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정권과 서구 열강의 침탈

1. 대원군의 등장과 내정 개혁

1862년의 농민항쟁은 비록 봉건왕조를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지만 세도정권을 위기로 몰아넣게 되었다. 대원군의 등장은 지배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지배세력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은 무너져가는 봉건체제를 유지하려면 왕권을 강화하고 세도정치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집권 후에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또한 강력한 왕권의 상징물로서 경복궁을 다시 지었으며, 흐트러졌던 군사·법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은 농민착취의 중심이 되던 지방의 토호세력과 서원의 폐단을 척결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600여 서원을 없애 버렸다. 또 호포법을 실시하여 평민에게만 징수되던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부과하였으며, 상공업 분야에서도 도고의 매점행위를 금지하고, 청과 일본 상품의 유입을 감시하여 과세징수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이러한 개혁정치는 호포법의 대상이 되었던 양반층의 원성을 사게 되었으며, 경복궁의 중건을 위하여 과중한, 세금을 농민들에게 부과함으로서 농민들에게까지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 개혁정치는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사회모순이 확대되는 것을 막고 봉건체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서구 열강의 통상 강요와 군사침략

안으로 체제를 정비하던 대원군은 밖으로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펴나갔다. 대원군의 각 지방에 외국선박에 대한 경계와 그들과의 통상을 금지하였으며, 서해안 일대와 한강 하구에 대한 방어도 강화하였다. 또 구미 열강과 국교를 맺은 일본과 통상을 단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미 열강은 여러 차례 조선을 침략하여 통상을 강요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국가가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프랑스는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866년 9월에 강화도를 침략하였으며, 미국은 상선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불평등한 통상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며 1871년 4월 아시아 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러한 구미 열강의 군사적 시위는 조선 민중에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지만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려던 그들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았다. 이는 민족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단결된 의지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은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뒤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열강의 침략에 대한 경계심을 높여갔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봉건 지배체제의 강화만을 고수하던 지배층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