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발제4]


1. 장보고가 건설한 '해상왕국'은

한반도 서남해의 크고작은 섬들중 하나인 완도를 근거지로 하여, 9세기에 당나라와 신라,일본을 잇는 바닷길을 장악하여 해상왕국을 건설한 인물이 장보고이다. 그는 중국 산동반도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짓고, 산동반도에서 양자강 연안에까지 흩어져 살던 신라인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국제무역을 장악하였다. 험한 바닷길을 안전하게 왕래하기를 바라는 신라인은 물론 일본인 승려까지도 그에게 안전을 의탁하기도 했다. 장보고의 출신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뒤에 청해진을 설치한 곳이 완도이므로 그곳을 고향이라 보아도 무리는 없다. 역사 기록에서 그 조상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그가 평민 출신이었음을 말한다. 장보고의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였다. 즉 '활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장보고란 이름은 나중에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중국의 대성(大姓)인 장씨를 칭한데서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약간 적은 정년이라는 사람과 친했다. 두사람은 모두 전투에 능하고 특히 잠수를 잘해 바닷속에 들어가 숨을 쉬지 않고 50리를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갔고 당에서 무녕군 소장(小將:하급무관)을 지냈는데, 이때 말을 달리고 창을 쓰는데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당나라에 가서 활동하던 당시 신라의 사정은, 통일 이후 귀족들은 1세기 남짓 동안은 안정을 구가했다. 당시 귀족의 생활은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에서 "재상의 지배는 수입이 끊어지지 않았고 예속된 노동(노비)이 3천이었다. 이와 비슷한 수의 병사와 소·말·돼지가 있었다. 바다 가운데 섬에서 방목을 하는데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아먹었다."라고 전한다. 또 귀족들은 지방에 많은 토지와 장원을 보유하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병을 보유한 귀족들은 서서히 권력 쟁탈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8세기 후반 혜공왕대에는 96각간의 난이 일어나 전국이 혼란했었고, 혜공왕은 결국 권력쟁탈전에서 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의 생활은 불안정해졌고, 흉년과 기근은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민심이 뒤흔들릴 무렵, 김헌창이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데 원한을 품고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진압되었으나 몇 년 뒤에 그의 아들 김범문이 고달산의 산적들과 연결해 중앙정부에 대항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신라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극격히 약화되었다. 신라정부가 제 구실을 못하는 틈을타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 해안에 상륙해 노략질을 자행 하거나 사람을 잡아 중국에 노비로 팔아 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이 문제는 당나라와 신라의 외교 현안이 되기도 했다. 청해는 당나라에서 황해를 건넌 다음 흑산도와 남해 연안을 거쳐 일본의 북큐슈(九州)에 이르는 국제 무역항로의 중간 기항지였다. 그는 828년에 지방민 1만 명을 모집해 군사를 조직하고, 해군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면서 서서히 동지나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당나라 동해안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이 거주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초주(楚州)의 신라인 거주지역을 '신라방(新羅坊)'이라 하여 신라인 스스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들 중에는 연안운송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과 양주(楊州)·소주(蘇州)·명주(明州) 등지에서 아리비아·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는 자들, 그리고 당과 일본을 오가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보고는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아울러 이들의 지원을 받아 국제뮤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장보고의 무역사절이 회역사(廻易使)·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 등으로 불린 것은, 그의 무역활동이 순수하게 사작인 것이 아니라 국가간 공식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음을 뜻하고, 그는 '대사(大使)'라 불리웠다. 그의 주위에는 신분이 낮으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또,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지방의 커다란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앙 정치무대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민애왕을 치고 우징을 왕위에 앉힌 공로로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됨과 동시에 식읍(食邑)도 수여받아 신라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 되었다. 이즈음이 그의 전성기로써 840년에는 무역선과 함께 교역사절인 회사를 일본에 파견 했다. 그런데, 그역시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자신의딸을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이려 했으나 그가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대한 중앙 귀족들에 의해 좌절 되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그는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군사력으로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신라 정부는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였고, 장보고의 꿈은 무산되었다.

2. 처용은 아라비아인인가

우리 학계에는 처용(處容)을 아라비아인이라고 보는 견해와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있다. 양자는 모두 처용설화의 의미를 당시 신라 사회의 실상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보려는노력에서 나온 것 으로, 독단적 주장이라고 무시해버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처용가를보자.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 놀며 다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디 내것이건만 빼앗겼음을 어이할꼬

