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주차 [발제 1][발제 2][발제3]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과 성격

 

1.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출현한 이래 지금까지도 인간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필요하면서도 억압적인 존재이다. 이는 고대사회에 출현하였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한 만큼 이제 연구성과들을 참조하여 국가의 형성사를 살펴보겠다.
먼저 국가란 무엇인가에 접근해 보자. 국가란 간단히 일정한 영토에서 거기에 사는 주민들에 대하여, 배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통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이전의 씨족, 부족, 또는 추장사회 등에서 발전하여 출현한 만큼 성립에 대해 밝히는 것은 간단치 않다.
그래서 역사학에서는 국가 이전의 조직들과 비교하여 변화의 과정 위에서 국가의 존재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우선은 일반 구성원에 비하여 지배자가 사유재산의 축적에 따라 많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사회계층이 구성원간에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었는가를 보게 되고, 다음으로 왕이나 관료 등이 있으며 중앙과 지방의 조직적인 지배망이 존재하였는지에 주목한다. 다음은 이 조직이 자체 조직 내에 있는 하부조직이 이탈을 억제하고 조직체의 영속을 위하여 확장해가는 성향을 가졌는가 하는 점을 보게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왜 국가를 갖게 되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자. 국가가 만들어진 요인은 인간집단간의 갈등과 경쟁과정에서 이익을 더 많이 얻었던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영속화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 국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이 비교적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상호결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들도 제시되었다.
오늘날에는 위와 같은 견해의 타당성과 문제점이 검토되면서 다양한 요인들이 국가 성립의 동인(動因)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국가라는 조직체가 탄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2. 한국 고대국가의 성립

1) 고조선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그런데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고조선이 국가의 단계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사료 부족부터 시작하여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단계에서 역사학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경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그 이후 고조선 주민들은 요하일대에서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살았고, 기원전 8, 7세기경에는 이미 비파형청동검을 위시한 청동기문화를 누리고 살고 있었다. 청동검은 거친무늬청동거울과 함께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고조선 전반기의 청동문화단계에 지도자 내지 지배자들이 종교적 사제를 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지배자를 종교적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壇君)'과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왕검(王儉)'을 써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을 표기하고 있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 고조선은 연(燕)과의 투쟁에서 실패하여 평양지역으로 옮겨 살았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말부터 시작된 연과의 투쟁은 중국의 사서『위략』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먼저 연이 왕을 칭하고 독자적인 국가임을 서포함에 있어 조선 후도 왕을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사가의 입장에서는 조선 후는 왕이 될만한 존재도 못 되는데 스스로 왕을 칭했다는 뉘앙스가 있으나, 정치나 외교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만큼 조선 후의 세력을 과소 평가할 수만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왕이 연을 치겠다고 나선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정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기에 전쟁을 도모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대부라는 관등명이 있는 것도 눈에 띤다. 대부가 있었으니 경이나 사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면 4세기 말의 고조선은 왕과 관료체계가 있는, 조직적인 통치체제가 갖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천 리의 땅을 빼앗겼다고 하는데에서는 영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경계선 안의 모든 지역에 절대적인 주권이 행사되는 영역(領域)이라는 개념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듯 일종의 연맹을 이루고 살고 있던 이때에 조선 후라는 고조선의 연맹장은 제천(祭天)행사나 외부로부터의 침략기도에 대하여 흩어져 있던 종족의 힘을 모아 대응하였던 것으로 보아 약간의 관료체제를 마련했던 것이다.
평양지역으로 이전한 후에도 정치적 단계는 유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전과는 달리 국가단계에 들어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에 대한 근거로, 고조선이 한무제(漢武帝)의 5만 군사의 침략을 받아 싸우는 전쟁의 전말이 전해지는『사기』조선전에서는 고조선 군사력의 존재, 강력한 군사력으로 방어되는 영토, 왕이나 관직체계도 있었음이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이미 국가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서』지리지에서 전하는 범금8조에서는 조선이 이미 사유재산제가 확립·발전된 농경사회였으며, 엄격한 사회계급, 법을 집행할 만한 통치기구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이 망한 기원전 108년 그 영토에 곧바로 한(漢)의 군(郡) 3개가 설치된 것도 영역통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조선이 망함으로써 동이족에는 고대국가의 발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양상을 맞기도 하였다.
