정치][삼국과 남북국의 사회성격]


삼국과 남북국의 사회성격

발제자

9745029 이정숙, 9745004 김나영

참고자료

한국사3 (한길사-주보돈)

 

1. 삼국사회의 형성과 구조

1. 삼국의 형성과 발전

1) 삼국의 형성을 보는 시각

고대국가는 모름지기 원시공동체의 해체 결과로 발생한 계급관계 위에서 출현한 정치적 사회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삼국과 가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두 원시공동체에서 분화한 소국을 모태로 삼아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고구려·백제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차례로 건국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삼국지』위서 동이전은 삼국의 형성시기와 발전정도를 다르게 기술하였다. 고구려의 형성과 발전이 가장 빨랐으며, 백제와 신라는 기원후 2,3세기까지도 마한의 백제국과 진한의 사로국과 같이 소국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서술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삼국의 국가형성을 보는 시각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드러났다. 그러한 시각차는 결국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대한 신빙성 여부에 기인한 것이었다. 일제시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상한연대를 낮추어 보려는 식민사학의 논리에 입각하여 『삼국지』의 내용에 보다 더 사료적인 가치를 두었다.
반면에 한국인 학자들은 삼국에 선행한 소국을 고전적인 국가기원론에 입각하여 원시부족국가로 규정함으로써 삼국형성이 갖는 역사적 계기성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나중에 부족국가-부족연맹-고대국가의 발전단계론이 성립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고대국가의 발전단계론이 고고학에서의 발굴 성과와 인류학이론의 도입에 따라 부족국가론이 갖는 용어와 개념의 적합성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고대국가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새로운 논의는 두 방향에서 이루어 졌다.

하나는 성읍국가론의 제안이었다. 이 경우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발전은 성읍국가-영역국가-고대제국의 단계를 경과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읍국가론은 성읍국가-연맹왕국-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단계론으로 다시 정리되기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신진화 주의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군장사회설의 수용이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고대국가의 출현에 이르는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은 군집-부족-군장사회-초기국가의 단계를 거친 것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에서 종래 부족국가로 이해하던 소국이 바로 군장사회에 해당된다. 군장사회설은 군장사회-초기국가-고대국가의 발전단계론으로 다시 정리되어 한국사의 서술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논의 가운데 성읍국가론은 고고학적 입장에서 성읍의 실재 여부와 국가의 외형적 요인을 강조한데 따른 내부구조에 대한 해명의 미흡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군장사회설은 족장, 추장, 추방사회와 같은 다양한 번역 용어와 아울러 적용시기 및 대상의 불일치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같이 국가형성에 관한 두 방향의 논의에서 제기된 차이점과 문제점은 결국 소국에 대한 성격규정과 소국으로부터 고대국가로의 이행을 보는 기본관점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삼국에 선행한 소국은 원시공동체의 유제가 잔존하는 다른 한편으로 미약한 계급관계가 발생한 새로운 사회이기는 하지만, 아직 국가의 단계로 규정하기에는 미숙한 그야말로 소국공동체일 따름이었다. 이런 소국이 고대국가로 전환하는 방법은 교역 또는 전쟁을 통한 소국간의 통합작용이었다. 삼국의 경우 교역에 의한 통합도 물론 있었겠지만 전쟁의 기능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삼국은 소국에 대한 부단한 통합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국가형성에 필요한 영역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제 고대국가를 형성한 삼국은 그들만의 건국신화를 갖게 되었다. 건국신화의 유무는 해당사회의 국가성립여부를 가름하는 하나의 지표이며, 여기에는 건국에 관한 사실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런 신화 구조는 바로 선진문화를 보유한 유이족이 후진문화의 토착족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치적 사회를 성립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2) 삼국발전의 두 방향

삼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길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국가존립의 토대로서 토지와 인민이 결합된 통치영역을 확장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삼국사회의 발전은 귀족중심의 합의체제를 거쳐 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삼국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문화배경 속에서 정치적 사회를 성립시켰기 때문에 발전과정에서 공간적으로 유사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삼국은 선진문화의 수용시기와 사회경제적 조건의 차이로 말미암아 발전단계에서는 시간적인 차별성이 드러났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국가형성단계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삼국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일정하게 살필수 있다.
우선 삼국의 국가형성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주변의 소국에 대한 통합의 전개와 지배체제의 미숙성이다. 원시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많은 소국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소국이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같은 조건에 있던 다른 소국을 병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로써 소국의 상태에 있던 삼국은 모두 소국적 질서로부터 탈피하여 고대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양적변화가 일어났다.

