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주 중세사회 이행과 관련한 제문제

[남북국시대의 지배체제와 정치][삼국과 남북국의 사회성격]


남북국시대의 지배체제와 정치

발제자

9445009 김정호,  9745028 이수진

참고자료

한국사3 한길사

1.통일신라 지배체제의 정치

1. 통일신라지배체제의 성립과 전개

1) 바담의 난과 중대의 성립

삼국통일 전쟁기는 신라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의 체계에서 볼때도 하나의 획을 그을수 있을만큼 정치.사회적으로 변동을 겪었던전체의 체계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삼국사기"에서는 上代-中代-下代로 구분하며,"삼국유사"는 上古,中古,下古로 구분한다. 하치만 이 분류에서 공통되는 시기가 통일기이다. 이는 통일전쟁기가 큰 변동을 겪고 있던 시기라면 통일전쟁을 경과한 이후의 신라의 정치 체재나 구조 등을 제대로 규명하기위해서는 그에 바로 앞서는 이른바 중고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6세기 이후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정복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그에 어울리는 통치조직을 점차 마련하면서 중앙집권화를 꽤하여 갔다. 초기에는 군권(君權)과 신권(臣權)이 조화를 이루는 체제를 유지할수 있었지만 중앙집권화가 마침내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제도적인 정비를 통한 집권화란 어디까지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7세기를 거치면서 신라는 대내외적으로 급속히 성장해갔으나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 권력의 배분문제를 둘러싸고 왕권과 신권은 여전히 대립 갈등하였으며 선덕왕 말년에는 그 갈등이 극한 상태에 달했다. 647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은 그 최후의 결전이었다. 외부로부터 계기가 주어진 비담의 난은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647년 정월에 염종 등의 귀족과 함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를 표방하여 명활성(明活成)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의 연합공세로 비담의 난은 평정되고 이로 인해 점차 입지를 강화한 김춘추가 왕권을 듻을수 있었다. 그의 즉위는 왕위가 단순히 성골에서 진골로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권파와 귀족하가 싸운 결과, 왕권파의 승리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중대를 단순히 무열왕계승 시기가 아니라 왕권을 정점으로 집권화된 새로운 시기로 이해해야하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왕권중심의 집권화가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2)통일 전쟁의 전개와 귀족 억압

무열왕(武烈王)은 즉위한 뒤 내적으로는 김유신 등 왕권파와의 결속을 다져나가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지속적인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기위하여 계속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당과의 우호적인 관계가 어느 정도 성숙되었다고 판단되자 659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벗어날 목적으로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 때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를 침공하고자 한 것은 물론 대외적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지만,보다 근본적으로는 지배층의 분열이라는 체제내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은 즉위한 이후 근친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려한 시도는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시키는 직접적인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구조상의 핵심적인 직책을 무열왕의 왕자를 비롯한 김유신 등 왕권파가 차지한 것은 지배체제상의 큰 변화였다고 할수 있다. 그로인해 자연 귀족파는 반발하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귀족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진주를 병마권 담당자인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은 것이 주목된다. 이는 커져가는 귀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 조치로 보이며 그를 견제하기 위한 장치도 아울러 마련한듯하다. 귀족파는 철저하게 정치의 실권에서 배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삼국 통일 전쟁이 일어났다. 국가의 사활이 걸린 신라는 전시 동원체제로 전환하였고,따라서 왕권중심의 지배체제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도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文武王.661-680)원년에 대당장군에 임명된 사람은 왕권파와 귀족하가 대등한 수치를 보이나 문무왕 8년의 경우 10명중 1명이 귀족파이며 나머지는 모두 왕권파였다. 이 사이에 한편으로는 전쟁을 치러나가면서 한편으로는 그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적대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이러한 귀족억압책으로 인해 수세에 몰리던 귀족들은 그에 저항하여 모반을 시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669년 한성주도독 박도유의 반란사건과 670년 수세와 673년 아찬 대토의 모반등이 있다. 고구려 멸망 뒤 전후 처리를 둘러 싸고 신라와 당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자 당은 고구려.백제의 고토(故土)는 말할것도 없고 신라에 대한 지배권까지 장악할 목적으로 신라 지배층의 내부분열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명분을 찾아내어 불만 귀족세력을 제거해 나간 결과 새로운 지배체제를 수립할수 있었기에 저지할수있었던 것이다. 676년 마침내 기벌포 싸움에서의 승리로 당군이 한반도에서 물러남으로 신라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기존의 세력에 대해서 억압정책을 취하는 한편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으로 백제민과 고구려민을 포섭하였다. 이들을 이영해 유민들의 이탈을 막고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힘을 이용하려는 목적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제거된 귀족파들의 공백을 메울수 있는 세력으로서 그들을 이용하기 위한목적도 아울러 갖고 있다.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지배집단의 교체가 상당히 이루어져 중대적인 집권체제를 이룩할수 있는 인적 물적 토대를 구축하였지만 당이나 일본 등 대외적인 적대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또한 뿌리깊은 전통귀족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유민을 이용한 당의 침략과 백제의 유민을 이용한 일본의 침략은 신라로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당에 대해서는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일본과도 활발한 교섭을 하면서 그들의 국내동향을 지속적으로 파악하여 침략에 대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내적으로도 왕위계승문제를 염려하여 문무왕이 유언을 남기면서 태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라고 한 것을 보면 이는 아직도 귀족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문왕이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김흠돌의 반란사건이 그를 웅변해준다.

