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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歷史硏究會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고찰
< 目 次 > 

 

 

1.序 論 ―――――――――――――― 1 

2. 古朝鮮의 彊域의 爭點 ―――――― 2 

1> 大洞江中心說 ――――――――――― 3 

2> 遼東中心說 ―――――――――――― 5 

3. 古朝鮮의 彊域에 對한 現代的意味 ― 8 

4. 結 論 ―――――――――――――― 14 

5. 參 考 文 獻 ――――――――――― 16 

 
 
 

1. 序論

古朝鮮은 民族史의 源流로서의 인식으로 인하여 역사학자 또는 일반인 모두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오고 있으며, 고조선사 연구중에서도 고조선의 位置와 彊域문제는 항상 논쟁의 초점이 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관심 때문인지 이 부분에 관한 서적들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을 무비판적으로 읽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큰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古朝鮮의 彊域과 位置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중심을 大洞江流域으로 볼 것인지 또는 遼東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양상은 역사지리적 문제를 떠나 객관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동강설을 주장하면 일제의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듯 인식되었고, 요동설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는 국수주의에 빠져있는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도 있어 왔다. 이렇듯 고조선의 강역과 위치의 문제가 대동강 중심설, 요동중심설 등 많은 논쟁을 가져오게 된 것은 고조선 분야에 관한 史料의 不足, 無批判的 史料의 引用?解釋, 遺物?遺蹟 등의 확실치 못한 解明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고조선 분야의 연구는 모든 사료의 검증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의 주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이 가설을 세운 후에 그들의 주장에 맞는 사료를 주장함으로써 객관적이지 못한 주장을 펴고 있다. 이러한 가설우선성향은 사료 부족,유물?유적의 부족 못지 않게 고대사 분야를 더욱 더 혼돈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듯 하다.

고조선 문제는 그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국시기에서부터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또한 箕子의 實存 問題, 滿의 人物評價 그리고 古朝鮮 彊域의 핵심이 되는 아사달, 平壤, 遼水, 浿水, 碣石山 등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漢四郡 位置 또한 학자들 마다 제 각각이며, 고조선의 國號문제 또한 그 견해가 분분하다. 고조선이라 함은 통설적으로 해석했을 경우 古朝鮮?衛滿朝鮮 모두를 하나의 정통성을 이은 국가라는 차원에서 이 두 국가를 古朝鮮이라 하지만, 이를 정통성과는 별개의 국가로 보아 고조선?위만조선으로 나누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이 국호에 대한 문제보다는 上古史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古朝鮮의 領域을 둘러싼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하여 영역 해석상 만이 건국하기 전의 국가를 고조선, 만이 건국한 국가를 위만조선이라 명명하기로 한다. 이렇듯 논쟁도 많고, 잘못된 사료의 인용은 더욱더 혼돈 속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 고조선의 강역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古朝鮮의 彊域의 爭點

古朝鮮의 彊域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중심을 大洞江流域으로 볼 것인지 또는 遼東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양상은 역사지리적 문제를 떠나 객관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大洞江說을 주장하면 일제의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듯 인식되었고, 遼東中心說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는 국수주의에 빠진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도 있어 왔다. 그러면 요동중심설과 대동강중심설 등의 학설이 어떻게 하여 제시되게 되었나 알아보도록 하겠다.

『管子』를 비롯한 『戰國策』?『山海經』등 先秦時代의 문헌에 이미 조선의 위치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보이며, 漢代 이후의 문헌인 『史記』?『漢書』?『魏略』 등에 오면 조선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조선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原史料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필요하다. 先秦文獻에 보이는 조선의 위치는 모호하여 정확한 위치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대 이후의 문헌인 史記, 漢書, 魏略 등에 이르면 선진 문헌의 모호한 표현과는 달리 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고조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衛滿朝鮮 당시의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에서 다른 史書와 비교될 수 없는 『史記』朝鮮傳의 기사가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史記』의 고조선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朝鮮王 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燕나라의 전성기에 처음으로 眞番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塞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遼東의 外?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건국하여서는 그곳(遼東外?의 관할 지역)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遼東의 故塞(옛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삼아 연(한나라 후국)에 부속시켰다. 燕王 盧?이 匈奴로 도망갈 때에 滿도 망명하였는 데 1천명의 무리를 모아 상투머리에 蠻夷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국경의 초소를 빠져나와 패수를 건너 秦국의 옛 空地인 上?과 下?지역에 거주하면서 겨우 변방의 수비를 맡아 眞番과 朝鮮에 속해 있었으나 蠻夷(그 지역 토착민)와 옛 燕?齊의 망명자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니 王儉(城)에 도읍하였다. ……眞番?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