역사학계는 당시 신라사회가 처해 있던 정치적 상황을 염두해 두면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자제라 보기도 한다. 처용설화는 신라 말기에 경주의 중앙 귀족이 지방 호족을 포섭·견제하면서 지배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견해의 대강은『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에는 많은 용이 등장하는데, 대개 두 부류로 나눌수 있다. 하나는 중앙의 국왕을 비롯한 골품 귀족정권, 다른 하나는 지방에 잠재하면서 신라국가로 부터 떨어져 나갈수도 있는 세력을 상징한다. 또, 경주는 이미 퇴폐적인 거대한 소비도시가 되어있었다. 설화에 등장하는 '역신'은 도덕성을 상실한 이러한 '병든 도시'를 상징하며,역신과 잠자리를 같이한 미녀도 시골청년의 건강성과는 대립되는 존재였다. 이미 처용은 그들을 상대할 미련조차 가질수 없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국제교류를 염두해 둔다면, 설화에 나타난 처용을 아라비아인으로 볼 수 있는 개연성도 있다. 고려 가요에는 '회회인(回回人)'이 가끔 등장하는데, 아라비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시대에는 백여 명씩 떼를 지어 찾아온 아라비아 상인들이 후한 대접을 받고 조정에서 마련해준 객사(관설여관)에 체류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훨씬 이전인 당나라 때부터 중국·인도, 동남아시아를 잇는 바닷길을 왕래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일부가 신라까지 왔을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 당에 이르는 바닷길 중에 울산부근의 포구를 출발해 남해안→서해안의 흑산도→중국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가는성을 배제할수 없다. 이를 반증하듯이 9세기 무렵의 이슬람측 문헌에는 신라에 대한 언급이 적지않다. 특히 "중국의 동쪽에 6개의섬으로 이루어진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버리곤한다"는 기록이다. 즉, 당시 이슬람세계는 신라에 관한 일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이는 활발히 바닷길을 왕래한 상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옛 설화의 대부분은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설화 자체가 후대에 문자로 정착되어 정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개한 처용에 관한 논의도, 통일 신라 사회의 실상을 염두에 두면서 설화로 부터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을까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폐쇄적 골품제를 고집하고 있던 중앙 귀족들이 기울어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지방 호족들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시기. 진귀한 사치품에 대한 지배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교역이 널리 행해지던 시기. 대규모 소비도시였던 신라의 수도가 도덕적인 퇴폐상을 드러내고 있던 시기. 처용설화가 이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할수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3. 신라는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멸망하였는가

총명하기로 이름난 선덕여왕과는 대조적으로, 진성여왕은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한 주인공이라는 면에서 흥미를 끈다. 통일신라말기 농민봉기에 편승한 호족세력이 이탈·독립함으로써 신라가 결정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 이 여왕때이다. 신라 멸망을 생각할 때 그녀의 '방탕함'을 쉽게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미국의 프레데릭 애덤스 우드라는 사람은 유럽의 군주와 각국가의 흥망성쇄가 갖는 관계를 조사하였다. 그는 현명하고 강력한 군주=번영기, 연약한 군주=쇠퇴기가 갖는 상관관계가 70퍼센트에 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현명한 군주가 있을 때는그 국가가 번영하였고, 연약한 군주 때는 보잘것없는 형편이었다는 뜻이다.

신라는 통일 이후 중앙 정부조직과 함께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1세기 가량 안정을 누렸으나, 중앙귀족들 사이에 격렬한 왕권쟁탈전이 일어나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게된다. 넓어진 영토를 장기간 통치하려면 끊임없는 쇄신이 요구되었지만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사회체제는 이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말기의 중앙귀족들은 수입이 끊이지 않았고, 그 중에는 3천명에 달하는 노비를 보유하거나 많은 사병과 가축을 소유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관심은 중앙에서의 권력쟁탈전에 집중되었다. 8세기 혜공왕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반란사건이 발생하였다. 때로는 그 와중에 국왕이 살해되고, 전투에서 이긴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일도 다반사 였다. 9세기 후반이되면 왕위를 찬탈할 정도의 세력을 지닌 자도 없어졌지만 불안정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자연히 지방통치에는 큰 관심이 기울여질 수 없었고, 귀족과 사원의 대토지소유가 확대되면서 농민들은 가중되는 수탈에 자연재해가 겹치면 몰락하는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신라가 몰락의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진성여왕이었다.

경문왕(진성여왕의 아버지)이 재위한 15년 동안에 세 번의 반란이 있었고, 이어 즉위한 큰아들 헌강왕 역시 한 번의 반란을 겪었다. 그뒤를 이은 동생 정강왕은 명이 짧아 2년만에 죽었고, 다시 그의 누이 만(曼)이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제51대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은 즉위하기 전부터 유모의 남편이었던 각간 위홍과 사통(私通)하고 있었다. 그가 죽자 젊은 미남자들을 궁중에 끌어들여 '음란한 행각'을 벌였는데, 그들에게 관직을 주어 정사를 맡기니 풍기와 규율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자 누군가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지어 거리에 붙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여왕은 범인이 학자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대야주(大耶州:지금의 합천)에 사는 왕거인(王居仁)의 짓인 듯 하다는 주위의 말을 듣고 그를 붙잡아 가두었다. 왕거인이 분하다고 여겨 하늘에 호소하니 그날 저녁 감옥에 벼락이 쳤고, 겁에 질린 여왕은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직후인 889년, 국가재정이 궁핍해 지방에 조세를 독촉하자 전국의 농민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이후 온나라가 전란의 와중에휩싸인채 몇 년이 흐르게 된다. 최치원이 시국에 관한 의견 10여 항목을 건의한 것이 894년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조치가 따른 흔적은 없다. 몇 년뒤인 897년,여왕은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신라는 이제 경주 일원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전란후 중소 지방세력들을 규합한 견훤과 궁예가 각기 나나를 세워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진성여왕이 퇴위한 이후 39년간 5명의 왕이 있었으나, 이미 대세를 돌이킬수 없었다. 결국 제56대 경순왕은 스스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말았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보다는 개인적인 영향력이 훨씬 컸던 전근대사회라고 할지라도, 군주 개인의 역할이 국가 멸망의 직접원인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물론 방탕하거나 영약한 성격의 소유자일 경우, 국가의 쇠퇴를 촉진한 측면을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성격 역시 쇠퇴해 가는 사회적 분위기의 산물일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국왕과 국가의 관계는 이런 측면을 염두해 두면서 판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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