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


신분제

1.신분제

신분이란 사람이 그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일정한 지위를 말한다. 신분은 혈통에 따라 출생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얻는 경우도 있으며 경쟁을 통하여 자기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출생에 의하여 특권 있는 신분을 세습하는 경우는 없지만 고대사회나 중세사회에서는 출생에 의하여 특권이 보장되는 신분제가 있었다. 그것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의 존속을 막지는 못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신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1. 귀족

고대국가가 서는 과정에서 과거의 족장출신이나 그의 가족들은 재배층으로서 일반 피지배층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예로 고구려는 이들이 귀족층을 이루었는데 흔히 '가(加)'라는 족장의 명칭에서 유래한 명칭을 갖고 관직을 독점하였다. 한국 고대국가는 족장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그 지배층이 구성된 만큼 이같은 현상은 마땅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족장 출신들이 이같이 연대하여 피지배층과 자신들을 구분한 것은 권력의 구조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인식의 특성에서 연유된 점도 적지 않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족장들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들 간에는 족장으로서 지켜야 할 범절(凡節)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족장들 자신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던 만큼 다른 족장들의 신상에 대하여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들에서 귀족은 우월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위를 자손에게 세습시키게 되었다.
귀족신분은 이와 같이 족장 출신으로 국가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 뒤에 국가의 팽창과정에서 통합당한 세력의 족장이나 왕족들 중 우대할 필요가 있었던 자들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족장 신분과는 차이가 있는 자들도 일부 있었다고 보이는대 이들은 대개 국왕의 측근 관리로서 왕을 위하여 봉사하는 중에 왕의 인정을 받아 고위관직을 차지하면서 귀족화하였던 것이다.

2. 중·하급 지배층

귀족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만 역시 세습적 신분으로 일반민들에 비하여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부류들로 귀족과 일반민의 중간에 있는 자들이다.
중·하급 지배 신분의 가장 주류를 이룬 이들은 고구려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 출신들이었다. 5부나 6부인들 중에는 귀족의 반열에는 들지 못한 소족장들과 대족장들의 지휘하에 국가건설에 공헌을 한 일반 족원출신들이 이 신분층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방 족장들도 역시 귀족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비교적 규모있는 세력을 지배하다가 국가의 지배 체제에 편입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중앙의 행정관리, 군대의 중간 지휘자, 왕 측근의 호위병과 같은 층의 병사가 되기도 하거나 문무 전문 관료층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앙의 귀족이나 관료들은 지방의 유력자나 관리들과 구분되는 경향이 있으며 지방유족자들은 관등을 갖지 못하고 외위(外位)라는 지방민만을 위한 별도의 관등을 가졌다.
이들 지방의 유력자는 지방관을 도와 세금을 걷거나 부역을 징발하고 나아가 지방민으로 구성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 노릇도 하였다. 이들은 일견 중앙의 하급 지배층과 유사한 듯하지만 중앙과 지방이 분별되는 현실에서 중앙의 관직을 맡을 수는 없어 다만 지방의 유력자로서 준관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살았다. 또 촌주들의 지위를 세습하며 국가로부터 면세를 받고 직위에 따라서는 그에 상당하는 녹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바 지방에서는 지체있는 존재들이었다.

3. 평민

중·하급 지배층 밑에는 평민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농민들로서 족장들의 지배를 받던 공동체의 일반 구성원들을 그 연원으로 한다. 이 평민들은 농사를 위시한 생업에 종사하며 남자들의 경우, 군대에 가고 부역을 하며 세금을 내야하는 국가의 기초적인 존재였다. 여자들은 농사를 같이 짓고 길쌈을 하며 가사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지방의 소규모 부역에 징발되어 일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국가사회에서 권리보다는 의무를 더 많이 진 자들로서 노비에 비하여 공적인 의무를 지며 독자적인 생계를 영위하였던 기본적으로는 '자유민'으로서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국가의 의무 때문에 의식주에 대한 부담이나 세금을 낼수 없어 빚을 지고 자녀를 팔기까지 한다.
따라서 고대 평민들의 실제 사회 경제적 위상이 노비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고대인들도 인간인 만큼 타인의 소유물이 되어 자유를 상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즉 평민의 입장에서 인격의 포기를 수반하는 노비가 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던 것으로 아무리 미미한 자유지만 그들에게는 역시 소중한 것이었다할 수 있다.

