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


고조선의 지배체재와 사회 성격

1. 고조선의 지배구조

관제(官制)는 그 당시 사회의 상부구조이기 때문에 관제를 해명하는 것은 사회의 사회경제구성을하는 주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위만조선에는 조선상(朝鮮相) ㅗ 대신(大臣) ㅗ 이계상 ㅗ 장군(將軍) ㅗ 비왕(裨王) 등의 관직이 나온다. 이들 관직명은 고대 한국어를 한자화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명칭으로 보아 중국의 관제와는 전연 다름을 볼 수 있다. 고조선의 관직은 그 외에도 박사와 대부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통해 기원전 4세기 후반기경 고조선에는 이미 왕 밑 박사ㅗ대부 등의 관직과같은 어느정도 발전된 관료제도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후 위만시기에 이르면 이들 관제는 더욱 분화된 모습을 보인다.
위만시기의 관제는 먼저 고대국가의 정치적 지배자인 왕의 존재가 주목된다.
고조선에서는 조선후에서 후손인 부로 부에서 아들인 준으로, 위만조선에서는 위만이 준의 왕위 찬탈한 이후 아들에 이어 손자인 우거에게로 왕위 계승. 이들이 모두 부자상속에 의해 왕위를 계승하거나, 또는 태자가 존재한 사실을 고조선의 왕제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국가의 최고 통치자인 왕밑에는 비왕과 국무를 관장한 상이 있었다. 비왕은 왕을도와 나라의 중요한 정사를 맡아보았고, 상은 나라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충고할수 있는 직책이었다.
상 직위에는 상 한음(韓陰), 조선상 노인(路人), 이계상 참(參)등 여러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명칭을 자세히 보면 조선상 ㅗ 이계상등 지역명칭이 첨가된 상과 그렇지 않은 상 한음과 노인의 명칭이 보인다. 이것은 조정과 지방의 상의 명칭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만조선에는 상 외에 대신이 있었다. 이 대신이라는 말은 '큰 관리' 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상과동등하거나 상밑에 위치한 고급관리로 인정된다.
이 외에 상설직의 관료로 상비군의 지휘자인 장군의 존재가 보인다. 왜냐하면 고대국가의 관직중에서는 군사관련 관직이 가장먼저 분화하는 것이 보편적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고조선의 지배체제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의 경상인 상ㅗ대신직과 지방의 장관격인 이계상 등을 두고, 한편으로 무장세력인 장군직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중앙과 지방 모두를 상이라 하여 그 사이에 명칭상의 구별을 두지 아니한 것은 고조상 관제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2. 고조선의 계급 구성

고조선은 씨족제적 유제가 강인하게 잔존한 읍락공동체들을 계층적으로 편성한 바탕위에 지배와 예속 관계를 설정하였다. 기원전 4∼3세기에는 일정한 정도로 철기가 보급되어 있었다는것과 또한 이에 따른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여 노예제적 국가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이 계급 국가로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서 이른 바 "범금8조" 가 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가 계급분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사회였고 나아가 노예제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주요 근거로 제시되어지곤 한다. 8조가운데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단지 3개조항만으로 그요점은 다음과같다.

①.사람을죽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②.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써 보상하여야 한다.

③.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도둑맞은 자의 노(奴)로, 여자인 경우에 는 비(婢)로 만든다. 만일 도둑질한 자가 죄를 벗으려면 50만 전의 돈을 내야 한다.

부를 가진자를 옹호하는 내용과 노예에 대한 규정등으로 사유재산제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음을알 수 있다. 특히 3째 조항은 노예소유제에 대한 옹호를 말해주며 반면에 공동체적 농민들의 노예화를 합법시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노예의 공급이 전쟁 포로뿐만 아니라 공동체 농민들의 몰락에 의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체무노예의 존재도 충분히 상정이 가능하다. 이것은 고조선의 지배계급중 장군직위에 있는 자들이 형벌 노예를 재생산 했으리라는 추론과 함께 노예제의 광범한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그렇다면 촌락의 일반인들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했었는가?. 고조선의 일반 촌락민의 존재에 관한 정확한 기사는 없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읍락에는 호민이 있었고 민은 하호였는데 모두 노복으로 삼았다"는 부여의 기사(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간접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호민은 부유한 평민으로 읍락공동체내에서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부를 축적하면서 지주계급을 형성한 존재이다. 따라서 개인경리가 가능했던 고조선 사회에서도 부여와 같이 호민의 존재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호는 부여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빈민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 부여전의 노비는 하호보다 더 열악한 존재로 나오는데 이들 하호와 노비는 분명 구분되고, 모두 문자 그대로 '하층민'이자 '빈농'이었다.
관직체계나 범금8조 그리고 고고학자료 등을 통하여 고조선의 계급구성은 노비.촌락의 일반민(하호.호민), 세습귀족(대부.상.후)이 실제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바탕위에 고조선은 첫째로 이미 노예소유자 국가의 본질을 가지고 공동체에 대하여 급속한 분해작용을 야기시키면서 고대 노예국가로서의 발전과정은 노비 외에 하호ㅗ호민 등 다른 사회계층, 그리고 대부ㅗ상ㅗ후와 같은 세습귀족이 실재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둘째로 이미 노예소유자 국가의 본질을 가지고 공동체에 대하여 급속한 분해작용을 야기시키면서 고대 노예국가로서의 발전 과정을 밟았다.

3. 고조선의 사회성격

고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통해 볼 때 대체로 기원전 10세기 전반기의 고조선사회는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고관 귀족들과 그들의 밑에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노예주의 무덤에 순장을 강요당한 노예와, 노예나 별다름없는 가난한 최하층주민들로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 고조선은 씨족적 잔재를 강하게 보존하였다는 것 또한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고조선이 공동체적 관계가 미약하게 붕괴된 토대 위에서 출현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공동체에 토대한 고조선은 전국 토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와 통제를 그 권력의 물질적 기초로 한 전제주의로서 특징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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