삼국은 복속된 소국에 대해 정치적 자치는 인정한 반면 경제적 공납과 군사적 동원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같은 간접지배의 방법은 직접지배를 관철시킬수 있는 국가적 역량이 부족한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아직 지배체제의 질적 변화를 유도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삼국의 국가발전단계에서 보이는 특징은 형성기 이래 영역확장의 지속과 그에 상응하는 지배체제의 정비이다. 삼국은 발전기에도 부단히 영역확장을 도모하였다.
삼국의 발전단계에 있었던 정복전쟁은 삼국사이에 끼여 있던 소규모의 정치세력을 흡수함으로써 국가발전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더욱 확대하고 삼국이 정립할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였다. 이런 영역발전은 체제정비의 필요조건이 되었다. 고대국가의 발전기에 이루어진 지배체제의 정비는 정치구조 내부에서 귀족합의체제의 운영에 필요한 귀족회의체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왕의 위상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끝으로 국가완성단계에서 삼국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각축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삼국에서는 국가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왕집권체제를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통치규범으로서의 율령과 지배 이념인 불교의 수용으로 집약되었다. 율령의 반포는 귀족 합의의 전통이 온존된 관습법 체제를 극복하고, 왕집권의 통치를 뒷받침할 성문법체제로의 지향을 의미하였다. 불교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의 확립에 알맞는 지배이념의 수용이었다.
국가완성단계에서의 정복전쟁은 종래 귀족세력의 이익에 기여하던 것과는 달리 오로지 왕에 의하여 추진된 왕토확장전쟁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이같이 통치영역과 지배체제의 두 방향에서 단계적으로 발전한 삼국은 마침내 왕 중심의 집권쁁제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귀족회의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삼국의 완성단계에서 왕은 귀족세력을 행정관부의 관료로 임명하는 통치의 주체로 전환함으로써 대왕과 같은 호칭을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거나 역사를 편찬하였다.

2. 삼국사회의 구조와 성격

1) 삼국의 사회·경제구조

삼국은 나라 나름의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서로 특색있는 발전이 불가피하였고, 더구나 발전과정에서는 상당한 시차가 있었던 까닭에 정확한 구조의 해명과 일률적인 성격규정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만 삼국이 기본적으로 유사한 조건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성격의 사회구조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적지 않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같이 삼국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는 시각은 크게 고대사회론과 중세사회론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 원인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이 삼국사회에 관철되면서 나타난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삼국의 정치·이념구조

