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


전    쟁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쟁은 종교, 정치, 문화, 경제상의 갈등 등에서 비롯된다. 그것들은 단독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전쟁을 유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에도 전쟁은 적지 않았다. 역사서를 통해서보면, 우리나라 고대의 전쟁은 대개 3단계로 나누어 볼만하다. 고대국가가 막 성립되어가는 시기에는 이웃 종족간에 우열을 가리면서 국가의 기반인 영토를 확보해가는, 국가 성립을 지향한 전쟁 단계가 있었다. 다음은 고대국가가 정립되어 이제는 삼국을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간의 경쟁에서 비롯된 장기간의 전쟁이 지속되는 단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삼국간의 대결에 중국이나 왜가 연결되어 국제전의 성격을 띠는 단계가 있었다. 이제 각 단계의 전쟁양상과 거기에 담긴 역사적 의미 등을 살펴보자.

1. 삼국성립기의 전쟁

삼국의 국가 성립 초기의 전쟁은 건국 주도세력의 정착과 거점의 확보를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면이 적지 않다. 시조들에 관련된 전쟁이나 대외관계사에는 시조들의 심통력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는 이질적인 집단들이 접촉하여 새로운 세력을 결집하는 국가 성립 초기의 상황에서는 영웅들이 신통력이나 탁월한 무력을 가지고 여러 집단 위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가 막 시작되는 시기에는 집단 내의 계급 대결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성원간에도 종교적 차원이나 생존의 면에서 여전히 기존의 유대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때는 정상적인 남자 구성원은 모두 전사(戰士)가 되어야 했다. 이는 국가 성립 이전에 공동체 성원들이 행하였던 공동의 공격과 방위의 전쟁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가 체제를 갖추어가면서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는데 이제는 보다 구분된 전문적인 지휘체계와 부대체계를 이룬 군사력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국가적 목표에 따라 여러 부(部)의 병력이 단독 혹은 협동하여 작전에 임하였다. 그런데 이 단계에도 병사들은 국가의 핵심세력을 이루는 5부나 6부 출신 즉 왕도(王都)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대체로 삼국시대 전반부에는 지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물론 신라와 같이 국가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나라에서는 후반부의 일부 기간에도 이같은 형편이 유지되는 면이 있었지만 삼국시대 전반부의 전쟁은 삼국 성립과정의 대외적 표현이라 정리해 말 할 수 있다.


2. 삼국시대 후반의 장기전

삼국 후반기에 들면서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나아갔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국력 대결을 벌였다. 5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남하정책(南下政策)이 추진되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침략에 공동대응하였다. 이후에는 삼국간에 국가전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후반의 전쟁은 근 3백 년간이나 간헐ㆍ지속적으로 벌어졌다. 왜 삼국간에는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렇게 장기간 지속되었을까. 그기고 이 전쟁의 특성은 무엇이고 전쟁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삼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데서 찾아진다. 삼국시대 중반 이래 철기(鐵器)가 일반 백성의 생활에까지 널리 쓰이고 농업기술도 점차 발전하게 됨으로써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나라의 부의 창출은 농업에 보다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형세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에 자신의 여건 개발이나 개선보다는 남의 것을 빼앗는 데 익숙한 체질을 가지고 있던 고대의 지배층들은, 다른 나라의 부의 창출수단인 농토와 농민 탈취에 진력하게 되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전쟁은 방어를 낳고 또한 보복전으로 이어져 이같은 전쟁의 악순환이 있게 되었다.
삼국간의 전쟁이 이같이 삼자간의 갈등과 견제 속에 지속되는 데는 이들간의 경쟁에 외부세력이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던 사실이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 중국 북부에 북위(北魏)가 자리하여 안정된 세력을 구축하게 되고 고구려와 평화관계를 이룸으로써 삼국은 2세기 가까이 자신들끼리의 경쟁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삼국간의 전쟁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 장기전(長期戰)의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단순히 장기전이었다고 정리하고 말 수는 없다. 전쟁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왕실이나 귀족, 왕경민만이 참여하는 전쟁이 아니라 확대된 전쟁을 감당하기 위하여 지방민까지도 전쟁에 동원되는 총력전(總力戰)의 양상으로 발전해갔다.
전쟁이 장기전 그리고 총력전으로 되면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서는 경제전(經濟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군량이나 무기, 갑옷 등을 마련하여야 했다. 이것들은 두말할 것 없이 재정이 있어야 갖추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재정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는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생업인 농업의 발전에 노력을 기울였다. 국가적으로 제방을 적극 쌓고 관심을 기울여 관리하였다. 농업의 발전과 장기적인 전쟁을 통한 인적 물적 손실 및 군공의 포상은 일반민들간의 빈부 차이를 심화시키고 지위의 분화(分化)를 촉진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6세기 말 7세기 초 고구려의 경우에는 3등호제(三等戶制)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에도 지방민을 국가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원함으로써 본래 왕경민에게만 부여되었던 골품제가 변모하는 변화가 따랐다. 일반민들에게 미친 전쟁의 결과는 국가 내에서 일반민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 면도 있다. 과거에는 병사가 될 수 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군공(軍功)을 통하여 하급 군관이 되기도 하였고 농업의 발전에 따라 부자가 되는 자도 있게 되어 아울러 일반민들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점차 확립되어갔다.


