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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보는 고구려사

1. 머리말

고구려 무인상(武人像), 사실의 일면에 불과, 북방민족(北方民族)중 일찍 남녘 진출, 본격적 농경문화(農耕文化)민족으로 성공한 알찬 면 간과.

종래의 양적(量的) 팽창주의대신원래의 남북(南北) 문무(文武) 내외(內外)면 파고 들어가야. 무사(武士) 졸개 중심국가-->농경 생산인 문화국 일찍 성취

특히 4~ 5세기 고구려 남진(南進)발전상 주목, 광개토호태왕비 등 중심 그 실모, 문물(文物) 제도 흥성 사례와 의의.

새롭고 바른 성격 규정, 외화적(外華的) 편파적 역사인식 역사교육 반성 개선.

2. 고구려의 南進발전과 광개토好太王비문의 실상

<1> 전기 남진과정

1). B.C.2C전후 주몽(朱蒙) 부여(夫餘)에서 남하, 압록강 지류 분지(盆地)에 입국, 대륙 금속문화 통로. 배 채우기 어려운 형편. 정복 약탈이 생산활동. <지도>

2). A.D. 1∼2세기 태조왕(太祖王) 이후 세습(世襲)왕국, 계루부(桂婁部).

3).미천왕(美川王)대--4C 초 중국 군현 축출, 한반도 서북부지방경영에 주력. 포로 8천명 평양에. 서안평, 낙랑군 대방군 차지, 400년 이어온 중국 군현 소멸.

* 농업 경제기반. 바다로 국제 활동. 고조선 역사 정통, 중국계 문화유산 이음.

이를 기반으로 남진 성취, 한국사 삼국시대(三國時代) 전개.

4).고국원왕(故國原王)대--모용씨(慕容氏) 침입(339), 왕시신,왕모와왕비,포로5만.

백제와 접전, 371년 평양성전투에서 전사.

5).소수림왕(小獸林王, 371∼384)--전진(前秦)서문물 수입. 획기적 체제정비.

6).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391∼412)--'나라 부강 5곡 풍성' 알찬 발전, 실모 7.3m비문에, 공략 성 64, 촌 1,400, 남녘 한반도 중북부, 동북아 패자(覇者).

< 2 > 광개토호태왕 비문 연구방향 <지도>

1). 만주보다 남진 훈적(勳績) 장수왕(長壽王) (414) 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

平安好太王碑--후대{三國史記} 광개토왕 본기의 3배 분량] 실상 확인. <사진>

천 수백년간 잊혀, 일군(日軍) 5년간 비밀 연구 끝에 1888년후 관심 끌어.

2). 왕호문제--비 연구 100여년, 왕호부터 한 중 일(韓 中 日)간 무원칙. 정식 왕호 5C 금석문 용례 비슷. 9C 일본기록 '好太王(호태왕)', 중 일 고래통용. <사진>

후대 {삼국사기} 광개토왕, 남북한 관습 문제점. 당시 본의 오도 소지도.

무엇보다 광개 토경 열거에 비문은 북쪽보다 알찐 남녘을 일방적으로 중시.

원래 [광개토]부분은 늘 [호태왕]부분과 짝지어 쓰인 용례 주의. 내외 문무 갖춘 영주(英主) 시호답게 당시 고구려인이 지어 올린 본의를 되도록 살려야. 호태왕대 영락(永樂)기년법처럼, 또 중 일 고래 현행 약칭 감안 '광개토'에 '호태왕'을 더하여 통칭은 ' 廣開土好太王(광개토호태왕)', 흔히는 '호태왕'으로.

3). 신묘년조 문제--일본 주도로 100년 관심 끌어. 왜(倭)기사 오용, <사진>

정인보(鄭寅普) 주어 바꾸어, 북한학계 많이 계승, 고대 한일관계사 재조명.

4). 비문변조 문제--일본군'석회칠작전' 이진희(李進熙) 주장. 이형구 등도 '倭(왜)'는 '後(후)'자 고친 것. 중국 왕건군(王建群) 등 비판. 탁본 편의 위한 것.

5). 고구려사 본연의 탐구--비문의 본의 찾고 활용하려는 연구들. 무전행남(武田幸男)·문정창·천관우·박성봉 서영수 등. 천하관의 노태돈, 수묘제 중심의 조인성·김현숙 임기환 등의 연구도. 고구려인 본위로 당연히 연구되어야.

< 3 > 호태왕의 남진 실모와 백잔 왜 인식문제

1). 호태왕비 외정 실모와 의의--18세 등극(391,신묘-능비紀年) 39세 승하(412) 재위 22년, 토경 개척 양상은 이제 상식. 그러나 질적 의의는 별개로 남아. [國富民殷(국부민은) 五穀豊熟(오곡풍숙)](비 제1면) 사실로서의 성과. 핵심적 터전은 남진으로 확보한 황·평안도 등. [民相食(민상식)]의 곤경 모면. <표>

2). '백잔 왜' 인식문제--비문 [百殘(백잔)] 증오 찬 호칭, [倭賊(왜적)][倭寇(왜구)]와 유별난 지탄 대상, [殘(잔)]자의 의미 표현 곰곰 생각해야.

