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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지배의 비밀 - 고구려 山城
서 길 수(서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I. 머리말 고구려연구회 회장

압록강 이북에 있는 고구려 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압록강 이북에 고구려 성이 몇 개나 있으며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가를 조사하고, 이어서 관계되는 문헌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지를 가 볼 수 없었던 한국의 학자들은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불가능했었고 현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입수하기도 어려웠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 대한 여행이 가능해 지자 우선 필자는 우선 압록강 이북에 있는 고구려 성의 분포 상황부터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일본 시대 때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한 기록, 북한 학자들의 기록, 중국 학자들의 기록을 모두 모아 보니 압록강 이북에 약 150∼160개의 고구려 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중복된 것도 있겠지만 그것을 자세히 밝힐 자료가 부족했다. 일본인들의 연구나 북한의 연구 결과는 그것을 가지고 전체의 분포를 보기는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지난 몇 십년간 중국 학자들이 해낸 연구 결과가 중심이 되었다.

고구려 성에 대해서는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도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문헌의 기록을 가지고 비교적 많은 성들을 고구려 성이라고 인정하는 반면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아무리 사료에 의해 심증이 가더라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고구려 유물이 나오지 않으면 고구려 성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필자는 우선 고구려 성이라고 주장되는 성은 일단 모두 현지를 답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1990년 이후 150∼160개의 성 가운데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100 여 개의 산성을 뽑아 답사한 결과 지금까지 103개의 성을 답사할 수 있었다.

본 글에서는 먼저 고구려에서 성이 갖는 의미와 축성 기록을 개관하고 이어서 요령성과 길림성을 나누어 답사한 성들을 주로 강의 줄기에 따라 분류해 보고, 각 성의 현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Ⅱ. 고구려와 성

1. 고구려(高句麗)=고려(高麗)=성(城)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란 이름의 나라가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고구려와 고려를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었고, 또 실제로 구별하여 사용한다. 이는 고려시대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고구려를 선택하여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참고하였던 많은 중국의 역사책들은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이름으로 섞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당시에는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국명으로 썼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와 고려가 같은 것임을 보기 위해서 중국의 사서에 쓰인 고구려의 나라 이름들을 모아 보기로 한다.

고구려란 나라 이름이 처음 역사책에 등장한 것은 한서(漢書) 지리지 현토군 조인데 고구려(高句驪)라고 써서 려자에 말마(馬)변을 부쳤다. 중국인들은 다른 나라 민족 이름 앞에 동물 이름의 변을 부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빛날려(麗) 앞에 말마(馬) 변이 붙은 [가라말 려], 즉 [검은 말]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 뒤 고구려는 여러 가지 형태로 쓰이게 되는데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高句驪) : 후한서, 송서(宋書), 양서(梁書)

고구려(高句麗) : 삼국지 위서(魏書), 북사(北史), 남사, 삼국사기

고려(高麗) : 위서, 북사, 구당서, 당서

고려(高驪) : 송서

구려(句麗) : 삼국지, 남사, 삼국사기

구려(句驪) : 한서, 후한서, 양서

그 외에도 고리(?離), 구여(句餘), 구루(溝?) 등 비슷한 이름이 많다. 삼국지에 보면 구루(溝?)는 구려(句麗), 즉 고구려라고 했으며(溝?者句麗), 고리(?離) 또한 고구려라고 했다(?離卽高句驪).

그런데 "구루(溝?)란 고구려 말로 성을 일컬었다고 한다(句?者句麗名城也)"는 기록이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 고구려 조에 나온다. 구려란 말이 [성]인데 거기에 [높다]라는 고(高)자를 붙였으니 [고구려]란 [높은 성]이란 뜻이 되는 것이다.

2. 성(城)은 고구려의 행정구역

고구려에서 성은 적군을 막는 군사시설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행정구역을 나타냈다. [구당서]에 보면

"그 나라(고구려)는 평양성에 서울을 두고 …… 60 여 개의 성(城)에 주(州)와 현(縣)을 두었다. 큰 성에는 욕살(?薩) 1명을 임명하는데 (당나라의) 도독(都督)과 같고, 그 이외의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었는데 (당나라의) 자사(刺史)와 같다" 고 해서 성이 바로 행정구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성의 수에 대해서는 같은 구당서에 "옛날 고구려는 5부(五部)로 나뉘어져 있었고 176개의 성이 있었으며, 69만 7천 호(戶)였다"고 해서 성이 앞의 기록보다 훨씬 많은데, 삼국사기에서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보장왕 26년).