3)신문왕대 새로운 지배체제의 확립

통일 전쟁이 끝난 뒤 왕권파의 정치-경제적인 입장은 강화되어 갔다. 그에대한 불만을 가진 귀족파들에 대해서는 직적 억압하기도 하고 회유하는 시책을 편 것으로 보인다.귀족파인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던 것이 그 예이다. 신문왕이 즉위한지 한달 남짓밖에 되지않은 681년8월8일 신문왕의 장인인 소파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으나 이 난을 계기로 계속된 갈등관계속에 수세에 몰려 있던 귀족파가 완전히 제거되었고 왕권파 중심의 새로운 지배체제를 수립할수 있게 된 것이다. 신문왕이 687년 조묘(祖廟)에 치제(致祭)하여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등 5묘를 세운 것은 중대적인 지배체제 확립의 선언이었다. 신문왕은 새로운 지배체제확립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도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9주5소경제의 완비로 지방촌락 깊숙이까지 국가 권력이 미칠수 있었으며 국학을 설치하여 중대적인 관료를 양성할수 있는 바탕을 마련 하기로 했다. 신문왕대에 취해진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적인 정비는 곧 관료체제를 확립하는 작업이었는데,관료들의 경제적인 기번을 마련해줄 목적으로 687년에는 관료들에게 지급되고 있던 녹읍을 혁파하는 대신 녹봉을 지급함으로써 그들에게서 귀족적인 성격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2.통일신라의 통치구조

1)

7세기 후반,신라는 통일 전쟁의 승자가 됨으로써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그에 맞는 통치조직을 재편해 갔으며,개편된 통치조직은 몇가지 측면에서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성을 지녔다.

1. 새롭게 당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신라적인 요소를 근간으로 당-고구려-백제의 제도까지 다양하게 내포되었다.

2.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화 방향으로 체제를 정비했다는 점이다.

신라적요소와 중국적인 요소가 어울리는 것이 중대적인 제도개편의 특색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는 당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외는 기본적으로 다른 신라고유의 특질을 지녔다.

첫째, 6전조직을 중심으로 그아래에 속사를 포괄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13개의 관부가 병력적으로 나열되어 각기 독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3개의 관부를 총괄하는 당의 3성(省)과 같은 관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병부의 비중이 늘었다는 점이다. 넷째, 각 부 장관의 경우 복수제(複數制)가 많았던 점이다.다섯째, 관직과 관등의 문제로써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각 관직이 하나의 관품이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등이 설정되어있다.여섯째, 내성을 국가기구로부터 분리 설정함으로써 왕실사무와 국가사무의 업무를 명확히 한점이다.

이상과 같이 기본적으로 관료들에 의한 권력의 집중을 막고 국왕과 각 개별 관료를 직접 연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켜나가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적인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점이 신라통치조직이 갖는 한계이다.

