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발제4]


통일 신라 시대

(1)시대 개관

통일신라시대는 고구려가 멸망된 668년부터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미술사 쪽에서는 통일신라양식을 단순히 668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 못 된다.그것은 668년에 영토가 형성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신라로서는 새로운 양식이 통일 이전부터 싹틀 수도 있기 때문이다.

650년경부터는 인도의 새 양식이 강하게 반영된 새로운 당양식의 불상이 신라에 수용되기 시작했기에 이 650년경부터 신라통일 양식의 제1기를 맞이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때부터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8년의 고구려 멸망, 이들 유민들의 반항과 당의 식민지화에 대한 분쇄.전쟁등 혼란의 소용돌이는 7세기의 3/4분기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는 다양한 조각양식의 혼재와 융합과 태동이 부산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하겠다.

7세기의 4/4분기(676-700)는 이러한 부산한 움직임이 일단 마무리되고 차분하게 새로운 통일신라 양식을 만들어 보려고 온갖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을 것이다.

8세기의 1/4분기는 이제 새로운 불상양식이 정립되는 시기이다. 그 예가 감산사 불상인데,이 불상의 조성은 새로운 사실주의 양식이 성립된 사실을 입증하는 획기적인 일이다.이러한 새로운 사실주의 불상양식은 이후 8세기의 2/4분기기간에는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신라의 수도 경주는 화려한 국제도시로서 온갖 문물이 번성하였으니, 인도는 물론이고 멀리 페르시아 문화까지도 들어오게 된다.따라서 불교의 융성은 그 극을 보여주게 되며,인도의 굽타 불상양식까지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8세기의 3/4분기가 되면 전성기의 신라도 점차 자체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찼던 작품이 줄어지고 형식화가 서서히 대두되고 있었다. 이 점은 우리가 한국조각의 절정으로 높이 평가하는 석굴암의 불상조각들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774년 실질적인 선덕왕의 통치권 인수 때부터 중대신라는 사라지고 하대신라가 시작되자 귀족연합적 통치권이 수립되며, 그들 서로간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쟁투가 계속되었다. 이것은 급기야 전면적인 내란상태로 들어가서 마침내 후삼국이 성립되며,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신라도 망하고 만다.그러니까 하대신라의 제1기는 8세기의 4/4분기에 해당되며,이때 양식은 중대신라의 말기양식을 계승하여 현실적 사실주의양식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9세기의 1/4분기는 지방세력과 선종의 연합,중대신라 불상양식의 전통과 새로운 당양식의 수용 등으로 새로운 하대신라 양식이 성립되었다.

9세기의 2/4분기는 전대의 혼란이 본격화한 시대였다.

신라의 하대양식이 크게 빛을 발한 것은 신라 하대 제2기인 9세기의 3/4분기였다. 중앙과 지방이 겉으로는 평온이 유지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이런 안정기에 각 지방에서는 특히 선종사찰이 대거 확장되고,여기에 따라 조각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많은 불상들이 만들어진다.이와 함께 중앙귀족들의 말기적인 사치풍조와 호화를 극하는 생활풍조에서 수도를 중심해서 이러한 분위기가 조각계에 작용하였을 것이다.이들 조각 양식은 현실성이 강하게 반영되고 지방화도 크게 진출하는 양식이다.

9세기의 4/4분기는 전대의 섬약과 추상화의 양식이 어느 정도 자리잡는 경향도 있지만,이 양식이 사실상 신라양식의 종말인 셈이다.

