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과 사회경제 변화

1. 명성황후 정권의 등장

대원군은 양이(攘夷)의 명분을 내세워 대외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내적인 사회모순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원군 집권기에도 반봉건 농민항쟁은 계속 이어졌으며, 그 가운데는 몰락 양반 출신의 지식층이 중심이 된 병란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유생들은 대원군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고종 또한 이를 계기로 직접 정치를 하려 들었다. 1873년 대원군은 끝내 정치에서 물러나고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민씨 정권은 대원군이 실시한 거의 모든 정책을 바꾸었다. 서원을 복구하여 봉건 유생들을 포섭하였으며, 각종 조세와 부과금을 내리거나 탕감해주어 민심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그쳐 국가재정의 혼란만 가져왔으며, 정치기강도 더 해이해졌다.

민씨 정권은 청과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안정시키는 선에서 개방정책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개방에 필요한 아무런 준비는 갖추지 않은 채 벌인 이들의 정책은 비자주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2.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개항정국

1870년대 조선은 일차적으로 서구열강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국제 정세를 적극 이용한 것이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토대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식산흥업과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은, 1868년 11월 조선 정부에 왕정이 복고되었음을 알리면서 새롭게 수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이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정부는 '왜양일체'의 입장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일본은 1874년 8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이 사건을 구실로 조일수호조규를 강요하였고, 민씨정권은 1876년 2월 27일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일명 '강화도 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은 일본의 일방적인 특권만을 규정하였다. 이 조약으로 부산 등 3개 항을 개항하게 되었으며, 비로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되었다.

이어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으며, 9월에는 청의 강요에 의해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시하고 있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굴욕적으로 조인하고 말았다. 그 뒤에도 조선 정보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열강과 이와 비슷한 내용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봉건 모순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던 민씨정권은, 개항과 개방에 따른 적절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하였으며, 청과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에 의해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한편 개항 뒤 민씨정권의 부패와 외세 침략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양반 유생의 저항이 높아가는 가운데, 1882년 6월 군인폭동(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신식군인 별기군과의 차별과 월급을 받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일어난 임오군란은 일시 왕궁을 점령하였으나, 청의 무력개입으로 진압되었다.

민씨정권의 요청으로 사태를 진압한 청은 위안스카이를 파견,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일본과 충돌하게 되었다. 조선 문제를 둘러싼 청·일 사이의 대립은 청일전쟁 때까지 극동 국제정치사의 기본축이었다.

3. 개항 뒤 사회경제 변화

개항 후 민씨정권의 부정부패와 청·일본의 경제침탈이 겹치면서 사회모순은 깊어만 갔다. 또한 개항 이후 본격화된 외국무역은 조선의 사회경제를 크게 변화시켜 갔다.

불평등 조약에 의해 외국 상인들이 국내 유통기구를 잠식해가기 시작했으며, 조선 무역의 주요 상대국인 일본과 청은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이 시기 무역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쌀의 수출과 외국산 면포의 수입이었다. 외국 상인들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본 상인들은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사버리는(입도선매) 등 조선 쌀을 값싸게 수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농민들은 파산하게 되었다.

또한 외국산 면제품의 수입은 이제 막 공장제 수공업 단계로 접어들고 있던 조선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게되었다. 값싼 면직물이 들어오자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면직물을 생산하던 농민들은 몰락하였고, 면화를 재배하는 농민들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들의 외세에 대한 경계심과 적대의식이 쌓여갔다. 또 개항항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일본 상인들의 상권침탈과 불법행위를 규탄하는 국내 상인들의 외침이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