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1. 3일 천하

개화파의 노력은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던 청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부딪쳤다. 민씨정권은 '친청수구'의 성격을 보이면서 그 동안 추진해오던 개화정척을 크게 후퇴시키고 개화파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 민씨정권과 개화파는 바닥난 국가재정을 해결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친청수구파의 입장을 대변한 독일인 재정고문 묄렌도르프 등은 악화의 발행을 주장하였고, 김옥균 등은 외채를 도입하여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는 정부 안의 주도권을 다투는 중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일본과의 차관 교섭에서 김옥균이 실패하고 돌아오자 개화파는 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수행하려던 자신들의 개화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민씨정권의 장벽을 실력행사로 뚫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884년 8월 청불전쟁으로 청군 3,000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키자 개화파는 이를 민씨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로 삼으려 하였다. 개화파는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사관학교의 유학생과 개화사상을 지지하던 조선군인을 동원하기로 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또한 민씨정권을 감싸고 도는 청 세력을 막을 군사문제와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기로 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마침내 개화파는 거사를 단행하여 수구파의 거두들을 처단하고,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인적이 드물어 방어하기 편리한 경우궁으로 옮겼다.

2. 새 정부 구성과 정령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이튿날 18일 새 정부를 구성하여 발표하였는데, 겉으로는 민씨왕권에 반대하는 왕실과 개화파의 연합정부 성격을 띠었지만 실권은 개화파가 잡았다.

19일 개화파는 새 정부의 개혁 내용을 담은 새 정령을 발표하였다. 청에 대한 사대외교의 폐지, 인민평등권에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지조법 개정, 내각의 권한 확대 등이 개혁의 뼈대를 이루었다. 이 새 정령은 개화파가 조선의 부르주아적 개혁을 위해서 발전시켜온 개화사상과 그에 따른 정치적 개혁활동의 총체적 반영이었다.

그러나 청군이 공격해오자 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군이 철수해 버리고, 개화파의 핵심세력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개화파의 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은 철저한 부르주아적 혁명은 아니었지만, 조선사회를 봉건체제에서 근대 자본주의체제로 발전시키려 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