(2) 중대 신라 (中代新羅 제1기;AD 650-775)

1)위대한 전통을 찾아서(中代新羅 제1기; AD650-700)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신라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은 당나라 군사를 통일신라 영역 밖으로 완전히 몰아내어 명실상부하게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676년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통일전쟁기로 완전히 돌입한 것은 태종 무열왕이 원병을 청하러 당나라에 다녀온 648년부터 그가 왕위에 오른 653년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즉,650년경부터 675년까지를 삼국통일 기간으로 보아야 되겠다는 것이다.이런 통일기간은 불교미술, 특히 불교조각에도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는 모색기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신구양식과 삼국양식이 서로 혼재하면서 이를 융합하고 극복해 나가는 때였기 때문이다. 즉 전대의 자자에 의하여 수입되었을 初唐樣式의 불상들이 만들어지고 있었음은 물론,北周.北濟양식과 隨양식도 이와 더불어 이 시대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서 가장 눈에 띄개 활약하고 있었던 조각가는 良志였던 것 같다. 양지가 선덕여왕때부터 문무왕 때까지 활약한 가장 유명했던 조각가였다는 것은<삼국유사>가 잘 전해 주고 있다. 즉 '기예에 능통하여 그 神妙함이 비길 데 없다'고 한 것이 그의 예술가로서의 천재성을 그대로 알려주는 예이다.당시까지의 그의 작품은 아마도 北齊周양식의 바탕 위에 선, 隋에서 初唐에 이르는 양식의 불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는 7세기의3/4분기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당양식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사천왕사의 신장상에서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중국은 인도 굽타조각의 관능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양식을 당조각으로 수용하던 시기이다. 당시의 신라 사절들은 이러한 사실주의 조각양식을 열심히 모사하고, 또 그러한 불상을 그들의 행장 속에 꾸려 왔음이 분명하다.이러한 당양식 불상의 영향이 어느 정도 보이는 대표적 작품은 바로 경주의 서악으로 알려진 선도산(仙桃山)의 마애불상과 두 협시보살상이다. (그림 39) 이 불상들은 7세기 3/4분기인 650년에서 675년 사이, 그것도 그 전반경에 만들어진 조각으로서 새로운 수법도 눈에 띄게 나타나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거불이자 걸작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새로운 조각 수법을 가장 재빨리 수용한 측은 무엇보다도 왕실과 상류 귀족층이었을 것이다. 수용된 양식이 점차 신라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태종무열왕의 비석 대좌인 귀부(龜?)이다. 이 거북조각은 통일을 주도하던 제왕으로서의 만만한 패기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당대의 대표작이 분명할 것이다.이런 새로운 작품을 한층 더 진전시킨 조각은 김유신묘의 납석제 12신상조각들이다.이 조각들은 세련되고 재치있는 선이나 갑옷의 치밀한 무늬,그리고 신체의 인간적인 묘사 등에서 사실주의적인 양식이 물씬 풍기고 있다.이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되는673년경의 경주의 진보적인 일군의 조각가들은 이러한 신장상이나 보살상들에 사실주의적 양식을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적인 일군의 조각가들은 아직도 앞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약간씩의 변모만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예가 경북 북부지역인 영주.봉화지구 불상 작가들이다.대표적 작품으로는 봉화 북리지 마애불좌상과 석조반가사유상 및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좌상들이 있다.

북리지 마애불좌상은(그림45) 앉은불로서는 상당한 거불에 속하는 작품이고 또한 거의 원각상적인 처리를 하고 있어서 조각사에서 이 불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앞시대의 수법에서 그렇게 탈피하고 있지 못한다.따라서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일 가능성도 다분히 있어서 아직도 실 연대는 보류해 두고 싶다.

이 점은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상(그림46)에서 보다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 마애불은 가슴은 넓고 당당하며 양감이 풍부하여 중생들을 압도할 만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그리고 불상의 선과 형태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중한 스타일은 보살상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이러한 수법은 선방사 삼존상의 계통을 따르고 있으면서 더 진전된 양식으로 보이며,힘찬 얼굴이나 건장한 체구등은 감산사 아미타불입상의 양식으로 훨씬 접근하고 있다.말하자면,선방사 불상에서 감산사 불상으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양식의 불상이 발생되었다고 보면 거의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양식의 불상은 '연기파(燕岐派)불상조각'이라 부르고 있는 충남 연기지방 일대에 흩어져 있던 일군의 조각들에서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이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상이다.(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像-그림41)

이 불상은 전대양식의 전통을 그대로 고집하고 있는 보수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이점은 기축명 아미타불비상(己丑銘 阿彌陀佛碑像)이나,연화사 칠존상(蓮花寺 七尊像),서광암 천불비상(瑞光庵 千佛碑像)등에서도 그러하다.