3. 삼국시대 말의 국제전

삼국간의 전쟁이 간헐적으로 지속되는 중에 삼국간의 세력균형 그리고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온 국제적인 세력균형이 깨어지면서 재편되는 변화가 있게 되었다. 이같은 변화를 압축적이고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사건은 551년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옛 백제의 수도 일대인 한강 유역을 빼앗은 일이었다. 이 사건은 곧 신라가 삼국의 역사 특히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사실과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그 사건이 있을 수 있었던 조건들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데는 신라의 차분한 성장과정이 있었다. 신라는 국가의 체제정비가 지속되어 왔고 많은 성을 쌓아 국방을 확고히 하면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갔다. 그리고 지방의 행정구역을 더욱 체계화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보다 보편적인 사상체계를 마련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관제를 정비하여 차분히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이어 진흥왕은 이같은 전단계의 기반에서 과거 진한과 변한의 상당지역을 아우른 국력을 바탕으로 백제와 더불어 한강지역의 쟁탈에 나섰다. 그는 일단 함께 빼앗은 다음에 방심하고 있던 백제를 공격, 이 땅을 독식하였다. 그런데 신라가 이같은 국력의 성장과정에서 한강 유역을 차지 할 수 있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 고구려가 처한 여건이었다. 우선 고구려의 국력이 장수왕이나 문자명왕시의 전성기에 비하여 쇠퇴과정에 들어가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정복왕으로서 귀족들 위에 성스러운 태왕(太王)으로 존재하던 고구려왕은 오랜 평화기를 지내는 동안에 오히려 귀족세력 특히 외척들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세력쟁탈전으로 그 존엄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데는 이같은 내부적 요인과 더불어 국제적인 세력변동도 한 원인이 되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 지역의 농업생산을 통하여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아울러 이 지역을 통하여 중국 왕조들과 활발히 외교와 교역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보인 비신사적인 면은 백제를 극도로 자극하였고 국토를 상실한 고구려의 적대감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여 진평왕대 이후 백제와 신라 아울러 고구려와 신라의 대결은 점차 고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제는 종전과 달리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즈음 중국에 큰 변동이 있었다. 그것은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이다(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는 사방 주위의 나라들에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였다.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고 형식적인 사대만을 취하였다. 백제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는 외교책을 쓰지는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막고자 하여 수에 적극 사대하며 그 힘을 이용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이제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여전히 동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가 충돌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것이 려ㆍ수간의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는 고구려의 방어 성공과 수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 수의 멸망은 국내적인 반란 등이 끊이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 되었지만 역시 고구려 원정에서 입은 인적 물적 손실이 지대하였던 점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에는 수나라가 망한 후 당나라가 등장하였다. 당의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은 팽창주의자였다. 이에 영류왕은 당과 평화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으나 당태종의 야욕에 의하여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우호관계를 희망하는 정책을 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수축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에 당과 고구려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의자왕이 즉위한 다음해(642)에 백제는 40여 성을 신라로부터 빼앗았다. 이어 같은 해에 재차 신라를 공격하여 백제와 신라간 전략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김춘추의 사위가 지키고 있던 대야성을 빼앗았다. 대야성전투에서는 항복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백제군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신라는 현실적으로 매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당시 실권자였던 김춘추의 개인적인 원한도 크게 깊어졌다.
바로 이때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하였다(642년).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자원하여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구원 출병을 요구하였다. 고구려는 마땅히 과거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지금은 신라의 영토가 된 지역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 교섭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고구려와 백제는 오히려 화친관계를 맺었다. 이에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 태종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의 오만함을 꺾으려 하였던 당과 백제의 공격에 의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협을 받고 있던 신라는 비교적 손쉽게 연맹을 맺게 되었다. 여기서 당과 신라가 연결되고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백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던 왜가 부수적으로 연결되어 국제적인 연맹세력간에 대립하는 형세가 연출되었다. 655년 고구려와 백제가 말갈까지 동원하여 신라를 쳐서 33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신라 무열와(김춘추)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과의 약속을 환기하여 당나라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당은 정명진과 소정방이 지휘하는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곧 귀환하였다. 659년 백제의 공격이 계속되자 신라는 재차 당군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준비를 갖춘 당나라는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을 파견하여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합세, 백제를 공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고 백제를 멸망시켰다(660년). 그런데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왜는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돕고자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백제를 구하는 작전에는 나서지 않았다. 당나라 침략의 최종 목표가 고구려 자신인 것을 잘알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당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강화함은 물론 백제의 일로 위험스런 당과의 결전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668년 일단 고구려가 멸망함으로써 삼국간의 전쟁은 물론 중국측과 고구려가 대립하면서 벌여온 국제전도 마감을 고하였다. 그러나 당을 끌어들인 신라는 당군을 물리쳐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676년까지 계속하여야 했다.
중국측과 고구려가 주축이 되어 싸운 6세기 말 이래 전개된 국제전은 당나라가 이 지역에서 정치, 문화의 주도국으로서 자리하면서 종결되었다. 신라도 오랜 전쟁에서 벗어나 확대된 영토와 주민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의 정치를 시도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삼국통일