倭는 근자 고고학 당시 국제적 대세로 난점 파악. 신묘연조 근본 재고 문제.

신묘년(辛卯年)과 갑인년(甲寅年)은 호태왕기 업적과 구별되어 가타부타 불요.

3). 남진 치중의 의의--호태왕 공취한 성, 촌 열거(비 1-4면)에. 만주대륙 논외. 내치에도 큰 성과, 외정도 남쪽 실속 토경 광개(廣開) 주목, 놀라움과 감탄 거리. 당시 고구려인의 현실적인 대(對)백제 설욕과 국제적 위신 회복, 남정 공취 크게.

*. 요컨대 촌은 [營(영)]등과 달리 농경 안정지대에 인구 밀집지역임. 수묘인연호 동원도 북녘 구민 110호 남녘 신민 220호 배정. 남녘 신(新)개척으로 나라 비중이 남으로. 대륙지향적 경향은 후대문제, [民皆土着(민개토착)]의 소중한 발전. 선왕대 치욕 씻은 피맺힌 승전, 국제질서 잡아. 평안호태왕(平安好太王)으로 추앙.

3. 고구려의 文物 흥성과 民族史的 의의

< 1 >. 국책전환과 호태왕기 내정 정비

*. 소수림왕 2년(372) 불상 경문 도입,태학(太學)설립, 새관료 양성, 이듬해 율령(律令)반포, 국가제도 전반. 왕 4년, 5년 두 절 건립. 당시 초(超)부족적 편제에 적절한 처방제. 이후 사회문화 제반에 큰 변화. <한국사상사상 불교문화기 시작>.

1). 불교-- 초기 인과(因果) 설법에서 신앙적 실천에. 신라에 불교 전함,

당시 고구려 불교의 수준과 영향 큼, 묘지 묵서에도 불제자 등장,

2). 중앙지배체제 지방통치제도 정비--중앙관등(兄 使者) 분화 발전 확인됨,

또 군사제도 관직 신설, '王幢(왕당)''官軍(관군)'족병을 국가 질서 속에 통제. 더욱 군사동원에 '躬率(궁솔)''敎遣(교견)'군사전략과 군령통수에 일사불란 계통.

한편 본 곡 촌(谷 村)지방통치 확대, 성 곡 촌의 지역적 및 종족(種族)적 지배 등 편제방법 통치로 통일적 일원화. 효과적 지방지배 위해 외관파견 사실도.

3). 연호제도--중국 B.C. 140 한무제 '建元(건원)', 주권자 권위 위해 길서(吉瑞) 출현, 천재지변, 출병, 반란사건시 새연호. 중국이하 각기 독자연호, '永樂(영락)' 독자 연호의 사용 자체가 당대 고구려의 문화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

연호제 운영도 특색, 영락원년이 호태왕 즉위년과 일치, 개원(改元)도 없었음. * 고구려 연호 사용예--장수왕 이후도, 독자적 국가 발전상 상징. <사진>

4). 시호제(諡號制) 변화 진전--이전 왕호 대략 장지명(葬地名). <표>

호태왕 시호 국강상-장지, 광개토경-업적, 평안-치세 표현, 호태왕-미칭 복합. 군왕 업적 내세우는 의식, 문화적 성장 바탕 독자 세계이념 반영도, 전대와 판이.

* 호태왕비 형상 거대 독특, 글 글씨 모두 당대 문화 독자수준 상징 금자탑.

5)?내치 외정 합치--정치 .사회 문화 등 국정전반 정비, 결국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로 국력 총집결. 이러한 내적 정비가 외정(外征)의 큰 결실로.

6). 고구려사에서의 의의--호태왕기에 '無良田(무양전) 不足以實口腹(부족이실구복)' 형편 바뀌어 고구려와 고구려민에게 안겨준 결정적인 호태왕의 업적. 당시 호태왕비를 세운 고구려인의 본 뜻.

< 2 > 5세기 고구려의 문물 발전

*. 장수왕대(412-491) 평양천도와 실제 실리적 남진발전--호태왕대 맥 같이한 결과물, 더없이 인상적인 빛나는 한 세기. 농경문화 기반의 문화적 성취.

1). 고구려 문화면 기록들--{舊唐書(구당서)}·{新唐書(신당서)} 고려전 등에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고 배우기를 좋아해서 궁색한 마을의 없이사는 집이라도 모두 부지런히 배운다. 길가에는 제각금 엄옥(嚴屋)을 지어 경당(?堂)이라 하고, 장가들지 않은 자가 모여서 경서도 외우고 활쏘기도 연습한다'고.

특히 {구당서} 고려전에서는 '그 책에 오경·사기(史記)·한서(漢書)·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삼국지·손성(孫盛)진춘추(晋春秋)·옥편(玉篇)·자통(字統)·자림(字林)이 있고, 또 문선(文選)이 있는데 그것을 더욱 애중히 한다'고.

2). 초기에도 외교 접촉상 한문공부, 평양 점령후 중국 유학 사서(史書) 공부열.