고대사회에서 정치와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크다. 전쟁이 고대 정치의 핵심이었고, 고대사회의 이념은 제사의 형식으로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은 효율적인 통치를 담보하기 위해 여러 부문에 걸친 지배기구를 편성하였다.
삼국시대의 정치구조에 대해서는 대체로 상부구조의 내부에서 두 경향이 병존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씨족 회의체의 유제를 이어받은 귀족합의체제의 유지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완성단계에서 확립하는 왕집권체제로의 지향이다. 삼국시대라는 한정된 시간속에서 어느 체제가 지배적인 경향이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삼국사회의 정치구조를 해명하는 관건이 될 수 있다.
삼국은 국가형성 이후 소국의 수장 출신인 왕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발전단계에 따라 왕권의 위상은 달라졌다. 그러한 편차는 거듭된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왕권의 번영이었으며, 마침내 왕 중심의 집권체제의 완비로 귀결되었다. 이런 체제가 수립되기 이전에 정치권력의 중심은 아마도 귀족회의체제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귀족회의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정치구조에서 일찍이 출현한 이래 그러한 정치체제가 공간적으로 확산된 결과 삼국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제솔회의, 그리고 신라의 제간회의는 바로 그러한 귀족회의체였다. 그 귀족세력은 대토지와 노예소유자로서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의장을 선출하였다.
이러한 의장은 권력관계에서도 왕에 버금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관등과 관직이 미분화돤 상태에서 직능에 따라 군국사무를 담당하는 통치의 실질적인 주체였다. 삼국의 중요한 정치적 사안은 왕위계승후보와 전쟁수행 여부의 결정이었는데 귀족회의체의 의사가 관철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이 국가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귀족회의와 그 의장의 위상도 변하지 않을수 없었다. 왕 중심의 집권체에서의 특징은 관등과 관직의 분화이다. 이로써 귀족회의의 기능 축소와 아울러 의장의 권능이 약화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정치구조의 변동양상은 이념구조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그것은 토착신앙에서 지배층에 의한 불교의 수용으로 변화하였다.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관념체계는 토착신앙이었으며 그 본질은 샤머니즘이었다.
이런 토착신앙은 불교가 수용되기 전까지 지배 이념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였는데, 제사의례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삼국사회의 발전으로 인하여 분화과정에 있던 사회의 계급화 현상과 표리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먼저 삼국은 모두 천지신신앙에 입각한 제사의례를 거행했다. 고구려의 동맹이 그 대표적인데 10월에 천신으로서의 동명과 아울러 지신으로서의 수신에 대하 제의를 거행하였다.
다음으로 삼국은 조상신신앙에 입각하여 시조묘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다. 삼국의 시조는 천신과 지신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인격신으로 관념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왕의 제의 주재도 당연한 것이었다.
삼국시대 왕의 천지신과 시조묘에 대한 제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의시기와 그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제의를 거행한 해가 대부분 즉위 초년이라는 사실은 천손의 후예로서 왕위를 계승한 정통성을 천명하려는 즉위의례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제의를 실시한 달이 1,2월을 비롯하여 특정한 달에 집중된 사실은 농경사회에서 기풍제와 수확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후속조치로 취해진 관리임명, 사면실시, 인민관리등은 모두 사회적 갈 등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회의 상부구조에서 토착신앙이 갖는 지배이념으로서의 기능을 입증해주는 셈이다.
삼국의 정치구조가 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지향함에 따라 토착신앙의 통치이념성은 한계에 이르렀다. 이에 삼국시대의 왕은 고유의 토착신앙을 견지하고 있던 귀족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 단위의 통치이념으로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러므로 불교는 왕권의 초월화와 정복전쟁의 합리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결국 토착신앙에서 불교로의 지배이념의 변화는 제사장적 성격을 탈각하지 못한 채 군림하던 왕이 통치하는 대왕으로 전환하는 정치과정의 관념형태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3. 삼국사회의 구조변동

