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


        5-6 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2) 朝貢. 冊封關係의 '名' 과 '實'

西周時代에 각각의 영토와 인민을 통치하는 독자적인 정치단위였던 小國들이 周(주)를 중 심으로 上下關係를 맺어 하나의 世界를 형성하였고 이 국제정치권 내에서 주왕실과 소국 간의 관계를 제도화한 것이 朝貢과 冊封이다. 小國의 지배자는 周의 天子에 의해 五等으 로 序階化(서계화)된 爵號(작호)를 책봉받고 그 대신 朝勤(조근)과 貢物(공물)의 臣禮(신 예)를 행하여 君臣關係(군신관계)를 맺었다. 周의 天子는 이를 통해 諸侯國(제후국)들을 간접적으로 통치하였고 이러한 황하유역 小國들 간의 관계를 규정하였던 朝 , 冊의 제도 가 漢代이후 중국과 그 주변국과의 관계에 적용되었다.
중국의 왕조와 인근국 간의 朝貢,冊封關係가 朝貢國의 움직임을 일정하게 규제하는 上下 關係로써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고 當代(당대)의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규범적 논리가 되어 지려면 최소한 몇가지 측면이 지켜져야 한다. 즉 被冊封國이, 먼저 冊封國과의 교섭에서 제후국으로서의 上下의 儀禮를 준수할 것, 그 對外關係에서 冊封國의 적대세력과는 적어 도 공식적인 友好的 관계는 맺지 않을 것, 冊封國과 朝貢 및 朝,冊關係를 맺고 있는 집단 에 대해선 임의로 공격하거나 복속시키지 않을 것, 土産品 등을 貢獻하고 간혹 필요할 때 助力軍의 도원에 응할 것 등을 甘愛하여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길 때는 冊封國이 실제 응 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들이 지켜져 상호관계가 유지된다면 자연 중국왕조 는 被冊封國의 內政에는 干與(간여)치 않더라도 피책봉국의 국제사회 내에서의 위치를 일 정한 틀안에 고착시켜 둘 수 있어 전체적으로 自國중심의 국제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5세기 이후 중국왕조와 각국 간의 朝,冊關係의 구체적인면을 검토해보면, 먼저 고구려와 북위 간의 사실에서 儀禮的인 面을보면 고구려는 460년대 이후에 빈번히 朝貢使를 보내는 등 平常的인 交涉에서 대체로 충실히 被冊封國으로서의 禮를 행하였다.
그러나 儀禮上의 마찰이 있었다. 北魏帝의 調書(조서)에 대해 고구려왕이 禮를 갖추어 親 愛할 것을 거부하는 事端(사단)도 수차 있었고 5세기 말에는 이로 인해 北魏使 房亮(북위 사 방양)이 귀국한 후 파면되기도 하였다. 그 다음 對外關係면에서는 북위와의 朝,冊關係가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前章에서 보았듯이 고구려는 북위의 적대국인 南朝 및 柔然과 交結하였다. 그리고 북위에 조공을 하였던 地豆于(지두우)나 潔丹에 대해 攻略하여 그 일부 를 휘하에 복속시켰다. 또한 北燕件(북연건)에선 北魏의 詔諭(조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北魏軍과 正面 대결했다. 그리고 470년대 초 북위의 請婚件(청혼건)을 둘러싼 양국 간 의 분규에서도 보듯 북위의 일방적인 요청이나 더욱이 병력 징발 같은 것은 고려될 여지도 없는 관계였다. 그러한 被冊封國 고구려의 대응과 정책에 대해 北魏의 무력에 의한 응징은 전혀 없었다. 이렇듯 고구려와 북위간의 朝,冊關係는 지극히 名目上의 上下關係에 불과한 것 이다.