이상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의 주된 성이 176개였다고 볼 수 있는데 성의 규모에 따라 주?군?현의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큰 (욕살이 주재했던) 성의 기록은 오골성(烏骨城)인데 당 태종의 침입 때 고연수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 문헌 연구로 성의 크기를 구별할 수는 없다.

고구려 당시의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시대가 끝난 뒤 당나라에서 당나라 식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다. 구당서에 보면 "그 땅을 나누어 도독부(都督部) 9, 주(州) 42, 현(縣) 100개를 두었다"고 해서 모두 151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176개의 성(城)이나 164개 행정구역보다는 적지만 거의 비슷한 숫자이다.

구당서에 따르면 평양에 둔 안동도호부와 함께 4개의 도독부 이름이 나와 있는데 신성주(新城州)도독부, 요성주(遼城州)도독부, 가물주(可勿州)도독부, 건안주(建安州)도독부이다. 여기서 고구려 때의 신성, 요동성, 가물성, 건안성이 주라는 행정구역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성에는 당나라의 도독에 해당되는 고구려의 욕살이 다스렸으리라고 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압록강 이북에 있는 31개의 성 이름이 나오는데 주로 고구려가 패망할 때 항복 여부를 가지고 나누었다.

1) 압록강 이북에서 항복하지 않는 11개 성

1.북부여성 2.절성(節城) 3.풍부성(豊夫城) 4.신성(新城) 5.도성(桃城) 6.대두산성(大頭山城)

7.요동성(遼東城) 8.옥성(屋城) 9.백석성(白石城) 10.다벌악주(多伐嶽州) 11.안시성(安市城).2)

2) 항복한 성 11개

1.양암성(??城) 2.목저성(木底城) 3.수구성(藪口城) 4.남소성(南蘇城) 5.감물주성(甘勿主城)

6.능전곡성(?田谷城) 7.심악성(心岳城) 8.국내주(國內州) 9.설부루성(屑夫婁城) 10.후악성(朽岳城)

11.자목성(?木城)

3) 패전한 성 7개

1.연성(鉛城) 2.면악성(面岳城) 3.아악성(牙岳城) 4.취악성(鷲岳城) 5.적리성(積利城)

6.목은성(木銀城) 7.이산성(?山城)

4) 쳐서 빼앗은 성

1.혈성(穴城) 2.은성(銀城) 3. 사성(似城)

이상 31개 성 뒤에 주(州)가 붙어 행정 단위임을 보여 주며, 그 주가 옛날의 행정 단위인 홀(忽)이었을 때는 어떤 홀인가를 가능한 한 밝히고 있다.

3. 고구려 산성의 축성 기록

고구려 산성을 연구할 때 그 성이 언제 쌓은 것인지를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 축성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성벽이나 성의 구조를 가지고 축성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성들이 축성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계속 덧쌓기를 했거나, 성터의 흔적이 거의 없어져 연대 측정이 어려운 것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성은 넓어서 발굴한다는 것도 쉽지가 않아 한계가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역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인데 삼국사기에 나온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시조 동명성왕 4년(BC 34)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2) 유리왕 22년(AD 3) 겨울 10월, 국내(國內)로 서울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3) 태조대왕 3년(55) 봄 2월,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4) 산상왕 2년(198) 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5) 동천왕 21년(247)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전란을 겪고 난 후 좀처럼 복구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6) 고국원왕 4년(334) 가을 8월, 평양성을 중축하였다.

7) 고국원왕 5년(335) 봄 1월,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8) 고국원왕 12년(342)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9) 광개토태왕 3년(394) 가을 8월, 나라 남쪽에 7성을 쌓고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0) 광개토태왕 18년(409) 가을 7월, 나라 동쪽에 독산성(禿山城)등 6성을 쌓고 평양의 민가를 옮겼다.

11) 양원왕 3년(547)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보수하였다.

12) 양원왕 8년(552) 장안성을 쌓았다.