4. 노비

평민 밑에는 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개인이나 국가 혹은 사원의 소유물이었다. 노비들은 주인을 위하여 무상으로 봉사하여야 했다. 고대사회에서 이 노비는 서양의 고대에 널리 보이는 노예와 같은 사회적 존재였다. 노비 즉 노예는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살지못했다.
노예는 본래 전쟁의 포로로부터 나왔다.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서는 혈연이 개인에게 가장 확실한 사회적 유대로 그 가족이나 혈족을 떠나서는 제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웠다.포로는 이방족속인 만큼 살게 된 사회에서 같은 성원으로 인격을 인정을 받을수 없었다. 다만 주인의 소유물로서만 사회적 인정을 받는 즉 주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였다.
노예 혹은 노비는 전쟁포로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범금 8조에 '도적질한 자를 노비로 삼았다'에서 처럼 범죄 노비가 사회적으로도 존재하였다. 또 세금을 내지못한자나 부채대신 자녀를 팔아 생긴 채무노비 유괴되어 팔린 노비등도 있었다.
예외적이지만 노비가 가정을 이룬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살기는 쉽지 않았다. 노비들의 해방도 있었다. 노비가 해방되는 데는 자신의 능력이 문제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주인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다.
노예해방에서 볼 때 고대사회에서 노예는 해방전까지 말하는 도구로 여겨졌던 인간아닌 노예가 주인의 의사에 의하여 해방되면 곧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분명 노예도 인간인데, 자유민은 노예는 자기와 같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인간인 주인에 의해 해방이라는 인위적 조치를 받게 되면 갑자기 인간이라고 보아주는 사실이 존재하였다.

2.골품제

우리나라 고대의 신분제로서 그 구체적 실상이 전해지는 것으로는 신라의 골품제가 있으니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골품제의 구조

신라의 골품은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 이하 5두품, 4두품 그리고 평인(平人)의 등급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평인은 백성이라고도 말해졌다.
골품제의 구조에서 크게 구분되는 선은 진골과 6두품 사이이다. 이는 신라의 왕족이나 중앙귀족인 성골, 진골의 골족(骨族)과 그 이하 두품족(頭品族)이 나누어지는 선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구분선은 두품족과 평인(平人)의 사이에 있다. 두품족은 골족에 비하여 지체가 낮지만, 평인과 구분되는 중소 관리가 될 수 있는 지배층에 속하는 존재였다. 골품제에서 노비와 지방민은 편성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골품제가 언제 제도화 되었는지 기록이 없지만 율령이 반포되고 관리의 관복제(官服制)가 마련된 것으로 법흥왕때 제도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골품의 등급은 시종일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선 기록으로써 존재여부가 전해지지 않은 3, 2, 1두품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하위 두품은 역사의 진전에 따라 평인들과 동화되어 그 등급명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성골(聖骨)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법흥왕 이래 진덕여왕대까지만이 성골이었다. 삼국시대 왕과 관련된 부분에서 '성(聖)'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였다. 따라서 왕실이 자신들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왕실 혈족 만으로 구분 성골이라 하였을 가능성 이 큰 것이다. 불교를 적극 받아들인 법흥왕 이래 왕실은 석가모니의 혈족임을 주장하며 거룩한 종족이라는 의미를 가진 진종설로 다른 중앙귀족이 속한 진골과 구분하여 성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무열왕 이후 혈통의식을 다소 극복한 왕실은 성골이라는 골족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골과 진골은 신성한 족속이라고 생각해 골족내에서 혼인 혈통의 순수성을 보전하려 하였고 두품족들도 격이 맞는 같은 두품간의 결혼을 원칙으로 하였을 것이다. 또 진골들은 자신들의 혈통의 신성함과 국가 권력을 통해 확보한 기득권을 바탕으로 모든 고위직을 독점하고 사회 경제적인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2, 골품제의 사회적 기능

「삼국사기」에서 골품제에 기능을 보이고 있는데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첫째 골품에 따라 올라갈 수 있는 관등(官等)에 차이가 있었다. 신라의 관등은 모두 17등금으로, 최고 관등인 1등급 이벌찬에서 5등급까지 진골만이 오를 수 있었다.
6두품은 6등급인 아찬이하의 관등에, 5두품은 제 10등급인 대나마(大奈麻) 이하의 등급에 오를 수 있었다. 진골은 모든 등급에 6두품도 하위 등급과 5두품 4두품이 오를수 있는 등급에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진골이나 상위 두품에 속한 자들은 관직에 오를 기회가 하위 두품에 비하여 많았다.
둘째로 골품에 따라 생활에서 차등적인 규제를 받게 되었다. 골품에 따라 남녀의 입을수 있는 옷감의 종류, 색깔에 제한을 받으며 같은 원료로 된 옷감이라도 골품의 차등에 따라 입을수 있는 베의 고운 정도에 차이를 두고 있었다.
수레를 꾸미는 장식에도 골품에 의해 남녀에게 차등적 제한이 있었고 그릇에도 제한이 있어 금은 왕실이외에는 사용치 못했다.
또 집의 크기도 제한되어 방의 크기, 담장 높이의 규제와 마굿간의 크기도 골품의 차등에 따라 제한되었다.

