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과 개화파의 형성

1. 개화사상 형성

반침략과 반봉건이 우리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나라 안의 봉건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 역사발전의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생겨났다.

박규수·오경석·우흥기 등은 실학의 한 흐름인 북학파의 사상에다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목하여 개화사상의 기본 골격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오경석, 유흥기 등은 중인 또는 역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반영시킬 수 없는 처지였으며, 박규수는 자주적인 문호개방을 주장하였으나, 민씨정권을 둘러싼 봉건관료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담고 있는 연암문집을 비롯하여 중국을 통해 터득한 견문과 서구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교육하였다.

개화사상은 북학파의 중상주의적 사상을 적극 수용하였지만, 정약용 등이 주장한 토지개혁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화사상은 19세기 봉건체제의 위기에서 비롯된 농민항쟁의 근본원인이 봉건적 토지제도의 모순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때문에 이 개화사상은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사회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한 신진 지식인의 부르주아적 계몽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개화파의 등장과 초기 개혁운동

개화파는 개화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는데, 그들의 본격적인 활동은 1870년 말이었다. 김옥균·박영효 등 양반 출신의 청년 관리와 유흥기 등 일부 중인 출신의 선진 지식인들은 민씨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불만을 품고 나라가 부강하고 문명개화를 이룩하려면 급속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충의계'라는 정치적 결사체를 조직하였는데, 각계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넓혀나갔다.

1800년대에 이르러 개화파는 개화의 방법, 외교정책, 민씨정권에 대한 인식 등에서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 김홍집 등은 청의 양무론 받아들여 동도서기적 입장에서 점진적으로 부국강병의 개혁정책을 수행하려 하였다. 또한 김옥균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서양의 과학·기술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사상·제도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민씨정권을 타협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 청에 대한 사대관계 종식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