고구려가 그간 海外 즉 遼海 以東의 九夷를 총괄하여 왔으니 새삼 북위가 이 지역의 문제에 개입할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대신 고구려가 계속 북위에 충실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에서 양국이 朝,冊의 儀禮라는 名目上의 上下關係를 나타내는 外套(외투)하에서 실제적으로 피차 상호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存(병존)의 방책을 취해 友好的 關係를 유지하였다.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구려와 북위와의 朝,冊關係의 성격이 그러할진대 바다를 사이에 둔 고구려와 南朝의 그것은 더 분명하다. 고구려가 南朝와 北魏 양측과 通交하면서 어느 측에 대해서도 '强盛不愛制'한다는 南朝人의 표현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 中國王朝와의 朝,冊關係가 지니는 이러한 面은 고구려와 南,北朝간의 것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닌 餘他國과의 사이에서도 비슷한 面을 볼수 있다. 吐谷渾(토곡혼)은 南,北朝 모두와 朝,冊關係를 가졌다. 北魏가 吐谷渾에 대해 名實相符한 君臣關係를 확립키 위해 '不修職貢'을 내세워 수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그 결과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吐谷渾은 一面 북위에 被冊封國으로서의 朝貢의 儀禮를 행하면서도 一面으로는 南朝 및 柔然과 연결하여 북위의 압박에 대항하는 정책을 시종 고수하였다. 그리고 南朝에 대해서도 예컨데 南朝使 丘冠先(남조사 구관선)을 토곡혼왕이 無禮하다고 斬殺하였으나 南朝側이 이에 대해 어떠한 응징책도 구사치 못하였던 사건은 이 시기 양국 간의 朝,冊關係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그런 가운데서 吐谷渾은 그 주변 집단들을 휘하에 굴복시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곧 토곡혼과 南,北朝간의 朝,冊關係도 명목상의 上下關係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의 유지는 사실상 대등한 국가 대 국가로서의 상호 필요에 따르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 朝,冊關係가 항시 모두 冊封國의 강제력이 수반되지 못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留意하여야 할 사실은 이 朝,冊關係는 冊封國의 직,간접의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被冊封國이 된 이들 국가의 自意的인 노력에 의해 맺어지고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自意에 의해 一方的으로 이 관계를 중단하기도 하였다. 곧 이 朝,冊關係에서의 특이할 점은 中國勢(중국세)의 팽창에 있는 것이 아닌 오히려 被冊封國의 成長에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주도적인 노력에 의해 중국문물을 수용해 자기 사회의 성장을 도모해 나갔다. 이 시기 이들 국가의 朝貢의 대상은 중국의 特定王朝가 아니라 地大物傳(지대물전)한 文明國으로서 오랜 歷史體인 중국 그 자체이었다. 그만큼 중국 中心의 東아시아 文化圈이 확충되어져 갔다.
이상에서 볼 때 5-6세기 東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南,北朝와 인근 諸國(제국)간의 교섭의 형태였던 朝貢,冊封關係는 명분상으로는 양자간의 上下關係를 규정한 것이었으나 실제 국제관계를 움직여나가는데 있어서는 그것이 표면상 내세우는 논리가 구현되지 못했다. 곧 名과 實의 현격한 괴리를 보였다. 이 시기 국제정국을 주도하던 주요 세력의 하나이었던 柔然(유연)은 순수한 유목민국가이었지만 유연의 움직임은 직,간접으로 그 주변국가들에 큰영향을 끼쳤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근본적으로 북아시아 유목민사회는 馬,鐵(철),곡물 등을 상호교역하였으며 西域方面으로부터의 文化의 傳來(전래)와 교역을 중개해 주었다.
이 시기 柔然과 南,北朝간의 교섭 형태를 살펴보면 먼저 南朝側에선 柔然使의 來到를 朝貢으로 일관되게 기술하였으나 유연이 南朝에 보낸 國書에선 피차를 '吾' '足下' 로 표현하였다. 이에대해 남조측에선 유연이 自稱大號하며 중국과 抗禮(항례)하지만 그 나라가 殷盛(은성)하고 북위의 숙적이므로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실제상 양국관계는 그 교섭 형식에 있어서도 대등하였다.
유연이 首長(수장)의 칭호인 可汗(가한)에 대한 '魏言皇帝'란 주석은 유연의 존재에 대한 北朝人의 인식의 일면을 말해준다. 당시 유연은 南朝와 고구려 및 토곡혼과도 교류하며 一面으로는 유목민 諸集團을 휘하에 거느리고 타림분지의 오아시스國家들을 臣屬(신속)시켜 漠北의 패자로 군림했다. 곧 自國을 중심으로 한 세력권과 국제교섭망을 구축하여 동아시아 국제정치권내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이같은 유연의 존재를 고려할 때 5-6세기 東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세의 성격은 朝,冊關係로 상징되는 중국중심의 국제질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은 더 明白해 진다.