수세기에 걸친 삼국간의 전쟁은 중국세력이 가담하는 국제전의 양상을 겪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과 신라와 당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당은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을 위시하여 신라까지도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의도를 간파하고 끈질긴 저항 끝에 당군을 겪퇴하여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지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신라에 의한 삼국의 통일은 여러 면에서 우리 민족구성원들에게 미흡한 감을 주고 있다. 우선은 삼국의 영토 중 고구려의 영토였던 넓은 만주지역을 영토화하지 못했다는 점이 상기된다. 그리고 외세인 당나라를 이끌고 와서 고구려나 백제를 멸망시켜야 했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한다. 이러한 아쉬움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할 수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지도 한다. 이 의문은 왜 삼국 중 가장 후발세력인 신라가 통일할 수 있었나 하는 의문과도 같은 답을 가진 것이다.

1. 고구려는 왜 멸망했나

하나의 국가가 멸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다. 정치, 군사, 경제, 종교, 도덕상의 원인들이 국가를 점진적으로 혹은 일시에 멸망케 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멸망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대내적인 요인과 대외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대외적인 면을 살펴보면 군사적인 면에서 돌궐족의 강성과 침략이 있었던 일과 중국의 통일세력인 수.당의 침략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고구려 멸망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음으로 대내적 요인에는 사회적 경제적 원인과 대외교섭의 장애가 있다. 사회경제적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면 고구려는 사회 경제적인 발전의 길을 꾸준히 밟아나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본서 제1편에서 본 대로 고구려의 조세제는 역사적 발전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가 경과하여 재산 차이가 커지게 되었어도 그 재산의 차이를 크게 반영한 조세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국가의 재정적 필요와 주민들의 불만을 약간 반영하여 3등호제를 대단한 것처럼 내걸고 재산의 차이에 의한 차등(差等)세제를 실시하였지만 내용은 지배층의 기만성을 드러내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 멸망의 내부적 근본원인은 사회발전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던 체제의 고대적 한계성(限界性)에 있었던 것이다. 대외교섭의 장애로는 나당과의 전쟁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고구려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이때의 전쟁은 고구려와 당의 대결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수와의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던 만큼 전쟁을 획책하는 당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를 펴서 충돌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점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양국간의 평화적인 관계의 정립을 막았을까.

첫째는 고구려의 안일한 대외인식이 결과적으로 양국의 충돌을 가져왔다고 보인다.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에서 그들을 격퇴하여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당은 수보다 강한 나라였다. 주변의 토욕혼(土浴渾)이나 고창국(高唱國)을 위시하여 많은 유목민족을 굴복시키고 더구나 신라의 군사력과 결합되어 있는 세력이었다. 이러한 당에 대하여 고구려는 그 실체를 과소평가하고 적극적인 대처를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당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의도가 거의 확고하였던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과거 요동이나 고구려의 수도가 한(漢)의 군현(郡縣)이었음을 주장하면서 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아울러 수나라 군사들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명분도 내걸었다. 한편 고구려가 당과의 교섭에서 능동적인 자세를 갖지 못한 것은 대외적 인식이 과거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 것만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보장왕대 고구려정권이 갖고 있던 성격에서 연유한 바가 있었다. 고구려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왕을 정점으로 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내용상으로는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이 왕보다 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의 침략의도와 연개소문의 물러날 수 없는 정치적 위상이 양국의 타협을 구조적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연개소문의 출현과 집권은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한 면이 있다고 여겨진다.


