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발생

1. 동학의 발생과 사상

동학은 경상도 경주 지방의 몰락양반 출신인 최제우가 1860년 4월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유·불·선 사상을 융합하여 만든 종교였다. 그가 동학을 제창한 시기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나라 안팎에서 위기 의식이 높아지던 때였으며, 안으로는 지배층의 착취로 인해 민중의 항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학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학은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 하여 신분차별에서 벗어나려는 민중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으며, 동학의 보국안민 사상은 반봉건 반침략의 성격을 띠어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서학(천주교)에 반한다는 뜻으로 동학이라는 교명을 가지게 되었다.

동학을 열심히 믿고 수련하면 후천개벽의 시대가 열리며 그 때 모든 인간은 신선이 되는 지상천국이 온다는 '후천개벽설'은 민중의 바람과 시대상을 반영하여 동학이 빠른 속도로 퍼질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동학이 추구한 이러한 이상세계는 신앙심을 통하여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상이었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천행동의 원리는 아니었다. 이는 현실 변혁에 대한 민중의 염원을 종교로 순화시키려는 관념세계였던 것이다.

동학이 급속하게 교세를 확산하자 정부는 1864년 3월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다는 죄로 처형 하고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법화하여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동학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고, 특히 1880년대에는 삼남지방까지 전파되었다.

2. 교조신원운동

1890년대 들어 일부 동학간부들은 정부를 상대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여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벌였다. 이는 동학의 합법성을 인정받아 교세를 확대하고 교도들의 피해를 없애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1892년 10월에는 충청도 공주, 11월에는 전라도 삼례 지역에서 동학 교도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서 '교조신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금지하는 조처를 얻었다.

1893년 2월에는 손병희 등 40여 명의 동학간부가 광화문 앞에서 국왕에게 교조신원을 상소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동학간부들이 해산한 뒤 서울에서는 '왜놈과 서양오랑캐는 물러가라'는 벽보가 나붙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벽보를 붙인 세력은 동학 상부층의 교조신원운동과는 성격이나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교조신원운동을 계기로 동학 안에는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순수한 종교운동에 머물려는 세력과 반봉건 반침략의 바람을 현실적으로 실행하려는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섭은 그 해 3월 열린 보은집회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동학간부들은 다시 대중시위를 벌여 신원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보은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는 동학 교도들 뿐만이 아니라 2만여 명의 일반민중까지 참여한 대규모 집회였지만, 정부의 위협에 동학간부들이 도망가면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흩어졌다.

보은집회가 열리던 그 때 전라도 금구에서는 1만여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금구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를 주도한 전봉준·서장옥·황하일 등은 보은집회와 결합하여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으나 보은 집회의 무산과 동학간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교조신원운동에 연연한 동학 상층부의 뜻과는 달리, 신원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동학교도와 농민대중의 반침략 반봉건에 대한 의지는 1894년 3월 고부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전국적인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