이 불상들의 명문과 불상형식에서 이들 조각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조각사에 의미심장한 의의를 지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첫째로 아미타와 미륵상을 압도적으로 많이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바로 이 시대의 불교신앙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마도 法相宗 계통의 신앙 분위기가 크게 영향하지 않았나 싶다.둘째로, 예외없이 국왕,대신 및 7세 부모를 위하여 이들 불상을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백제 귀족으로 신라에 귀부한 사람들로 생각되는'全氏'.'牟氏'등을 중심으로 50인또는 250인 등 일단의 백제 유민 그룹이 향도가 되어 이 불상들을 673년경을 전후해서 집단적으로 조성한 사실이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반가사유상의 제작문제이다. 이 반가상은 통일기가되었다 해서 갑자기 사라진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대표적 작품이 북지리 반가사유석상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문무왕 16년,즉 675년부터 신라는 명실상부하게 統一帝國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신라는 광대한 영토,방대한 국민,여기에 이민족의 뒤섞임등으로 자칫하면 통일제국이 붕괴될 위험까지 안고 있었던 것이다.이것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 전제왕권의 강화이다.이런 전제왕권을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사상은 바로 종파불교였다.

국가적인 뒷받침으로 의상에 의해서 부석사가 창건되고,명랑에 의해서 사천왕사가 창건되었으며,국가에 의해서 직접 감은사가 창건된 것이다. 이들 대찰들은 새로운 통일국가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큰 배경이며 뜻깊은 기념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단 한 점도 남아있지 못하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천왕사의 탑 기단부를 형성하였던 신장상과 감은사 사리기의 사천상이 현존하고 있어서 가장 유명하였을 주존불 같은 대작품들의 일면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특히, 사천왕사의 신장상(그림47)은 당대의 거장이던 양지스님의 작품이어서 당시로서는 최신의 그리고 최고의 걸작품이라는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이 작품의 특징은 사실주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사실(寫實)이라 하더라도 준경(遵勁)하면서도 정치(精緻)한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즉 세밀한 부분까지 결코 소홀하게 다루지 않고 옷자락 하나라도 치밀하게 터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 양식은,당시 중국의 경우에도 결코 이를 능가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이것은 양지의 뛰어난 기량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이러한 사실주의는 감은사 사리기 사천왕상(그림48)에서 보다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이 사천왕상의 사실적인 장군 모습의 형태,치밀하고 긴장된 선의 율동 등에서 국제적인 도시로 등장한 이른바'大京'경주에는 벌써 진보적인 일군의 조각가들이 사실주의 양식을 확립시키고 있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이런 점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안압지 금동삼존불상같은 작은 금동불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앞에서 본 양지의 사천왕사 소조신장상과 관련시켜 당대의 가장 우수한 조각들인 소조작품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효소왕 때 왜구들에게 납치되었던 화랑부례랑을 귀국시킨 백률사의 아미타상,후에 최승로를 살린 중생사의 아미타상등 당대 최고 걸작들이 모두 소조상들인 것이다.이 불상들은 양지작인 소조불상과 함께 없어졌지만,이들 양식을 알 수 있는 작품이 최근 경주 능지탑에서 출토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소조불상의 양식이며 기법을 어느 정도 복원해 볼 수 있다. 사천왕상 신장상 계통과 비슷한 사실적인 작풍이 꽤많이 진전된 불상양식임이 분명한다.