고조선이 있었던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도 여러 종족들이 꾸준히 세력을 모으며 국가로의 성장과정을 밟고 있었다.

2) 부여
고조선이 망할 즈음에 부여(夫餘)와 고구려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고대국가로의 발전의 길을 가고 있었다.
『삼국지』동이전과 『위략』에서 부여의 국가 성립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기원 전후 부여에서는 왕과 큰 종족적 기반을 가진 대가들이 연합하여 국가를 결성하고 있었으며, 부여의 주민들이 귀족층과 호민층, 평민층 그리고 노예로 구분되는 사회계층으로 분화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부여의 왕과 관련된 사실 중에는 제정일치 단계의 지배자가 왕을 칭하고 있는 정도를 반영하고 있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지』동이전에, 부여의 옛 풍속에 풍수해로 흉년이 들 경우 그 허물이 돌아가 왕의 교체나 죽음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다는 사실에서 아직 왕권이 확고하게 자리하지 않았음은 물론, 초기의 왕들이 종교적인 신통력, 대개는 하늘의 아들로서의 위력을 보여주어야 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부여는 동부여, 고구려, 백제 건국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부여는 중국이 5호 16국의 혼란기에 들어가면서 모용씨(慕容氏) 연(燕)의 침략을 받아 346년경에 망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주민들과 그 영토는 광개토대왕의 정복에 의해 고구려에 편입되고 말았다.

3) 고구려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유역 및 동가강 유역에도 청동기문화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중간지점으로서, 비교적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과의 교류로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용이한 점도 가지고 있었다. 강이나 냇가에 인접한 지역에 주민들이 모여사는 곳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나(那)들 중에서 유력한 5개의 나(那)가 이러한 잇점을 가지고 결국 5부를 이루어 고구려국의 핵심세력이 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초기 기사에 의하면, 나(那)는 혈연적인 집단으로서의 성격과 지연(地緣)집단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가진 공동운명체로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는 새로운 통치기구나 규범,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였고, 이로서 통치력의 강화와 국가성립을 향한 역사가 진행되어갔던 것이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기원전 128년에 고구려의 원세력 집단으로 보이는 28만 명이 예군남여(?君南閭) 등의 족장에 이끌리어 한(漢)에 투항하였다. 당시 원(原)고구려인들은 직접 한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고, 한은 고조선을 견제하고 흉노와 원고구려세력의 연결을 막고자 군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비용과 노동력이 너무 들어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28만 명으로 이루어진 세력이 어떠한 정치 사회단계에 있었는가가 주목된다. '예군남여 등'이라는 말에서 이들은 종족연맹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원고구려사회는 다음 단계에는 고대국가로의 진입 가능성이 큰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고구려연맹은 한의 고조선 정복과 3개 군(郡)의 설치가 있자 다시 중국 군현으로 편제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107년 고구려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곧 한의 식민정책의 실상을 간파하고 현도군을 축출, 현도군은 중국방향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어 기원 1세기 초에 고구려연맹은 왕망(王莽)의 억압에 저항하면서 독자성을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고, 1세기 후반 태조대왕에 이르러 5부를 중심으로 한 연맹체에 다른 부(部)들에 대한 계루부 출신 왕의 왕권 행사, 영토의 확장과 고정, 종래의 족장들이 왕의 귀족으로서 존재함으로써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중국은 고구려의 국가성장을 막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와 연결하여 고구려를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내의 여러 족장들을 현도군에 출입케 하여 무역하게 하였다. 고구려 계루부 왕실은 이러한 중국의 침투책, 식민통치의 핵심을 파악하고, 책구루의 설치와 교역권의 장악으로서 정확히 대응함으로써 초기부터 정확한 국제적 인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고대국가에 진입한 이래 점진적인 발전을 지속하여, 관료조직이 점차로 갖추어져 갔다. 또 진대법을 마련하여 백성들의 삶을 국가 차원에서 어느 정도 보장해보려고 하였다. 