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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歷史硏究會 歷史바로세우기
참고:여기에 인용된 글은 歷史비평에 나와있는 김태식교수님의 "광개토왕릉 비문논쟁과 임나일본부설"을 참고로하였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가 신공황후 섭정 49년(369)에 가야 지역을 군사정벌하여 그 지배 아래 임나를 성립시킨후, 4세기 말 5세기초에는 한반도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대결을 벌이고, 5세기에는 왜의 한반도 남부 영유를 중국남조 송(宋)에게 인정받는 등, 임나일본부를 중심으로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다가 , 흠명천황 23년(562)에 이를 신라에게 빼았겼다는것이다.

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가?

日本에서는 옛날 언젠가 신공황후가 80척의 배를 거느리고 삼한을 정벌하였다는 전설이 고대 이래로 전해져왔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알수 없으나, 이것이 일본 고대의 양대 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도 수록되어 있다. 게다가 「일본서기」에는 한반도의 임나에 “일본부”라는 것이 존재하였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관료들의 이름 및 활동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규정이 애매한 임나일본부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몇가지 사료를 택하고 있다. 첫째, 광개토 대왕비문이다. 여기서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되는 기사는 “신묘년(辛卯年)기사”이다. 그 본문은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래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洙軍 討伐殘國”(「」안은 불분명한 글자, □는 보이지 않는 글자)로 되어있다. 
일본학자 스에마츠의 해석은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영락)6년 병신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토벌하였다. 이 해석의 주안점은 신묘년, 즉 391년에 왜군이 백제(=백잔)와 □□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강조하는데있다.하지만 위의 해석이 맞는다면 백제와 신라는 둘 다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가 똑같이 왜의 신민으로 바뀌었다 . 그렇다면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모두 정벌해야 논리적으로 맞는데, 실제적으로는 백제만을 토벌하고 있다. 이것은 문맥상으로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왜가 강조되어야 할 이유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위와같은 해석은 타당하다고 볼 수 없는것이다. 정인보는 주어인 고구려가 문장 중간에 생략되었다고 보아, “왜가 신묘년에 오자,(고구려가)바다를 건너 (왜를)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정두희,이기백교수는“왜를 (고구려가)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고 해석하고있다. 
두번째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 관련기사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사는 아래와 같다.신공(神功)기 9년 10월 3일 :대마도에서 출발한 신공 황후는 신라를 정벌하여 내궁가둔창을 설치하고, 신라왕의 아들 미질기지를 인질로 잡아온다.
신공기 49년 3월 : 모쿠라콘지를 보내 거창, 김해, 경산, 함안, 합천, 정순, 고령 7국을 평정
이중(履中) 4년 8월: 국사를 둠
계체(繼體)6년 12월: 임나국의 상치리, 하치리, 모루의 4현을 백제에 줌
흠명(欽明)23년 정월 : 신라가 임나를 멸함

「일본서기」는 역사성 자체를 배제하고 있다. 그 지명이나 인물대신에 그들의 지명과 인명을 삽입하여그들의 역사로 치장하고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납득이 어려울 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부분이 허다하다. 그 한예로 천지 6년에 서력으로 667년에 백제가 멸한지 7년, 고구려가 패망하기 1년전이나 되는데, 패망한지 7년이나 된 백제에서 조문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고구려와 신라가 국가의존망을 놓고 대결상황에서 두국가의 사신이 함께자리했다는 기록등이 존재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많은 부분이 허구로 「일본서기」의 기록에 근거한 임나일본부에대해 집착하고있다는것을 알수있다. 
세번째로, 이소노가미 신궁에서 보존하고 있는 칠지도이다. 이것은 75센티미터로 칼날 양측에 교차된 세걔의 날이 붙어있는데 일본사학에서는 여기에 새겨진 앞면에 34자, 뒷면에는 27자, 총 61자의 명문에서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앞면에는 “泰和 四年 四月 十一日, 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世)벽百兵, 宣供供侯王□□□□作”이라되어있고, 뒷면에는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라고 쓰여있다. 이에 해석은 “태화 4년 4월 11일 병오날 중에 백번을 달군 강철의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백 명의 군사를 물리칠 수 있으니 후왕들에게 베풀어 공급할 만하다. □□□□만듦”“선세 이래로 아직 이러한 칼이 없었던바, 백제의 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이 보전하라” 이 해석의 진위여부는 “후왕”이라는 어휘에서 분명해진다. 후왕이라면 제후인 왕, 그러니까 백제왕의 수하에 있던 영주를 의미하는것이니, 왕세자가 하사했다는 해서에 신뢰도를 더해준다. 더구나 당시 철의 문화 수준(군사력, 국력)이 왜보다 백제측이 훨씬 우월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위의 해석을 이해하는데 손쉬울것이다. 
네번째로, [송서(宋書)]의 倭人傳에“都督 倭新羅任那加羅泰韓慕韓 六國諸軍事”라는 기록이 있어 일본사학은 이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왜의 5왕은 신라를 포함한 임나 , 가야등의 실질적 권리를 중국으로부터 인정받은게 되고 그 증거로 작위까지 부여받았다고해석하고있다. 그러나 다시 중국은 주변국가들에게 관작을 수여할때, 그 지역의 실질적인 관할 여부와 관계없이 관작을 받는 이가 원하는 칭호를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작위 명칭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송서]에 등장하는 기록은 분명 우리에게 혼란을 안겨준다. 기록대로라면 왜왕은 한반도의 신라와 가야을 통괄하고 있었고, 백제에 대해서도 「일본서기」 등에서 주장하듯이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왜와의 직위보다 훨씬 높은 칭호를 부여받았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의 해괴한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설명이 뒷받침해주진않는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한.일 연구상황