2)지방제도

통일 이후 신라의 영토와 인구가 3배이상 증가함에 따라 수취기반이 확대되었고 새로이 백제난 고구려민 등 복속민의 처리가 시급한 정치,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개편이 불가피하였다. 그리하여 이전의 체제를 이어받으면서도 새로운 지방통치조직을 편성하게 되었다. 왕경(王京)은 6部55里360坊에서 통일후 6부로 되어 명칭은 동일하나 성격은 상당히 변모하였다. 그리하여 족적(族的)인 성격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오직 행정구획으로 서만 기능하였다. 6부를 관장하는 관부로 6부 소강전이 두어졌다. 통일이후 당제를 받아들이면서 지방제도는 새로운 조직체를 갖췄다. 흔히 9주5소경제라 일컫는데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아래군(郡)을,군의 아래에는 현(縣)을 두었고,특별한 행정구역으로 5소경을 설치하였다.9주는 고구려,백제,신라 영토에 3개를 균등히 분배하여 통일된 신라의 천하관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소경이 5개로 고정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5부(部)-5방(方)제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와는 설치목적이 한결 같지는 않았다. 5소경은 금관소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백산맥의 외곽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모두 신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였다. 이처럼 복속지역이면서 신라 왕경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에 소경을 설치한 것은 수도가 동남 구석에 편재해 있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있었을 것이지만 고-백-가야 등의 복속인 가운데 유력세력을 이곳으로 집단 사민(徙民)시킴으로써 그들을 회유하고 감시하기 위한데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소경에 사민된 것은 복속민 뿐만아니라 왕경에 거주해오던 원래에 신라귀족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이밖에 특수한행정구역으로 향(鄕)부곡(部曲)성(成)등이 있었는데 필요할 때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제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특수한 행정구획을 구성하는 기초 단위는 자연촌(自然村)이었다. 각 자연촌에서 세력 기반을 갖고있던 유력한 세력이 선발되어 직명을 받아 행정을 보좌하였고, 중앙에서는 이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일정기간 왕경에 불러 머물게 하는 상수리제(上守吏制)를 실시하였다. 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통치 조직이 9주5소경제로 정비된 것은 물론 중고기의 정비-발전된 결과이지만 양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1,중앙행정조직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당제를 적극 수용하려 하였다. 2,지방편제를 중고기보다 합리적으로 하였다. 3,지방세력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중앙권력을 지방 깊숙이 침투시키려는 방향에서 정비가 추진되었던 점이다. 4,중고기에는 지방제와 병제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었지만 중대에는 양자가 상당히 분화되었다. 5,지방에도 중앙과 마찬가지로 지방관의 부정이나 비리,권한남용 등을 감시하기 위하여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였던 점이다. 요컨대 통일기의 지방통치는 국왕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조직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정비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고기의 지방통치 조직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하겠다.

3)군사제도

신라의 군제는 6세기 이후 국가적인 성장과 함께 확대-편제되어왔다. 통일기 신라병제에 대한 대략적 윤곽은 "삼국사기"직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6정과 9서당 이하 23개의 군호(軍號)와 장군 대관대감(大官大監)아래 30개에 달하는 군관으로 구성되어있었다. 6정은 중고의 핵심군단으로 신라가 대외적인 발전을 하는데 큰역할을 해왔지만 통일이후 그 생명을 다하여 발전적으로 해소되고 통일이후의 핵심군단은 9서당으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9서당은 왕경에 주둔한 군단으로서 금색(衿色)에 의해 구별되는 부대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 명칭으로 보아 획일성이 강한 부대였던 만큼 통일 이후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국왕에 직속된 부대로 추측된다.9서당가운데 녹금서당을 비롯한 3서당은 신라 민으로,나머지 6서당은 고구려,백제,말갈인 등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중앙에 설치한 핵심부대가 9서당이라면 지방에 설치한 중심부대는 音里火停을 비롯한 10정이다. 지방의 중심지인 주치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주마다 1정씩,가장많은 군(郡)으로 구성된 한산주는 2정을 배치한 것으로 국방만이 아니라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10정 외에도 기병중심의 5주서(州誓)가 있었으며,보병중심으로 각 주에 두 개씩 배치된 만보당(萬步幢) 등이 있었다. 이밖에 특수한 성격의 부대인 39여갑당,법당,노당,사성당이 있었다. 통일기의 군제는 중고기의 군제가 발전하여 정비된 것이나 몇가지 점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첫째, 군사편제는 정치적으로 왕권중심의 중앙집권화에 어울리게 조직되었다. 둘째,기병중심으로 편제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신라가 통일을 달성한 만큼 군사편제는 대외적인면보다는 중앙집권력의 강화나 지방에서의 반란 등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3.통일신라 지배체제의 모순과 붕괴