1) 삼국완성단계의 정치과정

삼국의 국가완성단계에서 주목되는 정치현상은 왕집권체제의 확립으로 인한 귀족세력과의 갈등이었다. 삼국이 고대국가를 완성함으로써 야기된 왕권의 강화 추세와 전쟁의 성격 변화는 확대된 귀족세력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과 대립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기성귀족세력은 귀족합의체제를 옹호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반면에 신진귀족세력은 새로운 왕 집권체제에 편승함으로써 세력기반을 확보하고자 도모하였다.
귀족세력간의 왕위쟁탈전이라는 공통성은 종래 귀족세력의 합의에 의해 왕위계승의 후보를 추대하던 관행과는 사뭇 다른 정치현상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에 대왕 호칭의 사용과 대대로제의 실시로 상징되는 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완성하였다. 이런 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완성하면서 왕위계승과정에서 귀족세력간의 심각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이런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분열양상을 보인 귀족세력의 실체이다. 그 하나는 기성귀족세력이고, 또 하나는 신진귀족세력이다. 이 두 계열의 귀족세력은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번갈아 장악하였으며 그들의 권한은 오히려 왕권을 능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정치구조를 귀족연립체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정변은 왕집권체제하에서 성립된 귀족연립체제를 종식시키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고구려의 대회정책이 강경과 온건의 혼선을 빚는 가운데 신진귀족출신으로 집권한 연개소문은 기성귀족세력에 대한 숙청과 도교의 수용을 통해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백제에서 왕 중심의 집권체제는 근초고왕대에 대왕의식의 맹아와 지지왕대에 상좌평제의 실시를 거쳐 개로왕대에 대왕제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침류왕 이후 진사왕과 아신왕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귀족세력의 숙청과 유교사상의 강조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할수 있었다.
신라에서 왕 중심의 집권체제는 법흥왕대에 상대등제의 실시와 대왕 칭호의 사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진평왕대에 주요한 행정관부의 설치를 통하여 마무리되었다. 이같은 왕권강화의 추세에 대하여 기존의 귀족세력은 귀족합의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왕집권체제로의 지향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는데, 두 세력의 권력투쟁도 역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표출되었다.
삼국이 왕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드러나기 시작한 권력투쟁은 정치구조의 변동결과이다. 결국 고대사회 말기의 왕위쟁탈전은 삼국사회의 권력구조에서 기인하는 바이지만,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기본구조로 삼는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소용돌이였던 것이다.

2) 삼국 말기의 동아시아 정세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이루었을 때 전쟁은 종래의 전쟁과 달리 강화된 왕권의 통치공간을 배타적으로 확장함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대규모의 총력전으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삼국간에 있었던 세력각축전의 본질은 왕을 위한 전쟁이었으므로 귀족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대외인식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대체로 기성귀족세력은 소극적이었던 반면 신진귀족세력은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삼국이 서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추진한 세력각축전은 대내적 모순의 외연에 대외적 모순이 중첩됨으로써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결국 이 전쟁은 고구려, 백제의 남북진영과 신라, 당의 동서진영의 대립구도에 의한 국제전으로 비화하였다. 이것은 기존의 국제관계가 변화한 결과였으며, 새로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모색하려는 태동의 시작이었다.

2. 남북국사회의 성립과 전개

1. 남북국의 성립

1) 남북국의 성립을 보는 시각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관점은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나눌수 있다. 긍정론은 그야말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견해이고, 부정론은 발해의 존재에 유의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이 내포한 근본적인 한계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발해사의 위상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신라의 삼국통일로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긍정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한 9세기 이전의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지방에 거주하는 민중은 그러한 인식경향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인식은 『삼국사기』의 내용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 할수 있다. 김부식은 신라계통의 문벌귀족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같은 고려시대의 긍정론은 개경 중심의 문벌귀족이 서경 중심의 묘청란을 진압한 이후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논리일 뿐, 그것이 갖는 공감대의 광범위성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다.
결국 조선시대 전기까지 긍정적인 인식경향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비록 왕조의 교체는 있었지만, 역사인식의 변화를 유발할 만한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동이 수반되지 않은 중세사회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전근대사회에서 형성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론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는 개화기와 일제시대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줄기가 되었다.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긍정론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인에 의한 인식경향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일본인의 긍정론은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인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만선사관의 달갑지 않은 산물이었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론이 차지하는 사학사상의 위치는 자명해진 셈이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맹아가 싹텄으며, 후기에 이르러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대두하였다. 발해는 『삼국사기』의 본기에서 북국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라가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이후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어느 역사서도 발해사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은 결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근대사회의 지향으로 규정되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실학사상이 배태되었으며, 실학계열의 역사서술에서 인식의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이런 변화속에서 유득공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신라 중심의 삼국사만이 서술되어 있고, 발해의 역사가 빠진 사실을 고려왕조의 취약성과 결부시켜 비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한국사의 서술에서 신라와 더불어 발해사가 함께 언급될 수 있는 남북국시대론의 단서가 열렸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시작은 한국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조선후기에 나타난 민족의식의 발로와 무관하지 않았다.
근대사학의 본령은 인식내용의 질적 전환에 있다. 남북국시대론을 제대로 전개할수 있는 논리적인 인식체계가 요구되었는데 신채호에 의해 해결되었다. 신채호는 역사이해의 중점을 민중과 민족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사료로서 『삼국사기』가 갖는 봉건성과 사대성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론을 심화시킴으로써 역사인식의 전환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일제시기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개설서에서나마 '남북국' 또는 '남북조'를 표제어로 사용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남북국론을 전개하는 또 다른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심지어 신라보다 발해를 앞세우는 '발해 및 후기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같이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다르게 나타났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긍정적 관점의 통일신라론이 지배적이었으나, 근대사회로 내려오면서 대체로 부정적 입장의 남북국론이 대두·심화되었던 것이다.