모두 12회 34건인데, 그 가운데서 도성(都城)이 7건(축성 5건, 증축 1건, 수리 1건), 산성이 27건(축성 25건, 개축 14건, 수리 1건)이다. 축성 목적은 도성 7건, 도성 방위 1건, 북서쪽 중국 침략 방어 13건, 동쪽 방어 6건, 남쪽 백제 침략 방어 7건으로 중국의 침략에 대한 방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Ⅲ.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성의 현황.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성에 관한 논문 가운데서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것은 1986년 중국 고고학회 제5차년회논문집에 요령성 박물관의 진대위(陳大爲)씨가 발표한 [요령 고구려 산성 초탐(初探)]이다. 진대위 씨에 따르면 현재 요령성 안에 87개의 고구려 산성이 있다고 한다. 진 씨는 87개의 규모에 따라 대?중?소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1) 대형 산성(둘레 2 Km 정도): 27 곳. 주로 요하(遼河) 동쪽 가의 산간 지역과 평원이 맞닿는 곳에 많다.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와방점시의 "용담산성"과 "남고산성", 개현(蓋縣)의 "고려성", 해성(海城)의 "영성자성", 심양 진상둔(陳相屯)의 "탑산산성", 무순시의 "고이산성", 철령의 "최진보산성", 개원의 "위원보(威遠堡)산성" 등이다.

2) 중형 산성(1∼2 Km): 17 곳. 주로 요하 동쪽의 비교적 큰 지류 사이에 있다.

벽류하(碧流河) 유역 - 적산산성, 성산산성

영나하(英那河) 유역 - 선성산(旋城山)산성

대양하(大洋河) 유역 - 삼성산, 낭낭성

애하(?河)유역 - 초하구(草河口)산성, 통원보(通遠堡)산성

포석하(蒲石河) 유역 - 관수(灌水)산성

태자하(太子河) 유역 - 암주성, 삼송(杉松)산성

자하(紫河) 유역 - 청룡산산성

3) 소형 산성(200∼1000 m): 37 곳. 대,중형 산성의 주위에 분포되어 있다.

한편 [동북역사지리]에는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산성 54개를 정리하여 놓았다. 진 씨의 논문처럼 자세하지는 않지만 소재지가 분명하게 밝혀져 현지 답사하는데 도움이 컸다.

필자는 위에서 본 자료들을 참고 삼아 필자가 직접 답사한 산성의 현황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환인(桓仁) 주위의 고구려 산성 (정리번호 1∼6번)

환인현 문물지에는 환인에 7개의 산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4개의 성을 답사하였다. 오녀산성은 본문에서 자세하게 다루기 때문에 생략한다. 오녀산성이 전쟁 때 쓰는 산성인데 반해 평지성이라고 보는 하고성자성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집들이 꽉 들어찬 마을이 되어 버렸다. 고검지(高儉地)산성은 주위의 마을에서 돌을 허물어 간 곳이 많지만 아직도 3∼4미터 정도의 높은 성벽이 남아 있다. 사첨자향에 있는 산성의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한?두군데 2미터 정도만 남아 있다.

한편 신빈의 흑구산성과 전수호 산성은 부이강 가에서 환인 오녀산성을 통해 집안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는 중요한 성들인데 산꼭대기의 분지에 있는 흑구산성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고 전수호산성은 훼손 상태가 심하다.

2. 소자하(蘇子河) → 혼하(渾河)유역의 고구려 산성 (정리번호 7∼15번)

학자들이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이라고 비정하는 목기성(木奇城)은 목기 옆을 흐르는 소자하를 건너 평지에 있는데 성벽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으나 고구려 때의 기왓조각들을 쉽게 주을 수 있다.

목기에서 남잡목(南雜木)으로 가는 국도 상에 일도관?이도관?삼도관(三道關)이라는 3개의 차단성이 있는데 이도관?삼도관의 유적이 뚜렷이 나타난다. 현지에서 "설인귀의 동정(東征)" 때 고구려에서 쌓은 것이라는 증언이 많았다.

일도관과 이도관 사이에 있는 오룡산성(五龍山城)은 토석혼축성으로 성벽과 성벽 위의 길(현지에서는 말 타고 다닌 마도라고 한다)이 잘 남아 있다.

[동북역사지리]에서는 혼하 주변에 있는 여섯 성을 고구려 때의 성으로 비정하였다. 즉 산성자산성=북치성, 남산성산성=청암성, 철배산성=남협성, 노동공원=현토성, 고이산산성=신성, 탑산산성=개모성이다.