1)중대 지배체제의 모순과 하대로의 전환

신문왕대에 확립된 지배체제의 특징은 왕자를 중심으로 하는 근친 왕족과 가야계인 김유신 계열 및 구래(舊來)의 귀족으로서 왕권파에 협조해왔으며 통일전쟁기에 전공을 세운 공신들이 지배세력의 핵심이 되었다는 데 있다.이러한 중대체제가 갖는 특징으로는 먼저 왕싫 외부로부터 도전받는 것을 막기위하여 무열왕대 이후 태자책봉제(太子冊封制)를 확립했다는 점이다. 이후 태자책봉제는 점차 자리잡아간 듯 하지만 효소왕(孝昭王692-701)말년에 이르러 지배집단 내부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700년에 일어난 이찬 경영의 모반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중대지배체제 내부에서 일찍부터 모순이 싹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중대 지배체제의 말은 이미 중대성립초부터 내부에서 배태되기 시작했다. 왕자들은 중고기때에는 갈문왕(葛文王)이라는 의례적인 지위를 받고,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대에 들어와서는 근친왕족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직접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열왕에게는 많은 왕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국내에서 정치적 요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왕족을 제외한 다른 공신세력은 두말할 필요없이 주요공직에서 배척되어갔다. 신문왕-효소왕을 거치면서 왕족중심의 권력집중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그들 사이의 갈등이 배태되기 시작했다. 그들간의 알력은 특히 왕비문제를 둘러 싸고 노골화되었다. 그들의 불만은 이따금씩 왕자의 난이나 귀족의 모반형태로 나타나긴했어도 아직 중대적인 지배체제 자체를 그 뿌리로부터 뒤흔들 정도로 심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가면서 마침내 경덕왕(景德王)대 소수귀족간의 갈등차원을 넘어 전체귀족의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경덕왕은 국왕중심의 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인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는 관료체제의 정비를 통하여 흐트러진 왕권을 재정비하고 나아가 지배층의 내분을 수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되나, 이작업은 그리 순조롭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경덕왕이 사망하고 혜공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태후(太后)만월(滿月)부인이 섭정하자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모순이 일시에 폭발하니 768년(혜공왕4)에 일어난 일길찬 대공(大恭)과 아찬 대렴(大廉)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이 후,잇달아 난이 일어났는데 난의 성격은 한결 같지 않지만 흔들리는 지배체제를 통한 중대이래 귀족들간의 권력투쟁이었던 점은 동일하다. 왕족중심의 지배체제는 여타귀족들을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배제하였고 그 결과 지배집단의 규모는 극도로 축소되었는데,이들은 다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왕비의 자리를 둘러싸고 쟁탈전을 벌였다. 중대의 시기가 겉으로는 지배체체가 안정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은 제도적인 정비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체제 내부로부터의 모순이 축적되어 마침내 혜공왕대에 이르러 일시에 폭발함으로써 중대적인 지배체제는 막을 내리고 이제는 새로운 하대가 시작되었다.

