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주차-1 [발제 1][발제 2]


신라 초기 불교와 귀족세력

1.머리말

예전에는 "불교의 전래는 절대적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형성의 관념형태적 표현이였다"고 그 의의를 표현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이 결론은 두가지 문제로 재고되어야 한다. 그 첫번째로 재고될점은 전래라는 말은 수용이란 말로 바뀌어야 할것이며, 두번째는 절대적 왕권에 의하여 불교가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불교의 수용에있어서 국왕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데 대하여는 지금도 의심을 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 점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신라의 지배세력인 진골귀족의 존재를 너무나 무시해버린 경향이 있다. 즉 신라는 골품제도에 밑바탕을 둔 귀족사회였다. 그래서 진골 출신 귀족들로써 조직된 화백사회에 의해서 그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절대적왕권의 성립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중앙귀족들이 화백회의를 통하여 강력한 정치적 발언을 할 수가 있는 지위에 놓여있었다고 한다면, 이들 귀족에 의해서도 불교가 받아들여질수도 있었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예전에 불교수용과정에 있어서의 귀족의 역할을 부정적으로만 보았던 것과는 달리, 그 긍정적인 면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2.불교 수용과정에서의 귀족세력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연대는 지금껏 흔히 믿어지고 있는 것과 같이 법흥왕 14년(527)이 아니라, 법흥왕 21년(534)이나 22년(535)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있다.
현재도 이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이차돈의 殉敎에 따르는 기적으로 인하여 즉시 불교가 공인되었다는 것은 殉敎者를 찬양하려는 의도에서 뒷날에 꾸며진 이야기일 것이다. 다만 옛날에는 법흥왕21년(534)인지 22년(535)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여 연대에 모호한 구석을 남겨두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22년(535)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즉 신라에서는 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이 殉敎를 하고, 그보다 8년 뒤인 법흥왕 22년에 불교가 드디어 공인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신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이 문제가 표면화한 뒤에도 상당한 진통기를 거쳐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그 시기를 전후하여 나타난 일련의 정치적 사실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러한 정치적 사실들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법흥왕대 기사로부터 뽑아서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4년 4월 兵部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7년 1월 律令을 頒示하였다. 百官 公服의 服色 등급을 정하였다.
8년 梁에 使臣을 보내어 方物을 바치었다.
18년 4월 伊飡 哲夫를 임명하여 上大等을 삼아 國事를 총리케 하였다.
21년 上大等 哲部가 죽었다.
23년 처음으로 年號를 칭하여 建元 元年이라고 하였다.
25년 1월 敎하여 外官이 가족을 데리고 赴任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4년(517)에 신라 최초의 관부인 兵部가 설치된 뒤를 이어, 7년(520)에는 律令이 반포되고, 동시에 公服의 服色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제도가 짜여져 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내물마립간 26년(381)에 처음으로 고구려를 통하여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140년이 지난 법흥왕 8년(521)에 중국의 양에 사신을 파견한 것도 이러한 왕권의 성장 및 정치제도의 정비와 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25년(538)에 외관은 가족을 거느리고 임지로 부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52읍록의 지방관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이미 중앙집권적인 정치조직이 짜여져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왕권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배경 속에서 법흥왕의 흥륜사 창건 계획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흥륜사 창건운동은 귀족사회의 반대에 부닥쳐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국왕과 귀족회의인 화백회의 사이에 의견대립을 보여 준 예이다.
이렇게 귀족세력의 거센 반대에 부닥쳤던 불교가 어떻게 해서 법흥왕 22년(535)에 공인되기에 이르렀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법흥왕 18년(531)에 상대등이 설치된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상대등은 대등으로써 구성된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국왕 자신이 맡뎐 의장직을 상대등으로 하여금 대신 맡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 상대등의 설치는 그 이전보다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겠지만, 한편 아직 왕의 전제적 권력의 행사가 귀족 세력에 의하여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상대등은 국왕과 귀족 세력과의 일정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타협의 배경 속에서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기에 이르렀던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된다.
그런데 최초의 상대등 철부는 법흥왕 21년(534)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그의 후계자가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러한 공백상태는 다음 임금인 진흥왕 일대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적어도 상대등 철부의 죽음 자체는 모르더라도 그의 후계자가 임명되지 않은 것은 상대등의 설치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왕권과 귀족 세력 사이의 타협이 위기에 부닥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그럴 만한 것이라면, 그것은 왕권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법흥왕 23년(536)에 건원이란 연호를 처음 세우게 된 것도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법흥왕 22년(535)의 불교 공인은 이러한 왕궝의 승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것이 곧 왕권의 전제화였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진흥왕 다음인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하여 왕위로부터 축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써도 이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는 국왕의 주동적인 추진에 의해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귀족 세력과의 일정한 타협의 기반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으리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3.轉輪聖王.釋迦佛 및 彌勒菩薩의 신앙