(3) 勢力均衡과 字小事大

이상에서 5세기 초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성격을 이해키 위해 세력균형과 字小事大의 양측면을 검토하였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세력균형과 字小事大는 그 성격상 二律背反的인 것이다.
前者가 複數(복수)의 국가들 간의 대등한 ?存關係(병존관계)에 기저를 둔 것이면 後者는 一國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나타낸 체제이다. 前者가 국제관계에서 어느 一國의 지배적인 위치를 부정하는 것인데 비해 후자는 一國을 宗主(종주)로 한 上下의 序階化(서계화)된 국제관계를 正常的인 상태로 여긴다. 兩者는 적어도 原論上(원론상)으로는 서로 不相容(불상용)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런데 5-6세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선 이 矛盾된 양측면이 일단 현상적으로는 共存한다.
중국의 南,北朝, 柔然, 高句麗, 吐谷渾등이 얽힌 특히 前三者의 力關係의 連動性(연동성)에 의해 세력균형상태를 이룬다. 一面에선 南,北朝를 각각 중심으로한 朝,冊關係가 그것이 名目上의 것일지라도 행해진다. 그런데 세력균형상태하의 국제관계라는 것은 複數(복수)의 강대국들이 중심이된 국제질서이다. 전체 東아시아 국제 정치권에선 보다 큰 국가와는 交涉儀體上 下位를 취하였던 국가가 다시 그 지역 국제 정치권에선 다른 집단과 上下關係를 맺었다.
이 시기의 국제정세는 中國王朝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東아시아의 차원에서 볼 때 一國중심의 국제질서인 字小事大體制를 想定한 朝,冊關係의 外套(외투)가 부분적으로 덮힌 下에서 실제적으로 세력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 세력균형적 국제관계의 독특한 면모가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 동아시아諸國간에 형성된 上下關係는 그 중심이 하나가 아닌 多元的이다. 그리고 上下關係를 이룬 각 지역 小國際政治圈은 그 구성국가들이 때로는 서로 겹치는 면이 있다. 예컨데 吐谷渾(토곡혼)은 南,北朝 모두와 朝,冊關係를 맺었다. 고구려의 경우도 南朝와 北朝로 부터 冊封을 받았고 일면으로는 신라와 조공관계를 이루었다. 또한 한 차례 북위에 조공을 하기도 하였던 부여를 예속국으로 두고 일부 거란 및 말갈 집단을 휘하에 종속시켰으며 유연과 함께 地豆于 (지두우)의 분할을 도모하였다. 이렇듯 각 지역 국제정치권의 구성 국가 및 종족집단들이 겹침에 따라 그 중심국과의 上下關係는 상대적으로 不安定한 면도 지닌다. 사실 이러한 점이 下位國의 自存을 유지하는데 유리한 면이다. 그 실제적인 上位國의 힘의 작용 정도에 따라 그 上下關係의 名과實의 괴리의 정도가 결정되었다. 자연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정세의 전개에 민감히 대응하였고 그에 따라 諸國의 대외교섭의 半徑(반경)도 확대되었다. 그러한 이 시기 국제관계를 움직이고 각국의 국제적 지위를 결정하였던 것은 理念(이념)이나 名分(명분)또는 傳統的(전통적)인 권위가 아닌 각국의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힘이다. 중국 및 몽고고원의 勢力(세력)의 영향력이 배제된 가운데서 고구려는 그 직할영역의 외곽에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의 部族(부족)들을 집단 별로 예속하였다. 東北亞 地域에 하나의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 했다. 이 시기 平壤(평양)은 동북아지역 小國際政治圈의 중심이었다. 이같은 현실속에서 고구려인들은 自國 중심의 독자적인 天下觀을 형성하였다.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


중국의 남,북조와 명목상의 朝,冊關係를 지속하였고 유연과의 사이에도 기존의 우호관계에 변동이 없었다. 북으로 勿吉(물길)의 세력이 일시 흥륭하여 고구려의 北邊(북변)을 침략하였고 물길에 쫓겨 부여국왕이 고구려 內地로 移居하여 부여국이 완전 멸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부여왕이란 북부여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상의 필요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존재였으므로 부여국의 소멸 그 자체는 큰변화를 야기하지 않고 다만 물길의 적대적 동향이 북위와 연결될 때에만 큰 변수로 작용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북위의 대응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아 고구려의 변경에 대한 抄掠(초략)이상으로 나아가 기존의 정세에 대한 큰 변혁을 일으킬만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은 전개치 못했다. 493년 낙양 천도 이후 북위 조정의 급속한 漢化政策에 따라 그 지위가 低落되어진 北境(북경)의 鮮卑武人(선비무인)들의 반감이 523년 沃野鎭(옥야진)의 반란을 필두로 六鎭 전체에서 격렬한 형태로 폭발했다. 그 결과 북위는 東,西魏로 분열되었고 高權과 宇文泰(우문태)가 각각 그 實權者로 등장했다. 이 북위의 내분이 고구려와의 교섭의 일시 두절의 원인이다.