국가는 성립하였지만 여전히 현실적으로 혈연적·지연적 공동체의 족장들을 통하여 통치하고 있는 실정에서, 국가가 생산과 의무 부담에서 국가의 기본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는 백성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세기 초 동천왕의 왕위계승 이후 부자계승이 확고해졌는데, 이는 왕권이 그만큼 확고해졌고, 통치조직 등이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어 왕의 능력에 관계없이 나라가 운영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고대국가 체제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완비되었다. 율령이 반포·시행되고 태학이 설치되었을 뿐만아니라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국가다운 국가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체제정비를 발판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단계에서는 보다 이질적인 여러 종족을 지배하는 국가를 이루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 백제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성장하여 한반도 남부의 마한(馬韓)지역을 통합한 고대왕국으로서, 이미 철기문화와 농경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백제가 세력을 모으기 전에 마한지역 정치세력들의 상당수는 종족이나 문화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삼국사기』온조왕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건국은 고구려 내의 세력 재편과 관련이 깊었다. 『삼국지』동이전과 『삼국사기』중 온조의 건국 관련 기사를 보면, 마한과 낙랑 그리고 말갈이 백제 건국의 장애세력으로 등장한다. 백제 건국세력들은 평화적인 관계보다는 우세한 기마병을 이용하여 마한 정복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한반도 남부지역 및 왜에 대한 외교와 교역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던 낙랑군은 백제가 대낙랑(對樂浪) 교역에 걸림돌 구실을 하게 됨에 따라, 반목반농(半牧半農)의 전투에 능한 말갈을 사주하여 백제를 괴롭혔다. 여기서 백제의 건국과정도 고구려와 같이 중국세력의 간섭과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깨면서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온조왕 재위기간 동안에 오늘날의 경기도, 강원도 춘천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것으로 『삼국사기』는 전한다. 이 사실은 믿을 수 없는 과도한 것이라는 견해들이 더 많다. 고대국가의 영역은 일정한 경계안이 모두 국가의 주권에 지배받는 형편이 아닌 것이었고, 시조의 위업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른 왕대에 있었던 사실을 덧붙여 기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모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므로, 역사상에 맞는 다른 해명의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온조 등 유이민인 건국의 주역들은 이 지역 내의 읍락들에 대하여 자신들의 군사력과 문화적 경험들을 통하여 낙랑군과의 교역이나 읍락국가들간의 문제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일종의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온조의 지배에 들어갔다고 하는 그 일대의 세력들은 스스로 온조의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뿐더러, 자신들의 위상이나 생활방식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상태를 약 2세기 이상 지속되는 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우리는 온조가 고대국가를 완성한 이는 아니지만 고대국가의 영역을 확보해가는 기초 단계, 즉 지역 맹주로서의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백제의 고대국가 형성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세기 전반기 즉위한 고이왕은 남쪽지방에 논농사를 하게 하였고, 군사력을 국제간에 사용하고 있으며, 6좌평 16관등제와 관등에 따른 복색과 복식을 제정하여 관제를 체계화하였다. 이 단계에는 이미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통치기구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로서 약 1세기 후에 재위한 근초고왕은 고이왕 이래의 발전선상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백제는 고이왕대에 고대국가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5) 신라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나 이때의 개국이 고대국가의 성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를 위시한 여러 자료에 보이는 신라의 건국연대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이른 것으로 되어 있어 학계에서 말하는 국가 성립의 연대순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어떠한 연유에서 그렇게 되었으며 신라의 가장 이른 개국의 역사가 어떻게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을까?
