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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歷史硏究會 임나일본부설
 
1.서론 

2.본론 3.결론 

1)임나일본부설과 그 모순. 

2)임나일본부설의 새로운 연구동향

 
 

序 論

韓日 양국의 관계사 가운데 역사가들의 최대 爭點이 되고 있는 부분을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임나일본부가 될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倭가 4세기 중엽에 가야지역을 軍事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經營하였다는 學說로 '남선경영론'이라고도 한다.

일본 史學에서는 임나일본부를 기정 사실화하여 국사교과서에 상세하게 記述해 놓고 있는 반면에 韓國史學에서는 임나일본부 자체를 否認하여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그에 대해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른바 일본에서 主張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며, 또 어디까지를 否定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과 그 矛盾, 그리고 한국 양국에서 進行되어 온 임나일본부에 관련된 여러 연구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本 論

1. 임나일본부설과 그 矛盾

일본에는 이미 에도시대부터 {古史記}, {日本書紀}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그를 통해 太古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지배를 주장하였다. 그 뒤 메이지 연간에 文獻考證을 위주로 하는 근대역사학이 成立되면서 일본의 임나지배를 전제한 위에 주로 임나 관계의 지명고증작업을 행하였으며 이러한 연구를 이어받아 스에마쓰가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바로 {임나흥망사}가 그것이다.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임나가라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자를 통하여 三韓에 통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로, {일본서기} 진쿠황후 49년 조의 7국 및 4읍 평정기사로 보아, 369년 당시에 왜는 지금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일부를 복귀시켜 임나지배 체제를 성립시키고 백제왕의 조공을 서약 받았다. 셋째로, 광개토왕 비문의 기사로 보아, 왜는 400년 전후해서 고구려 군과 전쟁을 통해서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 관계를 강화하였다. 넷째로, {宋書} 왜국전에 나오는 왜왕의 작호로 보아, 일본은 5세기에 외교적인 수단으로 倭 新羅 임나 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認定받았으며 백제의 支配까지 송나라로 하여금 인정시키고자 하였다. 다섯째로, {일본서기}의 기사들로 보아 일본은 5세기 후반에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6세기 초반에는 백제에게 전라남도 전라북도 일대의 임나 땅을 할양해 주기도 하고 新羅에게 南加羅 등을 약탈하기도 하면서 임나가 衰退하였다. 여섯째로, {일본서기} 긴메이왕 때의 기사들로 보아 540년대 이후 백제와 임나일본부설은 임나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결국 562년에 신라가 임나관가를 토멸함으로써 임나가 멸망하였다. 일곱째로, 그 뒤에도 일본은 임나고지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신라에게 임나의 調를 요구하여 받아 내었다. 즉 임나일본부설은 왜 왕권이 한반도의 임나지역을 정벌하여 현지에 설치한 직할통치기관으로서, 왜는 이를 基盤으로 하여 4세기 중엽부터 200년까지 伽倻를 비롯하여 百濟 新羅 등의 韓半島 남부를 經營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에는 많은 矛盾이 있다. 임나일부설의 주근거 史料인 {日本書紀}는 8세기초에 일본왕가를 美化하기 위하여 編纂한 책으로 원사료 편찬과정에 상당한 操作이 가해졌다고 보이며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워, 역사적 자료로서의 자격이 부적합함을 일본사학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또한 廣開土王 碑文이나 {宋書} 왜국전의 문헌기록은 과장되게 解釋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文獻사료상의 문제점을 접어 두고 그 주장의 사실관계만 檢討하여 보아도 임나일본부설의 한계성은 곧 드러난다. 김석형의 연구에 따르면 기나이의 야마토세력이 그 주변의 일본열도를 統合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可能하였다고 하며, 이러한 견해는 일본학계에서도 이제 통설화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야마토 국가가 멀리 떨어진 남한을 4세기부터 經營하였다는 점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왜가 임나를 200년 동안이나 군사지배를 하였다면 그 地域에 일본 문화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 고분 발굴 자료들에 의하면 4세기 이전의 이 지역 유물문화가 5 6세기까지도 連續的으로 繼承되는 樣相이 나타난다. 즉, 일본에 의하여 支配당하였다는 그 문화유물에 반영된 바가 없으므로, 임나일본설에서의 문헌 사료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이 立證되는 것이다.