그러나 신장상이나 보살상 같은 조각의 진전된 양식이 모든 불상에까지 적용되었는지는 미심쩍다. 당시의 사천왕사나 감은사,부석사 같은 당대의 진보적인 걸작품이외에는 사실주의 양식이 그렇게 많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더구나 거대한 석불일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런 거대한 석조 본존불의 보수성은 군위삼존석불에서 여실히 보이고 있다. 이것은 대형의 석불이어서 작가의 새로운 양식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보수적인 경향을 띠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삼존불에서 조각사상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몇가지 나타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첫째로,완전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사실이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부처님이 성도할 때 나쁜마음을 항복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상이다. 둘째로,머리에 얕게 음각으로 간다라식 곱슬머리가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헤어스타일이 된다.이 역시 새 양식의 등장과 관련시켜 생각해야되는 점이어서,앞으로 이 불상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나라 조각사에 의미심장한 의의를 지니게 될 작품이다.

이러한 점은 왜관 부근의 성주 마애불에서도 느낄 수 있다.이 불상들은 유희적 자세나 교각자세 같은 특이한 자세라든가 딱딱하면서도 사실미가 감도는 양식등으로 당시의 조류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아 그 조성연대는 7세기의 4/4분기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서 주목되는 작품이 황복사 3층석탑의 금동사리함속에서 나온 순금제 불상(그림52)이다.706년에 쓰여진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면,석탑은 692년 효소왕이 건립하고 그후706년 성덕왕이 사리함속에 아미타상을 넣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은 효소왕 자신이 손수 시납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692년 이전부터 신목태후나 효소왕 자신이 원불일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왕실에서 정성들여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범상한 기량을 단연 능가하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이 불상과는 다른 의미에서 시대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 있다. 이것은 작은 금동불이지만 추상성이 농후하면서도 사실주의적인 작품으로 경도된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금동불입상이지만, 보다 발전된 작품으로 유명한 사체사 석불상이 경주 박물관에 있다.

이처럼 이 시기의 조각은 전보주의적인 사실양식이 전면적으로 대두된 것도 있고,보수주의적인 추상양식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작품도 있으며,사실과 추상양식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아울러 백제적인 양식,고구려적인 양식과 중국이나 인도의 새로운 양식까지도 뒤섞여 있어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조각의 장점이자 또한 단점이기도 한 것이다.이런 양식의 혼재는 성덕왕대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사실주의 길로만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2)황금기의 이상과 사실주의의 극치(중대신라 제2기; AD700-775)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확립된 것은 성덕왕(702-737)때부터이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 통일왕국의 율령체제가 모든 점령지까지 완전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인 것이다.이제 신라는 명실공히 모든 국민들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이에 따라 통일국가의 부와 권력이 급속도로 강화.신장되었다.이와 아울러 이러한 신라를 강력하게 지탱해 주는 종파불교도 신라사회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원효나 의상의 화엄종, 法相宗, 神印宗등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사회가 완전히 정비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함에 따라 신라문화는 최성기를 맞이하게 된다.이제 국제문화를 적절히 소화.수용한 신라는 신라 독자의 화려한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즉, 신라로서는 최성기였고 문화의 황금기였던 셈이다.

