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적으로 고조선의 존재를 추적해볼 수 있는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경이 한계. 그 이후 고조선 주민들은 족
장들의 지도나 지배하에 遼河일대에서 紀元前 3世紀初까지 거주. 기원전 8·7세기경에는 이미 비파형청동검을 
비롯한 청동기문화를 누리고. 청동검은 흔히 거친무늬청동거울과 함께 출토. 칼과 거울은 무당이나 사제의 상징
적인 소지품들로 보이는 만큼 이 두가지가 같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고조선 전반기의 청동문화단계에 지도자 
내지 지배자들이 종교적 사제를 겸했음을 보여주고⇒ 제정일치사회(檀君王儉)
기원전 4세기 후반 3세기 전반에 고조선은 연나라와의 투쟁에서 실패하여 서쪽의 거점들을 대부분 내어주고 중
심지를 평양지역으로 옮겨.→ 연과의 투쟁은 기원전 4세기말부터 시작
 『위략』 : 기원전 4세기 말에 전국 7웅의 하나인 연나라가 주의 제후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을 높히어 왕이
라 칭하고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조선의 후도 왕을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의 왕실을 높이고
자. 조선 후의 부하인 대부 禮가 간하여 말리니 그 일을 그만두고 禮를 연에 사신으로 보내어 연을 달래니 연도 
침략을 그만두었다. 후에 자손들이 교만하여 포학해져서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어 서방 2천리의 영토를 빼앗았
다고. -----이기사는 『염철론』에서는 상실된 땅을 천리로 기술
⇒ 정치나 외교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대부라는 관등명이 존재
   고정적인 영토가 있었다고 보는데는 문제점이 有. 당시에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마을을 이루고 서로 점점이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형편. 영역이라는 개념은 확립되지 않은 상태. 이때는 동일 혈연과 동일 
   문화를 가진 고조선인들이 요하일대에 일종의 연맹을 이루고 살았던 것. 조선후는 연맹장으로서의 직책을 수
   행하면서 보다 전문적인 관리가 필요했던 만큼 약간의 관료체제를 마련. 前4세기말의 고조선은 국가단계에 
   거의 접근
위만조선 : 기원전 3세기말 중국은 漢에 의해 재통일 한고조 유방의 이성제후 축출정책에 연왕 盧官이 흉노로 
도망.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도 조선으로 망명. 조선왕 準은 위만에게 박사의 벼슬을 주고 조선의 서변을 지키도
록 명. 위만은 유이민을 끌어모아 준을 축출(前 194년경)하고 위만조선 건국. 위만조선은 한과 삼한·진번·임
둔지역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성. 기원전 109년 한 무제의 조선정벌로 인해 기원전108년 1년가의 전투끝에 멸
망. 한은 고조선과 흉노와의 연결가능성을 차단하고 동북아시아지역에 대한 패권을 확립할 필요. 이 위만조선의 
시기에는 고조선은 국가의 단계에 진입 
① 위만조선의 구조 : 유이민 + 토착민의 이중구조(朝鮮相 歷谿卿·朝鮮相 路人·尼谿相 參·相 韓陰)→ 적어
도 각 집단에 대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하였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이
었을 것(ex:역계경은 우거왕에 대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망명)
② 한무제의 5만군사에 대항하여 1년간 버티는 전쟁→ 군사력의 존재가 확인
③ 팔조범금 : 살인, 상해, 도둑질에 대한 처벌내용→ 이미 사유재산제가 확립·발전된 농경사회. 그리고 엄격한 
사회계급이 있었으며 특히 이러한 법을 집행할 만한 통치기구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④ 前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바로 한의 郡 3개가 그 지역에 설치된 것도 영토가 있었기에 가능
∴ 이시기 사회구성은 일단 귀족·일반민·노비로 대별 가능. 대규모 노비경영의 존재는 확인되고 있지않으며,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확안되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도시의 발달이 확인되지 않음
※ 요동반도 남단의 旅大市에서 조사된 崗上墓와 樓上墓⇒ 전형적인 순장묘
 崗上墓 : 대략 기원전 8-7세기의 무덤으로 약 140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순장
 樓上墓 :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것으로 100여명의 순장사실이 확인
※ 고조선의 강역
① 在遼寧說 : 북한학계(지금은 아님)·재야사학자
② 在平壤說 : 日人學者·李丙燾 등 및 현재의 북한학계
③ 移動說 : 신채호·서영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