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농민 전쟁

1. 고부 농민 봉기

갑오농민전쟁은 고부농민봉기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 제일의 곡창이었던 고부 지방은 개항 뒤 일본의 쌀 수입으로 가장 많은 수탈을 당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왕실에 소속된 궁장토(궁방전)가 널리 퍼져있었고, 이를 관리하는 관리의 농간과 조세 운반 책임자였던 전운사 조필영과 앞에서 언급한 김창석 등이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하자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어느 지역보다 극심했다.

여기에 1892년 4월 조병갑이 고부 군수로 부임하여 온갖 학정을 저질렀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 밑에 새 보를 쌓고 물세를 비싸게 받았다. 또 갖은 명목으로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하여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에 전봉준과 고부 농민들은 이러한 폐해를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군수와 전라감영에 호소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자들은 사발통문을 돌리며 준비를 한 뒤 1894년 1월 10일 봉기하였다. 먼저 고부관청을 점 령한 농민군은 아전들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숴 무장하였다. 이어 창고를 열어 양속을 몰수하여 부당하게 거둔 세곡을 돌려주고, 원망의 대상이던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보를 허물어버렸다.

고부 봉기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처벌하고,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하는 등 폐단을 고칠 방법을 모색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안핵사 이용태가 조병갑을 옹호하고, 봉기에 참가한 농민 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탄압으로 3월 13일 전봉준은 농민군과 함께 무장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봉기를 준비하였다.

2. 제1차 농민전쟁

1894년 3월 전라도 무장에 모인 농민군은 인근 고을 농민들의 궐기를 촉구하고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농민 군은 3월 23일 고부 관아를 재점령하고, 이어 25일에는 백산에 진을 치고 대회를 열어 호남 각지의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전봉준은 8천여 명의 농민들을 농민군 부대로 편성하고 지휘부인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전봉준은 '창의대장', 손화중, 김개남은 부대장인 총관령이 되었다.

대회에서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다', '충효를 오로지하여 제세안민한다', '왜이를 축멸하며 성도를 깨끗이 한다',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를 모두 멸한다'는 농민군 4대 행동강령과 농민군의 타도대상과 동맹세력을 밝힌 격문을 발표하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이 일어난 뒤 80여 년만에 중앙군을 파견하였다. 그렇지만 전주로 향하던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이어 4월 21일에는 장성에서 중앙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힘입는 농민군은 4월 27일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고 "병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부패한 관리를 처단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이 농민 봉기의 기운은 곧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번져갔다.

3. 폐정개혁 활동

전주성이 함락되자 민씨정권은 청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공격과 회유를 통해 농민군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청군에 이어 일본군까지 상륙할 것이 확실해지자 정부는 양군의 충돌을 우려하여 농민군에게 계속 압박을 가할 수 없었고, 농민군 또한 자신들의 군사적 열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농민군은 5월 8일 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철수하였다.

전주에서 철수한 농민군은 각 군에 도소(都所)를 설치한 뒤 정부 쪽의 폐정개혁을 거듭 요구하면서 각종 개혁정책을 실시하고 감독하였다. 이는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농민군을 해산시켜려 한 정부의 의도와 맞물려 시행되었다.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민족적 위기감이 높아지던 7월 6일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두 사람은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 도내의 안정과 치안질서를 바로잡기로 합의하고, 각 고을에 집강소를 전면적으로 설치한 뒤 농민군이 이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농민군 집강소와 도소는 지역 실정에 따라 민정기관으로 또는 자치기관으로서 또는 치안기구로 기능하면서 폐정을 개혁하였다.

<농민군의 폐정개혁 활동>
1.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은 씻어버리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의 죄목은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홍포한 부호들은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은 징벌한다.
5. 노비문서는 태워버린다.
6. 칠반천인(七斑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머리에 씌우는 평양갓(平壤笠)을 벗게 한다.
7.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
8.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한다.
10. 외적과 내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직하게 한다.

전봉준이 집강소를 통해 꾀하려했던 것은 농민군의 주도로 치안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합법적인 집강소 체제를 넘어 독자적인 반봉건 계급 투쟁을 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봉준 주도로 이루어진 관민상화와 집강소 체제는 농민군의 정서와 거리가 있었고, 무기를 반납하고 치안유지에 힘쓰라는 그의 지시는 무시되었다.

한편 이 시기 각지의 유생층은 농민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외세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농민군의 개혁으로 그들의 이해관계가 침해되는 것을 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 민보군은 각지에서 농민군을 체포하여 화적 혐의로 처형하였다.

8월이 되면서 정국은 농민군의 바램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점차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었고 농민군이 기대를 걸고 있던 갑오개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농민군 사이에 반봉건 계급 투쟁과 반침략 투쟁의 분위기 또한 점차 고조되어 더 이상 '관민상화'를 기반으로 한 집강소체제는 유지될 수 없었다.

4. 제2차 농민전쟁

갑오정권이 개혁을 늦추고,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농민군은 다시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8월 말 김개남의 영향을 받은 7만여 명의 농민군은 남원에 모여 재봉기를 결의하였으나, 전봉준은 재봉기를 말렸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서 농민들이 항쟁에 나서고 있었다. 결국 전봉준도 9월 5일 재봉기를 결심하고 통문을 돌리는 한편, 북접과도 연합을 꾀하게 되었다.

1차 전쟁 때 최시형의 북접 교단은 동학의 행동을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목적에 국한시키면서 남접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항쟁이 시작되자 전봉준은 파문시켰고, 동학교도들의 무장 봉기를 금지하는 통유문을 여러 차례 내렸다. 그러나 조선 정부와 일본은 북접을 포함한 동학교도 전체를 토벌하려 하였고, 점차 남접에 합류하는 북접 교도가 늘어갔다. 결국 최시형은 참전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9월부터 시작된 2차 농민전쟁에는 북접군까지 합류하고 호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 규모 또한 1차 전쟁 때보다 훨씬 확대되었으나, 훈련과 조직, 화력면에서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농민군은 서울 진격의 요지인 공주를 점령하고자 전봉준의 지휘하에 관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11월 8일 관군과 우금치 고개에서 격전을 벌인 농민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한편 남원에 주둔해 있던 김개남 부대는 10월 14일 주력군 8천여 명을 이끌고 북상하였으나 11월 13일 청주에서 패하고 말았다.

우금치와 청주에서 패한 농민군은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그러나 논산·금구 전투마저도 패하고만 농민군은 곳곳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12월 1일 김개남은 태인에서 체포된 뒤 전주에서 처형당했으며, 전봉준은 순창에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던 중 밀고자로 인해 12월 2일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 3월 말 다른 농민군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