2.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고구려가 최대의 강국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대에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던 가장 후발국인 신라가 삼국간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엄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혹자는 화랑도 정신 때문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고 또 혹자는 외교정책의 성공이 승리를 가져왔다고 한다. 전자는 승리의 내적 요인의 하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젊은이나 백제 계백의 오천결사대의 자세도 화랑도의 용감성에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이 개입하기 이전 7세기 전반의 삼국간 전쟁에서 신라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후자는 대외적 요인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는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파악하고 중국을 통일하고 동아시아의 확실한 패자가 되고자 한 수와 당의 의도를 간파하여 이들을 경쟁에 끌어들여 위기를 오히려 승리의 계기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는 확실히 외교전의 승리라고 평가할 만하다.
두 나라에 비하여 신라사회는 아직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 격화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일 후 상당기간이 흐른 후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격화되면서 후삼국의 분열기를 맞았던 것이다. 삼국간 경쟁에서 주민들간의 갈등이 적고 국가의 성장이 가져다주는 감격에 취하여 있던 신라인들은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성원간의 갈등이 적었던 만큼 사회는 안정되었고 그 기반 위에서 강한 응집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던 국가간의 전쟁에서 주민들이 단결하여 생명까지도 국가를 위해 바치겠다고 나서는 나라가 승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3. 당군의 축출

당나라는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곧바로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왕문도(王文度)를 도독(都督)으로 임명하고 당군을 진주케 해 백제를 자신의 영토로 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리고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였다. 665년에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구백제 지역을 한반도에서 당 세력의 발판으로 하고자 하였다. 이로인해 당과 신라는 감정적인 면에서 이미 적대적인 관계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 유민들은 안시성(安市城)을 위시하여 곳곳에서 당군에 저항하고 있었는데 신라는 이들을 도와 당군을 축출하는 데 함께 나섰다. 백제의 경우 초기에는 자체의 부흥군을 중심으로 당이나 신라에 대항했으나 뒤에는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신라와 대항하는 자세를 보였다. 신라와 고구려 유민들을 중심을 한 당군(唐軍)과의 치열한 전투는 지속되었다. 675년 당나라의 장군 이근행(李謹行)이 지휘하는 20만군이 지금의 경기도 양주인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여, 군마 3만 3백8십 필을 얻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 이후로 당군의 장항 앞바다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의 군선을 공격하여 적 4천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얻었다. 이후로 당군은 완전 철수하여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한반도 이남지역을 통합하였다.


4.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신라의 삼국통일은 비록 미흡하게 느껴지는 점이 많다고 하여도 그 정도의 성과를 얻기 위하여 신라를 위시하여 삼국의 우리 조상들이 치른 희생은 실로 막대하였다. 이제 삼국통일 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알아 보겠다.
이종족의 나라인 당이 삼국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도 앞에 삼국민은 그 출신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일단 당을 공동의 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으며 협조 속에서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계기르 마련했던 것이다. 이같은 점들로 볼 때 신라의 통일은 미흡한 점이 많지만 그 민족사적 의의를 가볍게 볼 수 없다. 특히 당과의 전쟁을 통하여 삼국민이 서로 하나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점은 민족형성사에서 매우 중대한 성취였다. 더구나 고구려의 옛땅에 발해가 다시 성립했지만, 그 지역과 주민의 대부분은 고려의 재통일에 수렴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신라가 통일한 영토와 주민은 고려의 영토와 주민으로 이어지고 오늘날 우리 민족의 기반이 되었다. 신라의 통일은 한민족의 형성에 기본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통일은 큰 진전을 예고 하였다. 우선 삼국의 고대적 지배체제가 일단은 세 개에서 하나로 줄어 피지배층은 과거보다는 지배층으로부터 수탈을 덜 당할 수 있는 여건의 하나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통일신라 주민들에 대한 조세 경감이나 토지 분급(分給)등은 이같은 체제 재편에 의해 생긴 여유를 이용한 면이 적지 않다.
전쟁의 종식은 당시 인간들 특히 큰 기약없이 전쟁의 신체ㆍ재정적인 부담을 지고 있었던 일반인들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던 것이었다. 이 평화야말로 어떤 고상한 이유들보다 삼국통일의 가장 현실적인 성과요 의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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