『史記』朝鮮傳의 기록이 先秦時代 문헌들에 비해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에 대하여 보가 구체적인 자료를 전해주는 것이 사실이나,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기록이 고조선의 위치를 첫눈에 알아볼 만큼 명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史記』의 기술에서 고조선의 원래영토였음이 확인되는 요동지역에 설치한 중국측의 군사기지가 후대의 『漢書』地理志와는 달리 모두 ?塞나 故塞 또는 外?, 秦故空地 上下? 등의 모호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한편 조선의 지명은 浿水, 王儉城, 洌口 등 구체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으나 후대의 지명과 달라 이론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조선의 위치 비정을 둘러싼 논쟁의 1차적인 원인이 『사기』를 비롯한 중국고문헌의 조선에 대한 모호한 기술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모호한 지명은 지역민의 이동과 함께 이동되어 혼돈을 가져올 수도 있었고, 고대 언어적인 문제로 이두식 표기에서 가져오는 경우도 있어 왔다. 그리하여 중국 문헌에 나오는 지역명과 현재의 지역명이 일치한다고 하여 그것을 현재의 지역과 옛 지역이 같다고 단정짓는 것은 역사에 크나큰 과오를 범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다르다고 부정하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모호한 지명에 의해 대동강설, 요동중심설, 이동설 등 많은 학설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지명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1> 大洞江中心說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유역으로 본 견해가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로 인정되고 있으나, 일부학계로부터 적지않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대동강중심설이 일제의 식민지사학을 계승하였다하여 이를 비판하고 오해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보다 큰 역효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대동강중심설은 일제식민지사학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통해 알수 있다는 것이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더 대동강중심설의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견해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단군은 민족시조의 차원으로 격상되어 국가적 숭앙의 대상이 되었으니, 이는 곧 신화적 존재로서의 단군이 역사적 실제 인물로서 합리적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東國通鑑』『東國與地勝覽』 등 조선전기 사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에 비정하였으며, 16세기 이후의 사서들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는 16세기 이후 對明關係의 안정으로 북방 故土에 대한 관심이 퇴조되고 압록강 이남의 현 강역을 고수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兩亂이후에는 상고사의 적극적인 해석이 시도되었는데, 한백겸의 『東國地理志』가 대표적인 저작이다. 그는 夫餘?高句麗?渤海 등 만주에서 건국되었던 국가들을 개별적으로 다룸으로써 국사 연구의 지리적 공간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지는 통설에 따라 압록강 이남에 두었으며, 고조선과 삼한이 한강을 경계로하여 북과 남으로 병립하였다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7세기 중엽부터는 正統論이 도입되어 삼한의 역사적 존재가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삼한 정통론을 종합한 것이 안정복의 『東史綱目』으로, 그는 스승인 이익과는 달리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비정하고,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북에 비정한 『遼史』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정약용과 한치윤으로 계승되었다.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 안에 있었으며, 뒤에 영토를 확장하여 遼西를 점령하고 燕과 국경을 접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았으며, 한사군도 진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보아 낙랑은 평양, 현도는 함경도, 임둔은 임진강 일대로 해석하였으며, 대방군도 임진강 하류지방으로 비정하였다. 정약용의 엄밀한 고증에 의한 실증적 역사연구는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정도로 당시의 연구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치윤?한진서의 『海東繹史』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은 요서지방을 훨씬 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수도는 한반도 내의 평양으로 보았으며, 한사군의 낙랑도 평양으로 비정하였다. 한치윤은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 안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로 확대하였으나, 그 중심은 한반도에 두었다.

이와같이 18세기 말 이후의 南人실학자들은 치밀한 고증작업을 통해서 고대사의 중심무대를 한반도에서 찾았다. 이러한 이유는 『遼史』계통의 자료들이 모두가 북방족들이 자신의 역사를 주류로 부각시키기 위해 억지로 한반도에 있던 지명도 만주로 끌어들여, 한반도를 역사의 주변적 위치로 격하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滿洲源流考』의 출현(1778년) 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사의 말살 내지는 전락을 의미했기 ?문에 당시의 우리나라 識者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학문적 반박이 요구되었던 때문에 18세기 말 이후의 학자들이 한국고대사의 중심무대를 한반도에 비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한국사를 축소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淸에 대한 주체성을 견지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발로였던 것이다.