신라는 다른 두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일찍 정착하고 있던 토착족이 보다 강고한 기반을 잡고 있는 중에 다른 주민들이 유입하여 연합하였기에 이같은 일이 있을 수 있었다고 보인다. 토착세력의 기반이 해체되지 않고 유이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시 유이민들이 선진문물 경험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잡는 듯하였으나 상대적으로 강고하고 광범한 토착세력의 저력앞에 유이민들의 위세가 약화되어 결국은 토착 김씨들이 왕권을 장악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서 신라의 초기사는 오히려 고구려, 백제의 건국주체가 되었던 유이민들의 유입 이전 토착세력들의 성장과정을 볼 수 있는 간접적인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은 이는 남해차차웅이었다. 차차웅이란 지배자의 호칭은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단계를 보여주는 명칭인 것이다. 제 3대 왕은 유리니사금이었다고 전해진다. 니사금(尼師今)은 연장자를 나타내는 용어인데, 이도 고대의 지도자 또는 지배자 유형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후에는 이같은 단계의 읍락국가가 이웃세력들과 연합하거나 혹은 정복해가는 성장의 역사를 엮어갔다. 그러다가 고대국가의 지배자로 볼수 있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단계가 나타났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19대 눌지왕으로부터, 『삼국유사』에는 눌지왕의 아버지인 17대 내물왕부터 마립간이라 하였다고 한다. 눌지마립간은 확실히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한 왕으로 볼 만하다. 신라는 그 이후로 김씨의 왕위 독점세습이 확립되었다. 또 왕위는 부자상속 그 중에서도 장자상속이 되었다. 이는 왕권이 확립되고 안정되어 다른 귀족들과는 위상이 다른 왕실의 권위가 확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는 마립간의 칭호가 사용되는 내물왕이나 늦어도 눌지왕 때부터는 그 위의 역사까지를 참조해 보건데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인다. 이같은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한 신라는 5세기 후반 다수의 성을 쌓는 등 영역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소지왕때에는 자방통제의 핵심적 시설을 마련했으며 지증왕때에는 농업기술사의 큰 진전이 있었다. 그리고 지증왕 4년에는 비로소 '신라'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갖게되며 국왕의 명칭도 갖게 된다. 법흥왕에 이르러 율령이 반포되고 공복제가 제정되며 불교를 공인하여 고대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3. 한국 고대국가의 연합적 성격

우리의 고대사를 돌아보면 중국이나 일본을 위시한 아시아 지역이나 중남미, 그리고 유럽지역에 비해 문화유산이 위축될 만큼 적다. 우리나라에는 전쟁이나 난리가 많았던 만큼 고대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을 수 없기도 했다. 그런데, 실상을 찾아보면 본래부터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 이렇게 많이 만들지 않았을까? 이것은 여러 면에서 설명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우선 생산력의 문제와 이를 소비하는 인구의 밀도 등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생산력에 비하여 우리의 인구밀도가 너무 높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건축을 하거나 예술품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잉여가 그렇게 많을 수는 없었다. 또다른 요인으로, 고대사회 이래 끊임없이 존속해온 국가의 성격이 어떠하였나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는 생산된 재화를 재분배하는 궁극적인 실체였던 만큼 국가의 성격은 곧 사회적 문화유산의 질과 양을 결정했던 근본요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의 질과 양이라는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현실로부터 시작된 의문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하나인 한국 고대국가의 성격문제를 해명하는 단계로 나아가 보겠다.
우리나라 고대국가는 왕국(王國)이었다. 고대국가의 성립에는 백제와 같이 정복에서 비롯된 국가의 성립이 있었던 곳도 있었지만, 고조선을 위시하여 고구려나 신라 등의 국가와 같이 여러 지역의 족장들 간의 연합과 연맹에 의하여 국가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두가지 중 어느 경우에도 완전한 정복자나 전제권을 가진 왕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토착세력을 인정해야 하거나 연맹체로서의 성격을 유지해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고대국가는 특정 종족이나 왕실의 일방적인 정복에 의하여 세워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정복을 주로 하여 국가가 성립되지 않고 또한 엄격한 왕의 독재가 실현되는 전제적인 국가가 출현하지 않았을까?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서 정복은 흔히 이질적인 종족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고대국가가 출현하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는 주민들의 이동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동한 주민들간에 종족적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점에 우선 유의해야 한다. 만주나 한반도지역에서 조선족이나 한(韓)족이 해안지역과 한강 이남지역에 주로 분포하여 있었고, 부여와 고구려를 위시한 예맥족들은 한강 이북지역에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상당수가 정착단계에 있었던 만큼 주민들의 일시적인 대규모 파동에 의해 정복사회가 형성된다는 것은 다소 예외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유이민이 토착민을 잠시 지배하기도 하였지만 토착민의 역사경험과 인원 등이 만만치 않아 결국은 그들과 연합하고 심지어 토착민에 동화되어 소수세력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동일한 종족간의 국가형성 과정은 일단 정복보다는 전단계이래 지속되어온 제사나 문화적 유대를 기반으로 하여 연맹으로의 길을 걸어갔다. 