2. 임나일본부설의 새로운 연구동향

스에마쓰에 의하여 學問的으로 定立된 임나일본부설은 오랫동안 일본고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定說로 인식되어 왔으나, 김석형의 일본고대사 自體에 대한 反論이 1960년대에 발표되자 그 충격에 의하여 1970년대 이후로 일본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노우에는 이전기록의 信憑性을 의문시하고 그들 記錄에 의한 더 이상의 想像을 배제하였으며, 廣開土王 碑文에 나타나는 4세기 말의 왜군이나 긴메이기에 나타나는 6세기 전반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은 신뢰를 둘 수 있되 이들은 야마토왕조에서 派遣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임나일본부에 관련된 일련의 논고를 통해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열도에 한반도의 주민이 移住하였던 것과 같이, 가야지역에도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으며, 임나일본부는 그러한 왜인들 내지는 왜인과 韓人과의 혼혈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解釋하였다. 이는 일본인학자의 硏究結果 중에서 왜왕권의 임나지배를 否認한 최초의 것으로 注目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가야지역에서 왜인들의 집단적 居住가 文獻的으로나 考古學的으로 證明될 수 없다는 弱點을 가지고 있다. 한편, 우케다는 사료상으로 임나일본부는 6세기 전반의 안라에 있던 일본부만을 가리키며, '일본부'의 古訓은 '야마토노미코토모치'로 그 뜻은 일본왕이 臨時로 파견한 사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見解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쓰즈키 야스타미, 우케다 마사유키, 오쿠다 쇼우, 키토우 키요아키 등에 의하여 確立되었으며, 근년에 한일고대사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해석의 位置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야마오는 {日本書紀}의 기사들을 再檢討하고 백제사와의 關聯性을 첨가하여 왜왕권이 임나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5세기 후반에 百濟의 대신이면서 임나의 지배자였던 목만치가 왜국으로 移住한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맞이함으로써 임나에 대한 緣故權을 가지게 된 왜왕권이 가야지역에 관인을 派遣하여 구성한 것이 임나일본부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 비하여 상당한 差異가 나타난다.

첫째, {日本書紀}의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否認함으로써 임나일본부의 성립시기를 4세기 中葉으로 설정하는 고정적 觀念에서 후퇴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 문제를 6세기 전반으로 制限하여 보고 있다. 둘째, 임나일본부의 性格을 왜왕권이 임나를 군사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배기관이라기 보다 왜왕권이 韓半島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임나에 파견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고 있다. 셋째, 임나일본부의 存立이유를 倭의 軍事的 壓制에서 구한다기보다 百濟 新羅의 壓力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제국의 自主的 의지에서 구하고 있다. 이러한 視覺의 변화는 종래의 임나일본부설에서 일단 진일보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한편, 국내학자들은 一般的으로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금기시하여 외면하고 體系的 反論을 펴지 않고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이후로 이에 대한 문제를 提起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천관우는 {日本書紀}의 임나 관계 기록들을 재해석하여 그 記事들의 주어를 왜왕이 아닌 백제왕으로 고쳐서 읽음으로써 '倭의 임나지배'가 아닌 '百濟의 가야지배'라는 시각으로 가야사를 復原하고자 하였다. 그는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군사정벌하여 이를 백제권에 編入시키고 나서 백제가 가야지배를 위하여 설치한 파견군 사령부가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라 하였다. 김현구는 임나일본부가 百濟의 가야통치를 위해 設置한 기관이라는 천관우와 같은 견해에서 6 7세기 백제 야마토 사이의 외교관계의 特徵을 용병관계로 把握하였다. 이러한 용병은 백제가 왜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던 반대급부이며, 왜 계통의 인명에 대해서는 일찍이 일본열도에서 백제에 이주하여 백제왕의 신하 노릇을 하고 있던 왜계통의 百濟인 이라고 規定지었다. 이렇게 볼 때 근래의 국내학자들에 의한 임나관계 연구경향은 百濟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結 論

이상으로 임나일본부설과 그 矛盾 그리고 한일양국의 새로운 연구동향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스에마쓰에 의하여 정립된 임나일본부설은 그 뒤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批判되고 수정되어 이제는 學說로서의 生命을 거의 잃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 본격화된 임나관계의 硏究들은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6세기 전반에 限定하여 取扱한다던가, 임나일본부의 性格을 지배가 아닌 외교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던가, 임나문제에 대하여 百濟의 役割을 重視한다던가 하는 점 등에서 서로 近接한 인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硏究들은 각기 問題點을 갖고 있으며, 6세기 이전의 가야사 및 日本고대사 자체에 대한 硏究가 아직 미진하여 이들 사이의 대외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임나관계연구는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의 體系的 연구이후에 서로의 先入見에 의한 批判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客觀的인 시각에서 硏究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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