낙랑유적의 발굴로 고조선의 대동강중심설은 고고학적 증거를 보태게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실학시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이를 체계화 한 것이 이병도였다. 그는 아사달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고, 여기에 근거하여 『史記』의 浿水를 청천강으로, 『魏略』의 滿番汗을 청천강에 인접한 박천강 일대로, 『漢書』의 列水를 대동강으로 보아, 고조선의 강역을 지금의 평안남도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한편 낙랑유적을 토대로 『漢書』地理志에 나오는 漢四郡의 위치를 정밀하게 고증하였다. 이러한 이병도의 고조선사에 관한 체계는 『漢書』地理志에 의하는 한 가장 정밀한 연구로 평가되어 정약용의 패수 = 압록강설과 더불어 학계의 통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병도의 역사지리적 고증은 위만조선 이후 특히 漢郡縣의 위치 고증에 치중된 것으로,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고증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조선의 위치고증의 가장 기본자료는 『史記』朝鮮傳인데, 그가 주로 의거한 것은 『漢書』地理志이며, 그것도 논리적인 결함의 여지가 있는 언어학적 추리에 의해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기』조선전의 해석에도 오류가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사기 조선전의 고조선 관계기사에서 燕?秦?漢에 속하였던 진번?조선은 모두 동일한 대상으로 연장 진개에 의해 점령된 고조선의 서북영토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연에 점령된 지역은 滿番汗 以西의 고조선 영토로 보면서, 진의 요동외요와 한후국인 연에 속한 것은 고조선 본국으로 보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그결과 고조선과 燕?秦?漢의 국경인 滿番汗?浿水?秦故空地 등의 위치 고증에도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가 한서 지리지와 언어학적 추리에 의해 패수와 만번한을 청천강?박천강 일대에 비정한 것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遼東中心說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應制詩註』에서 였다. 여기에서는 낙랑을 평양이 아닌 압록강 북쪽으로, 기자가 건국한 지역을 靑州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견해가 보다 구체화 된 것은 17세기 南人 학자에 의해서였다. 洪汝河는 『東國通鑑諸綱』에서 진번을 遼陽에 비정하고, 나아가 遼陽의 舊號가 평양이며, 衛滿이 도읍했던 검터도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浿水도 한반도에 있는 강이 아니라 遼河로 보았고,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하여 2천리의 땅을 빼앗기고 나서 경계를 삼았다는 滿番汗의 위치도 遼陽城으로 보았다. 그러나 樂浪은 통설대로 平壤에 비정하였다.

18세기의 申景濬은 『疆界考』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새롭게 고증하여 그 서쪽 경계선이 遼河 서쪽의 孤竹국(지금의 山海關 부근, 大凌河와 난하 사이)과 북경 북쪽의 上谷 동쪽에까지 미쳤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李瀷은 만주의 遼瀋지방(遼河의 東西)을 단군조선의 중심지로 보았으며,단군이 개국했다는 太白山도 遼地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또한 한사군의 위치도 낙랑?현도를 요동에, 진번을 요하 서쪽에, 임둔을 가원도에 새롭게 비정하였다. 李種徽도 『東史』에서 요동?심양 일대는 檀君과 箕子의 舊疆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왜란 이후 18세기 중엽까지는 만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상고사의 연구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론이 18세기 후반의 南人학자들과 같이 정치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이후 통설로서 인정받지는 못하였으나, 이러한 역사인식은 북학파를 거쳐 1920년대의 민족주의사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19세기 말에 태동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인 1910∼1920년대에 성립되었던 민족주의사학에서의 고대사연구는 申采浩에서 시작되어 崔南善?安在鴻?鄭寅普로 이어진다. 그들의 고대사 연구는 단군조선과 부여를 역사의 주류에 놓아 새로운 한국사의 체계를 세우는 한편, 東夷族의 中國大陸에서의 활동을 강조하고, 古朝鮮의 중심과 漢四郡의 위치가 한반도 밖에 있다는 견해로 요약된다.