이렇듯 북위의 분열에 따른 파동은 남,북조에 모두 미쳐 급격한 정세 변동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 삼국의 鼎立勢(정립세)를 나타내어 재차 균형을 이루었다. 북제와 북주는 낙양 부근 일대를 경계로 東西로 나뉜체 相爭을 벌렸다. 이러한 북위의 내분에 따른 일련의 대륙정세의 변동의 국면에 처해 북중국의 住民의 상당수가 동으로 고구려에 피난해 오는 등 그 여파가 직접 밀려왔으나 고구려는 이에 개입치않고 552년 북제가 고구려에 압력을 가해 北魏末 피난해온 流民 5천호를 刷還(쇄환)했다. 551년 고구려의 내분을 포착한 羅,濟同盟軍이 공격해와 漢水流域을 상실케 되었다.
이어 552년 北濟는 庫莫奚(고막해)에 대한 토벌전을 감행하여 이를 大破했으며 文宣帝가 요서지방 營州(영주)에 친행하였다.
이처럼 550년대 이후 국제정세의 새로운 전개에 따라 고구려의 대외관계는 변모케 되었고 몽고고원의 세력과의 백수십년에 걸친 평화로운 관계가 깨어지고 對決狀態(대결상태)가 되었다. 한때 고구려에 朝貢하며 質子를 보내기도 하였고 고구려가 그 內政에 깊숙히 간여하였던 바 있던 신라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종래의 고구려 對 신라,백제 및 가야의 연합이란 형태를 보인 一方的인 고구려의 우세는 깨어지고 삼국간의 각축이 전개 되었다. 이러한 정세변동과 고구려의 東北亞 지역에서의 위치의 상대적 약화는 중국왕조와의 交涉의 측면에서 반영되어 나타났다.
564년 신라가 北濟에 朝貢하였고 이에 응해 북제는 이듬해 진흥왕을 使特節部督東夷校尉樂浪公新羅王(사특절부독동이교위락랑공신라왕)으로 冊封하였다. 이 진흥왕에 수여된 爵號(작호)중에서 東夷校尉가 주의되어진다. 東夷校尉는 대체로 曺魏代(조위대)에 요동의 公孫淵(공손연)을 멸한 뒤 襄平(양평)에 東夷校魏府가 설치되어진 이후부터 그 실질적 기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東夷校魏의 직능은 中國王朝에 內附해오는 東方의 諸集團들을 수무하고 그들과의 交涉을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때로는 비상시에 夷族의 군대를 징발하기도 하며 또 朝貢關係에 있는 국가를 지원하기도 하여 郡縣의 외곽에 있는 諸集團을 統轄(통할)해 동방사회에 중국왕조의 지배력과 영향력을 유지케 함을 도모했다. 그런데 장수왕에서 安源王에 이르기까지 北魏가 고구려왕에 대한 책봉에서 東夷校尉나 같은 의미의 東夷中郞將의 칭호가 시종 주어졌다. 北齊의 550년 陽原王에 그리고 560년 평원왕에 대한 책봉에서도 東夷校尉의 칭호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에서 중요한 점은 동북아 지역에서의 고구려의 위치에 대한 중국왕조측의 인식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고구려왕에게 계속 東夷校尉나 東夷中郞將의 칭호를 부여한 것은 곧 고구려를 동북아지역 즉 遼海 以東(요해 이동) 지역의 패자로 인식하고 있고 나아가 그것을 공인한다는 북조측의 입장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565년 신라왕에게 東夷校尉의 칭호를 封함은 북제의 遼海 以東 지역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적어도 동북아 방면에서 고구려만을 주된 교섭의 대상으로 여기던 기존의 자세에서 벗어난 면을 나타낸다. 羅,濟 양국이 종전에 남조와만 通交하였는데서 벗어나 북중국의 왕조와 연결을 도모하였으며 북조도 고구려의 배후에 있는 양국을 주목케 되었는 것은 즉 고구려를 사이에 둔 羅,濟와 북제의 접근은 그 전의 국제관계에 비해 주요한 변화였다. 그것은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6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대륙과 한반도내에서 諸國간의 상쟁과 각축이 치열해져 종전보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형세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어느 一國이 절대적 우세를 이룩하지 못하여 5세기 이래의 세력균형적인 국제정세에 근본적인 변화가 야기되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 고구려는 內外의 정세의 격변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고 동북아 지역에서의 패권과 그 국제상의 기존의 위치를 재차 확립해 나갔다. 그러나 577년 북주에 의한 북제의 병합과 581년 隋(수)의 건국, 이은 돌궐의 분열과 隋에 의한 돌궐의 격파 복속 등으로 이어지는 급속한 정세 변화는 마침내 589년 陳(진)의 멸망으로 진전되었다. 陳의 멸망소식에 접하자 보다 유리한 지역으로 중심부를 옮겨 방어책을 모색하였고 고구려는 理兵積穀(이병적곡)하여 拒守之策(거수지책)을 강구했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이 가져올 파동이 어떠한 것일지는 당대의 고구려인에게 바로 인식되었다.