영액문향의 산성자산성은 토성으로 지금도 산성자리가 뚜렷하나 그다지 큰 산성이 아니고, 남산성산성은 오녀산성 처럼 4면이 모두 절벽인데 성을 쌓은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철배산성은 대화방(大?房)저수지 동쪽 끝의 혼하와 소자하가 갈라지는 삼각주에 있다.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다. 고이산산성은 무순시 북쪽에 있는데 철령가는 국도가 바로 이 성 안을 통과한다. 무순 시내에 있는 노동공원은 원래 현토성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고구려의 기왓장들이 길에서 발견될 정도이다. 개모성이라는 탑산산성은 토성인데다 채석장이 되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3. 태자하 유역의 고구려 산성(정리 번호 16∼23번)

환인을 떠나 고검지(高儉地)산성을 지나 평정산(平頂山)을 넘으면 태자하가 시작된다. 태자하를 따라 하협하(下夾河)에 다다르면 강 남쪽에 태자성산성이 있는데, 북쪽의 삼송산성(杉松山城)과 함께 마치 평지성과 산성처럼 태자성은 강가의 낮은 언덕에 있고 삼송산성은 깊은 산골에 있다. 두 성 모두 성벽이 남아 있는데 특히 삼송산성에는 고구려 때의 석축법을 알 수 있을 만큼 2미터 이상의 석축이 잘 남아 있다.

북풍성(北豊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본계 소시(小市)의 하보(下堡)산성은 성벽도 빈약하고 규모도 크지 않았고 마미주(磨米州)로 비정되는 변우산성은 토성으로 성벽의 흔적은 뚜렸하다.

태자하 유역에서 가장 튼튼하고 역사서에도 자주 나오는 백암성이라고 비정되는 연주성과 요양시의 요동성은 크게 대조를 보이고 있다. 요동성은 흔적조차도 없이 도시가 되어 버려 박물관에 가서야 백탑의 동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백암성은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견고하고 웅장한 모습을 아직도 보여 주고 있다 (연주성 참조).

요동성에서 조금 내려가면 안산(鞍山)이 있고 그 동남쪽에 천산이 있다. 천산에는 당나라 때의 옛성이 있는데 설인귀가 그 성을 점령한 얘기가 전해 온다. 현재 옛 성벽으로 성을 재현하여 관광지를 만들었는데, 점령하기 전에는 마땅히 고구려 산성이었을 것이다. 태자하와 혼하가 합해지는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해성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조금 가면 안시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영성자성이 나온다. 토성이지만 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정문인 서문은 그 높이가 상당히 높은데 현지인 들의 말에 따르면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한다.

4. 애하(?河)유역의 고구려 산성(정리 번호 24∼28번)

애하의 상류인 관수향(灌水鄕)에 고력성(高力城)이 있는데 고력(高力)은 고려(高麗)와 중국어 발음이 같기 때문에 지도에서 바꾼 것으로 고려성, 즉 고구려 성이다. 현지에서는 마을 이름을 따 고대보(高臺堡)산성이라고 한다. 산성 서남쪽에 문이 있는데 무너졌지만 흔적이 뚜렷하고 산정에 석성이 약간 남아 있지만 주민들이 돌을 굴려다 집을 지어 버려 거의 없어졌다.

애하와 초하(草河)가 만나는 곳에 봉황성이 있는데(봉황성 참조), 초하에 두 개의 산성이 있다. 초하구진의 이가보(李家堡)산성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나무가 많이 자라 찾기 힘들지만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통원보진의 산성구산성은 규모도 작고 보존 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한편 단동 동쪽 구련성향에 있는 애하첨(?河尖)성터는 표지판 이외에는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5. 대양하(大洋河)유역의 고구려 산성(29∼33번)

대양하 유역에는 특히 수암(岫岩)을 중심으로 고구려 산성이 많다. 대양하의 상류인 황화전(黃花甸) 근방에 보고된 4개의 산성 가운데 진가보(陳家堡)에 있는 성은 찾지 못하고 노와촌(老窩村), 영천촌, 곽가령촌에 있는 세 성만 답사하였다.

노와촌의 산성은 현지에서 고려산성이라고 부르는데 동네 사람들이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느라 모두 허물어 버려 성벽을 찾기 힘들다. 영천촌의 산성도 현지인 들이 고려성이라고 부르는데 원형이 상당히 많이 남은 토성이다. 곽가령촌의 고려성은 초자하(哨子河)라는 지류가 대양하로 흘러들어 가는 삼각주에 있다. 이곳도 마을이 가까워 돌멩이를 주어다 집을 지어 흔적만 남아 있다.

대양하 유역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은 낭낭산성이다. [동북역사지리]에서는 이곳을 적리성이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관리인까지 있어 대단히 잘 보존되어 있다.