고구려, 신라 그리고 심지어 백제 유이민 내의 세력연합이 그같은 노정을 잘 보여준다. 물론 주민간에는 상대적으로 이질성이 더 큰 부류들로 나누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언어나 법속 등이 유사한 이들간에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융합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동일 종족 혹은 유사 종족들이 가까이에 있고 어울려 살았기에 이들이 종족 차원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연합이나 연맹체제를 이루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가까운 종족이라 하여도 상호간에 이익 충돌이 있을 때 그리고 세력들간에 현저한 힘의 차이가 있을 때는 갈등관계나 지배·피지배 관계에 들어가기가 쉬울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고대국가를 이루어간 세력집단들이 연합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 다른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었던 만주와 한반도지역의 생태적, 자연적 조건에 유의함으로써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에는 산간지역이 많아 주민들은 일찍부터 산이나 강을 경계로 하여 많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어떤 한 지역이 다른 지역들에 비하여 월등하게 많은 인간을 수용할 만한 공간적 조건을 갖춘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강수량도 농업을 영위하는데 큰 지장을 받을 정도도 아니어서 물이 많은 지역 등으로 주민들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현상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의 고대인들은 서로간의 세력 차이가 현저하지도 않았던 만큼, 정복보다는 연맹이나 연합을 이루어 또다른 적들과 대응하는 형세를 취하였다고 보여진다. 앞에서 본대로 지역 일대의 주민들이 대부분 동일한 종족이었던 만큼 평화적 교섭과 연맹의 추진을 비교적 손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위와 같은 조건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삼국의 핵심세력, 실제적으로는 귀족세력은 이후에도 그들의 연합적 구조를 끈질기게 존속시키는 면을 보여주었다. 비록 왕실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입지를 갖게 된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귀족들의 연합체로서의 국가인 만큼 나머지 부(部)의 귀족들이 왕권의 독주와 어느 특정 귀족세력의 독단을 늘 견제하는 면이 있었다. 국가운영은 귀족들이 중요 관직을 맡아 행해졌으며, 국사결정에 있어서 귀족협의제나 만장일치제와 같은 제도는 귀족연립을 실제적으로 받쳐주는 기본적인 장치였다. 또한 국가 중요 부서의 장관이나 차관이 복수였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것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상의 사실들에서 삼국의 국가권력은 결국 과거 족장들의 후예의 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정리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지배층의 연합·연맹은 그들이 지배력을 행사하였던 휘하 주민들간의 존재방식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지배층과 더불어 왕경민(王京民)으로 편제된 고구려나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의 주민은 거의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지배층들과 연계를 가지고 살아갔다. 다른 지방세력 주민들의 경우는 물론 왕경민들과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의 경우도 과거 지배층의 후손들과 모종의 연계를 가졌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국가권력의 연합적 성격은 사실 주민 일반에까지 관철되는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들은 상호간에 경쟁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연합적인 구조를 깨뜨림으로써 왕권을 지나치게 비대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귀족들의 연합구조는 그 하부기반으로서 주민들의 뒷받침이 필요하였으므로, 귀족들은 주민들과의 연계를 꾸준히 계속해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구조는 왕권의 무한정한 전제를 제약하는 작용을 하였기 ?문에, 왕은 주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정책을 고안한다거나,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을 막아주어 주민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주어야 했고, 따라서 왕은 백성을 아끼고 돌보는 자애로운 성군의 상을 지향해야 했다.
이같은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연합·연맹적인 구조는 결과적으로 생산여건이 크게 좋지는 않았다고 여겨지는 백성들에 대한 지나친 조세 수취나 수탈을 막아주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왕은 국가 전체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과 번영의 요체임을 알고 이에 대응하였던 것이다. 그 균형과 조화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깨어져 갈 때는 소위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왕조교체가 일어나 새로운 수준에서 균형된 체제를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각 시기의 주민들이 기본적으로 공동체적 삶을 이상으로 생각하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그리고 이같은 삶의 태도의 연원은 고대국가의 성립과정과 그것의 구조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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