신채호는 수두시대의 단군조선과 眞?番?莫 삼조선분립시대의 주무대를 요동과 만주에 비정하였으며, 東夷族이 중국내의 활동은 부여족의 식민활동으로 보았다. 고조선의 역사지리와 관련하여서는 秦開와의 전쟁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요동?요서는 물론 上谷?魚陽?右北平과 山東일대까지 미친 것으로 보았으며, 문제의 滿番汗을 양평 일대로 비정하였다. 언어학적 방법과 地名移動說을 통하여 王儉成을 검터로 보아 요동의 海城으로, 浿水를 海城 근처에 있는 軒芋岵에 비정하였으며, 낙랑군도 樂浪國과 구별하여 요동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정인보는 이를 계승하여 고조선을 ‘發朝鮮’?‘眞番朝鮮’?‘濊貊朝鮮’?‘樂浪朝鮮’으로 파악하고, 그 강역을 한반도 이외에 開原 이북 興京 이남으로 보아 吉林?奉天내지 흑룡성까지를 거의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浿水를 수도 주위에 흐르는‘벌내’로 보아, 신채호와 같이 浿水와 王儉城을 모두 海城 근처로 비정하였다. 나아가 漢四郡에 대한 고증을 통하여 眞番은 大凌河 부근에, 현도는 右北平에, 낙랑은 요동 검터로 고증하였으며 낙랑유적은 日人의 조작으로 보아 漢四郡의 半島內存在說은 증명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지리적 고증은 조선시대의 境城論을 넘지 못한 日本 官學者들의 한국사 인식체계를 한단계 넘어선 것이다. 특히, 신채호의 경우 고조선 강역에 대한 이해체계를 정립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나, 이들의 학적 업적은 시대적 한계로 인한 고증의 오류탓으로 이후 발전되지 못하였다.

1960년대말부터 이른바 在野史學이란 일련의 古代史硏究者들이 출현하였는데, 이들을 연구가라고 부르기보다는 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학계의 古代史 연구에 대하여 이해하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때로는 비판을 넘어 역사 연구를 국회나 법정에까지 끌고 가기도 하였다. 그들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체계도 백가쟁명하여, 민족종교인 大倧敎에 뿌리를 두기도 하고, 반대로 기독교에 연원을 두기도하여 그 맥락을 잡기 어려우나, 그들이 근거하는 자료는 대개 2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道家史學에 영향을 받아 쓰여졌다고 판단되는 史話인 『揆園史話』와『桓檀古記』가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1910년대의 大倧敎徒들에 의하여 서술된 일조의 경전인『神壇實記』?『檀奇古史』등이다.

이러한 사회와 경전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桓因?桓雄?檀君 三聖의 實史化와 고조선 강역의 확대라고 할 것이다. 고조선의 강역도 한반도와 만주 일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가 全아시아 대륙으로 확장되며, 고대로 올라갈수록 한국사는 더욱 영광스러운 大帝國으로 체계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연구는 오히려 그들이 근거하였던 『규원사화』 등의 사화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도리어 『규원사화』보다 퇴행하고 있는 느낌이다. 文定昌의 『古朝鮮史硏究』이후 李相時의 비교적 정밀한 연구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연구의 출발점을 잘못잡은 까닭에 아직 이들의 견해를 역사연구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최근에 발표된 고조선의 요동중심설로 윤내현의 견해가 있다. 그 연구의 내용이 종래의 고조선사에 대한 이해체계와 근본적으로 달라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그 연구의 결과만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된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고조선은 『삼국유사』의 건국기원과 거의 같은 시기인 BC. 2400년경에 시작된 요녕의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발전된 국가였으며, 둘째, 고조선의 강역은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서쪽으로는 난하, 남쪽으로는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의 남북만주 전부와 한반도북부지역에 걸치는 것이었고, 셋째, 종래에 고조선의 국경인 난하 근처에 있는 나라들로 보아 武帝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세운 樂浪郡도 한국사와는 무관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 그의 견해에도 많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고조선의 기원에 대하여는 고조선의 문화로 파악한 夏家店하층문화의 경우, 현재단계로는 그것이 중국의 龍山말기문화와 연결되는 것으로 그 민족적 성격이 모호하며, 문화적 성격도 청동기가 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아직 그것이 청동기시대에 속하는지 신석기 문화에 속하는지 판단하기는 성급하다. 또한 BC 2400년의 교정연대가 나온 赤峯지주산 유적의 경우, 이 지역을 고조선의 초기 영역으로 볼 수 있는 지 의심스럽다. 둘째,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역사지리의 고증에 대한 그의 견해 또한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의 연구는 난하 = 요수설을 토대로 하고 있는 동시에, 패수?열수를 모두 난하로 보는 까닭에 『史記』의 기사를 설명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셋째, 준왕의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모두 부정한 결과 , 선진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조선관계 기록이 진한시대에는 거의 나오지 않게 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기와 위략의 기사를 비교하여 사기의 조선은 연에 복속된 것이므로 고조선이 아니며, 위략의 서쪽으로 2천리를 빼앗긴 조선은 복속된 조선과는 다르므로 고조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문헌에 나오는 기자의 표현에 너무 얽매여 기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북한에서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힘입어 60년대초 고조선 문제에 관한 격렬한 토론을 거친 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거의 정설화되어 있다. 리지린이 가장 주력한 것은 『史記』朝鮮傳의 합리적 해석과 고조선의 요동중심설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하여, 중국의 요동을 난하 이동에 비정하려고 한 것이다.