6. 장하(莊河)유역의 고구려 산성(34 번)

평산향(平山鄕)에 선성산(旋城山) 산성이 있는데 관광지를 개발하느라 모두 새로 쌓았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성벽을 들여서 진짜 옛 성터가 해자처럼 남아 있다.

7. 벽류하(碧流河)유역의 고구려 산성(35∼39)

벽류하 상류에 있는 두 개의 산성이 있다. 나둔향(羅屯鄕)에 있는 적산산성은 험한 계곡을 막은 정문에 무너진 돌담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지형 지세가 험하고 규모가 커, 큰 성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십자가향(什子街鄕)의 고려산성은 둘레가 약 400여 미터로 작은 성이지만 높이 3미터가 넘는 석성의 성벽들이 잘 남아 있다.

벽류하가 바다로 흘러들어 가기 전 성산 부근에 대련과 난동 사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산(성산 참조)이 있으며, 그 서쪽에 있는 묵반향(墨盤鄕)의 고려산성은 꼭대기의 묘 빼놓고는 인공으로 쌓은 성이 없고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 특이했다.

성자탄(城子坦) 서쪽에 있는 성대향(星臺鄕)도 벽류하 유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성산과 쌍벽을 이룰 만큼 규모도 크고 튼튼한 오고산성이 있다(오고산성 참조).

7. 복주하(復州河)유역의 고구려 산성(40∼44번)

원대향(元臺鄕)에 있는 노백산성은 규모가 작아 보(堡)에 행당하고, 복주하 상류에서 큰 성은 득리사 산성과 남고점(嵐?店)산성이다. 득리사는 말안장형의 산성이고 남고점을 산 정상을 둘러싼 산보형(山堡型)이다. 남고점산성은 군사(공군과 해군의 레이다 기지)기지 지을 때 지하 벙커 만들며 돌들을 다 써 버려 성벽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다. 득리사의 마권자산성은 득리사산성을 올려다보는 낮은 산에 쌓았는데 돌로 쌓은 흔적만 남아 있다.

태양승(太陽升)의 고려산성은 성벽을 쌓은 곳은 극히 일부이고 마치 높은 산성을 쌓은 것처럼 불쑥 올라온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였다.

8. 수군의 첫 공격지 대흑산산성(45번)

대련에서 조금 위로 올라간 금현(金縣)에 있는 대흑산산성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비사성(卑沙城)이라고 비정한다. 비사성은 중국이 수로를 통해 요동반도를 쳐들어 올 때 맨 먼저 맞딱드린 성이기 때문에 성도 견고했지만 공격 또한 집요했다. 대흑산산성은 몇 년 전까지 군사 보호구역이라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정상의 성과 점장대를 쌓고 골짜기의 관문(關門臺라고 한다)도 모두 새로 쌓았다. 옛날의 성벽은 관문 입구 가기 전에 오른쪽 산 위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 허물어 졌으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1∼2미터 높이의 벽은 아직도 존재한다.

9. 개현(蓋縣) 주위의 고구려 산성(46∼50번)

개현 청석령향의 고려성산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구려 때의 건안성(建安城)으로 보고 있다. 개현을 벗어나 영구쪽으로 얼마 안 가 옛날 건안성에 부속되었던 청석관(靑石關)이 나오고 왼쪽에 봉화대가 있다. 고려성촌에 들어가면 산밑에 바로 건안성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에서 오른쪽 능선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이어지고 그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토축인 토석축 산성이다. 현지에서는 연개소문과 동생 연개소진이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건안성을 중심으로 북쪽 대석교(大石橋) 백채자향(百寨子鄕)에 보성(堡城)이 있고 아래로는 서둔향(徐屯鄕)의 연통산과 쌍대자향(雙臺子鄕)의 성자구산성, 양운향의 분영(奮英)에 각각 보성(堡城)이 있다. 분영산성은 거의 흔적이 없으나 마을에서는 아직도 고려산성이라 부르고, 백채자향과 쌍대자향의 보성은 분명하게 그 자리가 남아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서둔향의 연통산인데 분명한 문이 있고 축성술도 아주 뛰어나 보인다.(연통산 참조)

10. 요령성 북쪽의 고구려 산성(51∼54번)

혼하 북쪽에서 요하로 흘러 들어가는 범하(汎河)와 청하(淸河) 유역에 고구려 성들이 있다. 범하 유역에는 최진보(催陣堡)산성과 청룡산성이 범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데 청룡산성은 토성으로 평지성 같고 최진보산성은 굉장히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청룡산성은 산성의 흙벽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최진보산성은 훼손이 심하다. 서쪽 성벽 북쪽에 축성법을 알 수 있는 벽이 일부 남아 있다.

