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


한국고대사회의 정치구조

4. 삼국 말기의 구조변동

1)대왕집권체제로의 전환

삼국시기 왕권의 위상은 신라왕호의 변천에서 보듯이 사회지도자인 수장으로부터 최고의 정치지배자인 대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차가 있었다. 그 편차는 지배체제의 정비를 통해 강화되는 왕권의 반영이었으며, 고대국가의 완성기에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체제의 확립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애왕집권체제의 확립과정은 귀족세력의 왕권에 대한 견제력을 배제라는 과정과 엇물려 있었다.
삼국시기의 왕은 기본적으로 수장출신으로서 초기에는 비록 왕실의 교체가 없지 않았지만,국가형성 이후에는 일정한 원칙에 따른 왕위계승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삼국시기의 왕은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할 때까지 귀족회의체와는 성격이 다른 왕실집단, 또는 가신집단과 같은 독자적인 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삼국은 통치영역과 지배체제의 두 방향에서 발전한 결과 삼국사이에 개재한 소규모의 정치세력을 흠수하여 정립하는 형세를 이루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각축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국가적차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왕의 정치구조가 내포한 한계를 국복하고, 체제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방향이 바로 대왕집권체제로의 전환이었는데, 새로운 통치규범과 이념으로서 율령 및 불교의 수용으로 집약되었다.

율령의 반포는 귀족합의체제의 전통이 온존된 관습법체제로부터 대왕집권체제를 뒷받침할 성문법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또한 불교의공인은 분절적인 토착신앙을 극복하고, 고등종교의 수용을 통한 통치이념의 집중화였다. 이양자는 부와 지방의 상대적 독자성을 현실과 이념의 두 측면에서 해소시키는 지표적 현상으로서 각각 고구려의 소수림왕, 뱍제의 침류왕, 그리고 신라의 법흥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취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귀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초월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영역발전의 정치적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신라와 백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 가운데 가장먼저 나타난 결과 현상에 불과하였다.
이 무렵 삼국간의 세력각축전은 종래 귀족세력의 이익에 기여하던 것과 달리 왕을 위한 전쟁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다시 말하면 대왕집권체제에 의해 위상이 제고된 왕은 그에 상응하는 저변 공간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따라서 전쟁은 총력전으로서 규모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는 이른바 친솔의 빈도도 늘어났다.
또한 이 시기의 전쟁은 귀족세력의 경제기반으로서 포로회득의 의미가 적지 않았던 과거의 전쟁과 달리 대량의 살육 이 수반되었다. 진흥왕대에 신라가 등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군사 29,600여명을 살해한 일은 숫자의 사실여부를 떠나 저간에 변화하고 있던 전쟁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따라서 이 시기의 전쟁은 왕에 의한, 왕을 위한 왕토팽창전으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듯하다.
삼국이 왕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하였을 때, 고대국가에서 군국사무를 총괄하던 귀족회의체의 의장의 권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으리고 으 구성원이었던 귀족세력에게는 이제 왕의 통제하에 있는 관료로서의 성격이 요구되었다.
한편 귀족세력이 짓능에 따라 국무에 종사하던 통합적 기능은 귀족회의채와는 별도로 분리 .독립하기 시작한 행정관부가 담당하는 분업롸호 바뀌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관등에서 관직이 분화함으로써 신분.관등이 력합된 귀족회의 체제에서 신분.관등.관직이 결합된 귀족관료체제로 전환하였다. 이제 왕은 관등만을 보유하고 직무를 수행하던 종래의 귀족세력을 고나등에 기초하여 직책을 담당하는 귀족관료로 임명하는 단위 행정관부의 조직화를 통하여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왕중심의 집권체제에 상응하는 지배체제의 정비를 통하여 삼국시기의 왕은 비로소 대왕의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제사장적 성격을 탈각치 못한 채 군림하던 왕이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통치하는 전윤성왕과 역택가불로의 통치이념적둁니 전환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고조선 이래 시공적으로 지속·확산되던 고대사회 정치구조의 한 형태가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2) 귀족세력의 분열과 대