즉 요수를 난하로, 고조선과 중국과의 경계가 돠었던 浿水를 大凌河, 列水를 현재의 遼河에 비정하여, 『사기』조선전의 지리기사를 위만의 망명로에 따라 遼水→遼東故塞→浿水→秦故空地→王儉成으로 설명하는 한편, 그러한 논리의 결과로 王儉成을 蓋平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 고조선의 강역은 秦開의 役 이전에는 난하 유역까지, 秦開의 침입 이후는 大凌河 유역까지 遼東?遼西에 걸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리지린이 遼水〓 ?河說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자료는 모두 異說의 여지가 있는 것이며, 그 해석도 자의적이다. 이미 그의 『전국책』의 해석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지만, 가장 모순되는 것은 『사기』의 고조선관계 기사의 해석이다. 그는 위만의 망명로는 정당하게 보았으나, 요동을 난하 이동에 잡은 까닭에 秦의 요동외요를 연나라의 장새보다도 더 서쪽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위만이 건너온 패수 동쪽, 즉 연의 장새 동쪽에 진고공지가 있다는 사기의 표현으로 보아, 연나라 때 보다 진이 중국 쪽으로 후퇴했다는 이러한 해석이 모순됨은 분명하다. 이는 요동을 의도적으로 난하 이동에 잡은 까닭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모순으로 보인다. 이후 북한학계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연구는 남쪽은 고고학적발굴성과에 따라 청천강에서 대동강?예성강으로 변경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리지린의 연구에 맞추어 도식화 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현실적 잇점인 고고학적 발국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3. 古朝鮮의 彊域에 對한 現代的 意味

지금까지 제시되어온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요동중심설?대동강중심설이 일제의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았다든지 또는 국수주의에 빠져 있다고 일반인 및 몇몇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모두가 주체성을 몰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논쟁이 많은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고조선문화와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중국문헌학자의 고조선의 역사지리에 관한 상반된 주석에 있다할 수 있을 것이며, 2차적인 문제로 우리 학계에서의 가설우선성향에 입각한 무비판적인 사료의 채택 및 인용 등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논쟁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史記』를 비롯한 중국고문헌의 모호한 기술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모호한 기술 중의 대표적인 것들이 浿水, 滿番汗, 碣石山, 아사달, 平壤 등이다. 그래서 다음에 이들 중 갈석산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위치를 알아본 후, 고조선의 위치를 대동강 중심으로 볼 수 있게 했던 낙랑유적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이제 이 당시의 지명을 통해 고조선의 영토를 확실하게 알아보도록하겠다. 먼저 만번한은 燕의 秦開가 조선을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아 그 경계로 삼은 곳이다. 이 滿藩汗을 알기 위해서는 그 서쪽에 쌓았던 연의 障塞를 알면 될 것이고, 연의 장새를 알기 위해서는 장새 근처에 있는 만리장성을 알아야 할 것이며, 만리장성을 알기 위해서는 장성의 시작인 碣石山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갈석산은 지금의 갈석산, 한반도 내의 갈석산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면 다음에서 갈석산이 어디에 위치 하였는지 알아 보도록 하겠다.

우선 갈석산이 보이는 옛 소재지는 {漢書} [地理志]에는 右北平郡 驪成縣 西南,{續漢書} [郡國志]에는 遼西郡 臨兪縣, {魏書} [地形志]에는 遼西郡 肥如縣, {隋書} [地理志]에는 北平郡 盧龍縣, {新唐書} [地理志]에는 平州 石成縣, {明史} [地理志]에는 永平府 昌黎縣 서북, {淸史稿} [地理志]에는 永平府 昌黎縣 북부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얼핏보면 마치 驢成, 臨兪, 肥如, 盧龍, 石成, 昌黎 등 각 현에 모두 갈석산이 있었고 이들 갈석산은 동일한 산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 현의 연혁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서한의 驢成현은 지금의 위치를 확인 할 수가 없지만 {漢西} [地理志] <遼西郡> 류현의 주석을 보면 ぢ갈석수가 있다っ고 기록되어 있다. 갈석수는 그 시원이 갈석산이었을 것임에 틀림없고 이산은 려성, 류 두 현의 경계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東漢시대에는 류현을 폐하여 임유현에 통합하였고, 晋 시대에는 그것을 폐하여 해양현에 편입시켰으며, 東魏 이후에 그것을 폐하고 비여현에 편입시켰다가 隋 시대에 와서 다시 그것을 폐하고 노룡현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唐 시대에는 그것을 폐하여 석성현에 편입시켰고 遼 시대에는 그 지역에 廣寧縣을 설치하였으며 金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昌黎縣이라 명명하였다. 따라서 이들 갈석산은 모두 동일한 갈석산이다. 즉, 지금의 창양현 북쪽에 있는 갈석산을 가리킴을 알 수가 있다.