청하 유역에서는 상류인 서풍(西豊)에 있은 성자산산성이 가장 큰 규모인데 돌로 쌓은 성벽이 제법 잘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곳을 부여성 또는 설부루성(屑夫婁城)으로 비정한다.

Ⅳ.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성의 현황

1. 집안(集安) 주위의 고구려 산성(55∼61번)

국내성이라고 얘기되고 있는 집안현성과 환도산성이라는 산성자산성은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다만 집안의 동대자 터가 고구려의 황성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 동대자 터도 모두 집이 들어서 자세한 답사가 불가능하다. 기록에 보면 집안에서 서북으로 진출하는 데는 북로와 남로가 있다. 북로를 따라 가다 보면 관마산성이 있는데 삼면에 차단성을 쌓아 큰 산성을 이루는 곳이다. 지금도 남?북 두 곳의 석벽 일부는 남아 있으나 동쪽의 성벽은 찾지 못했다. 통화에 도착하면 통화역에서 혼하 건너편에 자안산성(自安山城)이 있는데 좁은 절벽 위에 있는 분지를 잘 이용하였다. 축성법을 알 수 있는 석벽도 일부 남아 있다.

남로는 소판분령(小板분嶺)과 망파령(望波嶺)을 지나 재원(財源)의 패왕조산성과 이어진다. 망파령 차단성은 발전소 저수지에 묻히고 최근 도로공사 때문에 거의 파헤쳐 졌다. 패왕조는 산성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잘 쌓은 석성이었다 (패왕조 참조).

2. 휘발하(輝發河)유역의 산성(62∼65번)

통화에서 용강산맥(龍崗山脈)을 넘으면 길림합달령(吉林合達嶺)과의 사이에 송화강의 지류인 휘발하가 흐른다. 이 휘발하는 유하(柳河), 일통하(一統河), 이통하, 삼통하가 동북쪽으로 흘러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유하 상류인 산성진 북쪽에 산성이 있는데 토성이지만 성벽 높이가 2-4미터로 높고 마도(馬道)가 분명하게 나 있다. 삼통하 가의 대통구(大通溝)에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은 길림성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2미터 이상 높이의 석벽이 남아 있고 주위에 고려무덤이 있으며 평지성이 있다는 설도 있어 한때 수도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도 있다.

유하와 1?2?3통하가 합쳐지는 북쪽, 반석에 닿기 전에 두 개의 성이 있는데 모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문 있는 곳만 차단성 형태로 쌓은 성이었다.

3. 요원(遼源)부근의 고구려 산성 (66∼68번)

휘발하 유역에서 길림합달령을 넘으면 바로 요원이다. 요원은 요하, 그 가운데서도 동요하(東遼河)의 발원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길림합달령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린 물이 바로 요하의 수원이 되는데 요하원(遼河源)이란 마을도 있다.

요원에는 3개의 산성이 있는데 시내에 있는 용수산은 공원이 되어 산성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성자산산성이나 공농산산성은 모두 토성인데 전자는 평지에 가깝고 후자는 산성으로 말길(馬道)이 잘 나 있다.

4. 송강하(松江河) 유역의 고구려 산성(69∼70번)

송강하는 백두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무송현(撫松縣)에 속한다. 무송 북쪽에 있는 만양진(萬良鎭)의 대방정자(大方頂子) 산성은 꼭대기에 있는 낮게 쌓인 돌무더기를 빼놓고는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무송 서쪽의 유수천(楡樹川)에 있는 산성은 강가의 적벽을 잘 이용해 쌓았는데 동남쪽에 있는 옹성문 옆의 동남 성벽만 남아 있다.

5. 송화강(松花江)유역의 고구려 산성(71∼74번)

송화강의 지류인 표하(漂河)에 있는 산성은 토성으로 정문인 북문은 옹성형태를 보이며 잘 남아 있으나 성벽은 다 무너지고 밭을 일구어 흔적을 찾기 힘들다. 현지 백성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길림의 용담산성은 고구려성의 특징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유적이 남아 있고 보존도 비교적 잘되어 있다. 조그만 언덕처럼 작은 동단산은 선?후기의 산성들과 섞여 있어 고구려 시기의 산성을 분명하게 밝히기가 쉽지 않다.