삼국이 대왕집권체제를 확립한 이후에 표출된 정치적인 현상은 귀족세력과의 갈등으로서 고대국가사 내표한 대내적 모순이었다. 삼국의 발전과정에서 귀족세력의 범위는 확대되었고, 그들은 대외전쟁을 자신의기반을 확대·재생산하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삼국이 고대국가를 완성함으로써 표출된 왕권의 강화추세와 전쟁의 성격변화는 확대된 구족세력으로 하여금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과 대립의 현상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지방미의 공민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야기된 귀족세력의 기반 약화는 귀족세력의 분열을 축진시킨 배경이었다.
기성 귀족세력은 귀족합의 체제의 옹호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의도하였고, 신진귀족세력은 새로은 대왕집권체제에 편승함으써 세력기반의 획득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경우에 정치권력의 장악이 경제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귀족세력은 왕위의 계승과정에서 종래의 관행이 취약성을 노정할 때,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왕위계승권의 장악을 둘러싼 권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과거에 귀족회의체의 합의에 입각하여 왕위계승의 후보를 결정.추대하던 관행과는 사뭇 달라진 역사적 현상이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국내에서 평양으로 천도와 귀족세력에 대한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으나 문치왕 말기에 국내계 귀족세력이 다시 중앙정계의 변수로 둥장함으로써 심각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인 진씨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대왕집권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귀족세력의 권력투쟁은 침류왕이 죽은 뒤에 곧바로 본격화하였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이후 왕위의 계승과정에서 귀족세력의 분열이 일어났다.
결국 삼국이 모두 왕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공교롭게 야기될 수밖에 없었던 귀족세력간의 분열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대립은 삼국시기의 권력구조가 변동한 결과이며, 각각 연개소문의 정권장악, 의자왕의 건력강화, 김춘추의 왕위계승으로 정리되었다. 삼국 말기의 정치과정이 비록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귀결되었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고대적 권력구조의 변동과정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었던 형식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삼국 말기에 있었던 귀족세력간의 권력투쟁은 왕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정치구조의 기본으로 삼는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기위한 소용돌이였던 셈이다.

3) 맺음말

귀족합의체제는 고대국가의 완성기에 삼국이 세력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성과를 담보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성 때문에 대왕집권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였다. 소국의 수장출신이던 삼국의 왕은 율령반포 및 불교공인과 같은 일련의 조치를 통해 제도적 위상을 제고하고, 왕토의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삼국의 왕은 이제 대왕으로서 귀족회의체의 기능과 의장의 권능을 약화시킨 반면에 행정관부를 분업.조직화하고 신분.관등 보유의 귀족세력을 관직에 임명하여 귀족관료화함으로써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였다. 삼국이 왕중심의 짐권체제를 확립했을 때에 귀족세력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대립은 고대국가의 대재적 모순으로 전화하였다. 삼국 말기에 공통적으로 간취되는 권력투쟁은 삼국사회의 권력구조와 그 변동에서 기인한 고대적 모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내적 모순의 외연에 삼국간의 세력각축전이 중첩되어 잇었다. 삼국이 일정한 문화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 영토적 통일성의 결여로 인한 상호전쟁은 고대국가의 자기발전인 동시에 대외적 모순이었다. 더구나 이 무렵의 대외전쟁은 왕을 위한 전쟁이 본질이었기 때문에 귀족세력의 대외인식도 영향을 미쳤다. 기성귀족세력은 소극적이었던 데 비해 신진귀족세력은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와 신라에서 신진귀족출신의 집권과 즉위, 백제에서의 왕권강화는 대외적으로 강경책을 예고하는 정치현상이였으며, 중국에서 수·당 통일왕조의 출현은 한반도의 정세를 변화시킨 국제적조건 이였다. 나·당연합의 동서진영과 여·제연병의 남북진영을 중심축으로 전개된 동아시아의 국제전은 마침내 한국사에서 신라의 백제통합과 고구려고지에서 발해건국이라는 남북국의 성립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새로이 성립된 남북국사회에서 기왕의 고대적 모순은 일정하게 해소될 수밖에 없었으며, 신라와 발해는 각각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 체제를 지향함으로써 선행사회의 정치구조와 질적인 차별성을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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