갈석산에 대하여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서술한 것으로는 曹操의 で觀淪海と라는 시와 역도원의 {水經注}가 있다. 먼저 {수경주}의 원문을 자세히 보면 문제점이 있음을 알수 있다. ぢ濡水는 갈석산의 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っ고 하였지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で유수 하구에 산이 있다と고 {수경주}에 기록 되어 있는 것 처럼 말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데 많은 이들은 갈석을 난하 하구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수경주}에 보면 갈석이 잠겼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말은 지금의 갈석산의 主峰 仙臺頂 중간 산허리(해발 400-500m)에 바닷물에 의한 침식의 흔적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曹操의 で관윤해と라는 시를 보면,

동으로 갈석에 올라, 잔잔한 바다를 바라본다.

바닷물은 고요히 철렁이며, 山島는 높이 치솟아 있고 .

수목은 울창하게 자라며, 百草는 무성하다.

가을 바람 소슬히 불어오고, 커다란 물결 높이 이네.

해와 달의 운행이, 그 안에서 나오는 듯하며.

은하수의 찬란함도, 그 속에서 나오는 듯하다.

라고 묘사하였다. 이 풍경을 잘 해석해 보면 높은 산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는 광경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갈선산에 올라가 바다를 보면 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위에서 미약하나마 갈석산이 지금의 갈석산임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만리장성은 난하 동부연안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이병도씨가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시작은 浿水, 滿番汗 등을 한반도 내로 보기 때문에 빚어진 모순이라 할것이다. 즉, 진개가 2천 여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영토는 지금의 요하 서쪽의 大凌河(리지린이 보고 있는 패수)강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만의 영토는 난하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확장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견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패수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다. {史記} [朝鮮列傳}, {魏略}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패수는 한과의 국경선이고. 둘째, 위만은 국경선인 패수를 건너와서 패수 이동의 秦 고공지의 상하 장세에 거주하면서 고조선왕과 교섭을 진행한 사실. 세째, 진의 고공지에 거주한 위만조선의 원래의 주민은 고조선인이며 그 고공지는 연나라 진개시기에 일시 한인들의 세력하에 놓였다는 사실이다. 고조선과 한과의 국경선인 패수는 반드시 이상에 열거한 역사적, 지리적 사실과 부합되어야 한다. 패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水經}있다. 낙랑군의 수다한 강들 중에서 동남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없다는 이유로 내외의 학자들이 이설을 부인하였다. 역도원이 가장 대표적인 학자인데 그는 고조선 영역을 오늘날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수경}의 패수에 관한 기록을 誤中이라고 인식하였다. 역도원은 역사적, 지리적 사실을 떠나서 자기 시대의 패수와 한대 국경인 패수를 동일시하고 {水經}의 패수설을 논박하였다. 이와 같이 패수에 대해 견해가 다양한 것은 중국문헌인 {漢書} [地理志]의 遼東郡 番汗縣 沛水와 樂浪君 浿水縣 浿水, {水經注}의 본문에 보이는 樂浪郡 鏤方縣 浿水와 그 주석에 보이는 지금의 대동강을 지칭한 浿水, {遼沙} [地理志]의 遼東縣 浿水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패수의 강 이름이 여러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수가 고유명사가 아닌 옛 고대 한국어 강의 어원인 펴라, 피라, 벌라 등이 향찰식으로 기록됨으로서 여러강이 패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패수에 대한 명칭은 다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한과 고조선의 국경지역이 어딘지를 알면 될 것이다. 국경지역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국경지역은 갈석이 있는 곳. 즉, 지금의 난하가 된다. 그러므로 패수는 지금의 난하라 할 수 있다.

한사군 중에서 낙랑군의 위치는 한국사와 연관된 문제로서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만약, 난하유역에 고조선이 존재하였다면 후에 한에 의해 설치되는 한사군의 위치 또한 요동에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없다. 그렇다면 한반도 내에 있었던 낙랑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三國史記} [高句麗本記]대무신왕 15년(기원후 32년)조를 보면,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를 여행하였는데, 낙랑왕 최리가 출행

하였다가 그를 보고는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 같지

않는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대무신왕)의 아들의 아닌가 하고 드

디어는 함께 돌아와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되었다.