2)김헌창의 난과 하대의 동요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이 집권(780-784)하면서 귀족들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처럼 왕족 중심의 단독지배체제가 아닌 하대성립에 공을 세운 여러귀족들이 연합하는 형태의 지배체제라는 데서 하대는 출발부터 불안하였다. 선덕왕은 즉위후 6년동안 지배체제의 확립을 위한 이렇다할 업적없이 사망하였고,즉시 귀족회의가 열려 무력에 의해 원성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 지배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했다. 788년에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국학교육의 강화를 통해 왕권을 지지할수 있는 관료를 배출하고자 하였다. 이는 당문화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특히 경덕왕때 추지된 한화정책에 대한 불만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원성왕의 뒤를 이어 소성왕(昭聖王799)이 즉위하나 재위 2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청명이 즉위하여 애장왕이 되었다.애장왕의 즉위시 나이는 13세였는데 그의 숙부인 언승이 대신 권력을 지배했다. 언승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려 했고 809년 동생과 함께 애장왕을 주살(誅殺)하고나서 즉위하여 헌덕왕(憲德王)이 되었다.814년(헌덕왕6),815년,820-821년에 계속된 기근으로 인해 유랑민이 발생하였고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로 인해 농민봉기가 발생하였다. 농민봉기는 곧 진압되나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이용하여 김헌창은 신라의 지배채재를 부정하는 발란을 얻기도 했다. 웅천주 도독 김헌창은 선득왕의 사망후 자신의 아버지가 원성왕의 무력에 밀려 왕이 되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인사 정책에 대한 불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난은 몇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반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1. 국호와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인데 이러한 점은 후삼국정립의 시원적 성격을 지닌 난이라 할 수 있다. 2, 지방세력을 반란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지방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촉진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또한 중앙의 지배체제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이제 신라 사회는 밑으로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헌창의 난을 기점으로 신라의 하대 사회는 전기와 후기로 시기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은듯하다.

3)왕위 쟁탈전의 전개와 지배채재의 붕괴

김헌창과 그의 아들의 난으로 누적되어온 모순의 폭발은 지배세력이 결집하게끔 되었다. 두난이 단순한 왕위 쟁탈전이 아니라 하대 지배체제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기에 가능했다. 826년 10월 헌덕왕이 죽자 흥덕왕(興德王,826-836)이 즉위했다. 흥덕왕은 김헌창의 난으로 들어난 체제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몇 가지 괄목할 만한 개혁을 추진했다. 먼저 지방통치체제의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해적을 퇴치하기 위하여 장보고의 요청에 따라 청해진을 설치하고 그를 대사로 임명한다. 다음해인 829년에 당은군을 당성진으로 고쳤는데 이것은 변경 해안 지대의 독자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하대에 들어와 체제내부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지방세력이 성장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취한 조치였으며 중대에 완성된 정연한 모습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834년 진골 귀족의 사치풍조를 막기위한 제한령을 공포하여 율령격식의 정비를 시도한것도 지배귀족의 대한 통제를 통해 체제정비를 하기위한 노력의 소산으로 보이나 이러한 개혁이 제대로 성공할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후계자에 대한 언급이 없이 흥덕왕이 836년 사망하자 왕위를 둘러싼 격심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신라는 명맥만 유지할뿐 지배체제가 붕괴된것과 다름없었다고 할수 있겠다.