왕권과 귀족 세력과의 관계를 불교의 신앙면에서 추구하는 경우에 주목에오르는 것은 釋迦佛과 彌勒菩薩에 대한 신앙이다. 삼국시대의 신라에 있어서 釋迦佛과 彌勒菩薩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불상도 그들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었다.
釋迦佛은 비록 過去佛이긴 하지만 가장 가까운 시대에 지상에 와서 설법을 한 如來였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불교를 수용한 초기에 釋迦佛은 如來의 대표적인 존재로 믿어졌다.
그런데 그 釋迦佛이 마치 왕권의 상징과 같이 생각되기도 하였던 것이 주목을 끈다.
그 예로, 진평왕때의 왕이나 왕족들의 이름을 통해서 엿볼 수가 있다. 즉 진평왕은 釋迦의 아버지인 白淨과 그 이름이 같고, 그 妃는 釋迦의 어머니 摩耶부인과 그 이름이 같다. 그리고 진평왕의 두 왕제의 伯飯과 國飯이란 이름은 釋迦의 숙부의 이름 그대로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진평왕과 왕비 摩耶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은 바로 釋迦에 해당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만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있었으며, 따라서 석가에 비길 수는 없게 되었지만, 선덕여왕이 여자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는 이유는 이러한 관념과 인연이 있었음직하다. 이같이 신라의 왕국을 釋迦에 비기어보려는 생각은 결국 釋迦의 권위를 빌어서 왕권의 강화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를 예전에는 '王卽佛'의 북방불교의 영향이라는데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표시한 바 있었지만, 지금은 '王卽佛'의 호국적 신앙이야말로 신라 초기 불교신앙을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彌勒신앙이 [彌勒上生經] 아닌 [彌勒下生經]에의한 신앙이었으며, 그리고 彌勒菩薩은 신라에 화랑으로 탄생했다고 믿어지고 있다. 화랑으로서의 죽지랑이나 김유신의 경우, 그리고 彌勒선화의 설화가 이러한 신앙을 잘 전해 주고 있다.
그런데 轉輪聖王의 치세는 彌勒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으로 되어있어서, 轉輪聖王과 彌勒菩薩과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것이 신라에서 하나는 국왕이요 하나는 화랑인 것이다. 화랑은 귀족의 자제, 아마도 진골귀족의 자제가 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문자 그대로 신라 귀족의 꽃과 같은 존재였다. 말하자면 귀족 세력의 상징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국왕과 화랑이 轉輪聖王과 彌勒菩薩로 생각된 사실에 근거해서, 신라사회에 있어서의 왕권과 귀족 세력이, 불교신앙면에서 어떤 조화를 얻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결코 지나친 억측만은 아닌듯 싶다.
轉輪聖王과 彌勒菩薩과의 관계에서 뿐아니라, 釋迦佛과 彌勒菩薩과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점은 약간의 차이점을 지닌 대로 역시 찾아볼 수가 있다.
삼국시대의 신라에서 半跏형의 彌勒菩薩상은 불사에서 중존으로 모셔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것이 본존이면서도 如來상이 아닌 菩薩상이었다. 또 그것이 화랑으로 화생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은 釋迦가 如來상이고, 그 釋迦가 국왕에 견주어졌던 사실과 비교해서 생각할 때에, 자연히 왕권과 귀족 세력과의 관계에 생각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즉 轉輪聖王과 彌勒菩薩의 경우와 같이, 이 사실도 왕권과 귀족 세력의 융화를 상징하여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백제의 서산 마애산존불상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중앙에 여래상이 있고, 향해서 그 바른편에 반가상의 미륵보살이, 왼편에는 다른 또 하나의 보살상이 있다. 그런데 중앙의 여래상의 불명은 현재 밝혀지지가 않고 있다. 이 특이한 양식의 삼존상은 삼존불의 의궤만으로써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고, 따라서 삼존불의 제약을 떠나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與願 . 施無畏의 手印으로봐서 중앙의 주존은 석가여래로 보는 것이 극히 자연스로워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주존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쪽에 그것을 모시는 보살이 있는데, 그 하나는 미륵보살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석가불과 미륵보살은 하나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국왕과 화랑, 혹은 국왕과 귀족과의 조화를 상징하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백제의 사실을 신라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 의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의 몇가지 점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결은 결코 부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첫째로, 백제에도 화랑도와 비슷한 청년조직이 존재했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고구려의 경당에 대한 설명을 보면,
여기서 讀書와 習射를 하였다.([舊唐書] 고구려).