敗戰 직후 에가미는 일본고고학의 성과들을 종합하여 한?일관계사에 응용하여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하여 동북아시아 계통의 기마민족이 한동안 남한을 지배하다가 진왕의자손이 4세기초에 일본 북큐수로건너가 왜한(倭韓)연합왕조를 건국하고 스진천황이 되었으며, 5세기 초에는 그의 자손인 오진천황이 북큐수에서 기나이로 진출하여 야마토(大和)왕조를 창시한 후, 일본열도를 통합하고 한반도남부를 경영하다가, 7세기 중엽이후 손을땠다는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 북한의 김석형은 「일본서기」와 일본 고고학 자료들을 가지고 일본열도내에서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고대 한.일 관계사 영역을 개척하여 이른바 “분국설”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4~5세기의 일본고분문화는 백제, 가야 등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고 그 주체세력들은 모두 한국계통 소국 즉 분국이었으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한반도 관계기사는 일본열도 내부의 한국계통 소국들 사이의 일을 반영한다는것이다. 그렇게 분열되어 있던 일본은 6세기초 이래 백제계통의 소국으로 보이는 야마토정권에의하여 통일되기 시작하는데, 임나일본부는 그 시기에 야마토의 왜왕권이 기비지방의 임나소국에서리ㅊ한 지배기관이었다고 보았다.
1970년대에들어 기존의 남한경영설에대한 반성이있었다. 그리하여 이노우에는 「일본서기」의 사료계통의 원정을 추출해내어 분석하는 방법론을 써서 좀더 객관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그에 따르면 「광개토왕비문」의 왜군이나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관계기사들은, 왜인을 자칭하는 임나의 한 토착세력이 일본의 중앙귀족이나 지방호족과 관계를 가진것에 의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여 한것을 보여준다는것이다.이는 일본인 학자의 연구결과중에서 왜왕권의 임나지배를 부인한 최초의것으로서 주목된다.
천관우선생은 “백제군사령부설”을 제기하여 4세기 중엽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가야제국을 군사정벌하여 백제권에 편입시킨 이후 6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임나일본부’란 곧 백제가 가야지역에 파견하여 군대의 사령부였다는것이다.
최신연구성과는 1996년에 발표된 스즈기의 저서 「고대왜국과 조선제국」이다. 여기서 6세기 전반 왜왕권은 한반도의 금속. 문물을 수입하는 대신에 백제에의 병사파견, 무기공급과 같은 군사력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백제의 ‘용병’으로 볼수는 없다고 한다. 당시 백제와 왜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자립한 왕권사이의 동맹관계이나, 백제가 왜왕에게 볼모를 보내고 왜군의 파견을 구한 시기의 관계는 왜국을 주 백제를 종으로 하는 ‘종속적 동맹’관계라고해야 한다는것이다. 또한 안라에 있었던 ‘임나일본부’ 즉 왜왕이 파견한 군사력을 가진 ‘제왜신’은 왜왕의 통제아래 있었고, 왜왕권이 안라의 군사.외교에 관여한 형적이 있었으므, 왜왕권과 안라의 관계는 ‘종속적 동맹’에서 진일보한 종속형태라고하였다. 결론의 내용은 30여년동안 백제와 안라가 왜국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그러나 그가 든 근거는 왜왕권의 군대가 안라에서 1년간 자립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불확실하고 미약한 증거와, 왜국에 거주하던 백제의 고위귀족을 「일본서기」에서 종종 ‘質’로 기록한 상투적 표현뿐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그의 결론은 객관적 사실성을 결여하였다고 볼수있다.

역사바로세우기

러한 연구를 확실히 뒷받침해줄 고대서들은 거의 일제침략기에 일본에 의하여 불태워졌다. 특히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일본은 우리 고대사에 칼을 대기 시작하였다. 아직까지도 고대사에 대한 많은 내용들이 희석되지않고 미진한 것은 일제의 이러한 역사왜곡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광개토왕비와 칠지도의 명문을 삭제조작하고, 「일본서기」를 재정리하여 조선탈취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연구활동에 몰두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사료적근거를 위주로 그들의 주장을 내세우고있다. 그러나 사료의 일부분만 발췌하여 논지를 강화하였을뿐이지, 그 시대의 역사적상황이나 시대배경이 전혀 맞지가 않는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화된 조작일뿐이다. 우리역사연구활동은 일본의 역사조작을반박하는 연구하는 활동이 계속적으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올바른역사, 밝은역사를 연구하고, 바로세워나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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