송화강은 부여를 지나 눈강(嫩江)과 합쳐지면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송화강이 부여에 닿기 전에 이통하(伊通河)의 물을 받는데 그 이통하의 상류에 농안(農安)이 있다. 농안은 고구려 때 부여성이라는 설이 유력하고 여기서부터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 농안 시내는 완전히 개발되어 성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6. 목단강(牧丹江) 유역의 고구려 성(75번)

목단강시에서 돈화까지의 목단강 유역에는 발해의 유적이 특히 많은 곳이다. 목단강의 상류인 돈화시에서 서남쪽으로 22.5 km 지점에 있는 성산자산성은 발해 산성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중국역사지리에서는 고구려산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토석혼축인 이 산성은 들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산의 한 면을 성으로 썼고 북쪽인 전면은 목단강의 지류인 대석두하(大石頭河)를 해자로 이용하였다.

7. 포이합통하(布爾蛤通河) 유역의 산성 (76∼83번)

포이합통하의 상류인 안도 북쪽에 있는 오봉산성은 성의 유적이 분명히 남아 있으나, 무학(舞鶴)에 있는 성문산은 필자가 성문을 확인하여 줄 때서야 사냥꾼 안내인도 성문인 줄을 알 정도로 불분명하다. 오호산성(五虎山城)은 돌로 쌓았는데 계곡에 세 겹의 차단성으로 문을 만들고 산등성이를 따라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1∼1.3미터 정도 높다. 넓이로 비슷하다. 상당히 험하고 깊은 계곡에다 쌓은 성이다.

태양촌의 성자구산성은 태양촌에서 강을 건너 바로 보이는 계곡인데 북쪽 문은 옹성이고 토석 혼축한 성이다.

포이합통화가 조양천에서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을 받는데 바로 조양하(朝陽河)이다. 이 조양하를 따라 올라가 팔도향 서산촌에 가면 평지성이 있는데 이 평지성 마을을 토성둔(土城屯)이라고 한다. 이 평지성은 대단히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동쪽에 여러 갈래로 나누어 돌담을 쌓아 놓았다. 담은 큰 돌로 기초를 튼튼히 쌓고 그 위에다 냇가 돌을 가져다 흙과 섞어서 쌓았다.

포이합통하는 도문에서 두만강과 합류하는데, 그 직전인 연길 근방이 이 강의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길시 북쪽에 흥안성터가 있는데 지금은 큰 길가 채소밭이라 알아보기 힘들지만 고구려 때의 기왓조각들은 쉽게 주울 수 있다. 이러한 평지성과가 대칭을 이루는 산성이 장안진의 성자산 산성이다. 동?서?북쪽 문은 옹성이며 성벽은 돌로 쌓았는데 현재 1∼1.5미터 정도의 높이로 드문드문 남아 있다. 연길을 중심으로 둘러 쌓인 고구려 장성은 중간 중간 서 있는 봉화대를 점으로 잇는 산성이 눈으로도 확인할 만큼 남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들어 연변대 박진석 교수는 성자산산성을 고구려 때의 책성(柵城)이라고 주장한다.

8. 해란강(海蘭江) 유역의 고구려 산성(84∼86)

청산리 서쪽과 북쪽에서 발원하는 해란강이 동북으로 흐르는데 화룡에 닿기 전 송월(松月) 근방의 왼쪽 산에 송월산성이 있다. 도로에서 서쪽으로 바로 올려다 보이는 길가에 있는데 둘레가 2080미터로 제법 크다.

화룡을 지나 팔가자진(八家子鎭)에 다다르면 강 건너 언덕에 산성이 있는데 바로 팔가자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토성인데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석정(石井)에서 해란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류가 팔도하(八道河)인데 팔도하의 발원지인 금곡(金谷)에 있는 산성은 비가 많이 와 못 가 보고 덕신(德新) 옆 하북(河北)에 있는 평지성은 가 보았는데 경작지로 변해 흔적도 없다. 그러나 이 곳에서 고구려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9. 사하하(??河)유역의 고구려 산성(87∼89번)

해란강과 합쳐진 조이합통하는 도문에 닿기 전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하하와 합쳐진다. 이 사하하는 쌍하(雙河)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전하(前河)라는 지류와 합쳐진다. 이 전하의 상류에 합마당(蛤?塘)이란 조선족 향이 있고 바로 서쪽에 두 개의 성이 있다. 해발 956 미터의 동사방대산(東四方臺山) 위의 산성은 절벽 위의 널따란 평지에 토성으로 쌓았다. 광흥산성은 동사방대산을 올려다보는 낮은 동네 뒷산에 설치한 보성(堡城)이다.