백제의 경우에는 비록 경당과 같은 어떤 조직체에대한 언급이 없는대로,
俗에 騎射를 중히 여기고, 겸해서 墳史를 사랑했다.([周書] 백제전).

이 두 기록은 보는 바와 같이 상당히 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백제에도 讀書와 習射를 겸수하는 청년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백제에도 화랑도나 경당과 비슷한 청년조직이 있었다면, 백제의 미륵보살신앙을 그러한 청년조직과 관계지어 생각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둘째로, 신라의 화랑이 미륵신앙과 연결되는 것이 백제로부터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시사가 있 기 때문이다. 즉 眞慈師는 미륵이 화생한 동자를 만나러 백제의 용주(공주)까지 갔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백제와 신라의 청년조직 혹은 미륵신앙이 서로 상통할 수 있는 일면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세째로,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산의 서북쪽 골짜기의 명승지는 신라의 화랑도가 遊娛했다고 하는 명산대천으로서의 조건을 갖춘곳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산은 백제의 서북단에서 서해를 바라다보는 위치에 있어서, 중국이나 고구려로부터의 해상침략에 노출되어 있는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난 의미를 신라의 화랑도와 연결지어 생각해 본다는 것이 노상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이같은 몇가지 점에서 미루어 볼 때에, 이 서산마애삼존불상에 나타난 의미가 신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게 아닐까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신라의 불교신앙의 대상으로서 대표적 존재인 석가불과 미륵보살은 신앙면에서 왕권과 귀족세력을 상징해 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양자의 조화 위에 신라의 불교는 성장하였다고 믿는 것이다. 아마 전륜성왕과 미륵보살의 경우보다는, 석가불과 미륵보살의 경우가, 보다 더 왕권의 우세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여래와 보살은 상하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4.輪廻轉生思想과 귀족

지금까지 신라에 있어서 불교는 왕권의 독점물이 아니었으며, 귀족도 일정한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그 신앙체계가 짜여져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왔다. 이제 그러면, 귀족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어떠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겠다.
이 점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輪廻轉生思想이 아닐까 한다.
삼국시대의 윤회전생사상을 말해 주는 것으로는 우선 불상의 造像記들이 있다. 이들 조상기를 우리 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景 4년 辛卯에 북병 道須와 여러 善知織인 那婁 . 賤奴 . 阿王 . 阿 의 5인이 함께 无量壽像 1軀를 만든다. 바라건대 돌아간 스승및 父母가 다시 날 때마다 마음속에 늘 諸佛을 기억하고, 善知織들은 彌勒을 만나기를 바란다. 소원이 이러하니, 함께 한 곳에 나서 佛을 보고 法을 듣게 하소서(辛卯銘金銅三尊佛).

(2)建興 5년 丙辰에 佛弟者 淸信女 上部 兒奄이 釋迦文像을 만드니, 바라건대 나고 나는 세상마 다에서 佛을 만나 法을 듣게 하고, 一切衆生이 이 소원을 같이하게 하소서(丙辰銘金銅三尊佛).

(3)癸未年 11월 1일에 寶華가 亡父 趙 인을 위하여 만든다.(癸未銘金銅三尊佛).

(4)鄭智遠이 亡妻 趙恩를 위하여 金像을 공경히 만드니, 빨리 三塗를 떠나게 해주소서 (鄭智遠銘金銅如來立像)

(5)甲申年에.....釋迦佛을 만드니, 諸佛을 만나서 길이 고통에서 떠나고.....(甲申銘金銅釋迦坐像).

(6)延嘉 7년 己未에 高麗國 樂良 東寺主 敬과 弟者 僧 演과 師徒 40인이 賢劫千佛을 만들어 流布하니, 第29回의 現世佛은 북병 도 이 供養하는 바다(延嘉匕年銘金銅如來立像).

(7)永康 7년 甲 에 亡母를 위하여 彌勒尊像을 만드니, ........바라건대 亡者로 하여금.....慈氏三會......만일 罪가 있으면 위와 같이 바랄때 소멸하고.... 隨喜者들이 이 소원을 같이하게 하소서(永康匕年銘金銅光背).