2. 발해의 지배체제와 정치

1. 발해 지배체제의 정비와 정치화과정

1)건국과 영토확장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그 유민들은 한동안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예방하기 위하여 그들을 여러 곳으로 집단 사민된 지역의 하나가 바로 당의 동방정책의 전략적 요충지인 영주였다. 영주는 당의 세력 아래에 있던 여러 세력이 뒤섞인 곳이었다. 695년에 거란추장 이진충과 손만영이 당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다른 세력에게도 자극을 주게된다. 이들은 당의 지배를 벗어나 동북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은 이때에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이주하였다. 대조영과 걸사비우는 처음 합세하여 영주를 빠져나왔으나 걸사비우는 측천무후가 보낸 이해고의 군에 의해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세력은 모두 대조영의 세력 안에 포섭되었다. 대조영은 698년 동모산의 동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국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새로운 왕조인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 위에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
대조영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국가로서의 지배체제를 급속히 정비해간 것으로 보인다. 당과의 교섭도 시작되었는데 당에서는 713년 홍로경, 최흔을 보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대조영의 장자인 대무예를 계루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때부터 진국이라는 국호를 대신하여 발해가 새로운 국호로 사용되었으며 당과의 교섭관계가 시작되었다.
대조영의 사후 장자인 대무예가 즉의하면서 연호를 인안이라고 고쳤다. 대무예는 대외적인 정복전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발해는 급속하게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726년 흑수말갈이 당에 사신을 보내자 당은 흑수말갈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흑수주로 삼고 장사라는 관직을 두어 이를 총괄하게 하였다. 대무예는 기존의 발해와 흑수와의 사이에 취해져 왔던 관행을 깨는 것으로, 흑수말갈이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배후에서 공격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의심하여 흑수말갈을 치기로 하고 동생인 대문예와 외숙인 임아상으로 하여금 흑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대문예는 10만에 불과한 발해의 병력으로 당의 군사력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무예에게 흑수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라고 간청하였으나 오히려 대노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대무예는 미리 알고 당으로 도망을 쳤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발해와 당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대무예는 활발하게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대조영과 대무예의 2대에 걸치는 기간은 주로 발해건국기의 영토확장에 주력한 시기였다. 이처럼 이 기간이 무치에 힘쓴 시기였던 만큼 새로운 발해 지배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다음에 즉위하는 대흠무에게 맡겨진 과제였다.

2) 지배체제의 정비과정

대무예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대흠무가 737년 즉위하였다. 대흠무의 앞선 2대가 건국 초기의 무치에 힘쓴 시기라면 대흠무대는 이에 바탕하여 내치, 즉 문치에 힘을 기울인 시기였다. 대흠무는 내치에 힘을 쏟는 한편 대외관계도 활발히 전개하여 당과는 30여 회, 일본과는 11회에 달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대흠무는 대외적으로는 주변국가들과의 화평관계를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당제를 수용하여 지배체제를 정비하려 하였다. 대흠무가 당제를 적극 수용해가면서 당과의 화평관계가 유지되자 발해의 국제적인 지위는 급속히 상승되었다. 대흠무는 지배체제정비 작업의 일환으로 대조영 이래의 도읍인 동모산을 떠나 뒷날의 중경현덕부로 왕도를 옮겼다. 대흠무의 내치에서의 성공과 장기간의 집권으로 지배체제가 정비되면서 왕권은 크게 안정되었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동궁제를 채택할 수 있었던 것도 왕권이 크게 신장된 결과였다. 대흠이라는 연호를 대신하여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발해 지배체제의 기초는 대흠무대를 거치면서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3)지배체제의 동요와 멸망

대흠무의 내치가 성공하여 발해의 왕권은 상당히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794년 그가 사망하자마자 발해의 지배체제에 내재해온 모순이 일시에 폭발하여 지배체제는 뒤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발해에서는 직계의 왕위계승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직계 중심의 지배체제의 확립은 자연히 그레게 밀려난 방계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흠무의 사후 지배층 사이에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다. 내분의 요인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무예-대흠무를 거치면서 직계중심의 지배체제가 구축되자, 정치 핵심에서 밀려난 대씨 왕실의 방계세력들이 가졌던 불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방계의 지지를 받은 대원의가 즉위하였으나 그것은 정상적이 아니었으며, 그 후 다시 직계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대원의를 축출하고 대화여를 왕으로 추대하여 왕위는 다시 직계로 돌아왔다.
10대 선왕인 대인수는 발해 시조인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이므로 발해왕실에서는 방계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가 즉위한 것은 찬탈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대인수는 즉위 이후 건흥으로 개원하면서 지배층의 내분으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이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대내외적인 일대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일단의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로부터 발해는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지방통치체제를 완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체제도 새롭게 정비하였다. 당에서 당시의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동북아지역에는 큰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907년 중원대륙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10국의 혼란기에 들어갔다.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쇠망하면서 후백제와 태봉이 흥기하며 후삼국이 정립하는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곧 주변 민족의 흥기를 유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여 그동안 당에 말려나 북방에 흩어져 있던 거란이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거란은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뒤쪽으로부터의 위협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란군은 926년 말 발해공격을 시작하여 927년 정월에는 부여성을 함락하고 발해의 마지막왕 대인선은 항복하였다. 이에 15대 229년간 존속해온 발해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2.발해의 통치조직