2) 남북국의 성립과정

삼국 말기의 국내정치의 변동과 국제관계의 변화는 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이 성립하는 배경이 되었다. 남북국의 성립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의미를 부인하지 않으려는 점에서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결과론의 입장에서 연역한 역사인식일 뿐 실상과는 일정한 거리가 없지 않다. 윈인론의 입장에서 신라 삼국통일의 부정에 따른 남북국의 성립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할 것이다.
삼국 말기의 한반도 정세는 삼국이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력각축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삼국 중의 어느 한 나라가 다른 두 나라를 동시에 적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당의 고구려에 대한 정벌의 좌절과 신라에 대한 백제의 일방적인 공세로 말미암아 추진된 나당관계의 성립은 한반도의 정세를 변화시킨 국제적인 조건이었다.
신진귀족세력인 김춘추는 김유신의 도움에 힘입어 진골출신으로 처음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태조무열왕의 정치적 과제는 나머지 진골귀족세력의 체제도전이라는 대내적 모순과 신라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백제의 신라 침공이라는 대외적 모순을 동시에 해결하는 일이다. 두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체제안정을 위한 대외전쟁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에 기성귀족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용했던 외교적인 나당관계를 군사적인 나당연합으로 전환시키고, 백제에 대한 통합전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당연합군이 편성되었고 당과 신라의 협공으로 두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당은 양국의 정벌과정에서 작전권을 장악한 만큼 전후의 처리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결국 당의 기본전략은 신라의 후원을 이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한 다음 신라마저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를 관철시킴으로써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런 정세속에서 당군과 다시 싸울 수밖에 없는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삼국말기의 정치과정에서 파생된 대내외적 모순이 집약·심화되었던 나당연합에 의한 동아시아의 국제전은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닌 남북국의 성립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신라는 백제통합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었지만, 발해와 더불어 당 중심의 제국질서 속에 편입됨으로써 이이제이의 동방정책에 따른 또다른 모순을 배태하게 되었다. 남북국의 전개과정에서 표출된 대립현상은 그러한 모순의 산물이었다.