고 나온다. 즉, 한의 낙랑군 말고도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기원후 37년)조에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고 되어 있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을 말하는 것인지 최리의 낙랑국을 말하는 것이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三國史記} [新羅本記] 儒理이사금 14년(기원후 37년)조를 보면, 고구려의 왕 無恤(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나라 사람 5천 여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고 나온다. 즉, 고구려가 멸망시킨 낙랑은 고구려와 신라사이에 끼어 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313년까지로 보고 있는 한반도 내의 낙랑은 어떠한 낙랑이었을 것인지가 문제로 남게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년)조에는, 가을 9월에 東漢의 光武帝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을 만드니 청천강 이남은 한에 속하게 되었다고 나온다. 이 기록을 한사군의 낙랑으로 보기에는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한사군은 설치된 지 이미 오래 되어 당시에는 동한의 영토에 속해 있었는데, 이미 자기들의 영토가 되어 있는 낙랑군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곳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동한의 광무제가 한사군의 낙랑군을 쳤던 것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군이 있었던 지역을 쳤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동한의 군사가 낙랑을 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그리고 동한이 낙랑국을 친 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 최리의 낙랑국, 그리고 동한의 광무제에 의한 낙랑의 3개가 있었으며 최리의 낙랑국과 동한의 낙랑은 같은 지역에 있었고 한사군의 낙랑은 지금의 난하 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평양 지역에서는 중국식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발굴자들은 그것을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보고함으로써 문헌에 보이는 한의 낙랑군 이었다는 평양이 바로 지금의 평양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으며, 고조선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 두게 되는 움직일 수 없는 설로 만들었다. 그러나 면밀히 이를 검토해 보면 낙랑의 유적을 잘못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평양지역에서는 중국식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평양에서 중국식의 유적이 발굴된 후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설치되었을 것이라는 설에 반대했던 일부 학자들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위조품일 것이라고 일소에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유적과 유물을 모두 위조품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다음에서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가운데서 이 유적을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대표적인 것들을 검토하여 그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封泥가 있다. 평양지역에는 지금까지 200전이 넘는 封泥가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封泥가 한 곳에서 수집된 예가 없으므로 처음부터 그것들이 모두 진품일 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의문점은 이미 정인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지적된 바도 있었다. 그 모든 封泥가 모두 위조품은 아닐 것이지만 그 일부가 위조품일 가능성이 다음 예를 통해 나타난다. 「樂浪大尹章」이라는 封泥가 있는데 大尹은 王莽時代의 관직명이다. 西漢時代에는 郡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太守라 하였는데 王莽時代에는 이것을 大尹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大尹이라는 관직명에 따르면 이 封泥는 왕망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망시대에는 서한시대에 사용하던 모든 군명을 개명하였는데 樂浪郡은 樂鮮郡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封泥가 왕망시대에 만들어졌다면 「樂鮮大尹章」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封泥는 군명과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조품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로, 封泥가 수집되었던 토성지역에서는 「大晉元康」등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지금의 평양지역이 낙랑군의 治所였음을 알게 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大晉 元康이라는 연호이다. 大晉元康은 西晉 惠帝의 연호로서 서기 291년 부터 서기 299년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에 의한다면 이 유적의 연대는 漢四郡이 설치되었던 西漢 武帝 元封 3년(기원전 108)보다 400여년이 뒤진 서기 290년대의 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기에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이러한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로 보아 封泥들도 漢시대보다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로, 古墳群이 있다. 평양지역에서는 중국식의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그 위치와 墓制로 보아 제 1호분이 갖당오래된 것이며 규모가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따라서 발굴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평양지역의 중국식 고분은 모두가 제 1호분보다는 늦은 시기의 것이 된다. 그런데 제 1 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그 가운데 貨泉이 있었다. 화선은 王莽 시대에 구조된 화폐이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 연대는 王莽시대 이전으로 올라 갈 수가 없다. 왕망시대는 불과 15년간이었고 그 뒤를 이어 동한시대가 되는데, 왕망시대의 주조된 화폐가 한반도에까지 도달한 시간을 감안한다면 제 1 호분의 조성연대는 동한시대 이전으로 볼 수는 없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평양지역의 중국식 고분은 모두 동한시대 이후에 조성되었다는 것이 되므로 한사군 설치 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시기의 것이 된다.