본질적으로 이 문화는 다름아닌 불교문화이다. 불교는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불교는 종파불교였는데,가장 각광을 받은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었다.이들 종파불교는 자기 종파의 교리가 다른 여러 종파의 갖가지 교리의 단계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네의 우수한 교리를 중심으로 다른 잡다한 종파의 교리를 흡수 통합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고 있어서,이것은 통일전제왕권의 정책원리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이들 종파에서 예배대상으로 크게 클로즈업된 부처님은 아미타물과 미륵존상이었다. 화엄종은 원래 비로자나불이 예배의 주체였지만,원효나 화엄종은 모두 아미타불을 신봉하고 있었다. 법상종은 원래 미륵보살이 주존이었지만 아미타불 또한 미륵에 버금가는 예배존상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는데,이는 당시 신라사회의 시대상과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불상으로 皇福寺 삼층석탑에서 나온 황복사 순금불좌상(純金佛坐像)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황복사는 의상이 출가했던 절로서 의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이고, 따라서 이 아미타불조성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이 불상은 사실주의 작풍으로 막 제작하기 시작하던 분위기에서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상과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만들어진 최초기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에 비해서 경주박물관의 사암불입상(砂岩佛立像)은 좀다른 양식 계열의 불상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도의 굽타기 마투라불 양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강건하고 팽창된 형태나 힘차면서 세련된 선등에서 보이는 새로운 사실주의적 작풍은 아직까지 감산사불상양식으로는 진전되지 않았지만 이 계통의 불상으로서 가장 초기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황복사불좌상과는 사실적 양식인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세부면에서는 획기적인 작풍을 나타내고 있는 불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굽타적 사실주의 양식을 꽤 많이 신라화시킨 불상이 감산사 불상들이다. 이 중 아미타불입상(그림55)은 정면관에 엄격한 좌우대 칭을 하고 있는 강건한 풍모의 석불입상이다. 비교적 두터운 옷 속에 감싸여 있어서인지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다하더라도 신체 각부의 탄력적인 표현과 함께 박진감이 넘치는 사실주의적 작풍을 역연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양식은 감산사 미륵보살입상에서 보다 완벽하게 진전된다.

이들 두 불상은 양식사상 가장 중요한 불상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상적으로도 그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이 불상은 화엄종과 함께 신라 종파불교의 2대거파였던 법상종의 예배존상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불상들은 첫째로 법상종의 신앙과 그 조형사상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둘째로 전제왕권의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들의 절실한 소망에서 이루어진 조형작품이라는 점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감산사 보살양식을 충분히 따르고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상원사종에 새겨진 비천상을 들 수 있다. 이종은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종으로 만든 장인은 '仕0大회 '인데, 비천의 모습을 세련되고 유려한 선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동감있는 형태로써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비천상을 계기로 신라조각은 난숙한 사실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즉 통일신라 미술의 절정기를 이루는 8세기의 2/4분기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왕권의 절대화가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때인 것이다. 그것은 성덕왕의 치적과 경덕왕의 왕성한 의욕 때문이었다.그리고 국제적인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게 되는 시기이다.

이런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굴불사 사면석불.즉 석주사방불이다.이 사방불은 사각형 돌기둥의 네면에 7구의 불보살상와 두 보살을 따고 조성하고 있다.그리고, 동서남북면의 불상이 인도불상, 중국불상,여기에 신라화한 불상양식등이 다양하게 뒤섞인 국제적인 신라 조각양식을 현란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다.

이들 보살상과는 달리 이 시대에는 단독의 석불좌상들이 상당히 많아지는 것 같다. 이 가운데 경주 보리사석불좌상은 감산사 불상에서 훨씬 진전되었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는 불상일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이 불상은 우아하고 세련된 불격을 사실주의 조각으로 성공시킨 당대의 역작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양식과 그 궤를 같이하면서도 앞의 통견의 옷과는 달리 우견편단(右肩偏袒)을 하고 있는 불상들이 있는데,이 계통의 불상 가운데 그 양식을 완전하게 알 수 있는 대표작이다.

경주 남산의 칠불암 삼존불상과 석주사방불은 이런 양식 계열을 따르고 있는 가장 유명한 불상군일 것이다.

불상은 아니지만 성덕왕릉의 호석으로 두른12지상이 당대의 역작으로 손꼽힐 수 있을 것이다. 이상들은 이국적인 즉 인도의 대왕초상조각의 전통이 강하게 나타나는 조각인데, 이상적이며 사실적인 조각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750년을 지나 760년경까지는 전대의 양식이 더욱 확대되고 있었지만,한편 서서히 딱딱해지는 경향도 나타나고있었던 것 같다. 경덕왕대는 율령체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중앙 집권화가 최고도로 강화되던 시기였다.그러나 급격한 왕권강화정책에 비례해서 귀족들의 불만도 쌓여가고 있었다.이에 따라 신라문화도 난숙의 절정기가 되고 거기에서 오는 여러가지 무리와 부작용도 뒤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걸작의 불교미술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754년에 완성한 황룡사의 거종과 이에 잇따라 새 종이 만들어졌다든가, 그 이듬해인755년에는 분황사의 금동약사불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입불과는 달리 당시의 좌불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갈항사지 석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원성왕의 외척에 의해서 건립된 삼층석탑과 기법이나 양식상 매우 근사하다.