3. 신라사회의 성격

신라사회가 신분에 따라 제한을 받는 숨막히는 사회였다고 볼수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불편이나 불만을 느끼지 않고 신분차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하위 두품 이하의 평민들은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제한 규정을 어기면서 생활할 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대다수의 주민들이 신분차등 제한규정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한규정들은 통·신 중후반에 경제가 발전하고 경주의 소비수준이 높아진 시점에서 만들어진 금지법의 내용인바 경제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또 경제력이 있다 해도 쉽게 고급 소비재를 구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또 이 골품제는 실제 일상 생활의 차원이 아니고 관직에 취임하고 승진하는 경우에 작용하는 것이어서 신분적 차등제한은 현실적으로 크게 문제되지 않은 제한들이었다.
관등 취임 제한의 문제 특히 두품자들의 진급욕구를 일부 해소하기 위해 중위제를 설정했다. 즉 일부 관등내에 또 다시 다수의 등급을 설정한 것으로 6두품 최고의 관등인 아찬과 5두품 최고 관등인 대나마 그리고 해당 인원이 많았을 나마에 각각 4, 9, 7등급을 설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생활에서의 제한 규정이란 실제적인 문제로 과도하게 인식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관직 취임 제한이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볼 수 있다.
그리고 골품제가 신라를 꽁꽁 묶어두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그 예로 화랑과 낭도는 골품이 다른 경우가 많았지만 평생 교류했고 대학자인 6두품 출신 강수가 두품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는 낮은 여자와 결혼했다. 즉 이 점으로 보아 정도의 문제이지만 신라사회가 경직되고 폐쇄된 사회라고 강조할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3. 신분제의 변화

우리나라 고대 신분제도는 시간이 경과하고 사회적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변화되었다. 골품제를 위시한 삼국시대 신분제도도 점차 변화되어 갔다.
삼국시대 말 신라 왕실은 왕실 직계만 구분하여 성골로 하였으나 자손이 끊겨 사라졌다. 또 3, 2, 1두품인 하위 두품도 사라져 평민이 되었고 지방민의 지위가 골품제에 연계되는 변화도 있었다. 여기서 주목된 점은 지방민이 골품제에 연계되어 하위 두품이 사라지고 이들이 평인에 편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수도민과 지방민간의 차별이 사라지고 이들간에 국가의 주민으로서 동질성이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위와 같은 변화는 삼국시대 후반의 사회적 변화와 삼국간의 전쟁의 격화에 의해 생겨났다. 지방에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세금징수나 부역의 징발 그리고 군대 동원에 있어 지방 유력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촌주로 입명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직위를 받거나,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앙귀족과 지배층들이 여전히 지방민들을 자신들과 같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중앙의 골품제와 연계하여 그에 상당하는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삼국시대 후반에 사회 경제적 변화가 커졌고 주민들은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독자적인 경제주체로 성장해 갔다. 따라서 사유재산 축적이나 전쟁에 전공을 통하여 농민은 지위를 향상시켰다. 이 과정에서 하위 두품간의 구분은 점차 의미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골품제의 차등적 요소는 현실적으로 관직 취임과 승진에 적용되었다. 그런데, 골품제는 상한선은 규정하였지만 하한선의 규정이 없어 하위 관직에 골품이 다른 자들이 차지하게 되어 하위 두품들의 존속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또 지방민들이 병사로 동원되어 수도 하위품과 유사한 사회적 대우를 받자 3두품에서 1두품은 점진적으로 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위 두품의 사회적 지위 상실 과정은 상위 두품의 지위 동요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숫자가 늘어난 상위 두품자들간에도 관직 취임여부와 재산 분화에 따라 그 지위란 현실적으로 차별화되는 형편인 것이었다. 이 변화는 신라 뿐아니라 시기에 차이는 있지만 고구려, 백제도 있었다.
신분제 변화를 정리해보면 우선 초반에는 왕실의 신성성이 강화되는 과정이 있었던 반면 후반에는 약화되어갔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왕경민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본래 종족들이 가졌던 우월주의가 점차 극복되어 가는 추세가 있었다는 점이다. 즉, 지방민도 국가의 백성 즉 공민(公民)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해 갔던 것이다.
또 하위 지배층은 점차 평민화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상위 지배층의 확대에 따른 귀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피지배층의 사회·경제적 성장에 의하여 상대적 우월성이 도전받고 결국은 무너진 면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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