백초구진(百草口鎭)과 석현진(石峴鎭)사이의 영창(永昌)에 있는 만대성(滿臺城) 산성은 흙을 파서 성벽을 만들고 그 판 자리에 해자를 만들었는데 높은 곳은 10미터가 넘는다.

10. 두만강 유역의 고구려 산성(90∼95번)

북한의 무산에서 두만강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지평리 건너편이 중국의 덕화진(德化鎭)이다. 덕화진에서 용화(勇化)로 가는 중간에 862미터 높이의 삼층령(三層嶺)이 있는데 이 산 위에 두만강 가에서는 가장 튼튼하고 높은 석성이 남아 있다.

부유(富裕)를 지나면 조동(朝東)이 나오는데 바로 서북쪽이 한왕산(汗王山)이다. 옹성이 분명하고 절벽 위에 교묘하게 돌도 쌓은 산성이 있다. 건너편이 바로 북한의 유선(游仙)인데 두만강 건너 바로 아래 내려다보인다.

삼합진(三合鎭)을 조금 못 가서 청수(淸水) 뒷산에 있는 산성은 토성이 마치 산등성이처럼 높이 남아 있어 동네 사람들이 산성이 있는 줄을 모를 정도였다. 두만강 건너에는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 회령(會寧)인데 산성에서는 잘 내려다보인다.

개산둔진(開山屯鎭)을 지나 선구(船口)에 있는 토성은 전문가가 자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산성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건너편이 바로 북한의 종성(鍾城)이다.

두만강이 도문을 지나 양수진(凉水鎭)에 다다르면 제법 넓은 평야가 나오는데 그 북쪽 산에 있는 바위가 정자 같다고 해서 정암(亭岩)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이 산 위에 쌓은 산성은 동문 쪽에는 2.9미터나 높은 석벽이 남아 있으나 다른 쪽에는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두만강의 마지막 성은 경신(敬信) 벌판 남쪽 수류봉(水流峰) 위에 있는데 성벽 자체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이라 멀리서만 관찰하였다.

11. 혼춘하(琿春河) 유역의 고구려 성 (96∼103번)

혼춘하가 두만강과 합류하는 지점 북쪽에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과 비우성(裴優城)이 있는데 모두 평지성이다. 두 성은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어져 있는데 두 곳에서 모두 고구려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세워졌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온특혁부성은 마을로 변해 흔적이 없고 비우성은 옹성?치?각루?해자가 분명하게 남아 있고 성벽의 높이도 10미터 되는데 후대에 쌓은 것이다.

한편 혼춘에서 혼춘강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양포향(楊泡鄕)에 살기산성이 있는데 이 산성과 온특혁부성의 평지성을 묶어서 혼춘을 옛날 책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혼춘에서 러시아로 가는 동남쪽에 석두하자라는 평지성이 있는데 이 곳에서도 고구려 시대의 유물이 나왔다. 이 성은 혼춘에서 장령자를 넘어 소련의 뽀시예트만에 이르는 교통로이다. 살기산성에서 혼춘강 바로 건너편에 건구자산성이 있다. 토성인 건구자산성은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도 상당히 높다.

지금까지 고구려 산성이라고 논의 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춘화(春化)에 있는 성들이다. 영성자고성은 평지성이고 성장납자산성은 산으로 둘러 쌓였지만 그 산 자체가 성벽이 되고 평지성에 가까운 야산이다. 이에 반하여 통긍산성(通肯山城)은 높은 산 절벽 위에 돌로 튼튼하게 쌓은 성이다. 동북역사지리에서는 성장납자 산성을 책성(柵城)으로 보고 있다.

Ⅴ. 맺는말

이상에서 간단히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성을 보았는데 몇 가지 제약점이 있었다.

1. 지면 관계상 전체를 개괄적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너무 빈약한 내용이었다. 이 점은 앞으로 각론을 쓸 때 자세하게 논의하기로 한다.

2. 성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지만 이미 수집한 자료조차 언급을 못했다. 이 점도 각론을 쓸 때 보충하기로 한다.

3. 산성의 특징, 즉 규모나 구조, 축성법에 의한 구별이 아니라 이번에는 주로 산천의 구조, 특히 강의 흐름에 따라 산성을 추적해 보고 그 연관성만 따져 보았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쓸 산성에 관한 논문의 스케치로 생각하고 앞으로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자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