隋帝國의 등장이후의 이러한 정세의 진전은 5세기 이래의 세력균형적인 국제정세를 본질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은 동북아의 패자인 고구려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대외관계도 급속한 변모와 진통을 겪게 되었다. 곧 동아시아 국제정국을 5세기 이래의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로 유지하려는 측과 명실상부한 중국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측과의 각자의 명운을 건 대결이었다.

맺 음 말

5-6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특성을 규정짓는 주요요소는 중국대륙의 장기간에 걸친 남북분열과 餘他地域(여타지역)의 국가들의 성장이란 점이다. 이 시기 국제정세는 중국의 남,북조, 몽고고원의 柔然(유연), 동북아의 고구려 그리고 吐谷渾(토곡혼) 등이 각각 중심이 된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를 이루었다. 이들 주요국 간의 상호 力關係에 의해 특히 그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던 北魏를 사이에 둔 諸國간의 力關係의 뚜렷한 連動性(연동성)에 의해 국제정국을 어느一國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억제되었다. 한편 小國들은 이러한 大國들 간의 力關係 下에서 또 이를 이용해 자존을 도모해 나갔다. 그러한 가운데서 諸國들은 自國의 이익을 위해 連衡(연형)과 對決(대결)을 거듭하였고 자연 각국의 대외관계의 半徑(반경)도 확대되어졌으며 보다 恒續性(항속성)을 띤 각국의 首都(수도)와 首都(수도)를 잇는 국가 對 국가 간의 교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치권이 형성되어가는 면을 보여주며 그것의 적극적인 動因은 중국이외 지역의 국가들의 성장에 있었다. 이무렵 중국의 남북조는 각기 自國이 중심이 된 일원적인 국제질서를 상정하였고 이를 지향하였다. 그래서 他國과의 交涉도 대개 朝貢, 冊封關係의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朝,冊關係는 동아시아 전체를 포괄치도 못하였을뿐 아니라 그 '名'과 '實'에 있어 현저한 괴리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국제정세는 중국왕조와의 관계라는 측면에 치중해서 보더라도 그것은 一國중심의 국제질서를 표방한 朝,冊關係의 外套(외투) 下에서 실질상으로는 세력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던 독특한 시대의 면모를 보였다.
5세기 초반이후 고구려는 국경을 접하고 있던 강대한 잠재적인 적대세력인 북위에 대해 南朝 및 유연과 교결하고 때로는 위의 兩國간의 연결을 중재해주면서 견제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과 당대의 세력균형적 국제정세에 의해 고구려는 북위 및 유연과 장기간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고구려는 동북아방면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여 패자로 군림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인들이 지닌 自國 중심의 독자적인 天下意識(천하의식)은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상태는 6세기 중반 북위의 분열, 돌궐의 勃興(발흥), 신라의 성장 등에 따라 동요되어졌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야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6세기말 隋(수)의 中國統一과 돌궐의 격파는 기존의 세력균형적 국제정세에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대외관계에도 급속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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