(8)甲寅年 3월 26일에 弟者 王延孫이 現世의 父母를 위하여 金銅釋迦像 1軀를 공경히 만드니, 바라건대 父母라 이 功德으로 現身이 安穩하고, 나는 세상마다에서 三塗를 거치지 않고 八難을 멀리 떠나 빨리 淨土에 나서 佛을 보고 法을 듣게 하소서(甲寅銘釋迦像光背).

이들 조상기는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첫째는 윤회전생하는 육도중에서 지옥. 아귀. 촉생의 삼도를 빨리 떠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원은 또 요컨대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도 된다.
둘째로, 장차 태어나는 세상에서 佛을 만나 法을 듣고 깨닫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未來佛로서 장차 이 세상에 하생하여 설법을 한다는 미륵불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것은 곧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나기를 비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
세째로, 그것은 대개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추선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따리서 이들 조상기에서는 주로 내세에 대한 관심이 표시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내세가 인간세계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현존하는 이들 조상기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운회전생사상은 대체로 그대로 신라의 경우에도 해당되리라고 믿는다. 실제로 신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윤회전생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어머니의 赴音이 이르니 眞定은 跏趺坐를 하고 禪定에 들어가 7일만에 일어났다. 설명하는 이는 '追慕와 슬 픔이 지극하여 거의 견딜 수 없으므로 定水로서 씻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禪定으로써 어머 니의 난 곳을 관찰한 것이다'고도 했고, 혹은 말하기를 '이는 곧 實理와 같이 冥福을 빈 것이다'라고도 했다. 禪定에서 나오자 後事를 義相에게 고하니, 義相이 門徒를 거느리고, 小伯山의 錐洞으로 가서 草家를 짓고 徒衆 3천을 모아 90일 동안 華嚴大典을 講하였다. (중략) 講이 필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이미 하늘에 났다.'고 하였다. ([三國遺事]5,孝善 眞定師孝善雙美).
여기서 진정의 어머니는 진정이 베푼 공덕으로 인하여 죽어서 천상에 난 것으로 되어 있다 비록 인간세계가 아닌 천상으로이긴 하지만, 추선으로 인하여 내세에 좋은 세계에 전생한다는 줄기는 같다고 하겠다.
이같은 공덕사상 혹은 인과응보설에 근거를 둔 윤회전생사상은 골품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긍정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지배귀족들이 이 윤회전생사상을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해 주는 이론으로 받아들였을 것임은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는 일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전세에서의 어떤 그럴 만한 공덕의 응보로써 귀족으로 태어났다고 믿었을 것이며, 또 그것은 당연한 일로 사회적으로 용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때에, 윤회전생사상은 신라의 골품제도를 강력히 뒷받침해 준 이론으로서 신라의 지배세력인 진골귀족들로부터 크게 환영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점은,통일 뒤에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한 굴품제도에 비판적이던 육두품귀족이나 평민 혹은 천민들이 윤회전생사상에도 또한 비판적이었던 사실에서 역시 증명이 된다.
또 하층의 피지배신분층을 중심으로 성행한 정토신앙도 같은 불교신앙이지만, 윤회전생사상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었다. 정토신앙은 곧 윤회전생사상의 극복을 그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 정토신앙을 믿은 신자의 주류는 골품제도밑에서 시달림을 받는 민중들이었다. 거기에는 노비신분의 소유자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현실을 지배하는 골품제도의 질서에 대한 반항으로서 윤회전생사상을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5.맺음말

예전에는 불교 수용에 있어서 왕권을 긍정적으로 파악한데 대하여 귀족을 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았었다. 현재는 이점을 반성하고, 귀족이 지니는 적극적 의미가 무엇이었나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 점을 검토할 사료가 비교적 남아 있는 신라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그결과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로, 불교 수용과정에서 그 수용을 적극 주장한 것이 국왕이어던데 대해서 귀족은 이에 반대하였다.
다음은 국왕을 전륜성왕및 석가불에 비기는 반면, 화랑을 미륵보살의 화생으로 믿는 신앙에 주목하여, 이를 통해서 왕권과 귀족세력이 불교의 신앙면에서 일정한 질서 속에 조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면 신라의 귀족들에게서 불교는 어떠한 적극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윤회전생사상에 주목하고, 이것이 골품제도라는 엄격한 신분제에 뒷받침된 귀족의 특권을 정당화시켜 줬다는 점을 중요시 해야한다. 물론 귀족들이 현세에서의 이익을 구하기도 하고, 또 내세의 행복을 바라기도 하였음은 분명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이러한 그들의 신분적 특권을 정당화시켜 주는 사상에 큰 매력을 느꼈을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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