1)중앙행정관제

발해의 중앙 통치조직은 고왕(대조영), 무왕(대무예)대를 거치고 문왕(대흠무)대에 이르러 전과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갖추었다. 대조영대에 이미 당과의 외교적인 관계가 열렸지만 당과 관제 수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783년(대흠무2)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삼국지>, <진서> 등을 베낄 수 있도록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던 사실이다. 발해는 당의 개원 율령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관료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한 듯하다. 물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이 대흠무대에 일시에 시작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 기반은 대흠무대에 마련되었을 것이다. 무왕대까지만 해도 국가기구는 비교적 단순하여 군정합일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고, 따라서 수령이라는 전통적인 관직이 중앙관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문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수령이라는 전대의 관직체제가 사라지고 그에 대신하여 중국식 관직체제로 정비된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당의 관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며 독자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발해가 고구려나 말갈의 지배체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해는 당제를 모방하여 3성 6부 1대 7시 1원 1감 1국의 중앙행정관제를 갖추었다. 3성은 선조성·중대성·정당성으로 구성되었다. 선조성은 당의 문하성에 해당하며, 군국의 정령을 심의하여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대성은 당의 중서성에 해당하는데, 정령을 기초하고 제정하여 정책을 심의하는 일을 담당했다. 정당성은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며 심의 의결된 정령을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서무기구이다. 정당성의 하부에는 행정의 실무를 직접 담당하는 6부가 있었고 각 부의 아래에는 지사가 있었다. 발해의 6부가 기본적으로는 당의 6부를 모방하였으면서도 그 명칭을 유교덕목을 나타내는 용어로 달리 사용한 것은 발해 통치조직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는 전체주의에 입각한 정치제도 정비의 결과로 추측된다. 3성 6부 외에 가장 중요한 관부로는 중정대를 들 수 있다. 중정대는 당의 어사대에 해당하며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역할을 담당한 관부였다. 발해의 중앙행정관제는 통일신라에 비하여 당제를 훨씬대 모방하였으면서도 나름의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 발해가 당제는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발해의 지배집단이나 주민 구서이 복합적이었다는 데 기인한 것으로, 어느 한 계통의 전통적인 제도를 일방적으로 채택하기 어려운 사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취해진 불가피한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2)군사조직과 지방제도

1. 군사조직 발해의 지배체제를 지탱시킨 근간인 군사조직에 대해서는 <신당서> 발해전에만 지극히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기록에 따르면 발해에는 중앙군으로 8위가 존재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군사조직은 대체로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각 위가 구체적을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당의 부병제를 모방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발해의 주민구성이 복잡했던 만큼 일률적인 형태의 충원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충원방법을 동원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 지방제도 발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영토 전부를 그대로 차지하였다. 발해의 대부분의 영역은 대조영과 대무예·대흠무 치세기에 확보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이들의 영역에는 5경 15부 62주와 영주·동주·속주등 3개의 독주주가 행정구역으로 배치되었다. 발해영역의 대부분이 대흠무대에 확정된 것을 보면 적어도 이 시기에는 부·주체제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5부는 발해 지방 행정의 중심이었는데, 15부 가운데 중요한 곳에는 다시 5경이 설치되었다. 하나의 부는 적을 경우 2개, 많을 경우에는 9개의 주를 통속하고 있었다. 주의 장관은 자사이며 도독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 지방관들은 9세기의 사정을 전하는 일본특 사서인<유취국사>에 따르면 토인, 즉 고구련인이 주로 임명되었으며, 그 아래 자연부락은 수령이라 불리는 토착재지유력자층에 의해 장악되었다. 독주주는 비교적 문제가 많은 지역에 설치했는데, 발해의 왕실이 직접장악함으로써 이곳을 완충지대로 삼아 통치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통치조직의 외형은 당제를 거의 그대로 모방했으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발해의 독자성이 다른 어느 분야보다 강하게 견지되고 있었다. 이는 발해가 다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던 만큼 그러한 점에 대한 배려가 충실히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