넷째로, 칠기의 銘文이다. 王旴墓에서는 명문이 있는 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で永平十二年と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永平 12년은 동한 明帝시대로 서기 69년이 된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고분에서 수집된 목재를 표본으로 하여 방사성탄소측정을 한 바 있는데, 그결과는 서기 133년 이었다. 이것은 평양의 낙랑유적에서 얻어진 유일한 과학적 연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이 고분도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이 평양 지역에 동한의 광무제가 설치했던 낙랑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로, 「夫租?君」?「夫租長」 등의 銀印이 있다. 이 銀印은 1958년에 평양의 貞柏洞 土壙墓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 경으로 추정하지만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의 낙랑군에는 夫租縣이 있었다.그러므로 평양에서 「夫租?君」?「夫租長」 등의 銀印이 출토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음을 알게 하는 증거라고 인식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김정학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夫租?君」의 銀印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 이후의 관직을 보면 郡에는 太守?大尹?丞?長史가 있었고 縣에는 令이나 長?丞?尉 등이 있었을 뿐 君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그러나 漢書 武帝紀에 "元朔 원년(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의 예군인 南閭 등 28만 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蒼海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동이의 예족이 君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夫租縣은 낙랑군에 속해 있었는데 낙랑군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衛滿朝鮮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夫租?君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사용하였던 관직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예군의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대 한국 청동기인 細形銅劍등도 출토되어 그 주인이 중국계가 아님을 알게 하여 주었다. 「夫租?君」의 銀印은 한으로부터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상의 고찰로서 지금의 평양에서 발굴된 유적이 한사군의 낙랑군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 보았다. 즉, 낙랑유적의 발굴로 고조선의 대동강중심설은 고고학적 증거를 보태게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설로 여겨지게 되었지만 이에도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고조선의 강역이 난하를 서쪽경계로 한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간략하게 나마 갈석산, 패수, 그리고 낙랑유적을 통해 알아 보았다.

4. 結論

古朝鮮에 관한 史料의 모호하고 단편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古朝鮮의 位置와 彊域에 대한 論爭은 朝鮮時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어 오고있다. 그 1차적인 책임은 古朝鮮의 文化와 言語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中國 文獻學者의 古朝鮮의 歷史地理的에 관한 상반된 註釋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假說우선적인 성향을 보인 학계의 안이한 자세 또한 그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의 강역문제는 위만조선 당시의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다른 사서와는 비교될 수 없는 史記 朝鮮傳의 기사를 검토해보았으나, 先秦時代의 문헌들에 비해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전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고조선의 위치를 확인하는데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리하여 燕의 秦開가 조선을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아 그 경계로 삼은 곳인 만번한을 알아보았는데, 이 滿藩汗을 알기 위해서는 그 서쪽에 쌓았던 연의 障塞와 장새 근처에 있는 만리장성을 통해 이 만번한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 만리장성은 그 시작인 碣石山의 위치를 증명해 봄으로써 그 위치를 알 수가 있었다. 갈석산은 지금의 갈석산, 한반도 내의 갈석산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한과 경계가 될 수 있는 갈석산을 중심으로 해서 갈석산이 지금의 갈석산과 동일함을 중국문헌 중 지리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고조선의 강역 중 서쪽경계가 난하유역이 아닌가 추정해 보았다.

西漢은 난하유역에 있는 위만조선을 외신제로는 그 나라를 다스리지 못함을 알고, 외신제를 군현제로 바꿈으로써 한의 위만조선 침입은 시작된다. 그리하여 기원전 108년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樂浪?眞番?臨屯의 3군을 설치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1년 후인 기원전 107년에 玄兎郡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이 漢四郡 가운데에서 樂浪郡의 위치는 한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문제로 낙랑의 해명은 곧 한국고대사의 위치와 강역에 대한 해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樂浪郡이 遼東地域에 있었다면 지금의 平壤지역의 樂浪遺蹟 및 三國有史 등에 나오는 낙랑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먼저 낙랑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외에도 최리의 낙랑국 그리고 동한 광무제에 의해 설치된 낙랑 등 3개가 있었다는 것과, 평양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서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 封泥, 기와, 제 1호분, 칠기의 銘文 등을 살펴봄으로써 한사군의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증명해 보았다.

한국고대사 분야는 많은 사학자들의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부분이 미궁 속에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무비판적인 사료의 인용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 주장에 맞지 않으면 오인으로 결정내려 버리는 성향은 한국고대사분야를 더욱더 혼돈속으로 빠지게 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이 분야의 관심확대로 인해 고대사분야의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이며, 한국고대사가 재정립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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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