*. 평안·황해도지역 수준 높은 생활. 스스로 한족 능가 문화수준 갖고자 노력. 소수림왕 이래 태학(太學), 처음 집안(輯安)에, 천도후 평양으로.

상당한 유교 붐, 서민층도 욕구. 동이전 기사는 이런 숭문 풍조 반영.

경당 에서도 경(經)공부, 동시에 활쏘기 익힌 점 태학과 달라.

3). 태학 교과목--위 동이전 기록으로 짐작, 중국 태학 한대부터, 오경박사 두어 교육, 고구려도 그럴 가능성.

태학에서 한문학습에 훈(訓)과 석독구결(釋讀口訣)교육,호태왕비문장좋은 예.

처음 고유명사에 이용되다 신라 이두(吏讀)로, 일본 가나(假名)에 영향.

4). 태학과 경당 유학 교육 효과--최고 최신 율령활용,국가조직 정비, 왕 정점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체제 갖춤.

새 율령관료층 확보에 큰 기여. 4C 중엽까지도 문서 다루는 관원 희소.

역사서 가르침. 역사의식과 역사편찬방법에 기여

*. 국초(4C중)에 {留記(유기)} 1백권, 영양왕 11년(600)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新集(신집)} 5권으로 개수, 태학과 역사 편찬이 밀접한 관계.

5). 묘제 장례제도 변화에 영향.

*. '후장(厚葬)좋아하고. 적석총(積石塚)축조.4C 석실봉토분(벽화고분)으로변화.

*. 3년상(喪)제도 5C이후 채택. 덕흥리벽화고분 묵서(409)에 {左傳(좌전)} {尙書(상서)} 어구(語句)인용, 유학 교양 심화 증거, 유교적 장례방식 채택된 듯.

< 3 > 평양천도후의 문화 성숙과 의의

*. 5C후 내적 높은 수준의 문화 향유. 대내외적 영향 작용 음미할 필요.

7C까지 전기 500년의 절반기간, 반도 중심 대륙적 웅비 의의는 실로 중차대.

1). 4C 초반 이후 집중적 벽화고분--이는 세계적 중요 문화유산, 4∼6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 벽화 내용은 낙랑·대방 및 중국문화나 불교문화의 직간접 영향. 현재 벽화고분 90여기 발견, 그 구조는 시기적 변화. 또 벽화 내용도 인물풍속에서 사신도로 변화 발전. 평화적 문화적이며 과학적인 형상.

6세기이후 집안지역도 평양의 영향, 문화적 중심성 이동.

2). 불교의 수용 이후발전-- 수도중심 전국에 많은 사찰 건립. 이미 호태왕대 평양에 9개 사찰, 그 후 불상·불화 제작, 가람 배치, 벽화 등에 불교문화 발달, 백제·신라·일본 등지에 전파. 학술적으로 삼론종과 중국 고구려승 승랑의 예.

3).태학 유학교육후 학문 숭상--학문 풍조 확대 문인계급 성장, 역사편찬도. 이는 자의식(自意識)의 확고한 정립 의미. 천제(天帝)와 하백(河伯)의 정통 이어받은 주몽왕의 후예 국가라는 천하 중심 자부심.

장례제도 등 사회문화에 많은 변화, 무(武)와 문(文)이 조화를 이루게 되기도.

4). 여러 외래문화의 통일 조화--문화요소들간에 상호충돌 배격아닌 조화 이룸.. 덕흥리고분 진(鎭)의 불 유 겸섭, 고분벽화에서 사신도와 연화문의 조화 예.

특히 고분벽화의 다양한 사상과 관념의 혼합은 고구려 문화의 폭과 깊이.

5). 고구려의 성(城)문화--곳곳에 많은 성 축조, 대부분은 산성(山城). 성(城)은 국토 방어체계의 핵심, 지방통치의 중심지. 특히 산성은 고구려 지방지배방식, 성곽 축조 각종 과학기술 등 중요 자료. 연구 앞으로 기대.

< 4 > 문화 향유와 국망

1). 귀족 문화생활 향유--평양천도후 귀족들 차원 높은 문화생활 향유, 주변국에 전달.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 의미, 국가 조세체계 안정과 농업생산성 증가, 평야생산지대 세원(稅源)확대, 생산도구 발달로 생산력 증가. 중국 남북조 분열 사실도.

2). 안주 부작용--후기 귀족들 점차 안일 무사속 정치적 분열과 왕위계승전 등 말기의 증상. 강서고분 사신도 여전 웅혼, 문화 측면에서는 생동력여일. 당시 장기 대외적 위기속에 결국 멸망의 길로.

3). 쇠망--수당과 오랜 전란 국력 피폐, 더욱 신라 성장으로 남북 협공. 연개소문 집권은 정치적 유연성 상실. 중앙귀족들과 지방세력 이탈 끝장.

*. 고구려 멸망은 민족사 전반 시각에서 이민족에 망한 것 아니라, 그 주민다수와 문화적 능력이 신라에 흡수되어 한민족 문화의 발전에 계승.

4. 맺음말