이제 우리는 통일신라 초대의 거작이고 가장 많은 석불군이며 8세기의 신라 불상을 마지막으로 총결산하는 그 유명한 석굴암 불상들과 마주치게 된다. 현재 총33구의 석불이 하나의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면서 이른바 전방후원,즉 전실이 사각형,본실이 원형을 이루는 석굴사원속에 적절하게 배치되고 있다.(그림65) 현재 전실에는 8구의 팔부중이 좌우로 배치되었고,본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2구의 인왕상이 지키고 있으며,사천왕상은 주실로 들어가는 복도를 지키고 있다.

본실 가운데 항마촉지인을 하고 앉아 있는 본존불의 형태는 긴장된 표현이 지나쳐서 근엄해고 딱딱해지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경덕왕의 왕권강화에서 오는 절대왕권의 권위의식이 크게 부각되었다는 점과,이에 따라 대두되는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들 양식과 수법이 판이한 조각이 전실에 배치된 팔부중상이다. 이것은 확실히 새로운 시대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특이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조각의 형태는 힘이 현저하게 감소되었으며 선의 탄력도 줄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佛格이라 할까 하니 神格이라 할 그런 분위기가 싹 가셔 버린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대의 재상 김대성이 전세부모와 현세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했다고 말하고 있지만,그의 가계가 무열왕계였으므로 일개 재상의 부모만을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당시의 왕권강화의 권위를 높이고 그들 왕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이 석굴암은 단지 국가적인 또는 개인의 원불로서뿐 아니라 일차적으로 깊은 교리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항마와 관련있는 신인종사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密敎圖像이라 생각된다.

석굴암 불상과 강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불상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은 석굴암 바로 아래 계곡에 있었던 장항사지 석불입상이다. 신체묘사는 평판적인 얇은 옷 속에 젖가슴과 아울러 육체의 굴곡을 선명하게 나타내었지만, 그보다는 날카로운 점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것은 석굴암 불상의 옷주름 선과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은 굴불사 불상들보다 진전된 석굴암 불상과 비슷한 현실하가 대두된 사실주의 양식으로 보면 좋지 않을까.따라서 이 불상은 석굴암 불상들의 조성과 전후해서 만들어졌지만 석굴암상 이후인 8세기의 3/4분기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이 점은 같은 장항사지에 있는 삭탑부조 인왕상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일련의 불상조성의 붐을 타고 또 하나의 거대한 미륵존상이 만들어 졌는데 766년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에 미륵장륙상을 주성한 것이다. 아마도 금동장륙상으로 생각되는데,현실화가 진전된 양식이었을 것 같다.

봉덕사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이러한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묘사된 비천상은 상원사종의 비천과는 달리 우아한 이상주의가 좀 후퇴하고 있어서 이른바 현실화가 대두되고 있는 점을 느낄 수 있지만, 세련되고 탄력있는 난숙한 기량은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당대 조각의 저력을 과사하고 있다.

경덕왕말년에 당나라 대종에게 보낸 沈檀木으로 된 만불산조각군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을 것으로, 수많은 조각상들이 살아 움직이도록 장치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는데,신라는 당나라 대종의 즉위를 축하해서 정치한 만불산을 만들어 보낼 만큼 뛰어난 조각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굴암의 정교한 배치와 치밀한 조각 수법과 비견해 보면 이러한 작품이 나올 충분한 저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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