2. 남북국사회의 구조

1) 남북국의 통치·이념구조

삼국의 국가완성단계에서 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확립됨으로써 야기된 귀족세력간의 권력투쟁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모색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남북국시대에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의 확립으로 귀결되었다. 남북국사회의 통치구조는 왕의 제도적 위상이 정립된 위에서 지배기구가 재편성 되었으며, 모든 정치과정은 중앙집권체제를 기본전제로 전개된 점에서 선행사회와는 차이가 있었다.
중대사회의 정치적 성격은 고대사회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기본관점 위에서 전제왕권체제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중세사회의 정치구조가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지닌 점을 고려할 때 신라에서 중대사회의 성립은 신라사를 포함하는 한국사의 차원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으로 볼수도 있다.
한편 고구려의 유민에 의해 건국된 발해 초기의 정치과정은 신라의 경우와 달리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과거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말갈세력을 다시 흡수하여 재편성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 방향은 역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확립이었다.
남북국은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수립·유지하는데 필요한 지배기구를 재편성하였다. 우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왕위의 직계계승원칙을 확립한 다음 왕권의 효과적인 관철을 담보할 제도적 장치로서 중앙·지방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였다.
신라의 중앙통치조직은 중대 왕권의 안전관에 해당한 집사부를 중심으로 주요 행정관부의 분업화와 단위 행정관부의 조직화가 마무리됨으로써 왕 중심의 일원적인 통치체제가 편성되었다. 지방통치조직은 중앙에 대한 지방의 복속관계에서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발해의 중앙통치조직은 3성6부를 비롯한 단위 행정관부를 갖추어 설치하여 국가사무를 분장하였다. 발해의 지배층인 고구려인은 피지배층인 말갈족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하여 지방관에 임명되었으며, 자연부락은 토착유력자인 수령이 관장하였다.
남북국시대에 재편성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 상응하는 이념체계의 근간은 물론 불교였다. 또 신라 중대에는 교리 발전과 더불어 통치이념으로서의 논리도 보다 정교해졌다.
신라에서 불교가 수용되던 당시에는 신앙주체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왕과 석가불신앙, 귀족과 윤회전생사상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또 이들은 종교적인 불법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세속사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회계층이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서방정토에 극락왕성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이 성행하였다. 여기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인하여 몰락한 사회계층의 이해가 반영되기도 하였다.
발해의 불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저술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사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발해의 통치지역에서 수많은 사원지, 불상, 불탑, 석등 등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서 불교가 융성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승려가 종교활동뿐만 아니라 외교활동에도 종사했던 점에서 발해의 불교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국가불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중대의 왕권은 불교를 통하여 왕권강화의 이념적 요소를 받아들이는 한편, 유교의 사회운영원리에 입각하여 현실적인 지배질서를 편성하였다. 신라가 수용한 유교는 아마도 한당유학이 기본이었을 것이므로 자연히 국가적 성격을 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라 중대의 왕권은 진골귀족세력의 억제를 통하여 강화될 수 있었으므로 반진골적 성향을 지닌 6두품세력의 지원이 필요하였다. 이와같은 양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유교는 도덕정치의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강화에 기여할수 있었다.

2) 신라의 사회·경제구조

발해의 사회·경제구조를 해명할 사료가 부족한 까닭에 신라의 경우만 살펴보면 신라는 일찍이 철기문화의 보급에 이어 우경농법의 확대를 통하여 농업생산력이 증대함으로써 민의 계급분화가 촉진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자립도가 강화되는 한편 몰락농민층이 출현하였다.
신라중대의 왕권은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귀족세력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일련의 토지제도를 시행하였다. 또 신라중대의 왕권은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귀족세력의 기반 축소와 농민의 생활안정을 통한 재정기반의 확대가 필요하였다.

3. 남북국사회의 변화양상

1) 신라의 통치체제 파탄

신라 중대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는 경덕왕대에 이르러 이완현상을 드러냈고, 혜공왕대에는 빈번한 정치적 반란으로 말미암아 하대사회로의 전환이 불가피하였다. 하대는 내물왕의 후손으로서 선덕왕대의 상대등이던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선덕왕과 원성왕이 모두 귀족회의의 의장을 역임했던 사실은 중대사회의 모순이 귀족 세력의 재기에서 연유하였음을 시사해준다.
신라의 하대사회에서 근친왕족 중심의 정치운영방법은 왕권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투쟁을 심화시켰다. 그결과 빈번한 왕위교체로 인한 왕족의 분화는 왕위계승이 가능한 진골귀족가계의 확대를 가져왔다. 여기에 더하여 5묘제의 확립은 직계와 방계의 차별성을 강조하여 가계 단위의 왕위쟁탈전을 격화시킴으로써 몰락 귀족층을 유발하였다. 왕족으로부터 분화한 진골가계집단이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권력투쟁의 사회적 단위로 기능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사회현상이 바로 중앙집권체제를 동요시킨 원인이었다.
중앙의 왕위쟁탈전은 마침내 지방세력을 대두시켰다. 지방세력이 중앙정치에 도전하는 현상은 지배체제의 모순을 지방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중앙의 진골귀족 세력은 자기방어의식에서 귀족연립체제를 구속하였으나, 그것은 이미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신라 하대에는 중앙의 통제 기능이 상실되어 군현제를 통한 국가의 공적인 지배보다 녹읍을 통한 귀족의 사적인 지배가 강화됨으로써 지방에서 귀족세력의 자의적인 수탈이 가능해졌다. 진골귀족세력은 경제기반의 유지와 배타적 확대, 즉 녹읍의 확보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왕위쟁탈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귀족세력에 의한 전장화의 진전은 필연적으로 농민의 토지 상실을 수반하였다. 토지상실과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몰락 농민층은 귀족세력의 예속민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농촌을 떠나 유망민이 되었다. 신라 하대사회의 모순이 더욱 심화된 9세기 말엽에는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일반화됨으로써 마침내 농민항쟁의 단계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농민항쟁이 지방세력의 출현을 유도하였고, 호족세력으로 불리는 이들에 의해 후삼국시대가 성립함으로써 신라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는 완전히 파탄되고 말았다.
한편 선종은 신라 하대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9세기에 주로 도당유학승을 중심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몰락한 진골귀족, 6두품, 그리고 지방호족 출신의 선승들은 왕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선종으로 하여금 신라 말기의 새로운 불교로 자리잡게 하였다. 선종의 본질은 불타의 절대성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불성을 계발하는 데 보다 치중하였다. 선종은 중앙집권체제의 파탄으로 말미암아 속출한 지방세력, 이른바 호족세력의 사회적 성향과도 부합하는 바가 있었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선종은 개인적 성격으로부터 탈피하여 대호족에 의한 군소호족의 흡수를 합리화하는 사회적 성격을 띠어갔다. 선종의 이러한 경향은 고려시대에 교선일치사상이 등장할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 하대의 불교계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미륵신앙의 확산이다. 미륵신앙은 현세불이 아니 미래불에 대한 신앙으로서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는 사회계층의 이해를 반영한 신앙의 한 형태였다. 후삼국의 하나인 태봉의 궁예가 미륵불을 자칭한 사실은 시비 여부를 떠나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2) 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는 문왕 대흠무가 장기간 통치하는 동안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고, 선왕 대인수대에는 해동성국으로서 전성을 구가할수 있었다.
발해 지배체제의 모순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촉발되었다. 대흠무는 동궁제의 실시를 통한 왕위의 직계계승원칙을 확립하고,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의 효율적인 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직계 중심의 왕위계승과 지배체제의 운영은 이로부터 소외된 방계세력의 체제도전을 유발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동요시켰다. 이것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직계계승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었다.
발해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발해의 특수한 사회구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발해사회의 주민은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해의 지배체제가 내포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이와같이 이질성을 띠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종족적 모순이 결합함으로써 국가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런 대내적 모순의 연장선상에 거란의 침입이라는 대외적 모순이 중첩된 상황에서 발해는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이 절도사 세력이던 후량에 의하여 멸망하고 발해와 더불어 대립과 교섭을 거듭하던 신라가 후삼국시대로 들어감으로써 주변국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따라서 발해에 대해 긴장관계를 유발하던 기왕의 요인은 소멸하였지만, 서북 지방에서 세력을 급격히 팽창시키던 거란은 발해의 멸망을 촉진한 밖으로부터의 새로운 위협이었다.

정세변화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후량, 후당, 그리고 일본등과 고식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할 뿐, 거란의 팽창정책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거란은 925년 서방의 여러 세력에 대한 정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발해에 대한 본격적인 원정을 시도하였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다음 동란국을 세워 야율아보기의 맏아들 야율배를 동란국왕으로 삼고, 발해의 옛 관료를 등용하여 발해의 유민에 대한 지배를 획책하였다. 이에 발해 유민은 적극적인 투쟁 형태로서 발해의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발해 유민의 일부는 거란의 지배정책에 대한 소국적인 저항방법으로서 고려에 내투하였다.
이로써 발해의 옛땅은 이민족인 요와 금의 지배지역에 편입됨으로써 점차 우리의 역사무대로부터 멀어졌지만, 동족의식에서 발로된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은 우리 민족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여기에 남북국시대를 설정할 또 다른 역사적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